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의 사랑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는 절, 문종(1046--83)때 지은 남원의 기린산 만복사 동편에 방 한 칸을 얻어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양생이었다. 양생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끔씩 시를 짓곤 했다.
봄이었다. 배꽃이 피는 싱그러운 봄날이었다. 그의 방 앞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꽃이 피어 온 뜰을 은백의 세계로 만들었다. 이 날도 양생은 고독한 마음을 달래면서 배나무 아래를 거닐었다. 저절로 한 수의 시가 떠올라 조용히 읊조렸다.
한 그루 배꽃나무 외로움 벗삼으니
시름도 하그리 많은 달 밝은 이 밤
외로운 창가에 홀로 누웠으니
어디메서 고운 님 퉁소를 부는가.
비취는 외롭게 짝 잃고 날아가고
원앙 한 마리 맑은 물에 노니는데
뉘 집에 마음 붙여 바둑놀이 하나.
등불 가물가물 이내 신세 점치는 듯.
이렇게 시를 읊고 나니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
"그대가 정말 고운 짝을 구하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는가?"
양생은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아했다. 양생은 부처님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부처님을 찾아 뵈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은 음력으로 삼월 스무나흩날이었다. 매년 이 날은 고을 사람들이 만복사에 올라와 저마다 향불을 피우고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양생은 이른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오늘은 꼭 소원을 빌어야지. 부처님이 무심하지 않으시다면 반드시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야.'
저녁 예불이 끝나고 양생은 혼자 법당에 남았다. 그는 소매 속에 깊이 감추었던 저포를 꺼내 들었다. 저포란 당시 중국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쓰는 점대 같은 것이었다. 양생이 말했다.
"존경하옵는 부처님. 오늘은 제가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대중을 모아 설법하는 자리, 즉 법연을 베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부처님께서 지신다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제 소원은 간단합니다. 저에게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짝으로 주시면 됩니다.
부처님은 온갖 지혜를 갖추시고 능하지 못한 바가 없으십니다. 하물며 이 세상의 절반이 여자이온데 그중에서 저의 배필을 점지해 주시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 물론 말씀을 하실 리 없었다. 등상불이기 때문에. 그러나 부처님은 가피력을 베풀어 충분히 들어 주는 분이라는 것을 양생은 믿고 있었다. 양생은 혼자 빙긋 웃으며 저포를 던졌다. 저포는 말할 것도 없이 양생의 승리로 돌아갔다. 양생은 부처님께 말했다.
"보십시오, 부처님. 제가 분명히 이겼습니다. 저의 아름다운 인연은 이미 정해졌사오니 자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저의 소원을 저버리지 마옵소서."
그때, 양생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그는 부처님 탁자 밑으로 숨어 들어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려니 꽃처럼 아름다운 묘령의 아가씨가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깨끗이 단장하고 곱게 차려 입은 옷매무새가 진정 고왔다. 새까만 눈동자에 그 눈이 서글서글하게 생겼으며 늘씬한 키에 긴 목을 가졌다. 월궁의 선녀, 바로 그와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니 아름답고 고운 모습은 형용키 어려웠다. 그녀는 그 고운 손으로 기름을 따르고 등잔에 불을 켰다. 향로에 향불을 지핀 뒤 물러서서 세 번 절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탄식하듯이 말했다.
"인생이 박명하기 어찌 이와 같사오니까."
그녀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부처님 탁자 위에 놓고 낭낭한 음성으로 읽어 내려갔다.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는 외람됨을 무릅쓰고 삼가 부처님전에 사뢰옵니다. 요즈음 변방이 허물어져 왜적들이 쳐들어와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따라서 봉화가 해마다 꺼질 날이 없습니다. 건물을 파괴하고 백성을 노략하오매, 친척과 노복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피난하여 정처 없이 유리 걸식하고 있사옵니다. 수양버들마냥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먼길의 피난이 여의치 않사와 갚은 안방에 조용히 틀어박혀 금석같은 굳은 정절을 더럽힘이 없습니다만, 야속하온 우리 부모님은 이 여식의 수절이 마땅치 않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궁벽진 곳에 숨겨 두어 초야에 묻혀 살게 된 지 거의 3년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나이다. 밝은 달 아름다운 가을과 꽃 피는 봄날 아침에 고단한 영혼입니다. 어이 위무할 수 있사오리까. 흐르는 흰구름의 박명함을 탄식하오며 홀로 빈 방을 지키어 기막힌 밤을 보내오니, 님 그리운 이내 정이 채란의 외로운 춤을 오히려 슬프게 여겼나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서러운 영혼 깃들 곳 없사옵고 그럭저럭 날이 가고 밤이 와서 구곡간장은 다 녹아 없어지옵니다. 어지신 부처님, 자비와 연민을 베푸시옵소서. 인간의 한평생이 이미 정해져 있사옵고 부부의 백년가약 또한 피할 길 없다 하오면, 바라옵건대 하루 속히 꽃다운 인연과 배필을 점지하여 주옵소서."
은쟁반에 옥 굴러가듯 낭낭한 여인의 음성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축원문 낭독을 마친 여인이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며 어찌나 슬피 우는지 탁자 밑에 숨어서 보는 양생은 정신을 가늠할 수 없었다. 누가 여인의 눈물을 무기라 표현했던가. 누가 여인의 눈물에 속지 말라 했던가. 양생은 그런 말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양생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외모에서부터 낭낭한 음성, 들먹이는 어깨, 양볼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 그 아름다움이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스스로 그 정을 이기지 못해 탁자 밑에서 펄쩍 뛰어나왔다. 탁자 위에 다시 가지런히 놓은 글을 옆눈으로 보며 여인에게 물었다.
"낭자는 누구이기에 이 만복사 부처님에게 와서 그토록 진한 감동의 축원문을 봉독하십니까?"
양생의 물음에 여인은 다소곳하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양생을 바라본 뒤 고개를 약간 옆으로 틀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 놀라움이나 수줍음은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소녀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의심이 있으시다면 던져 두셔도 좋습니다."
양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뭐 자길 귀신이라고 생각했다는 건가. 아니야,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야.'
여인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배필을 구하고 있는 중이지요.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
양생이 대답하려는 찰나 그녀의 말이 앞서서 이어졌다.
"하기야 구태여 이름 석 자는 알아 무엇하겠습니까? 서로 마음이 맞고 끌리면 그만이지요."
양생은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그그, 그렇고 말고요."
만복사는 오래 된 절이었다. 당우가 퇴락하여 스님네는 절한 모퉁이에 움막을 얽어 살았는데 법당 앞에는 쓸쓸한 요사채가 하나 남아 있었다. 이 요사채는 객스님이나 오면 묵고 가는 곳이었고 스님네가 모여 살아가는 얘기들을 나누는 판도방이었다. 일명 지댓방이라고도 했다.
양생은 여인에게 그곳을 가리키면서 한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행여 남이 볼세라 조심스레 판도방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달이 동산에 솟아오르며 그 그림자가 창가에 비추는데 문득 어디선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왔느뇨? 혹 아무개 아니냐?"
밖에서 앳된 소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렇습니다. 소녀이옵니다. 낭자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문밖을 벗어나지 않으셨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런 곳에 와 계시옵니까?"
창 밖에 소녀의 그림자가 밝은 달빛을 받아 선명함 그대로 투영되었다.
소녀는 문고리를 잡는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싶었다. 양생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여인이 말했다.
"들어올 것까지는 없느니라."
"예."
여인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나는 오늘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서 짝을 이루었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라. 실로 자비로우신 부처님의 가피력이다. 이제 고운님을 배필로 맞아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비록 부모님께 말씀은 드리지 못하고 정식으로 귀밑머리를 올리지는 못하여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연을 맺었으니 한평생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너는 이 길로 곧장 가서 주안상을 준비해 오너라."
시녀가 명을 받고 돌아갔다. 그 동안 둘은 방안을 정돈했다. 얼마 후 시녀가 주안상을 보아 왔다.
두 사람은 합환의 잔을 부딪쳤다. 참으로 꿈 같은 순간이었다. 그들은 행복했다. 이 행복이 영원히 끝나지 말고 계속되기를 빌었다.
어느새 자정을 넘었다. 적어도 4경(새벽 2시 전후)은 됨 직했다. 양생은 문득 주안상에 차려온 그릇들을 보니 거기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다.
그러나 술잔에서는 기이한 향내가 풍겨왔다. 양생은 이것이 인간의 평범한 그릇들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일기 시작하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찌하여 그릇에 무늬도 글씨도 들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잔에서 풍기는 이 기이한 향내는 무슨 조화일까?"
그는 의심을 접어 두기로 했다. 여인의 예의바른 몸가짐이며 맑고 고운 음성으로 보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어느 명문대가의 따님이겠지. 한때의 정을 가눌 길 없어 이 어둠 속에 집을 뛰쳐나와 나를 만나게 되었을 거야."
여인은 양생을 바라보며 뭔가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련님, 의심하지 마옵소서. 의심은 싫사옵니다."
양생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다 들킨 것처럼 당황했다. 그러나 그 역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니옵니다. 되었사옵니다."
여인은 양생에게 술잔을 권했다. 그리고 시녀를 돌아보며 한 가락 시를 짓게 했다. 그녀가 말했다.
"얘는 옛 가락밖에 모릅니다. 청컨대 당신이 시 한 수를 지어 주시면 더없는 기쁨이겠고, 이 아이가 당신의 시를 가락에 실어 부를 것입니다."
양생은 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만강홍 가락으로 한곡조 시를 지어 시녀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봄 추위 쌀쌀한 바람에
명주 적삼 펄럭이고
애닯다,
몇 번이나 향로에 불 꺼졌던고
저문 뫼 눈썹인 양 가물거리고
저녁구름은 양산처럼 펼쳐졌는데
비단 장막 원앙 이불
뉘로 더불어 노닐런고.
금비녀 반쯤 꽂은 채
한 가락의 퉁소 불어 보니
덧없는 제 세월
어이하여 그리 흘러만 가느뇨
봄 밤 깊은 수심 둘 곳 없는데
타오르는 등불은 가물거리고
병풍,
나지막이 둘러
한갖 헛되이 흐르는 눈물
뉘로 더불어 위로받으랴.
기쁠시고 오늘 이 밤
봄바람이 소식 전하여
중중첩첩 쌓인 정한,
봄 눈 녹듯 녹았어라.
금주곡 한 가락 술잔에 기울여
한 많은 옛일 느껴워 하노매라.
시녀가 노래를 마치자 여인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며 말했다.
"진작 당신을 만나지 못하였음을 못내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아름다운 인연을 어찌 천행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만일 소첩을 버리지 않는다면 평생토록 당신의 수건을 받들고 빗을 집어 드리겠습니다.
하오나 만일 당신이 나를 저버리신다면 저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습니다."
양생이 바라던 바였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고독과 싸우면서 살아왔던가.
그런데 이처럼 아름답고 착한 여인을 저버리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대를 진정 사랑하오. 그대 또한 나를 사랑하고, 한데 내 어찌 그대를 저버릴 수 있겠고. 약속하리다."
하지만 여인의 일거일동이 좀 수상하여 그는 유심히 그녀의 동정을 살폈다. 이윽고 서쪽 봉우리에 달이 걸리고 먼 아랫마을에서 닭의 홰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새벽 예불을 시작하는 도량석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범종소리가 여명을 가르며 은은하게 들려 왔다. 흐끄무레하게 먼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한낮이 밤과 교대하여 그 자리에 나앉게 될 것이었다.
여인이 시녀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술상을 거두어 돌아가거라. 파해야 할 시간이구나."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시녀는 주안상을 거두어 안개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양생이 고개를 갸웃하자 여인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말했다.
"가연이 이미 이루어졌어요. 당신을 모시고 저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오니 허락하소서."
양생은 기꺼이 승락했다. 그는 한 쪽 팔을 굽혀 여인이 거머쥘 수 있도록 배려했다. 둘은 판도방을 나왔다. 여인이 앞장을 서다시피하여 앞길을 안내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울타리 밑에서 개가 짖고 길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뭇 이상한 것은 누구나 양생이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혼자서 이른 새벽녘에 어디 다녀오는 줄 알고 있었다.
"양 도령, 어디 다녀오는가, 이 이른 새벽녘에?"
양생은 대답했다.
"예, 어젯밤에 한잔 걸쳤더니 좀 취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만복사에서 눈 좀 붙였다가 방금 옛 친구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양생은 여인을 따라갔다. 숲속으로 난 길은 이슬이 담뿍 내려 바지가랑이를 적셨다. 길은 점점 으슥해졌다. 아직 해도 돋기 전이었다.
한참을 따라가던 양생이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낭자가 머무는 곳은 아직 멀었소?"
"예, 소첩은 이처럼 누추한 곳에 머뭅니다. 자, 가시지요. 거의 다 와 갑니다."
그녀는 말 끝에 시를 한 수 지었다.
이슬 내리는 오솔길
저물기 전에 가고 싶건만
어인 이슬이 이리도 심해
내 소원을 더디게 하느뇨.
이를 듣고 양생이 화답했다.
엉거주춤 저 여우
다리 위로 건너가네
정은, 아가씨 노리는 마음
미친 놈 멋없이 설레이네.
둘은 함께 웃고 함께 읊으며 개령동 골짜기로 들어갔다. 한 곳에 이르니 쑥밭이 즐비한데 아담하고도 고운 집 한채가 수려히 서 있었다. 여인은 양생을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곧 이어 밥상이 들어왔는데 지난 밤에 만복사에서의 차림새와 비슷했다. 양생은 거기서 연 사흘 동안 즐기며 보냈다. 그 즐거움은 한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됨에 있어서 조금도 모자랄 게 없었다.
시녀의 얼굴도 아름답고 고왔다. 하지만 교태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좌우에 벌려 놓은 그릇들은 무늬가 없었다. 가구들도 그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글씨나 그림이나 무늬는 보이지 않았다.
'이건 인간의 세상이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양생은 수시로 일어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인의 은근하고도 정겨운 접대에 그러한 생각들을 접어 두기로 했다. 양생은 생각했다.
'아무렴 어때, 인간세상이든 아니든.'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사흘 낮 사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여인이 문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양생을 향해 뭔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또 말을 하려다 그만두곤 했다. 양생이 눈치를 채고 안심시키며 말했다.
"뭔지 말씀해 보시오. 주저할 것이 뭐가 있겠소. 우리 사이에 말이오, 어서 말해 보오."
"말씀드리지요. 이곳 사흘은 인간세상의 3년에 해당합니다. 이제는 그대가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인간세상으로 돌아가시어 옛일을 돌보심이 어떠하신지요."
양생이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지금 이승이 아니라 저승이거나 아니면 신선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웬지 양생은 아쉽다 못해 서글퍼졌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낭자?"
여인이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 것이 너무나 역력했다.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 다하지 못한 연분은 내생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시를 읊었다.
개령동 깊은 골
봄의 수심 안은 채
꽃은 지고 또 피고
온갖 근심 더할세라
아득한 초협 구름 속
님을 여의고는
소상강 대밭 속에
눈물 어린 눈동자여.
맑은 강 따뜻한 날씨
원앙이 짝을 찾고
푸른 하늘 구름 걷히자
비취새 노니누나.
님이여!
맺사이다. 좋고 좋은 동삼쌍관과
비단부채 가지고서
맑은 가을 원망할 게 없나니.
초협이란 중국의 땅 이름으로 수목이 울창한 깊은 골짜기였다. 그리고 소상강은 순임금의 두 부인인 아황과 여영이 놀던 아름다운 강이었다.
부부의 두 마음이 영원히 변치 말기로 약속하면서 맺는 실을 동삼쌍관이라 했고, 사랑 잃은 여자의 정경을 비단부채에 비유했다.
그만큼 여인은 유식했다. 여인은 은잔을 한 벌 내어 양생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남원에서 서쪽으로 40리에 보련산이 있고 그 산에 보련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서 내일 재가 있습니다. 이는 저의 부모님이 저를 위해 베푸는 것입니다. 저를 저버릴 뜻이 없으시다면 보련사 가는 도중에 기다리시다 저의 부모님을 한 번 만나심이 어떠하올는지요?"
양생이 말했다.
"그야 당연한 말이오. 내가 낭자를 버릴 마음이 있겠소? 내 꼭 당신의 부모님을 만나뵈오리다."
여인은 사라졌다. 찰나의 일이었다. 양생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 도저히 일어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허무했다. 사흘의 환락이 이로써 끝나다니. 그러나 그는 일어섰다. 그는 다음날 여인이 일러준 장소에서 그녀가 준 은잔을 들고 그녀의 부모를 기다렸다.
과연 얼마쯤 있으려니 큰 행차가 다가왔다. 수레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보련사로 가는 중이었다. 딸의 대상제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한 시종이 한 손으로 양생이 들고 있는 은잔을 가리키고는 주인에게 말했다.
"저기 보십시오. 저기 저 사람이 들고 있는 은잔은 아씨의 장례식 때 관 속에 부장품으로 넣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주인이 놀라 물었다. 시종이 말했다.
"저 서생이 들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주인님, 아씨의 부장품이 틀림없습니다."
주인이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을꼬?"
시종이 신이 나서 말했다.
"마님, 아무래도 소인이 보기에는 도굴한 것이 틀림없는 듯 하옵니다. 원, 세상에 아씨의 부장품을 훔치다니."
주인이 말했다.
"필히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니,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좋겠구나."
주인이 말을 세우고 수레에서 내려 양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은잔을 얻게 된 연유를 물었다. 양생은 보고 들은 대로 낱낱이 말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주인은 한참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양생에게 탄식조로 말했다.
"내 일찍이 슬하에 여식 하나를 두었네. 아들 하나 없이 그 아이만을 길렀지. 나이가 차서 시집보낼 때가 되었는데 그만 난리가 나서 왜구들이 쳐들어와 그 애를 죽였다네. 해서 정식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개령동 길가에 묻었다네. 그렇게 한 후 머뭇머뭇하다가 어느새 3년이 지나 대상날이 되었다네. 해서 그 애의 왕생극락을 위해 재라도 베풀까 하여 지금 보련사로 가는 길이라네. 자네가 진정 그 애의 약속대로 하려거든 조금도 의심치 말고 기다렸다가 나의 여식과 함께 오게. 내 먼저 감세."
양생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떠나는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과연 약속 시간에서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시녀를 대동하고 여인이 나타났다. 양생은 반가웠다.
"낭자, 낭자가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오? 낭자, 낭자의 부모님도 만나뵈었소. 먼저 보련사로 가시면서 낭자와 함께 그리로 오라 하셨소."
"고맙습니다. 낭군님. 자 가시지요."
둘은 서로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보련사로 향했다. 절 문에 이르러 여인이 먼저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하고 곧 흰 희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님들과 친척들 중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오직 양생이 그녀를 보고 그 뒤를 따를뿐이었다.
"함께 드시지요."
양생이 보니 여인이 따라 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양생이 여인의 말 그대로 옮겼다.
"함께 드시지요."
여인의 부모는 양생의 말에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럼세. 우리 함께 드세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식사하면서 수저질을 하는 것과 꼭 같았다. 부모와 친척들은 여식이 식사에 함께 참여했음을 느꼈다.
그들은 마침내 장 속에 신방을 마련하고 양생으로 하여금 들어가 자게 하였다. 한밤중쯤 되어 안으로부터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제부터 제가 신세타령을 하겠나이다. 제가 예법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시경'에서는 남녀의 중한 예법을 풍자하여 건상이라 하고 상서라 하였지요. 제가 그 두서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도 오랫동안 들판의 다북 속에 묻혀 있다 보니 풍정이 한 번 발하매 마침내 능히 이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뜻밖에도 삼세의 인연을 만나 그대의 동정을 얻게 되었고, 백년의 높은 절개를 바쳐 술 빚고 옷 기워 평생 동안 지어미의 길을 닦으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숙명적인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운우의 정은 중국의 종양왕이 미인을 꿈꾸던 양대에서 개이고 오작의 한은 은하의 세계에서 흩어졌나이다. 님이여! 이 서럽고도 아득한 정회를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겠나이까."
이 말을 마치고 여인은 슬피 울었다. 마침내 혼백을 전송하는 스님들의 의식이 집전되었다. 이른바 봉송이었다. 영혼이 문밖으로 나가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고, 슬피 우는 소리가 법당 문을 넘어 밖으로 이어지면서 이별의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저승길이 바쁘기에
괴로운 이별을 하오마는
바라건대 내 님이여!
나를 저버리지 마소서.
애닯구나 어머니여!
슬프구나 아버지여!
내 신세 어이하랴
고운 님 여의도다.
아득해라 저승길이여!
이 원한을 어이할꼬.
사라져 가는 가녀리고 슬픈 노랫소리를 들으며 양생은 비로소 그녀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었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물론 그의 부모도 그녀가 3년상에 참례하였다가 혼령이 다시 떠나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슬픔은 더욱 고조되었고 함께 붙들고 통곡하였다.
그녀의 부모가 슬픔을 누르며 양생에게 말했다.
"우리 딸애의 은잔은 자네의 소용에 맡기니 알아서 사용하게. 그리고 내 딸 앞으로 되어 있던 밭 두 두럭과 여비 몇 사람도 자네에게 맡긴, 꼭 조건이랄 것은 없네만 내 딸을 잊지 말아 주게나."
양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양생은 고기와 술을 장만하여 여인과 처음 만났던 장소를 찾아가니 과연 거기에는 하나의 쓸쓸한 무덤만 있을 뿐이었다. 양생은 무덤 앞에 가지고 간 술과 고기 등을 차려 놓고 지전을 불사르며 조문을 지어 낭독했다.
"오오, 그리운 님이시여. 님은 어릴 적부터 자태가 아름답고 천품이 온순하기가 월나라의 미인 서시보다 나았나이다. 또한 당신의 문장은 선녀의 한 사람인 숙진보다 뛰어나 아무도 당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소이다. 규문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항상 어머니의 교훈을 잘 받았습니다. 난을 겪으면서도 굳은 정조를 온전히 하더니 그만 왜적을 만나 목숨을 잃으셨구려. 황량한 쑥대밭에 몸을 의지하고 피는 꽃 돋는 달에 마음만이 슬펐소이다. 봄바람에 귀촉도는 구슬피 울고 가을철 비단부채 어디에 쓰리까. 지난날 밤 님을 만나 기쁨을 얻었으니. 비록 유명은 다르나 운우의 즐거움을 님과 함께 하였구려. 장차 백년을 해로하려 하였더니, 어찌 며칠 밤의 기쁨으로 이별이 닥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고운 님이시여, 그대는 응당 달나라의 난새를 타시옵고 익산의 비가 되오리다. 땅이 암암하여 돌아올길 바이 없고 하늘은 아득하여 그대의 발길 끊겼소이다. 다만 아득하고 아득한 가운데서도 그대 만날 날을 가만히 기다리겠습니다. 님의 영혼이 속삭이는 말 듣고 내 구슬피 울었으며 구곡간장 갈갈이 찢기며 마음 아팠소이다. 총명한 그대여! 아, 고운 그대여! 그 음성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고 그 모습 상기도 눈에 삼삼합니다. 아아! 이 설움 어이 하오리까.
그대의 삼혼이 비록 없어졌다 할지라도 하나의 영혼은 길이 남을지니, 여기에 잠시 고운 자태 나타내구려. 비록 나고 죽음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대의 총명함은 여전하리니, 어찌 나의 글월에 대하여 느낌이 없을 수 있겠소이까. 아아! 이 몸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있을 따름이외다."
조문을 마치고 그는 만복사 거처로 돌아왔다. 양생은 여인의 부모가 남겨 준 집과 농토를 모두 매각하여 매일같이 재를 올리고 음식을 베풀었다.
그에게 있어서 재산은 한낱 허명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인이 없는 삶은 무의미했다. 여인이 없는 돈과 재물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하루는 그 여인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내고 양생에게 말했다.
"당신의 정성은 참으로 지극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은덕으로 다른 몸으로 환생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당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저어하여 예전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냈을 뿐입니다. 지금 저는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양생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그 음성을 들으며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당신이었구려. 인간의 몸을 받아 났다니 참으로 잘된 일이외다. 고맙고도 반갑소."
여인이 말했다.
"비록 유명의 한계는 더욱더 멀어졌다 할지라도 당신의 두터운 은정을 어이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도 마땅히 정업을 닦고 정업을 맞으십시오.
저처럼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오로지 부처님께 의지하고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일일 뿐입니다. 부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양생은 빈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고맙소. 내 반드시 당신의 뜻을 따라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 하겠소."
양생은 그 후 남은 생을 독신으로 보내며 지리산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어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그 뒷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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