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참선이라는 이 한 법은 본래 분별할 수 없지만, 다만 공부해 가는 데 있어서 초심자는 초심자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고, 구참자는 구참자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다. 그러면 초심자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하지 않아 들어갈 길을 찾지만 분명하지가 않고, 공부를 해도 향상되지 않으며, 마음이 조급하지 않으면 그저 눈만 껌벅거리며 세월을 보내게 되니, 결국 '첫해에는 처음이라 참구해 보는 것이고, 그 다음 해에는 벌써 오래 참구한 것처럼 되며, 3년이 되면 아예 공부를 놓는' 결과가 되고 만다.
초심자의 쉬움이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신심과, 장영심과 무심만 갖추면 된다는 것이다. 소위 신심이란 것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 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든 법이 생사를 완전히 통달함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道)임을 믿는 것이다.
이른바 장영심이란, 어떤 한 법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과 후내생에 이르도록 오로지 이와 같이 지켜가는 것이다. 참선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와 같이 참구해야 하고, 염불도 반드시 이와 같이 염해야 하며, 다라니를 외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지송해야 하고, 교학이라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고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법문을 수행하더라도 계율이 근본이 된다. 과연 이와 같이 수행해 나가기만 한다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위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누구든지 능히 이 법을 수행하되 3생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셨고, 또 영가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허망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지옥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는 겁을 보낼 것"이라 하셨다.
이른바 무심이란, 일체를 놓아버려 마치 죽은 사람 같으며 종일토록 대중을 따라 움직이지만, 다시는 일점의 분별이나 집착도 일으키지 아니하여 한 사람의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다.
초발심의 사람이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추고 만약 참선하여 화두를 든다면, 바로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라. 그대 스스로 묵묵히 생각하다 몇 번 소리내어 아미타불을 부르고 이 염불하는 것이 누구이며, 이 한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지를 보라.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이 한 생각은 내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내 몸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만약 그것이 내 몸이나 입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내가 죽고 나서도 내 몸과 입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왜 염불을 못하는가?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이 한 생각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바로 그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포착하여 예리하게 살펴보기를,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쥐구멍 앞에서) 기다리듯이, 모든 정신을 여기에 집중하여 일체 딴 생각이 없이 하되 완급을 적당하게 할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해서 병이 나게 해서는 안된다.
다니고 서고 앉고 눕는 동안 내내 이와 같이 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공부가 깊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참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무엇에 부딪치거나 밀치는 순간에도 홀연히 대오할 것이다. 이때는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그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곧 걸림 없는 경지에 이르며, 네거리에서 자기 아버지를 만난듯이 큰 안락을 얻게 될 것이다.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오래 참구한 이의 어렵고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오래 참구한 사람은 선지식을 가까이해 보았고,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한 차례 단련되었으므로 몸과 마음이 순숙해져서 공부길이 분명하며, 마음먹은 대로 공부할 수 있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오래 참구한 사람의 어려움은, 자재하고 명백하므로 그 상태로 중간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화성의 중간에서 멈추고 마니, 보배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고요한 곳에서는 공부를 잘 하다가도 움직이는 곳에서는 잘 하지 못하며, 마주한 경계를 지혜롭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심지어는 경계를 만나면 감정을 일으켜 취하거나 버리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완연하다.
거칠거나 미세한 망상이 여전히 굳게 자리잡고 있어서, 이제까지 해 온 공부가 마치 찬물이 바위를 만나 물거품을 일으키듯 하여 아무 작용도 일으키지 못한 채 피로하고 게을러지며, 결국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
오래 참구한 사람은 이러한 곤란을 알았으면 일어나서 곧바로 평소에 참구하는 화두를 들되, 정신을 바짝 차려서 백 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의 꼭대기(百尺竿頭)에서 다시 매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곧장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다니되 손을 놓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면, 부처님이나 조사와 서로 마주 볼 것이며, 곤란함 속에서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되니, 이 또한 쉬움이 아니겠는가.
화두란 바로 한마음이다. 우리의 이 한 생각 마음은 안팎이나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또한 중간이나 안팎에도 있다. 그것은 허공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두루하다. 그러므로 화두는 위로 끌어올리지도 말고 밑으로 끌어내리지도 말라. 위로 끌어올리면 도거가 일어나고, 아래로 끌어내리면 혼침에 떨어져 본래의 심성을 어기므로 다 중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망상을 두려워하여 망상을 항복받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여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망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망상에 힘을 허비하지도 말라. 망상을 항복받기 위해서는 그대는 그것이 망상인 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에 집착하지도 말고 그것을 쫓아가지도 말며, 그것을 버리려고도 하지 말라. 오직 망상이 계속 이어지지만 않게 하면 망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이른바 '망상이 일어나면 곧 망상인 줄 알 것이니, 망상인 줄 알면 그것은 곧 없어진다'고 한 것이다.
만약 망상을 이용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면, 이 망상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는가를 살피라. 망상은 자성이 없어 당체가 공하므로 바로 되돌리면 '나'가 본래 없는 마음의 성품인 자성청정한 법신불이 곧바로 현전한다.
진실로 말하면, 진여와 망상이 일체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가 모두 본래 마음이요 본래성품이니, 분별할 필요가 없으며,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취하거나 버릴 필요도 없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다. 어디에 허다한 방편이 있겠는가. 참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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