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남편노릇

  내가 결혼할 무렵, 부부애. 절약. 조혼 그런 따위의 문제를 다룬, 값이 1파이스 또는 1파이짜리의 조그만 팜플렛이 흔히 간행되었다. 이런 책이 눈에 띄는 대로 나는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통독했고, 그러고는 싫은 것은 잊어버리고 좋다고 느낀 것은 실천에 옮기는 것이 버릇이었다. 아내에게 한평생 신의를 지키는 것이 남편의 의무란 것을 나는 그런 책자에서 배우게 됐고, 그 감명은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게다가 진리를 향한 열성은 나의 타고난 바탕임을, 아내에 대해 거짓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또 그 어린 시절에는 배신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신의의 교훈이 아주 곤란한 결과를 가져온 일도 있다. 나는  내가 만일 아내에게 성실을 맹세해야 한다면, 아내도 또한 내게 대해 성실을 맹세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나를 질투하는 남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내의 의무는, 아내에게 성실을 요구하는 내 권리로 쉽게 바뀌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강요되어야 할 것이라면 나는 쉴새 없이 그 권리를 지켜야 한다. 내가 아내의 정절을 의심할 이유는 터럭끝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질투심은 이유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의 거동을 살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내는 내 허락 없이는 어디도 가서는 안되었다. 이것이 우리 둘 사이에 쓰라린 싸움의 씨를 뿌렸다. 간섭이란 실상 일종의 감금이다. 그런데 카스투르바이는 그런 것을 참고 있을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제가 가고 싶기만 하면 가고야 말았다. 내편에서 제재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녀는 점점 더 제멋대로 행동했고, 나는 갈수록 점점 더 곤란하게 됐다. 그리하여 서로 말을 안하는 일이 우리 어린 두 부부의 다반사가 돼 버렸다. 나는 나의 구속에 대하여 카스투르바이가 그러한 자유를 취한 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아무 속임도 없는 소녀가 절에 가고 친구 집에 가는 것까지 구속받고도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녀를 구속할 권리가 있다면 그녀도 또한 내게 그렇게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내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우리 생활이 돌이킬 수 없이 비참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의 엄격은 모두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내 아내를 이상적 아내로  만들려고  했다. 내 욕심은 그녀가 순결한 생활을 하며 내가 배운 것을 그녀도 배우고, 그녀의 생활과 사상을 내것과 일치하게  만들려 는 것이었다. 
  카스투르바이가 그러한 욕심을 가졌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녀는 무식했다. 그녀는 천성이 단순했고, 독립적이고, 끈기 있으며, 적어도 내게 대해서는 말이 적었다. 그녀는 자기의 무식을 걱정하지도 않았고, 나의 공부가 한번이라도 그녀의 내부에서 자기도 나처럼 공부를 해보자는 자극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는 기억도 없다. 그러므로 내 욕심은 전혀 일방적인 것이었던 듯싶다. 내 열정은 온전히 한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열정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비록 주고받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쪽에는 아주 적극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주 견딜 수 없이 비참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고, 밤이 오면 우리는 또다시 만난다는 생각이 항상 내게 붙어 있었다. 떨어져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잡담을 해가며 밤이 늦도록 그녀를 자지 못하게 붙들고 있기가 일쑤였다. 만일 이 열렬한 열정에다가, 의무에 대한 불타는 집념이 내게 없었더라면, 나는 질병과 조사의 밥이 됐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짐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마다 주어진 일과를 마쳐야 했고,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이 나중 것이 나를 많은 함정에서 건져내 주었다.
  카스투르바이가 글을 모른다는 말은 이미 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정욕적인 사랑이 내게 시간을 남겨주지 않았다. 첫째 그녀를 가르치려면 그녀의 뜻을 거슬려 가며 해야 했고, 그나마 밤에 해야 했다. 나는 어른들 앞에서는 감히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말을 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안될 말이었다. 카디아와드에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그곳 특유의 쓸데없이 야만적인 푸르다(Purdah ; 가리는 휘장)가 있었다. 사정이 그와 같이 불리하였으므로 어린 시절에 내가 카스투르바이를 가르치려던 노력은 거의 성취되지 못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정욕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나는 벌써 공적 생활에 출범한 후였으므로 내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가정교사를 두어 그녀를 가르치려던 것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카스투르바이는 지금 간단한 편지를 겨우 쓰고 쉬운 구자라트어를 겨우 이해할 뿐이다.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만일 절대로 정욕에 물든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오늘날 학식있는 숙녀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녀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정욕적인 사랑의 불행에서 얼마쯤 나를 건져 주었던 한 사실에 대해 말을 했다. 그밖에 또 하나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수많은 실례에 의하여 나는 동기가 순수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마침내는 구원해 주시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혼이라는 잔인한 풍습과 함께 힌두 사회는 그 해독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또 다른 하나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 부모들은 어린 부부가 오래 같이 있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어린 아내는 세월의 반 이상을 친정에서 보낸다. 우리들의 경우도 그러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결혼 생활의 처음 다섯해 동안에(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함께 지낸 것은 모두 합해서 3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있은 지 여섯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내 아내에게는 친정에서 오라는 소식이 오곤 했다. 그녀를 데리고 오는 것이 그때에는 몹시 못마땅히 생각됐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살아났다. 열여덟에 나는 영국으로 갔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건강한 별거 생활을 했고,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우리는 여섯 달 이상을 같이 있어 보지 못했다. 나는 라지코트와 봄베이 사이를 늘 바삐 왕래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아프리카에서 초청이 왔는데 그때 나는 이미 정욕에서 상당히 벗어난 때였다.

 


 중학교에서

  내가 결혼했을 때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말을 이미 했다. 우리 삼형제는 모두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맏형은 훨씬 높은 학년이었고, 나와 함께 결혼했던 형은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우리는 결혼 때문에 한 해를 허비했다. 우리 형님께는 정말 나쁜 결과가 돼버렸다. 그는 공부를 아주 그만둬 버렸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 힌두 사회에서만 공부와 결혼이 그와 같이 병행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계속했다. 중학교에서는 열등생으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해마다 부모님께로 학업 성적과 품행 통지표가 왔는데, 나는 한번도 나쁜 통지표를 받은 적이 없었다. 2학년 말에는 사실 상까지 탔다. 5학년과 6학년에서는 각각 4루피와 10루피의 장학금을 탔는데, 사실 그것은 운이 좋아서 탄 것이지 내 성적 때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장학금은 모든 학생이 다 탈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카디아와드의 소라드 구에서 온 학생 중 우수한 사람에게만 주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40내지 50명 되는 한 학급 학생 중에 소라드에서 온 사람은 그리 만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나 스스로 공부를 잘하노라는 생각은 없었다. 상이나 장학금을 탈 때마다 나는 늘 놀라곤 했다. 그러나 품행에 관해서는 매우 깊이 조심을 했다. 지극히 조그만 잘못 때문에도 나는 눈물을 흘리곤 했다. 꾸중 들을 짓을 했거나 또는 선생에게 그렇게 보인 때는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번은 체벌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데, 벌 그 자체보다도 벌을 받아야만 했다는 그 사실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나는 슬피 울었다. 그것은 내가 1학년인가 2학년 때의 일이었다.  7학년 때도 한번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도랍지 에둘지기미씨가 그때 교장이었는데, 그는 엄격하고 수완도 있으며 좋은 선생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인망이 높았다. 그는 체조와 크리켓을 상급 하년의 필수과목으로 정하였으나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싫어했다. 필수과목이 되기 전부터 나는 크리켓이나 축구, 그밖의 어떤 운동에도 끼여 놀지 않았다. 그렇게 섞이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나의 수줍음 때문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때 나는 운동은 교육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나는 체육은 교과과정에서 지육과 똑같은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운동은 하지 않았어도 몸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왜그랬느냐 하면, 나는 책에서 바깥 공기 속에서 오래 산책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읽고, 그 가르침이 좋아서 산책하는 습관을 길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이 산책으로 나는 상당히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체육을 싫어한 이유는 아버지의 간호를 잘 해드리자는 열의 때문이었다. 학교가 끝나기만 하면 나는 곧 집으로 달음질쳐 와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체육이 필수과목이 되니 아버지 간호에 지장이 생겼다. 나는 기미 씨에게 아버지를 간호할 수 있게 체육과목을 면제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그는 들어 주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에 일어난 일인데, 그날은 오전 수업이므로 오후 네 시에 체육을 하러 나는 집에서 다시 학교로 가야 했다. 나는 시계가 없었는데 흐린 날씨가 나를 속였다. 내가 학교에 채 가기도 전에 아이들은 벌써 다 헤어졌다. 이튿날 기미씨는 출석부를 조사하다가 내가 결석한 것을 보고 결석한 까닭을 물었으므로,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1안나인가 2안나(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의 벌금을 물라고 명령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를 졌다! 그것이 내게는 한없이 괴로웠지만 내 결백함을 무엇으로 증명할까? 도리가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고민에 울음이 복받쳤다. 진실하려는 사람은 또한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내가 학교 시절에 부주의를 저질렀던 처음인 동시에 마지막 사건이었다. 결국 벌금은 물지 않게 됐던 것을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아버지가 직접 교장께 편지를 내어 방과 후에는 나를 집으로 보내 주기를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체육시간의 면제를 받았다.
  그러나 체육을 게을리한 데 대해선 비록 별로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것 또 하나를 무시했던 죄로 그 벌을 오늘까지도 받고 있다. 어디서 그런 관념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글씨 잘 쓰는 것이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 갈 때까지 그랬다. 그후,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거기에서 나서 거기에서 교육을 받은 변호사와 젊은이들의 잘 쓴 글씨를 보고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필체를 소홀히 했던 것을 뉘우쳤다. 나쁜 글씨는 불완전한 교육의 표시로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후에 고쳐 보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었다. 젊어서 게을리했던 것을 나는 끝내 고치지 못하고 말았다. 모든 젊은이들은 나의 실례를 보고 유의하여 글씨를 바로 쓰는 것이 교육의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지금 나의 의견으로는 아이들은 쓰기를 배우기 전에 먼저 그림 그리기를 배워야 한다. 어린이가 꽃이니, 새니 하는 다른 물체를 관찰하여 배우듯이 글자도 관찰해서 배우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글씨 쓰는 것은 물체를 그릴 줄 알게 된 뒤에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학교 시절의 회고담 중 기록할 만한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내가 결혼 때문에 한 해를 잃었으므로 선생은 나더러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한 학년 건너 뛰라고 했다. 그것은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만 허락하는 특혜였다. 그래서 나는 3학년에 여섯 달을 있었을 뿐이고, 여름 방학 전에 시험을 치고 4학년으로 진급을 했다. 4학년부터는 대부분의 과목이 영어로 수업한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하학이 새 과목으로 들어 있었는데, 나는 기하학에 특별한 실력이 없는 데다 영어로 수업을 하니 더욱 어려웠다. 선생은 퍽 잘 가르쳐 주었으나 내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두 학년을 한 해에 하려는 것은 너무도 욕심을 부린 것이라 생각하며 몇번이나 낙심을 하고 다시 3학년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 아니라 선생님께도 망신이다. 나의 노력을 믿고 진급을 추천해 주셨으니 말이다. 그래 이중으로 망신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냥 눌러 앉았다. 그런데 애를 써서 유클리드의 제13정리에 들어가니, 갑자기 기하란 매우 쉬운 과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순수하게 추리력의 사용만을 요구하는 과목이 어려울 리가 없다. 그뒤로 기하학은 내겐 쉽고 재미 있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는 정말 어려운 과목이었다. 기하학에서는 암기할 것이 없었는데, 산스크리트에서는 모든 것을 암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과목도 4학년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6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낙심이 됐다. 내가 보기에 선생은 아이들을 억지로 공부시키려고 애를 쓰는 엄한 사람이었다. 산스크리트 선생과 페르시아어 선생 사이에는 일종의 경쟁이 있었다. 페르시아어 선생은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페르시아어는 쉽고, 페르시아어 선생은 착해서 학생들을 잘 봐준다고 하였다. 그  쉬움 이 나를 유혹하여서 어느날 나는 페르시아어 시간에 들어가 앉았다. 산스크리트 선생은 매우 섭섭해 했다. 그는 나를 곁에 불러놓고 말했다.  네가 어떻게 바이슈나바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느냐? 너는 네 종교의 말을 아니 배우려느냐? 어려운 것이 있으면 어째서 내게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산스크리트를 내 있는 힘을 다해 가르치려 한다. 차차 해가노라면 너는 그 속에 미치리만큼 재미있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낙심해서는 안돼. 와서 다시 산스크리트 반에 앉아. 
  그 친절을 보고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내 선생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오늘 나는 크리슈나샹카르 판댜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조금이나마 산스크리트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도저히 우리의 성전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산스크리트의 좀더 깊고 완전한 지식을 얻지 못한 것이 크게 후회스럽다. 그후에야 나는 모든 힌두의 자녀들은 산스크리트의 완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인도 고등교육의 모든 교과과정에는, 각각 제 국어는 물론이지만, 그 밖에 힌두어, 산스크리트, 페르시아어, 아랍어, 영어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짓수가 많은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 교육이 좀더 조직적으로 된다면, 그리고 학생들이 모든 교과를 외국말로 배워야 하는 짐을 덜어 버리기만 한다면, 이 말들을 다 배우는 것은 그리 힘드는 일이 아닐 것이고 아주 재미난 것이 될 줄로 확신한다. 한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은 다른 언어의 학습을 비교적 쉽게 하기 때문이다.
  실상 힌두어.구자라트어.산스크리트는 한 언어로 생각할 수 있고, 페르시아어.아랍어도 한 언어라 할 수 있다. 페르시아어는 아리안 어족에 속해 있고, 아랍어는 셈어 계통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사이에는 가까운 친족관계가 있다. 양쪽이 다 자기네의 완전한 발달을 이슬람교의 부흥에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르두어도 나는 아주 다른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법은 힌두어의 것을 채용했고 단어는 주로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 우르두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배워야 하고, 정확한 구자라트어나 힌두어.뱅골어.마라타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산스크리트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