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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성공품(眞性空品)

그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는 이름과 모습이 있을 수 없으며, 삼취정계에는 형식도 없는데, 어떻게 수용하여 중생을 위해 설명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를 위해 말씀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그대를 위해 설명하여 주리라. 선남자여, 좋거나 좋지 않은 법은 마음에 따라서 변화하여 생기는 것이니라. 일체의 경계는 의식과 언어로 분별한 것이니, 한 곳에서 제어하면 온갖 인연이 끊어져 없어지리라. 왜냐하면 선남자여, 순일한 본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 가지의 작용(用)은 베풀어지지 않을 것이요, 여여한 이치에 머무르면 육도(六道)의 문이 닫힐 것이며, 네 가지 인연이 순조로울 것 같으면 삼취정계가 갖추어지리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 인연이 순조로울 것 같으면 삼취정계가 갖추어진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인연이란, 첫째는 택멸(擇滅)하는 힘을 취하는 인연이니 섭률의계(攝律儀戒)를 말하며,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청정한 근기의 힘으로 모여 일어나는 인연(本利淨根力所集起緣)이니 섭선법계(攝善法戒)를 말하는 것이요, 셋째는 근본 지혜와 대비력의 인연으로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하며, 넷째는 순일한 깨달음에 통달한 지혜의 힘에서 연유하는 여여함에 따라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 인연이라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현상의 모습(事相)에는 머물지 않지만 공용(功用)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한 곳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은 하나의 일은 전체적으로 6행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인 일체지혜의 바다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현상의 모습(事相)에는 머무르지 않지만 공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란 법의 참된 공이며, 영원하고(常), 즐겁고(樂), 불멸의 나요(我), 청정한 것(淨)은 두 가지 나를 뛰어넘은 위대한 열반이며, 그 마음에는 얽매임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힘의 관행(觀行)이며, 이러한 관행의 깨달음 가운데 마땅히 37조도법을 갖추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37조도법을 갖추었느니라. 왜냐하면 4념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력(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의 이름은 많으나 그 뜻이 하나이니라. 또한 동일한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 이름과 숫자 때문이며, 다만 이름뿐이요 문자일 뿐이니라. 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얻을 수 없는 법은 하나의 뜻이요, 문자에는 없나니, 문자가 없는 모습과 의미는 진실한 공의 바탕이니라. 공한 바탕의 의미는 실답게 여여하며, 여여한 이치는 일체의 법을 갖추었느니라. 선남자여, 여여한 이치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 가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게 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일체의 법이란 모두 다 언어와 문자일 뿐이나 언어와 문자의 모습이 바로 뜻이 되지는 않느니라. 실다운 뜻을 언어로 의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설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너희 중생들이 말씀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는 것이니라. 내가 설한 것은 의미이지 문자가 아니니라. 중생이 설명하는 것은 문어이지 의미가 아니니라. 의어가 아닌 것은 모두 공허하여 실답지 않은 것이니, 공허하여 실답지 않은 말(空無之言)은 그 뜻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뜻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속이는 말(妄語)이니라.
뜻과 같이 말하자면 실상의 공은 공이 아니며 공허한 실상은 진실한 것이 아니니라. 두 가지 모습을 떠나 중간이라 할지라도 맞지 않나니, 그 알맞지 않은 법은 세 가지 모습(三相)을 떠나 처소를 볼 수 없으므로 여여한 그대로 말하느니라. 여여함에는 없다거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없나니, 없다는 것은 없다는 법에 대해서 있는 것이니라. 여여함에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이 없나니, 있다는 것은 있다는 법에 대해서 없는 것이니라. 여여함에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말씀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여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여함은 여여함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여여한 말씀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일체의 중생들은 일천제(一闡提)를 따르나니 일천제의 마음은 어떠한 지위에 머물러야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천제의 마음을 따라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도달하여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무느니라.
첫째는 믿음의 지위(信位)이다. 이 몸속의 진여의 종자(種子)는 망령된 마음으로 가려져 있으나 망령된 것을 버리면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을 믿는 것이니, 마음이 청정하면 명백하게 모든 경계가 의식과 언어의 분별인 줄을 아느니라.
둘째는 생각하는 지위(思位)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경계는 오직 의식과 언어뿐이며, 의식과 언어의 분별은 마음대로 나타나는 것이요, 보이는 경계는 나의 본래의 식(識)이 아니라고 관하는 것이니라. 이 본래의 식은 법도 아니며 뜻도 아니요, 잡히는 것도 아니며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 줄을 아는 것이니라.
셋째는 닦는 지위(修位)이다. 닦는다는 것은 항상 수행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마음(能起)을 일으키되 마음을 일으킴과 닦음이 동시이니라. 먼저 지혜로써 이끌어서 가지가지의 장애와 난관(障難)을 배제하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니라.
넷째는 행함의 지위(行位)이다. 행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행함의 경지를 벗어나 마음에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느니라. 지극히 청정하고 근기가 예리하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여여함은 결정된 보배로운 바탕이며 위대한 열반의 경지이니, 오직 바탕만이 공하고 클 뿐이니라.
다섯째는 버리는 지위(捨位)이다. 버린다는 것은 바탕이 공한데도 머물지 않는 것이니라. 바른 지혜는 흘러서 변하지만 대비의 여여한 모습이며, 그 모습은 여여함에도 머무르지 않느니라. 삼먁삼보리는 마음을 비워 깨닫지 않는 것이니, 마음에는 변제(邊際)가 없어서 처소를 볼 수 없으며, 이것이 여래에 이르는 길이니라.
선남자여, 이 5위(位)는 순일한 깨달음이니라. 본각의 이익에 따라서 들어가나니, 만일 중생을 교화하고자 한다면 그 본처(本處)에 따라야 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그 본처에 따르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근본이란 없느니라. 정해진 처소가 없는 데에 살면서 변제(邊際)를 비우고 실상에 들어가며, 보리심을 일으켜 성스러운 길(聖道)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선남자여, 마치 손으로 저 허공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은 것도 아니며, 잡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셨듯이 불사에 앞서서 본각의 이익으로써 취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적멸을 생각하는 것이며, 적멸은 여여한 것입니다. 가지가지의 공덕을 다 지니고, 마땅히 일체의 법을 진열하되 원융무애하여 둘이 아니니 헤아려 측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이 법을 알면 바로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것은 크게 신비한 주문이며, 이것은 크게 밝은 주문이며, 이것은 위없이 밝은 주문이며, 이것은 위없이 평등한 주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진여는 공한 바탕이니라. 바탕이 공한 지혜의 불은 가지가지의 번뇌(結)를 태워 없애 버려 평등하고 평등하니라. 등각(等覺)의 세 가지 경지와 묘각(妙覺)의 세 가지 몸이 9식(識) 가운데서 명백하여 밝고 깨끗하며 가지가지의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 법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니, 그것은 지혜 자체의 작용이기 때문이니라.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니니, 그것은 작용의 바탕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것은 공한 모습도 공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만일 중생을 교화할 것 같으면 저 중생들이 이 뜻을 관찰(觀)하여 들어가게 해야 하느니라. 이 뜻에 들어가면 이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여래를 뜻으로 관찰하면 가지가지의 흐름에 머무르지 않으며, 마땅히 4선(禪)을 여의고 유정천(有頂天)을 뛰어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왜냐하면 일체의 법은 이름과 숫자일 뿐이니 4선도 이와 같으니라. 만일 여래를 볼 것 같으면 여래의 마음은 자유로워서 항상 멸진처(滅盡處)에 있으며, 나오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그것은 안과 밖이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저러한 가지가지의 선관(禪觀)은 모두 생각이 공한 선정이거니와 이 여여함은 그것과 다르니라. 왜냐하면 여여함으로 여여함의 실상을 관찰하되 여여함의 모양을 보고 관찰할 수 없이 가지가지의 모습이 적멸하나니, 적멸이 바로 여여의 뜻이기 때문이니라. 저와 같이 생각이 있는 선정(禪定)은 움직임이지 선(禪)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선의 바탕(禪性)은 가지가지의 움직임을 여읜 것이므로 물들게 하는 것도 아니며 물들어진 것도 아니요, 법도 아니며 그림자도 아니니라. 가지가지의 분별을 떠난 본각의 이익이란 뜻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관찰하는 선정(禪定)이라야 선(禪)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께서는 항상 여여한 실상으로 중생을 교화하시되 이러한 실상의 뜻에는 글이 많고 뜻이 풍부하여 근기가 영리한 중생은 닦을 수 있으려니와 근기가 아둔한 중생은 뜻을 알기가 어려우리니, 어떠한 방편으로 저 아둔한 중생들이 이 진리에 들어오도록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아둔한 근기의 중생들이 하나의 사구게(四句偈)를 받아 지니게 하면 참된 진리에 들어가리라. 일체의 불법이 하나의 게송 가운데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네 구절로 된 게송입니까? 원하옵건대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뜻은,
이 뜻은 적멸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며,
가지가지의 생멸(生滅)을 소멸한 뜻은,
이 뜻은 생함이요, 멸함이 아니니라.

그 때에 대중들은 이 게송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모두 생김이 없는 법과 생김이 없어진 지혜와 바탕이 공한 지혜의 바다를 얻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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