23. 오음경계와 마장 ②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매를 닦아서 상음(想陰)이 다 사라지면, 평소에도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고 깸이 한결같아서, 깨달음의 밝음이 맑게 개인 하늘처럼 비고 고요하여, 거칠고 무거운 앞 경계의 그림자 모양이 없어지느니라. 세상의 대지와 산과 강들을 보아도 거울이 밝게 비치듯 와도 와서 붙는 일이 없고 가도 간 흔적이 없다. 빈 그대로 받아들여 비춰 응해서 전혀 묵은 습기도 없고, 오직 하나의 정교한 진실뿐이니라. 여기에 생멸의 근원이 열려 드러남으로, 시방의 12류 중생들이 종류마다 생기는 곳을 죄다 보게 되느니라. 비록 아직은 각 생명이 유래한 시초를 통하지 못했을지라도, 같이 태어나는 공동의 터가 마치 아지랑이가 번들거리듯 맑게 흔들리면서 뜬 감관이 짜이는 구경의 주요 원천을 보느니라. 이를 행음의 보금자리라고 한다.
만일 이 맑게 흔들려 번들거리는 근원의 성품이 그 성품 그대로 원래 고요한 자리에 들어가서 단번에 원래의 습기를 가라앉히면, 마치 파도가 사라져서 고요한 물로 화한 것과 같은 상태를 행음(行陰)이 다 사라진 경계라고 하며, 이 경계에 든 사람은 능히 중생탁을 초월하느니라. 그 행음에 가린 까닭을 살펴보면, 깊이 숨은 망상이 근본이니라.
아난아, 잘 알아야 한다. 바른 지견을 얻고 사마타에 든 선남자들은 밝음을 굳히고 마음을 바로잡아 열 가지 하늘 마가 그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비로소 정교하게 연마하여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이때 태어나는 근본 종류 가운데 태어나는 근원이 드러난 행자가 저 깊고 맑고 원만하게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원만한 근원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두 가지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은 근본을 보고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생겨나는 틀이 완전히 무너진 경계를 얻었으니, 눈 감관의 8백 공덕에 의지하여 8만 겁 안에 있는 중생들이 업의 흐름을 따라 굽이돌며 여기서 죽고 저기서 나는 모양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지 중생이 그 곳에서 윤회하는 모양만 볼 뿐, 8만 겁을 떠나서는 아득하여 본 일이 없으니 '이 세간의 시방 중생은 8만 겁 동안 원인 없이 저절로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헤아리기 때문에 두루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로 타락해서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은 끝을 보고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태어나는 데서 이미 그 근본을 보았으니, 사람은 사람을 낳는 줄 알고, 새는 새를 낳고 까마귀는 본래 검고 고니는 본래 희며, 사람과 하늘은 서서 다니고 축생은 기어 다니며, 흰 것은 씻어서 희어진 것이 아니고, 검은 것은 물들여 검어진 것이 아니라고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만 겁 동안 더 이상 달리 바뀌는 일이 없으니, 이제 이 형상을 다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본래 깨달음을 본 적이 없는데, 어찌 다시 깨달음을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마땅히 현재의 일체 물상은 다 본래 원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이러한 생각 때문에 두루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로 타락해서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첫 번째 외도가 내세운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논리'라고 한다.
아난아, 이 삼매에 든 선남자들은 밝음을 굳히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항상 원만한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두루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경계의 본질에서 두 곳이 원인이 없는 이치를 추궁하여 닦고, 이만겁 가운데 시방 중생이 소유한 생멸은 모두 다 순환하여 잠깐도 흩어지거나 잃지 않음을 알고는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사대(四大)의 근원을 추궁하여 네 성질이 항상 머무는 이치를 닦고, 사만겁 가운데 시방 중생이 소유한 생멸이 모두 다 자체가 항일하여 잠깐도 흩어지거나 잃지 않음을 알고는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여섯 감각식과 제7 의식과 제8 아뢰야식을 끝까지 추궁하여, 심의식 가운데 본원의 유래한 곳은 성품이 영원히 항일하므로 그대로 닦아서, 8만 겁 가운데 일체중생이 순환하여 잃지 않음을 본래 영원히 머무는 진리로 알고, 잃지 않는 성품을 추궁하며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은 '상음의 근원이 다 없어졌으니, 생의 이치는 더 이상 흐르거나 멈추거나 옮기거나 구르는 일이 없다. 생멸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제 이미 영원히 멸했으니, 이치 가운데 자연히 생멸이 아닌 법을 성취한 것이리라'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인하여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영원하다는 생각 때문에 두루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로 타락해서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두 번째 외도가 내세우는 원만한 영원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은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자타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뒤바뀐 소견의 한 편은 영원하지 않고 한 편은 영원하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묘하고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함을 관찰하고는 고요한 경계를 구경의 신비한 나로 여기고, 여기서 생각하기를 '나는 시방에 두루 밝음을 굳혀서 흔들리지 않으나, 일체중생은 나의 마음 가운데서 저절로 생겼다가 저절로 죽을 뿐이니, 나의 심성은 영원하고 저 생하고 멸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은 관찰하지 않고,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시방국토만을 두루 관찰하여, 겁이 무너지는 곳을 보고는 끝까지 영원하지 않는 종류라 하고, 겁이 무너지지 않는 곳을 보고는 끝까지 영원한 경지라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따로 관찰하기를 '나의 마음은 정밀하고 미세함이 마치 미세한 티끌과 같아서, 시방에 흐르고 굴러도 성품은 옮기거나 바뀌지 않는 가운데 이 몸을 생기게 하고 멸하게 한다'고 하여, 그 무너지지 않는 본질을 나의 성품의 영원이라 하고, 일체 생사는 나에게서 흘러나왔으니 영원하지 않는 성질이라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은 상음이 다 사라졌음을 알고 행음의 흐름을 보면서, 행음이 항상 흐르는 상태를 영원한 본질로 생각하고, 색음과 수음과 상음은 이제 이미 멸하여 없으니 영원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이렇게 한 편은 영원하지 않고 한 편은 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세 번째 외도가 내세운 한 편이 영원하다는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나뉘어진 자리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한계가 있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으로 태어나는 근원의 흐르는 작용이 쉬지 않는다고 헤아려서, 과거와 미래를 한계 있는 경계로 생각하고, 현재 상속하는 마음을 한계 없는 경계로 생각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8만 겁을 보면 중생들이 보이지만, 8만 겁 이전은 적막하여 듣거나 본적이 없으니, 듣거나 본적이 없는 곳을 한계 없는 경계라 하고, 중생이 있는 곳을 한계 있는 경계라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두루 알아서 한계 없는 성품을 얻었으니, 저 모든 사람은 내가 두루 아는 경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조금도 저들의 아는 성품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저들은 한계 없는 마음을 얻지 못하고 단지 한계 있는 성질만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행음의 공한 이치를 추궁한 소견으로 마음의 길을 따라 일체중생의 한 몸을 깊이 따져보고, 모두 다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한다고 생각하여, 그 세계의 일체 소유도 절반은 한계 있는 경계로, 절반은 한계 없는 경계로 밝히느니라.
이렇게 한계 있는 경계와 한계 없는 경계를 헤아리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네 번째 외도가 내세운 네 가지 한계 있는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지견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뒤바뀐 소견으로 죽지 않는 뜻을 교란하여 두루 헤아리는 헛된 논리'에 떨어지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변화의 근원을 관찰하여 옮겨 흐르는 곳을 보고는 변한다고 하며, 상속하는 곳을 보고는 한결같다고 하며, 보이는 곳을 보고는 생이라 하며, 보는 곳이 보이지 않으면 멸(滅)이라 하며, 상속(相續)의 원인에서 그 성질이 끊어지지 않는 곳을 불어난다고 하며, 상속하는 가운데 사이가 여읜 곳을 줄어든다고 하며, 각각 생기는 곳을 있다고 하며, 서로 서로 없어지는 곳을 없다고 한다. 이치로는 전체를 다 관찰하면서 마음을 쓸 때는 별도로 보고, 법을 구하는 사람이 와서 그 뜻을 물으면 '나는 이제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불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고 답하여, 언제든지 모두 그 말을 어지럽히면서 앞사람에게 글귀를 잃게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이 서로 서로 없어지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여 무로 인해서 증득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무라고 말할 뿐, 무라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은 그 마음이 각각 있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여 유로 인해서 증득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이것이라고 말할 뿐 이것이란 말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 보다가 그 경계가 갈라지므로 그 마음도 어지러워져서,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있기도 한 것이 곧 없기도 한 것이며, 없기도 한 가운데 있기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여 일체를 교란하여 따질 수 없게 하느니라.
이렇게 허무한 교란을 헤아리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해서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다섯 번째 네 가지 뒤바뀐 소견으로 죽지 않는 뜻을 교란하여 두루 헤아리는 헛된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끝없이 흐르는 경계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모양이 있다고 마음을 내는 뒤바뀜'에 떨어지느니라.
혹은 스스로 몸을 굳게 지켜서 색이 바로 나라 하기도 하며, 혹은 나는 원만하게 국토를 두루 머금었다고 보고 나는 색을 소유했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저 앞의 인연이 나를 따라 회복된다고 하여 색은 나에게 속했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또 나는 행음의 상속을 따른다 하여 나는 색 안에 있다고 하기도 하면서, 모두 헤아려 말하기를 '죽은 뒤에 상이 있다'고 하므로, 이와 같이 순환하여 열여섯 모양이 있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혹은 번뇌는 끝까지 번뇌이고 보리는 끝까지 보리이니, 두 성품이 나란히 달려도 각기 서로 저촉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이렇게 죽은 뒤에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여섯 번째 외도가 내세운 오음(五陰) 가운데서 죽은 뒤에 모양이 있다고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먼저 멸한 색음과 수음과 상음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마음을 낸 뒤바뀜'에 떨어지느니라.
그 색음이 멸한 자리를 보고 형체는 원인 할 곳이 없다고 하며, 그 상음이 멸한 자리를 보고 마음에 얽매인 경계가 없다고 하며, 그 수음이 멸한 자리를 알고 몸과 마음이 더 이상 연결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음의 성질이 소멸하여 흩어져버렸으니, 비록 태어나는 이치가 있더라도 수음과 상음이 없음으로 초목과 다를 바 없다. 현재 앞에 있는 이 몸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죽은 뒤에 어찌 더 이상 온갖 모양이 있으랴'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곰곰이 따져서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하므로, 이와 같이 순화하여 여덟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견해가 있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혹은 열반의 원인과 결과도 일체 공하여 이름만 있을 뿐, 구경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일곱 번째 외도가 내세운 5음 가운데서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마음을 낸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행음이 있는 가운데서 수음과 상음의 멸한 경계를 겸하여 쌍으로 있고 없는 모양을 헤아려 자체의 모양을 파하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함께 부정하는 뒤바뀜을 일으킨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색음과 수음과 상음 가운데서 있는 것을 보아도 있는 것이 아니며, 행음이 흘러 옮기는 속에서 없는 것을 보아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와 같이 순환하여 음의 경계를 추궁하여 다하고 여덟 가지 함께 부정하는 모양을 한 인연마다 따라 얻고는, 다 죽은 뒤에 유상이며, 무상이라고 말하느니라.
또 온갖 행의 성질이 옮겨 달라진다고 헤아리기 때문에, 마음에 통하여 깨달았다는 생각을 일으켜 유무를 함께 부정하면서 허와 실을 종잡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죽은 뒤에 함께 부정하는 경계를 헤아림에 따라 뒤의 경계는 어리둥절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잃어버리느니라. 이를 '여덟 번째 외도가 세운 5음가운데서 죽은 뒤에 함께 부정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뒤로 계속 없는 곳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7단멸론'에 떨어지느니라.
혹은 몸(欲界의 人天)을 단멸이라 생각하고, 혹은 욕심이 다한 곳(初禪天)을 단멸이라 하며, 혹은 괴로움이 다한 곳(二禪天)을 단멸이라 하고, 혹은 지극히 즐거운 곳(三禪天)을 단멸이라 하며, 혹은 지극히 평등한 곳(四禪天과 無色界)을 단멸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순환하여 일곱 경계를 끝까지 추궁하여, 현재 눈앞에 소멸하여 멸하고 나면 더 이상 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헤아리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아홉 번째 외도가 세운 5음 가운데서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소견으로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매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뒤로 계속 있는 곳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다섯 열반의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혹은 욕계천을 바르게 굴려 의지할 곳으로 삼는 것은 원만한 밝음을 보고 애착하여 사모하기 때문이며, 혹은 초선천은 성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이선천은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삼선천은 지극한 기쁨이 따르기 때문이며, 혹은 사선천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없어서 생멸의 윤회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뇌가 있는 하늘을 무위의 경지로 잘못 알고, 다섯 곳의 안온함을 뛰어나게 깨끗한 의지처로 여기고, 이렇게 순환하여 다섯 곳을 구경으로 삼느니라.
이렇게 다섯 곳을 현재 그대로 열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깨달음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열 번째 외도가 세운 5음 가운데서 다섯 곳을 현재 그대로 열반이라는 소견으로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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