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민족에 내놓은 몸 ①
을사신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 이강년, 최익현, 민긍호, 유인석, 이진룡, 우동선 등은 다 의병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윗청년회(epworth)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륙, 김인즙,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김병헌(현재는 왕삼덕), 유두환, 김기홍 그리고 나 김구였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정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회·2회로 4·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제 1회 상소하는 글은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주가 되고 그 밖의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다섯 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홀연 왜 순사대가 달려와서 우리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간섭이라 하여 일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 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 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 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도가 불탄 자리에 쌓인 와륵(기왓조각이나 돌멩이)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륵을 던졌다. 이때에 왜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날 민영환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 길에 나서니, 웬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 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명주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레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방송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18일이라 갓난 첫딸이 찬바람을 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과 최명식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 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부터 연빙하여 안악 양산학교에 하기 사범강습회를 여니 사숙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사백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는 김홍량, 이시복, 이상진, 한필호, 이광수, 김낙영, 최재원 등이요, 여자 강사로는 김낙희, 방신영 등이 있었고, 강구봉, 박혜명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어 있었다.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으로, 연전 서울서 서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는 당시 구월산 패엽사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를 시험하노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에 붙였다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김효영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안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 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이 넘고 허리가 기억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건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 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선생님 평안하시오?"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인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 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만에 본 해주 본향에 가 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 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아이던 것들이 인제는 커다란 어른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막히는 것은 그 어른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 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효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만 못한다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아주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형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고 온 환등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악에서는 하기사범강습소를 마친 뒤에 양산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 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배천 순수 전봉훈의 초청을 받았다. 읍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김구 선생 만세!"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 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시대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제에 머물렀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해주 정내학교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하고 장손무길이 5, 6세였다.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 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평양서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조약에 되었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학교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이므로 읍내에는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를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을 명하고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중에 장내에는 엄중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 일아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이 책임이 아니라고 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 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하르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인 줄을 알고 십 수년 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 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수교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의 교직원들이 교육 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의 환갑연에 참예하고 송화에서 나를 호송해 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 묵고 있단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턱을 먹이고 지난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 왔으므로 나는 이승준, 김영택, 양낙주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보강학교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이 있고 장덕준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내가 보강학교 교장이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에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 만에 불을 놓는 도깨비를 등시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서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이 지방에는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가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하지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 진초, 보강, 기독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암직하였다. 의사 나석주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 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에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가 장연 오리포에서 왜경에게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 청년간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종종 나무리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정령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등 김정홍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저녁에 진초 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졌다. 주인 김정흥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학교에 오인성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 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고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 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른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서 맡겨 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백린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백린은 "서울 와서 찾으시오." 하고 떠나버렸다.
그 후 일삭이 못 되어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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