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석가의 만년과 입멸
1. 데바닷타의 독립
부처님의 전도의 나날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개천이란 개천은 모두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했다고 전할 정도다. 이는 한결같이 부처님의 성품이 지닌 원만무결한 덕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부처님은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큰 곳,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다보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세상을 품고 간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의 선전에 뒤따르기 마련인 박해는 부처님이 아는 바 없던 일인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전해진 것으로는 앞서 기록한 바와 같이 코삼비 시에서 포교를 할 때 처음에 약간의 비방이 있었던 사실과 그리고 언제의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위성에서 외도가 친챠라는 미녀를 시켜 부처님을 중상한 사실, 그리고 또 같은 사위성에서의 일이지만 순다리라는 비구니가 외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부처님과 관계가 있었던 듯이 날조하여 말을 퍼뜨리고 다닌 사실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근거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곧 사라지고 말았고, 부처님이 있는 곳에서는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사람들의 귀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만년에 이르러 부처님과 불교교단에 있어서 처음으로 중대한 사실이 일어났다. 그것은 데바닷타의 반역이었다.
데바닷타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난다의 형이란 설과 야쇼다라의 동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 후자가 옳은 것같이 생각되지만 어쨌든 샤카족의 명문출신으로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임은 틀림이 없다. 부처님의 근친으로서 명문의 출신이고 위풍도 당당하고 아름다우며, 인물도 착실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신망이 상당히 두터웠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간에 대한 집착심이 근절되어 있지 않고 출세간의 일, 다시 말하면 종교의 일을 세간의 이익을 얻기위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심사가 그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무엇인가 세간의 이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든지 나타나던 것이, 그의 교단 안에서의 지위가 점차 향상됨에 따라 더욱 격화되어 자연히 반기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어느 때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아쟈타삿투의 왕위 찬탈이 부처님이 돌아가기 8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면, 그때가 부처님의 71세 때의 일이고, 이것보다 1-2년 앞선, 즉 부처님의 69세 또는 70세 때의 일이라고 짐작된다. 이 때 데바닷타의 나이가 몇이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가령 24-5세 때에 출가했다고 하면, 그때부터 31-3년은 지났으므로 56-7세는 되어 있어야 한다. 야쇼다라비의 동생이라고 한다면 7-8세 차의 동생이 되며 아난다의 형이라고 한다면 2-3세 차의 형으로서 출가 후 30여년은 그럭저럭 무사히 지내왔으나 56-7세 때에 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평이 많던 아자타삿투 태자의 귀의를 받게 되자, 반역의 심사가 더욱 굳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괴롭혔다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시대의 시구 속에도 나오고 있다.
“데바닷타는 지자(知者)로서 알려지고
몸을 닦은 자로서 존숭되고,
명예는 불길처럼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게으름에 젖어, 여래를 괴롭히고
네 개의 강이 있는 무서운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시구에서는 데바닷타가 게으름에 젖어 여래를 괴롭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그의 명성은 자못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음도 알게 해준다. 그가 게으름에 젖었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표면상으로 볼 때 그는 오히려 엄격한 고행주의를 표방하고 부처님의 중도의 정신을 배척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록들을 보면, 그는 불교교단의 수행방법이 당시 인도의 다른 종교에 비해서 미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데바닷타는 교단 안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조항의 준엄한 실행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① 죽을 때까지 숲속에 살 것.
② 죽을 때까지 탁발하며, 초대를 받고 포식하지 말 것.
③ 죽을 때까지 누더기를 기워 입고, 남이 주는 시의를 입지 말 것.
④ 죽을 때까지 나무밑에서 살며, 지붕 밑으로 들어가지 말 것.
⑤ 죽을 때까지 어육을 먹지 말 것.
이 다섯 가지 조항은 전적에 따라서 조목이 다른 것이 있으나 대체로 같은 정신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다섯 조항 중의 ①과 ④는 본래 같은 것이며, 이 중에서 ①, ②, ③은 비구·비구니가 지켜야 할 필수조건이 되어 있는 것이므로 무슨 새로운 주장이 아닐 것같이 생각될 수가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원칙들에 대해 예외를 허락하여 그 실행을 완화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고행자의 견지에서 보면 문제가 안될 정도로 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데바닷타는 이 원칙들을 엄격히 실행할 것을 주장하고 일반 민중들로부터의 존숭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앞서 인용한 시구 중의 ‘게으름에 젖어’란 말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따르는 그 정신적인 면에서 소홀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의 정신이 ‘마음’ 위주라고 한다면 데바닷타의 원칙은 ‘율법조항’ 위주라고 할 수가 있다. 부처님에게는 무소득의 마음이 있었는데 데바닷타에게는 어디까지나 유소득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이러한 데바닷타의 요구를 듣지 않자, 데바닷타는 오백의 비구들을 데리고 상두산으로 들어가 거기에 자리잡고 분당을 획책했던 것이다. 이 중에는 코칼리카, 카타모라카팃사카, 칸다 데비야풋타, 사뭇다닷타 등이 있었고, 그 강력한 지지자며 공모자로서 아자타삿투 태자가 있었다.
부처님의 교단 안에는 물론 여러 가지 분자가 들어와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인도의 고행주의 풍습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데바닷타의 율법주의에 동조하는 자가 결코 적지는 않았던 것이며, 불교 교단에는 일대 동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데바닷타의 일당에 가맹한 대다수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이대 제자의 힘에 의해 복귀하였다. 그러나 데바닷타와 그 측근들의 반대공세는 더욱 맹렬해지는 것이었다.
2. 왕사성의 비극
이러한 시기에 마가다국의 왕사성에는 하나의 비극이 생겼다. 실로 그것은 정법의 왕 빔비사라가 그 아들 아자타삿투에 의해 살해되고 왕위를 찬탈 당하는 비극인것이다.
빔비사라왕은 부왕의 뒤를 이어 앙가, 참파 등의 지방을 새로 그 영토로 삼고, 밖으로 크게 국정을 떨치고 안으로는 인정을 베푼 불법을 지킨 대왕이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코살라비, 베데히, 케마의 셋이다. 베데히부인은 이웃 비데하국의 왕가 출신인데, 이 두 나라 사이에 부득이한 정략적 견지에 의해 혼인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 베데히부인에게서 아자타삿투 태자가 태어났다. 이 아자타삿투 태자와 관련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즉 빔비사라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점을 쳐보았더니 점쟁이 말이 장차 아들이 될 한 선인이 어디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왕은 아들을 얻고자 그 선인의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그를 죽게 하였다. 그래서 새로 왕자로 태어나기는 하였으나, 날 때부터 부왕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라 한다. 그런 사정을 알고 베데히부인은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이를 죽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만 것이었다. ‘아자타삿투’란 말은 곧 ‘미생원(未生怨, 낳기 전부터 원한을 품은 자)’이란 뜻이다.
아자타삿투는 그 긴 태자시대에 데바닷타를 알고 그로부터 “당신은 신왕이 되시오. 나는 신불이 되겠소. 신왕·신불이 함께 세상을 다스려 나갑시다”라고 찬탈을 사주 받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태자는 부왕을 감금하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아사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남몰래 식사를 부왕에게 보내던 생모 베데히부인을 투옥하기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아마 부처님이 돌아가기 8년 전의 일이고 아자타삿투태자의 나이가 30세에서 40세에 이르는 그 중간의 일이 아니었을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그 마음의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 같다. 신왕은 매일같이 그 죄악에 대하여 고민하며 잠시도 편안한 시간이 없었다. 후회 때문에 생긴 번뇌의 열이 전신에 종창을 낳게 하고 그리하여 심신이 모두 병들어 대단한 고통에 빠져 있었다. <대승대반열반경>이 기록하는 바에 의하면 병든 아자타삿투왕은 그 병을 고치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보려고 당시의 여러 유명한 예언가들의 소견을 차례로 들었다. 육사외도의 이름이 모두다 열거되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결정론적 숙명주의의 견해로 대답하거나 또는 허무론적인 쾌락주의의 입장에서 대답하며 안심하라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 모든 답변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왕은 지바카란 의사의 안내로 대의인 부처님을 찾아보게 된다. 이 지바카에게 말하는 왕의 고백은 극악한 죄인이 어떻게 회개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지바카가 “임금님께서는 잘 주무십니까, 못 주무십니까?” 하고 묻는데 대하여 왕은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시구로 대답한 뒤 그 심정을 술회한다.
이 삼계를 떠나 모든 번뇌와 망상에서 헤어날 수 있다면, 나는 잘 잘 수가 있겠네. 만약에 대열반을 얻으리라고 생각하고 참된 브라만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나는 잘 잘 수가 있겠네.
네 몸과 입으로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고 내 마음으로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면, 내가 잘 잘 수 있겠네.
내 마음 속에 아무 번뇌도 없고 적정 속에 안주하며 무상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잘 잘 수가 있겠네.
여러 가지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증오를 버리고 싸움 없이 화목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나는 잘 잘 수가 있겠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고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며 죄의 과보를 믿는다면, 나는 잘 잘 수가 있겠네.
부모에 대한 효성에 가득 차 있으며, 단 하나의 목숨도 해치지 않고 어느 누구의 재산도 훔치지 않는다면, 나는 잘 잘 수가 있겠네.
내 모든 오관을 통제할 수 있고, 선지식들과 좋은 관계를 유비하며 악마의 무리들을 쫓아낼 수 있다면, 내가 잘 잘 수 있겠네.
행과 불행, 고와 낙에 대해 근심함이 없이 윤회 속에 유전하기를 그친다면, 나는 잘 잘 수 있겠네.
평화롭게 잘 수 있는 자, 그들은 부처님일세. 그들은 깊은 공삼매에 잠겨 확고부동한 평화 속에 생각과 행동을 안주시키는 것일세.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자, 그들은 자비의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네. 그들은 도를 닦으며 모든 중생을 아들같이 생각하네.
오오, 어리석음 때문에 안목이 어두워진 사람들, 그들은 비애와 번뇌의 원인들을 모르며, 항상 나쁜 짓을 거듭할 뿐일세. 그들은 결코 평화 속에 잠들 수 없으리.
나 자신과 또 남들을 향해 나는 열 가지 좋지 않은 행위들을 범하여 왔네. 그러므로 나는 잘 자지 못하는 것일세.
내 개인의 유락을 위하여 그릇된 충고를 받아들이고 죄 없는 부왕을 죽였으니, 이것이 내 잠 못 이루는 원인일세.
찬 물을 탐내어 지나치게 마시고 병과 고통을 얻었으니, 이것이 또한 내 잠 못 이루는 원인일세.
왕이라 자처하고 왕위에 앉았을 때, 나 혼인한 여인, 또는 혼인치 않은 처녀들을 향해 나쁜 생각을 가졌네. 이것이 또 하나 그 원인일세.
그밖에 더 많은 원인이 있네. 그것은 마치 계율을 지키며 아직 그 과보를 얻지 못하여 초조해 하는 자 같고, 왕위를 갈망하나 아직 얻지 못한 왕자와 같고, 물건 훔치기를 원하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한 자와 같으니, 그들이 모두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일세.
오오 지바카여, 내 입장은 위급하오.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충실한 한 임금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졌었으니 말이오. 이런 내 병고에 대해 무슨 효력 있는 처방이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으오. 실로 법대로 나라를 다스리던 부왕, 아무런 비난의 여지도 없던 부왕을 내가 죽였오. 땅 위에 놓인 한 물고기가 어찌 행복할 수 있으리오. 갓난 사슴이 아직 무엇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전쟁에 져서 남의 땅으로 도망쳐 온 왕, 내 사정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니오? 나는 불치를 선언 받은 병자나 다름이 없고, 죄과의 고백을 요구 당한 파계승과도 같소. ……
지바카가 이런 깊은 참회의 뜻을 가진 아자타삿투왕을 부처님에게 인도하여 갔을 때, 왕은 그냥 감격하여 엎드려 울었다. 부처님은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왕의 죄는 이미 그 마음의 정화를 통해 구해지고 있다고 가르치고 그 귀의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생모 베데히부인도 옥중에서 부처님을 보기를 간절히 소원하여 그 뜻을 이루고, 부처님이 가르친 타력본원의 가르침을 배웠다고 한다. 즉 아미타불을 믿음으로써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타력신앙의 타당성이 강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부처님의 구원을 받은 아자타삿투왕은 이후 깊이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고 대마가다국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장 사랑한 왕자 우다야 바드라에 의해 살해되어 그 일생을 마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업연의 부사의함을 가리키는 사실로 보아야 하겠다.
3. 샤카족의 멸망
석가의 만년에는 매우 슬픈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육신을 갖춘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에게, 인간세계의 비애가 피할 수 없는 사실로서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이상스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앞서는 제자이면서 또 혈육의 관계를 가진 데바닷타가 반역을 했고, 계속해서 왕자로서는 비할 바 없이 착실한 신자였던 빔비사라왕의 옥사가 있었고, 이번에는 또 얼마 안되어 코살라의 왕 파세나디의 객사가 있고, 그와 더불어 비두다바의 카필라성 공략이 있어 샤카 일족은 비운의 죽음을 당하였다.
처음에 파세나디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부처님의 일족인 샤카족 사람들과 혼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여 샤카족 왕가의 딸을 구해 왔다. 교만한 샤카족은 그 혼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샤카족 측에서는 파세나디왕의 세력이 두려워 사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의논한 결과 마하나마가 비성의 여인과 관계하여 낳은 바사바캇티야를 보냄으로써 적당히 처리하기로 하였다. 파세나디왕과 이 여인 사이에 난 아들이 비두다바였다. 이 비두다바가 아직 어렸을 때 어머니의 고향인 마가다국으로 온 일이 있었다. 비두다바는 여기서 그가 비천한 하녀의 몸에서 난 사람이라고 크게 모욕을 당하고 돌아론 것이다. 장성하여 그는 보복의 염을 잃지 않고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파세나디왕은 그 부장 반둘라의 세력과 인기가 증대하는 것을 보고 이를 시기하여 반둘라와 그 아들들을 모조리 죽인 일이 있었다. 그러한 죄악을 범한 이래 파세나디왕의 부처님에 대한 신심과 겸손은 더욱 깊어갔다. 언젠가는 시신 디가카라야나와 함께 부처님을 찾아가는데 모든 왕장을 다 떼어 그것을 시신에게 주고 맨발로 부처님에게 접근해 갔다. 왕장은 곧 왕위의 심볼인 것이다. 시신 디가카라야나는 앞서 왕이 죽인 반둘라장군의 조카였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시신 디가는 그가 맡은 모든 왕장을 다 가지고 사밧티성으로 달려가 그 아들 비두다바에게 주고 그를 신왕으로 옹립하였다. 노왕 파세나디는 만사가 다 된 것을 알고 사위인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에 의지하려고 그 성문에 이르러 거기서 마침내 죽고 말았다. 비두다바 신왕은 왕위에 올라 미리부터 원해온 샤카족의 살육을 계획해 갔다.
비두다바 왕은 그 옛날의 모욕에 대한 보복의 군을 카필라성으로 향해 보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 부처님은 죽은 나무밑에 앉아 명상을 하며 비두다바왕의 군대를 기다렸다 한다. 왕은 세존에게 “어찌하여 죽은 나무밑에 계십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 “친척의 그들은 서늘하다” 하고 대답하고 왕의 군을 멈추기를 세 번이나 하였지만, 그래도 왕이 계속해서 출병하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왕은 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으로 들어가 이를 함락시키고, 샤카족을 섬멸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떤 문헌에는 이 때 샤카족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체득하고 있었으므로 무저항주의를 취하고, 죽이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이라고 한 기사가 있으나 아마 그것은 어긋나는 기록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코살라와 같은 대국의 공격을 당하면 카필라성의 병사가 아무리 용감하다 할지라도 막을 길이 없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복수의 귀신이 되어버린 비두다바왕은 샤카족에 속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결심을 하고 무참한 살육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그 할아버지가 되는 샤카족의 왕 마하나마는 비두다바왕의 진으로 와 꼭 한 가지 청만 받아들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즉, 자기가 연못 물속에 들어가 깊숙이 잠겨 있을 터이니 그 동안에 성문을 열고 그 사이에 도망치는 샤카족 사람만은 살려주도록 간청했다. 그 간청이 허락되어 마하나마왕은 물속에 잠겼으나 언제까지나 떠오르지 않으므로 많은 샤카족 사람들이 도망칠 수가 있었다. 왕이 이상히 생각하여 마하나마를 끌어올려 보니까 자기 상투를 풀어 물속에 있는 나무의 부리에다 결박하고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 때에 도망친 샤카족 사람들은 갠지스강 남안에 이르러 다시 나라를 세웠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간 후 샤카족 사람들이 부처님의 유골을 그 고향 가까이에 봉안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샤카족은 멸망 당해 그 독립을 상실하였지만 여전히 이 지역을 고향으로 하여 남아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두다바왕은 이 잔학무법한 행위 때문에 불타 죽어 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도 꾸민 이야기가 아닌가 쉽다. 그 후 이 왕에 관해서는 더 전해지는 바가 없고, 그 왕통도 곧 끊어졌던 것 같다.
4. 석가의 입멸
남선북마라고 하지만 부처님이 말을 타고 다녔는지의 여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 바쁜 교화의 나날이 지나 어느덧 그 종언이 가까워 왔다. 사밧티성의 동원 녹자모 강당에 있으면서, 저녁 때 선정에서 일어나 목욕을 끝내고 잔등을 말리며 앉아 있으니 시자 아난다가 왔다. 그는 부처님의 잔등을 만지며 “부처님, 그 옛날에는 살결이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빛나고 있었는데, 이제는 많은 주름이 나타나고 몸이 많이 앞으로 구부려졌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젊음에는 늙음이, 건강에는 병이, 삶에는 죽음이 있음을 면할 길이 없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그것이 부처님이 78-79세에 다다렀을 무렵의 일이 아닌가 한다. 또 어떤 때에는 파세나디왕이 타다가 내버린 아름다운 차를 멀리 바라보면서 차도 시간이 가면 쓸모가 없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몸도 늙음 때문에 파괴되기 시작한다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입멸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기록은 상당수에 달한다. 그 주요한 것으로는 디가니까야에 <대반열반경>이 있고, 한역 <장아함경>에 <유행경>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전들에 입각하여 부처님의 만년에 관한 여러 모를 엿보기로 한다.
부처님이 사밧티성으로부터 왕사성으로 돌아와서 영취산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아자타삿투왕은 밧지족의 나라를 정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앞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밧사카라란 대신을 시켜 부처님에게 문안을 드릴 겸 은근히 그 뜻을 타진하게 했다.
부처님은 밧사카라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아난다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① 밧지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며 그 회의에는 많은 사람이 참집하느냐?
② 밧지 사람들은 상하가 항상 화목하게 같이 국사를 돌보고 있느냐?
③ 밧지 사람들은 선인이 정한 것을 깨뜨리지 않고 중시하며 그것을 함부로 고치는 일을 하지 않느냐?
④ 밧지 사람들은 장유의 서를 지켜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느냐?
⑤ 밧지 사람들은 남녀의 별이 있어 부녀자를 폭력으로 끌어내 약탈하는 등 불법을 행하지 않느냐?
⑥ 밧지 사람들은 국내외의 종묘를 숭상하고 의전을 폐하지 않고 지키고 있느냐?
⑦ 밧지 사람들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경애하며 도인이 옴을 후하게 맞이하느냐?”
이러한 질문을 받은 아난다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처님은 이것은 일곱 가지 불쇠의 법이다. 이것을 지키고 있는 한 밧지족의 나라는 쇠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밧사카라가 그 말씀을 듣고 돌아간 후 부처님은 영취산으로 왕사성 안의 모든 수행승들을 다 모아 놓고 밧지 사람에 관해서 한 설법과 같은 내용의 칠불쇠법을 여러 차례 설하였다고 한다.
마가다국과 밧지국과는 당연히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정세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간신히 막고 있던 것이 빔비사라왕의 정략결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충돌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해 중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아자타삿투왕은 부처님이 돌아간 뒤 이 나라를 병탄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 뒤 산을 내려 왕사성의 암바랏티카 촌으로 갔다가 다시 나란다로 향했다. 도중에 부처님은 기회에 따라 설법을 하면서 나란다를 거쳐 파탈리푸트라의 전신인 파탈리가마촌으로 들어갔다. 나란다는 왕사성에서 파탈리촌으로 가는 통로에 있으므로 부처님이 그곳을 지나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 나란다가 무슨 중요한 의의를 가진 곳이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이 나란다는 후세에 매우 중요한 불교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파탈리촌은 당시 갠지스강의 한 소항구에 불과했던 것이지만 나중에 난다 왕조 내지 마우리야 왕조 시대에는 인도 전체의 수도가 되어 번영을 이루었다. 지금의 파트나시가 그곳이다.
파탈리촌에 들어간 그 날은 밤늦게까지 마을 사람들에게 탐욕을 즐기고 방자하는 것의 해를 누누이 설명하였다. 그때 아자타삿투왕은 밧지국에 대비하기 위해 갠지스강 남안에 위치하는 이 촌락에 밧사카라와 수닛다의 두 대신을 보내어 성시를 만들게 하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지세상으로 보아서 이 마을이 나중에 인도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도시가 될 것을 예상하고 그 장래에 대해 경고하였다. 다음 날에는 밧사카라의 공양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갠지스강을 건너 코티촌, 나티카촌을 지나 베살리로 들어갔다. 부처님은 그곳 한정한 교외에 암바팔리란 부인이 소유하는 동산에 머물렀다. 암바팔리부인은 원래 유명한 창부였었는데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비구니가 된 사람이다. 경전은 암바팔리부인이 이때 처음으로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아마 벌써 이전에 불제자가 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부처님은 더 나아가 페루바촌에 들어가 거기서 마지막 안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촌락은 퍽 적고, 게다가 그 해는 흉년이 들어서 여러 사람이 한 곳에서 안거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간절히 타일러 각 지방으로 가서 따로따로 안거를 하도록 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한다.
“너 자신에 이겨야 한다. 좋은 것을 얻어도 좋아하지 않고, 나쁜 것을 얻어도 싫어하지 않고 식사는 다만 몸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탐을 내서는 안된다. 탐내기 때문에 생사가 끊임없는 것이므로 육신을 통제하고 자기 스스로에 이겨 적정을 얻어야만 한다.”
이 안거 중에 부처님의 신체에는 병상이 나타나 참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있었으나 부처님은 마음으로 이 병을 극복하고 이를 고쳤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마지막 설법을 간청하자, 석존은 이와 같이 말씀하였다.
“아난다야, 수행승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요망하는 것이냐? 나는 내외의 구별 없이 법을 설하였다. 온전한 사람의 교법에는 무엇을 제자에게 숨기는 것과 같은 그런 스승의 주먹은 없다. ……
아난다야, 나는 이미 노쇠하여 인생의 여로를 다 겪어 나이 80이 되었다. 아난다야, 예컨대 낡은 차가 가죽끈의 덕택으로 간신히 움직이는 바와 같이 내 차체도 가죽끈의 덕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야, 향상코자 노력한 사람이 모든 상에 마음을 둠이 없이 하나 하나의 감수작용을 없앰으로써 상이 없는 마음의 통일에 들어가 머무를 때 그때 그의 몸은 건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이 세상에서 너 자신을 섬으로 삼고 너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하지말고,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며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고 있지 말라.”
사리풋타는 이때까지 오랫동안 부처님을 따라 유행해 왔으나, 부처님이 입적할 시기가 점점 임박해 옴을 알고, 또 자기의 사기도 가까워 온 것을 알고 그는 부처님에게서 잠시동안 떨어져 있을 것을 원해 자기 고향인 나라다촌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그의 노모가 살아있었다고 한다. 사리풋타는 그 노모를 뵈옵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맛을 보이고 고요히 니르바나에 들었다. 혹은 이보다 앞이라고 하고 혹은 뒤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대개 같은 시기에 목갈라나도 니르바나에 들었다. 그의 죽음은 귀한 순교의 죽음이었다고 전한다.
안거가 끝난 뒤 부처님은 다시 베살리로 가서 차팔라 체티야에 머물렀다. ‘체티야’란 신령한 나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데 이는 팔리어고 산스크리트어로는 ‘챠이티야’라고 한다. 흔히 ‘묘’ 또는 ‘예당’이라고 한역되기도 하는 체티야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것으로서 이런 것은 대개가 마우리야왕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전에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탑파 모양의 것은 없었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것은 죽은 사람의 유골 위에 만들어진 토총 또는 그 위에 심어놓은 나무를 의미한다. 그 후에 세상을 떠난 성자의 유골이나 유품 위에 총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체티야는 스투파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게 된 것이다. 부처님 시대에 베살리 교외에는 큰 나무가 있어 그 나무 그늘에서 부처님과 아난다는 뜨거운 일광의 직사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옷을 벗어 갈게 하고 거기에 쉬면서 그가 석달 후면 니르바나에 들것을 예언하였다. 아난다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아난다야, 근심하지 말라. 설사 일겁이라는 긴 기간 살아 있었다 할지라도 서로 만난 사람이 한번은 이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있는 모든 것의 양상이다. 또 설령 이 육신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설해 온 묘법신은 언제까지나 남는 것이 아니냐.”
하고 위로하였다. 그 날 밤 부처님은 베살리 주변에 있는 비구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가르쳤다.
“비구들아,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모든 가르침을 생각하고 외우고 닦지 않으면 안된다. 욕심을 억제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고 몸을 바르게 하고 뜻을 바르게 하고 말을 바르게 하고 분노를 버리며 탐욕을 버리고 항상 죽음에 마음을 쓰라.
마음이 사를 원하더라도 따르면 안된다. 마음이 욕심을 일으키더라도 그런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마음은 사람에 따라야 하는 것이로되 사람이 마음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이 마음은 신도 되고 사람도 되고 악마도 되고 귀신도 되고, 또 명오를 열 수도 있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다 이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음을 바로하여 도를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를 행하는 자만이 세상에서 안온을 얻는 것이다.
비구들아, 나는 지금 너희들을 위해 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고독의 나무를 변화시켜 감로의 열매를 맺도록 하려고 원한다. 너희들은 이 법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서로 존경하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우유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 비구들아, 나는 스스로 이 법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였다. 이 법은 오래 너희들의 스승이 되어 너희들을 해탈의 경지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나는 이 삼월을 지나 니르바나에 들어갈 것이다.”
비구들은 부처님의 입열반이 가까운 것을 듣고 비탄에 젖어 오체를 땅에 던지고 명열하는 자마저 있었다. 부처님은 생있는 자가 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부처님은 그리고 베살리의 릿차비 사람들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반다가마촌, 핫티가마촌, 암바가마촌, 잠부가마촌을 지나 보가나가市에 들어가 가는 곳마다 어디에서나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고 파바로 나아가, 그 교외에 살고 있던 대장장이 춘다의 숲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춘다의 집에서 공양을 받았는데 그 음식물 중에 전단수의 버섯이 있어 이것을 먹고 복통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처님은 쿠시나라로 갔다.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에게 그와 같이 병을 얻게끔 하였으나 이것이 인간세계에 있어서 부처님에게 드린 음식의 마지막 것이다.
도중에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웃옷을 벗어 깔게하고 쉬면서 물을 구해 마산 다음 풋투사라는 사람에게 법을 설하여 옷의 공양을 받았다. 그는 다시 더 나아가 카쿳타강에 이르러 여기서 목욕을 하고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때 자기가 바친 음식 때문에 병들게 된 것을 슬퍼하여 따라온 춘다를 위로하기도 했다. 부처님은 몇 번씩이나 쉬면서 히라냐바티강을 건너 쿠시나가라의 우파밧타바란 이름의 사라나무의 숲으로 들어갔다. 아난다가 그 사라의 쌍수가 나란히 서있는 그 사이에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부처님을 모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잠자리였던 것이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서쪽을 향하여 바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깔고 발은 포개고 고요히 누웠다. 모든 천인들이 나무 위에 나타나 천상의 꽃들을 뿌리며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이것은 참말로 부처님을 공양하는 길이 아니다. 참된 공양은 정법을 닦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가 부처님의 명을 받들어 쿠시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입멸할 시간이 온 것을 알렸다. 그리고 부처님은 울며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수밧다라는 한 외도의 수도자가 꼭 부처님을 만나겠다고 야단하는 것을 아난다가 안된다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수밧다를 불러 인견하고 법을 설하여 마지막 제자로 삼았다. 제도해야 할 모든 사람들을 다 제도하고 난 부처님은 조용히 때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 날 밤, 달은 밝고 바람도 없으며 숲속은 적연히 소리도 없다. 천지가 다 대사의 입열반을 슬퍼 우는 듯하였다. 부처님은 다시 입을 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죽은 후 스승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말한 법과 율이 너희들의 스승이다.
너희들이 만약 마음에 무슨 의심이 있으면 묻는 것이 좋다. 후일에 내가 있을 때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일이 있으면 안된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고 질문하는 이가 없었다. 부처님은 두 번 세 번 거듭 재촉하였으나 그래도 묻는 이가 없었다. 아난다가 사람들을 대신하여 “부처님, 우리들은 깊이 삼보를 믿어 도를 의심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아옵니다” 하고 말했다.
“이 법에는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다 갖추어져 있다.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에 있어서 이미 제도할만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제도했고 아직 구제되지 않은 자도 구제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맺어 놓았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아끼며 이 법을 전해가면 여래의 법신은 영원히 존재하여 멸망치 않으리라.”
말을 끝내고 부처님은 고요히 소리 없는 숲속에서 대열반에 들었다. 그것은 인도력으로 둘째 달 베사카의 15일 만월 날 아침이었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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