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에 써 놓은 "백범일지"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써 넣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의사 사건 이후에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 고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할 것은 몽상도 아니하였다. 나는 완전한 우리의 독립국가가 선 뒤에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치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나를 사랑하는 몇몇 친구들이 이 책을 발행하는 것이 동포에게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하기에 나도 허락하였다. 이 책을 발행하기 위하여 국사원 안에 출판사를 두고 김지림 군과 삼종질 홍두가 편집과 예약 수리의 일을 하고 있는 바, 혹은 번역과 한글 철자법 수정으로, 혹은 비용과 용지의 마련으로, 혹은 인쇄 때문에 여러 친구와 여러 기관에서 힘쓰고 수고한 데 대하여 고마운 뜻을 표하여 둔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 주셔서 저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내가 이 책 상권을 쓸 때에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연전에 중경에서 죽고 작은 아들 신이가 스물 여섯 살이 되어서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시중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장교이다. 그는 장차 우리 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하여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도 다 이제는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나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이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김 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므로서이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와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 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십일월 십오일 개천절날
김구
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려 줄 수 없으매 그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 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언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 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 두려는 것이다.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이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 주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11년 5월 3일
중국 상해에서 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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