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2 오온[蘊] ① 1~4
■ SN 22.1 - 나꿀라삐따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세존께서는 박가에서 숨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미가다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나꿀라삐따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나꿀라삐따 장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늙고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 몸은 병이 들었고 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고귀한 비구들을 거의 친견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교훈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게 오래도록 이익과 행복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병으로 허약하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덮여 있다. 장자여, 이런 몸을 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건강하다고 만족해한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그러자 나꿀리삐따 장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나꿀라삐따 장자에게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대의 감각기관들은 참으로 고요하고 안색은 아주 맑고 빛납니다. 오늘 그대는 세존의 곁에서 법문을 들었습니까?”
“존자이시여, 어찌 아니겠습니까? 존자이시여, 여기 저는 세존의 법문에 의해 불사(不死)의 목욕을 하였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세존의 법문에 의해 불사의 목욕을 하였습니까?”
“존자이시여, 여기 저는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쪽에 앉았습니다. 한쪽에 앉은 저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늙고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 몸은 병이 들었고 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고귀한 비구들을 거의 친견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교훈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게 오래도록 이익과 행복이 될 것입니다.'라고.
존자이시여,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병으로 허약하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덮여 있다. 장자여, 이런 몸을 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건강하다고 만족해한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라고. 존자이시여, 이렇게 저는 세존의 법문에 의해 불사의 목욕을 하였습니다.”
“장자여, 그런데 그대는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든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 것이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세존께 더 질문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까?”
“존자이시여, 이 말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희들은 멀리서라도 사리뿟따 존자의 곁으로 와야 합니다. 그러니 사리뿟따 존자께서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자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나꿀라삐다 장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도 병들어 괴롭고 마음도 병들어 괴로운 것입니까?
장자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法.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그는 물질적 요소(色.색)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그는 감수작용(受)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감수작용(受)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受)이, 혹은 감수작용(受)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그는 지각작용(想)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지각작용(想)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지각작용(想)이, 혹은 지각작용(想)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지각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그는 형성작용(行)을 나(我)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형성작용(行)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작용(行)이, 혹은 형성작용(行)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그는 식별작용(의식.識)을 나라고 간주한다거나,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인 사람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장자여, 이렇게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듭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떻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에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배운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그는 물질적 요소를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혹은 물질적 요소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물질적 요소이다. 물질적 요소는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감수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감수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감수작용이, 혹은 감수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감수작용이다. 감수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지각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지각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지각작용이, 혹은 지각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지각작용이다. 지각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지각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형성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형성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작용이, 혹은 형성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형성작용이다. 형성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형성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식별작용을 나라고 간주하지 않고,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혹은 식별작용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어 지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식별작용이다. 식별작용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의 식별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렇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꿀라삐따 장자는 기뻐하며 사리뿟따 존자가 설한 것을 찬탄하였다.
■ SN 22.2 - 데와다하 경
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의 데와다하라는 삭까족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서쪽 지방으로 가고자 하는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난 후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서쪽 지방으로 가서 서쪽 지방에서 머물고자 합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리뿟따와 의논하였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사리뿟따 존자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의논하도록 하여라.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현자이다. 그는 청정범행을 닦는 비구들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떤 계수나무 숲에 앉아 있었다.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공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돈 뒤에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우리는 서쪽 지방으로 가서 서쪽 지방에서 머물고자 합니다. 우리는 스승님께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다른 지방으로 가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무엇을 말하는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분입니까? 그대 존자들의 법은 잘 배워서 잘 수용하고, 잘 사고하여 잘 결론 내리고, 지혜로써 잘 꿰뚫는 것입니까? 그와 관련하여 존자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세존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겠습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이여,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 저희들은 먼 곳에서 사리뿟따의 존자를 찾아 왔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다른 지방으로 가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무엇을 말하는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분입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우리의 스승께서는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무엇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스승께서는 물질적 요소(色)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 감수작용(受)에 대한 … 지각작용(想)에 대한 … 형성작용(行)에 대한 … 식별작용(識)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어떤 위험(잘못됨)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이 있고, 욕구가 있고, 애정이 있고, 갈증이 있고, 열기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그 물질적 요소가 변하여 다른 것(상태)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이 있고 욕구가 있고, 애정이 있고, 갈증이 있고, 열기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그 물질적 요소가 변하여 다른 것(상태)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납니다. 도반들이여, 우리의 스승께서는 이런 위험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제어)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면 끄샤뜨리야의 현자들과 바라문의 현자들과 장자의 현자들과 사문의 현자들 등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도반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존자들의 스승은 어떤 이익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 …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까?’라고 검증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질문을 받으면 그대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이 없고(벗어나고), 욕구가 없고, 애정이 없고, 갈증이 없고, 열기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그 물질적 요소가 변하고 다른 상태가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이 없고, 욕구가 없고, 애정이 없고, 갈증이 없고, 열기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그 식별작용이 변하여 다른 것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우리의 스승께서는 이런 이익을 보기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 감수작용에 대한 … 지각작용에 대한 … 형성작용에 대한 … 식별작용에 대한 욕탐의 길들임을 가르칩니다.’라고.
도반들이여, 불선법(不善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가 만일 지금·여기에서 즐겁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이 행복하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좋은 곳[善處]에 태어날 것이 예상된다면 세존께서는 불선법들의 버림을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나 불선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속상하고 절망하고 열기가 있어서 괴롭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불선법들의 버림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선법(善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가 만일 지금·여기에서 속상하고 절망하고 열기가 있어서 괴롭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된다면 세존께서는 선법들의 갖춤을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나 선법들을 갖추어 머무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속상함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이 행복하게 머물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선법들의 갖춤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기뻐하며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찬탄하였다.
■ SN 22.3 - 할릿디까니 경
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마하깟짜나 존자는 아완띠의 꾸라라가라에 있는 빠빠타 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할릿디까니 장자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할릿디까니 장자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숫따니빠따』「앗타까 품」의「마간디야의 질문 경」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처를 버림으로써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며
마을에서 (아무와도) 친교하지 않는 성자는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어떤 바램도 없으며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는다.’
존자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상세한 의미를 보아야 합니까?”
“장자여, 물질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물질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遊行)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장자여, 느낌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느낌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遊行)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장자여, 인식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인식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장자여, 형성의 요소는 의식의 거처입니다. 탐욕 때문에 형성의 요소에 묶여있는 의식을 '거처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장자여, 거처에서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는 오온 가운데서도 식온이 특별 취급되고 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모두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식온은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한 개인이 윤회를 거듭할 때 그 영속성을 연결해 주는 실과 같은 역활을 하고 있다.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온)은 의식의 거주처(vinnana - tthitiyo)의 역활을 한다. 그리고 의식은 자아로 간주되는 실체는 아니지만 인식의 과정에서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거처 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까?
장자여, 물질의 요소에 대한 탐욕, 소망(욕구), 갈애, 집착으로 이끄는 마음의 결정.경향.잠재성향들은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장자여, 느낌의 요소에 대한 … 장자여, 인식의 요소에 대한 … 장자여, 형성의 요소에 대한 … 장자여, 의식의 요소에 대한 탐욕, 소망, 갈애, 집착으로 이끄는 마음의 결정.경향.잠재성향들을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거처 없이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장자여, 거처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가 됩니까?
장자여, 형색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이면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 소리의 표상 … 냄새의 표상 … 맛의 표상 … 감촉의 표상 … 장자여, 법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이면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장자여, 머무는 곳에서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까?
장자여, 형색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임은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나무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 소리의 표상 … 냄새의 표상 … 맛의 표상 … 감촉의 표상 … 장자여, 법의 표상이라는 머무는 곳에서 배회하고 묶임은 세존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짤린 야자나무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래는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장자여,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마을에서 친교를 맺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가자들과 교제하며 머뭅니다. 함께 기뻐하는 자이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입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합니다. 해야 하는 역활이 생길 때 자신이 그것들을 실천합니다. 이렇게, 장자여, 마을에서 친교를 맺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마을에서 친교를 맺지 않습니까?
여기, 장자여, 비구는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고 머뭅니다. 함께 기뻐하는 자가 아니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가 아닙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지 않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해야 하는 역활이 생길 때 자신이 그것들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장자여, 마을에서 친교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감각적 쾌락들을 버리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구를 떠나지 못하고,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열기를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장자여, 감각적 쾌락들을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감각적 쾌락들을 버립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욕구를 떠나고, 애정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열기를 떠나고, 갈애를 떠납니다. 이렇게, 장자여, 감각적 쾌락들을 버립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기대합니까(바람이 생깁니까)?
여기, 장자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래에 이러한 물질적 요소(色)가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감수작용(受)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지각작용(想)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형성작용(行)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식별작용(識)이 있기를.’이라고.
장자여, 이렇게 기대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기대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이러한 물질적 요소가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감수작용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지각작용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형성작용이 있기를, 미래에 이러한 식별작용이 있기를.’이라고.
이렇게, 장자여,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합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된 길을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닦는 자이다.’, ‘나는 일관 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 말을 취소하라.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해 보라.’라고.
이렇게, 장자여,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장자여, 어떻게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습니까?
장자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된 길을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닦는 자이다.’, ‘나는 일관 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 말을 취소하라.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해 보라.’라고.
이렇게, 장자여,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습니다.
장자여, 『숫따니빠따』「앗타까 품」의 「마간디야의 질문 경」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처를 버림으로써 머무는 곳 없이 유행하며
마을에서 친교하지 않는 성자는
감각적 쾌락들을 버리고 기대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다투면서 말하지 않는다.’라고.
장자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알고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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