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증시랑 천유가 질문하는 글
[그 잘못을 설명하고, 법의 요체를 공경히 청함]
1-01
제(開 : 증시랑의 이름)가 예전에 장사에 있을 때 원오극근 선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원오 노사께서 스님을 언급하시며 늘그막에 서로 만났는데, 얻은 바가 매우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번번이 떠올린지도 이제 8년이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친견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항상 한탄하면서 그저 우러르는 마음만 간절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발심하여 선지식을 참례하고 이 본분사를 여쭈어 왔는데, 약관의 나이가 된 이후로는 혼인하고 벼슬하며 일에 매여 공부가 순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렁저렁 지내다보니 이제 나이만 먹어서 들은 것은 없으니, 늘 스스로 부끄러워 한숨만 나옵니다.
1-02
그렇다고 제가 뜻을 세우고 발원한 것이 사실 얕은 지견(智見) 에 있지는 않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겠지만, 깨닫기만 한다면 옛 사람들이 몸소 증득한 곳에 바로 이르러야 크게 쉬는 경지가 되어서 공부가 끝나겠지요. 이런 마음이 일찍이 한 순간도 물러난 적이 없었지만, 공부가 끝내 순일하지 못했음을 스스로도 알고는 있습니다. 의지와 원력은 컸지만 역량은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3
지난날 원오 노스님께 간절히 구하였더니, 노스님께서는 여섯 종류의 법어를 보이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본분사를 바로 보이셨고, 이후에는 조주 선사의 방하착과 운문 선사의 수미산 화두 인연을 들어서 미련하게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항상 스스로 거각하고 오래오래 하다보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노파심이 간절하게 이처럼 상세하게 알려주셨지만, 우둔하여 어리석음이 몹시 심하니 어찌하겠습니까.
1-04
이제 다행히 집안의 번다한 인연들이 모두 마무리하고 한적하게 지내니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사무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처음 발심한 뜻을 이루고자 하니,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입니다.
일생의 잘못과 허물은 제가 하나하나 말씀드린 것과 같으니, 반드시 이 마음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꼼꼼하게 이끌어 경책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어떻게 공부를 이어가야 다른 길로 가지 않고 곧바로 본지풍광에 서로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잘못과 허물이 적지 않겠지만, 그저 정성을 바칠 뿐입니다. 스스로 숨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여쭙니다.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①
[허깨비임을 알라. 또한 큰 서원을 일으켜라]
서한을 받아보니 어려서부터 벼슬할 때까지 여러 선지식께 찾아뵈었지만, 중간에 과거 보고 혼인하고 벼슬하느라 다시 잘못된 지각과 나쁜 습관만 늘고 공부가 순일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큰 허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세간사가 무상하니 가지가지 허망한 허깨비임을 사무치게 알아서 즐거울 것 없기에 오롯한 마음으로 일대사인연을 참구하려 하니 노승의 마음도 매우 흡족합니다.
그렇지만 선비가 되었으니 녹봉을 바라보며 생활을 해나가야 하니, 과거 보고 혼인하고 벼슬을 사는 것도 세간에서 피할 수는 없는 것인지라 공의 허물은 아닙니다. 작은 허물 때문에 매우 걱정하시는데, 광겁의 지난생 동안에 참된 선지식을 받들어 섬겨서 반야종지를 훈습함이 깊지 않았다면 어찌 그러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 말한 대죄는 성현들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허망한 환이라서 궁극적 진리가 아닌 줄을 알고, 출세간의 문으로 마음을 돌려 반야지의 감로수로 더러움을 씻어 없애고 청정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부터 일도양단하여 다시는 상속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과거를 생각하고, 뒷일을 떠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허망한 환이라 말한다면, 지을 때도 환이고 받을 때도 환이며, 지각할 때도 환이며, 헤매고 넘어질 때에도 환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다 환입니다. 오늘 허물을 알았다면 환의 약으로 다시 환병을 다스려야 합니다. 병이 낫고 [환이라는] 약까지 없어지면, 예전과 같아서 옛날의 그 사람일 뿐입니다. 만약 특별한 사람이 있거나 법이 있다면, 이것은 삿된 마구니와 외도의 견해입니다.
[증시랑] 공이 그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를 벼랑 끝에서 나아가듯 하되, 때때로 고요함이 지극할 때가 있는데, 허망하게 수미산이나 방하착 등의 두 고칙을 끝내야 함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그저 당장 딛고 선 발 아래에서부터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나가야지, 이미 지난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지거나 두려워하면 바로 도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 앞에서 큰 서원으로 발원하십시오.
“원컨대 이 마음 굳건하여 길이 퇴전하지 않고, 부처님 가피력에 의지하여 선지식을 만나 한 마디에 생사를 몰록 없애고, 무상정등정각을 깨달을지니, 부처님의 혜명을 상속받아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오래 지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도리를 깨닫지 못할 리 없습니다.
[그대는] 본 적 없습니까?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한 이후로 점차 남쪽으로 유행하였는데, 110개의 성을 지나면서 53선지식을 참배하였습니다. 끝에 가서는 미륵보살이 손가락 튕기는 사이, 이전의 선지식이 가르쳐주신 법문을 몰록 잊어버리고 다시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따라 문수보살을 뵙고자 합니다. 이에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멀리 펼쳐 110유순을 지나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십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선남자여. 믿음이 없다면 마음이 졸렬해지고 근심과 후회가 있어 공덕행을 갖출 수 없느니라. 애써 정진하지 않게 되고 선근 하나에 마음이 머무르게 되니, 적은 공덕으로 만족하다 여기게 되느니라. 그리하여 교묘한 방편으로 행원을 일으키지 못하고, 선지식의 보호도 받지 못하며, 이와 같은 법성과 이와 같은 본래 지취와 이와 같은 법문과 이와 같은 행법과 이와 같은 경계를 알지 못하느니라. 두루하는 지혜라든가 온갖 종류 지혜라든가 바닥 밑까지 다다른다든가 파해쳐 모조리 안다든가 들어간다든가 해탈한다든가 분별한다든가 증득해 안다든가 하는 것들 모두를 다 해낼 수 없느니라.”
문수보살이 이같이 알려주시자 선재 동자는 즉시 아승지의 한량없는 법문을 성취하여 무량한 대지혜광명을 구족하게 됩니다. 보현문에 들어가 일념 중에 삼천대천세계 미진수의 모든 선지식을 다 친견하고, 가까이 공경히 받들어 섬기고, 가르침을 받아 수행하여 망념 없는 지혜의 장엄장 해탈을 얻습니다. 보현보살의 모공의 국토에 이르러 모공 하나에서 한 걸음 내딛어 말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부처님 세계를 지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현보살과 같아지고 모든 부처님, 부처님 국토, 부처님 수행, 부처님의 해탈자재하심과 모두 같아지니, 조금도 다르지 않고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때 비로소 삼독을 삼취정계로 돌리며, 육식을 육신통으로 돌리며, 번뇌를 보리로 돌리며, 무명(어리석음)을 지혜로 돌리게 됩니다. 위와 같은 그런 일들은 단지 자신의 마지막 일념이 진실한 데에 달려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여러 선지식을 통해 증득한 삼매까지 단박에 잊을 수 있었는데, 하물며 무시 이래로 허망하고 거짓된 악업의 습기이겠습니까? 만약 이전에 지었던 죄업이 진실하다면, 지금 바로 눈앞 경계도 모두 실재로 존재하며, 나아가 관직이나 부귀나 은애도 모두 다 실재할 것입니다. 이것들이 실재한다고 치면, 지옥과 천당도 역시 실재하고, 번뇌와 무명도 실재하며, 업을 짓는 자도, 과보를 받는 자도 실재하게 됩니다. 증득되는 법까지 실재하게 되니, 만약 여러 가지 견해들을 만들어 내면,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다시는 아무도 부처님 가르침[佛乘]에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고 보니, 공이 서신을 보낼 때 제불보살님께 향을 사르고 이곳 암자를 향해 멀리서나마 예를 올린 후에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공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지극한 간절함이 그러하고, 서로 떨어져 있음이 매우 멀지는 않음에도 여지껏 마주하고 대화는 못하고 있습니다.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끄적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렇게 어지러워졌습니다. 번다하기는 할지라도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 말씀 한 글자 함부로 속이지 않았으니, 공을 속였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신을 속인 것이 될 뿐입니다.
또 기억해보면, 선재동자가 최적정 바라문을 만나 성어해탈[誠語解脫]을 얻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불보살님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조금도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지금도 물러나지 않고, 당래에도 물러나지 않아서, 구하는 것이 생기면 이루지 못한 것이 없다” 함은 모두가 정성이 지극함에 미치게 된 까닭입니다.
공이 이미 대나무 의자와 좌복을 도반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선재동자가 최적정 바라문을 친견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저의 편지를 보면서 제불성현 대하듯 멀리서 예를 올린 후에 보낸다 하였습니다. 오직 나, 운문을 믿어서 허락을 바란다 하니, 이것이 정성이 지극함이 대단합니다. 오직 한 마디만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나가기만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틀림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②
[식정을 내려놓고, 선의 종지를 면밀히 참구하라.]
그대가 육신은 부귀에 있으면서도 부귀를 위한다고 공부하는 마음이 꺾이거나 부족하지 않으니, 일찍이 반야지혜를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중도에 이러한 의지를 잊어버리거나, 예리한 근기와 총명함이 장애되고, 얻은 것이 있다고 목전에서 놓아버리며, 그 때문에 고인이 바로 내어주신 지름길에서도 일도양단하여 바로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통은 뛰어난 사대부뿐만 아니라 오래 공부한 구참 수행자들도 그러하여, 생력처에 나아가 공부를 이어 나가기를 기꺼워하지 않고 물러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저 총명한 의식으로 사량계교하며 밖을 향해서만 내달려 구하고 있습니다.
잠깐이라도 선지식이 총명한 의식으로 사량계교 밖에서 보이는 본분사를 위한 양식 같은 가르침을 잠깐 듣고서는 대부분이 어긋나거나 지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로부터 선사들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법이 실재한다고 잘못 생각하기도 하는데, 조주 선사의 방하착이나 운문 선사의 수미산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암두 전활 선사가 말했습니다.
“경계를 물리치는 것이 상근기이며, 경계를 따라가는 것이 하근기이다.”
또 말하였습니다.
“대강의 종지는 한마디를 반드시 알아야 하니, 그 한마디가 무엇인가? 그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는 [꽉 막힌] 때를 바로 그 한마디라 부른다. 정수리에 머문다고도 하고, 마음 둘 곳을 얻었다고도 하며, 역력하다고도 성성하다고도 하며, 시절인연[恁麽時]이라고도 한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일체 시비 분별을 깨부수는 것과 같습니다. 시절인연이 열리자마자 바로 시절인연이 아니어서 이 한마디도 남아 있고, 한마디 아닌 것도 남아 있는 것이 마치 한 덩어리 불과 같습니다. 닿는 순간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데, 한 물건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대부들은 다분히 사량계교를 토굴로 여겨서 한 물건의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공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배가 뒤집히지도 않았는데 먼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몹시 가련한 일입니다.
얼마 전에 강서에 가서 여거인을 만났습니다. 거인은 이 일대사인연에 마음을 둔 지 매우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공에 떨어지거나 사서 걱정하는] 병통이 매우 깊었습니다. 그분이 총명하지 않아서일까 내가 일찍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 거사님이 공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시니, 두려움을 아는 그놈은 ‘공’이겠습니까, ‘공’이 아니겠습니까? 한 번 말해 보십시오.”
여거인이 우두커니 생각하더니 헤아리고 따지다 겨우 대답하려 했습니다. 그때 대번에 ‘악!’ 하는 고함 한 번 질러주었더니 지금까지도 아득히 그놈[巴鼻]을 못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앞에 펼쳐져 있어서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만드는 것이지 다른 일이 간여한 것이 아닙니다.
공도 이와 같이 살피면서 공부를 지어 가며, 날이 가고 달이 가다 보면 자연히 축착합착하고 딱 맞아 떨어질 것입니다. 만약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나 영원히 쉴 수 있는 마음을 내려 한다면, 지금 당장 참구하여 미륵불이 하생하는 날까지 하더라도 깨달을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미욱함만 더할 뿐입니다.
평전보안 선사가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한 광명은 어둡지 않아, 만고에도 빛나는 도리이니, 이 선문에 들어와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또한 옛 어른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마음을 가지고 구할 수 없고, 마음 없이 구할 수도 없다. 언어로 지을 수도 없고, 침묵으로 통할 수도 없다.”
이런 말씀이야말로 진창에 들어가 흙탕물을 뒤집어 써가면서 하신 노파심의 간절한 말씀이건만, 참선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그런가 한번 생각하고는 지나쳐버리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지 자세히 살피지도 않습니다.
만약 근골을 가진 자라면, 들어 보인 것을 언뜻 듣고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금강왕보검을 가지고 한 칼에 이 네 갈래로 뒤엉킨 것을 끊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의 길머리도 끊어지고, 범부와 성인의 길머리도 끊어지고, 사량 계교도 끊어지고, 시비나 득실도 끊어질 것입니다.
당사자의 발아래에서 깨끗하게 발가벗겨지고 붉게 씻겨 내려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속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보지 못했습니까? 예전에 관계화상이 처음 임제의현 선사를 참배하였는데, 임제 선사는 관계화상이 오는 것을 보고 의자에서 내려와 돌연 멱살을 움켜잡았습니다. 관계화상이 바로 말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임제 선사는 관계 화상이 이미 확철한 것을 알고는 곧바로 밀어젖히고는 더 이상 그와 언구로 상량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관계 화상이 어떻게 사량계교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예부터 다행히도 이 같은 본보기가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전혀 일대사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마음만 내고 있습니다.
관계화상이 애초에 한 점이라도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크게 쉬어버리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있었다면, 당시 멱살 잡히면서 바로 깨달음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손발이 묶인 채로 사천하를 돌면서 한 바퀴 끌고 다닌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통 계교하여 안배하는 것이 식정(의식과 감정)이며, 생사를 따라 옮겨 다니는 것도 바로 식정이며, 두려워 허둥대는 것도 역시 식정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참선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러한 병통을 모르고서 그저 그 속에만 앉아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화엄경] 교설에서 “식을 따라서 행하고 지혜는 따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본지풍광의 본래 면목에서 어둡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일시에 내려놓아 사량계교하지 않는다면, 홀연 발을 헛디뎌 콧구멍을 밟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식정이란 것도 바로 진공묘유이니, 따로 증득할 수 있는 지혜도 없습니다. 만약 얻을 것이 따로 있고 깨달을 것이 따로 있다면, 도리어 옳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리석을 때는 동쪽을 일컫어 서쪽이라고 하다가 깨달을 때에 서쪽이 그대로 동쪽이니, 별도의 동쪽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진공의 묘한 지혜는 크나큰 허공과 수명을 나란히 합니다. 다만 저 크나큰 허공 가운데 어느 한 물건이라도 허공을 장애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한 물건도 가로막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허공 속을 오가는 온갖 것을 꺼리지도 않습니다.
이 진공의 묘한 지혜도 역시 그러하여 생과 사, 범부와 성현의 얼룩이 한 점도 생길 수 없습니다. 비록 얼룩이 생길 수 없어도 생과 사, 범부와 성인이 진공의 묘한 지혜 속을 오가는 것을 장애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얻고 보아 확철하면, 바야흐로 이것이 삶에서 벗어나 죽음에 들어가는 대자유를 얻은 사람이며, 비로소 조주 선사의 방하착과 운문 선사의 수미산에서 조금이라도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내려놓지 못한다면, 자! 도리어 수미산 하나를 짊어지고 도처로 행각하다가 눈 밝은 사람을 만나거든 분명하게 들어 보이십시오. 하. 하. 하.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③
[사견에 떨어지지 말고, 활구를 참구하라]
방거사가 말했습니다.
“가진 것을 비우기 바랄 뿐이며, 갖고 있지도 않은 것이 실재한다고 하지 말라.”
이 두 마디만 알게 되면 일생의 참선 공부가 마칠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머리 깎은 외도들은 자신의 안목을 밝히지 못하고 자꾸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면서, 쥐 죽은 듯이 그저 쉬라고 쉬라고 합니다. 만약 이같이 쉬기만 한다면 천불이 세상에 오시더라도 쉬지도 못하거니와 도리어 미욱해질 뿐입니다.
또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인연 따라 가지면서 식정을 잊고 묵묵히 비추라고 합니다. 오며 가며 비추고, 오며 가며 챙겨도 도리어 더 미욱해져서 깨달을 기약도 없습니다.
조사의 방편들은 자주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잘못 가리켜 보이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헛되이 살다 헛되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이 일을 관여하지 말고 단지 이렇게 쉬어가라고만 합니다. 쉬게 되는 때가 오면 알아차릴 식정도 일어나지 않고, 그러한 때가 되어 아득하여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성역력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다시금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해로운 독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나 운문은 평소에 그런 무리들을 공부인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목도 밝지 않고 단지 책자에 적힌 말들만을 가지고 틀에 따라 남들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가르쳐 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들을 믿는다면 영겁토록 참구하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도 평소에 사람들에게 좌선을 가르치면서 되도록 고요한 곳에서 공부하라고는 합니다만, 이것은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렇게 지시한 적은 없었습니다.
보지 않았습니까? 황벽 선사께서 이르시기를,
“우리의 이 선종은 예부터 사자상승하여 스승과 제자 간에 법이 전해져 온 이래로 일찍이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알음알이를 구하라고 한 적은 없었고, 그저 도를 배워라고 말할 뿐이니라.” 하셨습니다.
일찍부터 이것이 사람들을 제접하는 언사이지만, 도라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식정이 도를 배우는 데 치우치면 도리어 도에서 헤매게 됩니다.
머무는 곳이 없는 도를 대승심이라 이름합니다. 이 마음은 안팎이나 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고, 진실로 규정할 만한 것이 없는데, 제일 먼저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지금은 식정으로 사량분별하는 곳에서 도를 닦고 있지만, 사량분별이 다하면 마음에 방소란 없습니다. 이러한 도는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알지 못하고 식정에서 헤매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에 여러 부처님께서 나투시어 이러한 본분사에 대해 설파하신 것입니다. 그대들이 깨닫지 못할까 염려하여 방편을 세워 ‘도’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름에 갇혀서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눈먼 이들이 사람들을 잘못 가리키는 것은 모두 생선 눈알을 밝은 구슬로 알아 이름에 갇혀 알음알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항상 놓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고수하여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쉬고 또 쉬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생각을 잊고 공적인 것을 고수하여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쉬어서 감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마치 흙이나 나무, 기왓장, 돌덩이 같아지는데, 이렇게 되어도 어둡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역시 잘못 아는 것이니, 편의상 묶어주는 말에서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연 따라 비추어 살필 것을 가르치면서 나쁜 지각이 현전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으니, 이런 것 역시 髑髏情識에 달라붙어서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다만 탁 내려놓고 자재함에 맡기고 일어나는 마음과 흔들리는 생각들을 다스리지 말라 하며, 생각이 일어나거나 멸하거나 본래 실체가 없는데 집착하면 실재하게 되어 생사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것 역시 자연히 본체를 고수하여 궁극의 법으로 삼아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위와 같은 모든 병통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눈먼 스승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천유공께서는 이미 청정하게 살아오셨고, 진실하고 견고한 한 조각 화두가 있어 조심을 향하고 있으니, 공부가 순일한지 순일하지 않은지 상관하지 말고, 저 옛 조사님들의 말씀 위에 탑을 쌓듯이 한층 한층 올리지만 마십시오. 공부를 잘못하여 깨달을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 마음을 한 곳에 두기만 하면 깨닫지 못할 리 없습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축착합착하여, 그 자리에서 돌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허물이 있습니까?”
“수미산”
이라 하였습니다.
“한 물건도 온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려놓아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의심을 깨뜨리지 않거든, 다만 여기에서 참구할 뿐, 다시 군더더기 가지나 이파리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만약 이 운문을 믿는다고 한다면, 다만 이렇게 해서 참구할 뿐, 남들에게 보여줄 불법은 따로 없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마음 가는 대로 강북, 강남으로 물어보기도 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 보십시오.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④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읽고 나니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는 일상의] 사위 가운데 [언제나 공부가] 끊어지는 틈이 없어서, 공무에 어지러워지지 않고 급한 시류에도 언제나 스스로를 맹렬히 살피니 전혀 방일하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도심은 갈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하니, 이 촌사람의 마음도 흡족합니다. 그러나 세간의 티끌 번뇌는 불길처럼 치성하니, 어느 때에 이 일을 마치겠습니까? 시끄러움 속에서 바르게 머무르고, 대나무 의좌와 포단 위에서의 본분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마음을 지극히 고요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바로 소란한 경계에서 쓰기 위함입니다. 만약 소란한 경계에 있으면서도 힘을 얻지 못하면, 고요한 데 있으면서도 공부를 지어간 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받아보니, 전에 인연이 순일하지 못해서 오늘 이런 과보를 받는다고 탄식하고 있겠지만, 그 말만큼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감히 들은 명을 수긍할 수 없다.] 만약 이렇게 [공부하는] 생각이 움직이면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옛 어른이 말씀하셨습니다.
“흐름을 따라 자성을 깨달으면, 기쁨도 근심도 없다.”
정명 거사도 말했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높게 솟은 언덕에서는 연꽃이 피지 못하고, 낮게 젖은 더러운 진흙에서야 연꽃을 피워낸다.”
보리 달마, 오랑캐 출신 어른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여는 자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일체 만사 모든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인연을 따라 감응하게 되어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언제나 머무는 그곳이 보리좌이라”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만약 고요한 처소를 옳다고 하고, 어지러운 처소를 그르다고 하면, 이것은 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면서 실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생멸을 떠나서는 적멸도 구할 수 없습니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소란함을 싫어할 때에 그야말로 힘을 써야 합니다. 소란함 속에서도 곧장 고요한 때의 소식을 만나 뒤집어지면, 그 힘은 대나무 의자와 포단 위에서보다 천만억 배는 더 수승할 것입니다.
그저 새겨 들으십시오. 결코 착오가 없습니다.
또 보니 방거사의 두 구절을 행주좌와에서 항상 좌우명[箴銘]으로 삼는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소란할 때에 꺼리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낸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힐 뿐입니다. 한 생각 움찔할 때 방거사의 두 구절로 일깨우기만 하면, 열이 오를 때 해열제[淸涼散]를 복용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공이 확고한 믿음을 갖추었으니 그야말로 대지혜인이신데, 고요한 가운데 공부를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비로소 이런 이야기들을 굳이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할 수 없겠지요. 업식이 아득한 증상만의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또 다른 악업을 보태어 짐 지우게 될 것입니다.
선문의 갖가지 병통은 지난번 편지에서 이미 말씀드렸는데, 자세히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⑤
[방편으로 도에 들어가는 바른 방법과 자나 깨나 일여함을 드러내다]
말씀을 보니 “밖으로 모든 반연를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림지 않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한 것은 방편문입니다. “방편문을 빌려 도에 들어가는 간다면 괜찮지만, 방편을 고수하면서 버리지 않으면 병통이 된다.” 함은 참으로 말씀과 같습니다. 산승이 그것을 읽고 뜰 듯이 지극히 환희로운 기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러 선방에서 먹통 같은 무리들은 방편만 고수하면서 버리지 않고 진실한 방법으로 삼아 남들에게 가리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 눈을 멀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산승이 바르고 삿된 것을 구분하는 <변사정설>을 지어 그런 일들을 돕는 것입니다. 최근 마구니들이 강성한데 법은 약하여, 맑음으로써 맑음에 들어가 합치하는 것을 구경으로 삼는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으며,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 것을 종사로 여기는 이도 좁쌀처럼 많습니다.
산승은 요사이 납자들에게 이 두 가지를 제시해 주었는데, 정녕 보내온 서신에서 말한 것과 한 글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거사님이 찰나찰나 잠시도 끊어짐 없이 마음을 반야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으면, 예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여러 다른 방편들을 환하게 밝힐 수 없습니다. 공께서 이미 칼자루를 잡았습니다. 이미 칼자루가 손 안에 있는데, 어째서 방편문을 버리고 도에 들지 못할까 염려하십니까?
단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되, 경전의 가르침과 옛 어른들의 어록과 갖가지 차별 언구들을 보아도 그저 이같이 공부해 나가시고, 수미산이나 방하착과 같은 구자무불성의 화두, 죽비자 화두, 일급진서강수 화두, 정전백수자 화두 역시 이같이 공부해 나가십시오. 다시 별도의 다른 견해를 내어서는 안 되며, 따로 도리를 구한다거나 별도의 기량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공께서 [번뇌의 생사윤회하는 고통 바다의] 급류의 일상에서 순간순간 스스로를 이같이 일깨우고도 도업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부디 기억하십시오.
받아보니, “밤중 꿈에서 향을 사르고 산승의 선실에 들어오니 매우 한가로웠다”고 하셨는데, 절대 꿈에서만 일어난 일로 알지 마시고, 진짜 선실에 들어온 것이 맞다고 알아야 합니다.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습니다.
“꿈속에 육바라밀을 설하니, 깨어 있을 때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수보리가 말했습니다.
“그 뜻은 의미심장하여 내가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법회에 계신 미륵대사에게 그대가 가서 그것을 물어보십시오.”
(어허,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설두 선사는 말했습니다.
“그 당시, 내버려 두지 말고 뒤에서 한 대 때려주어 ‘누구를 미륵이라 하는가, 누구를 미륵이라 하는가?’ 물었더라면 곧장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쯔쯧, 설두 역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증시랑 공이 한밤 꿈에 운문의 선실로 들어갔다는데, 알려주십시오. 깨달은 때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물으면, 이에 운문이 그를 향해 말할 것입니다.
“선실에 들어간 이는 누구이며, 선실에 들어갔다고 하는 이는 누구이며, 꿈을 꾼 이는 누구이며, 꿈을 꿨다고 말하는 이는 누구이며, 꿈속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이며, 진정으로 선실에 들어간 것이라고 하는 이는 누구인가?”
(쯧쯧, 이 역시 허물이 적지 않구나)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⑥
[빨리 구하려 하지 말고 그저 반야지혜를 닦을 것을 권하다]
보내온 서신을 자세히 몇 번 읽고 보니, 철석같은 마음을 갖추고 결정의 뜻을 세워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렇게만 지속해 나가면 납월 삼십일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 염라대왕과 서로 겨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정수리의 심안을 활짝 열고 금강왕보검을 움켜쥐고 비로자나불의 정수리 위에 앉는다는 둥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산승은 일찍이 외도의 친우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선비들은 빠르게 구하려고만 하고, 잘못 깨닫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말하기를, ‘일 없이 인연들을 줄이고 고요히 앉아 체득하면서 참구하는 것은 헛되이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다. 경전 몇 권이라도 들여다보고 소리 내어 염불이라도 하든가, 부처님 전에 다양하게 예배하면서 평생에 지은 허물을 참회하여 염라대왕 손에 들린 철퇴를 면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 도가의 무리들은 망상심만으로 태양을 생각하고 달과 별에 정통하며 조을을 삼키고 기만 먹으면서도 몸을 유지할 수 있고, 세상에 살면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 마음을 이렇게 염하도록 돌이켜 반야에만 오롯이 두는 것이겠습니까? [도가의 수행법이야말로 시간 낭비라 할 수 있으며, 참선이 오히려 검증된 수행입니다.]
앞선 성인들께서도 명명백백히 말씀하셨습니다.
“파리가 어디에나 머물 수 있다 해도 화염 위에서는 머물 수 없는 것처럼, 중생들도 그러하여 어디서나 인연을 맺을 수 있어도 반야지혜 위에서는 인연을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찰나찰나 초발심에서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식과 마음이 세간의 번잡함과 인연 맺는 것을 붙잡아 반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면, 비록 금생에 확철하지 못하더라도 임종 시에는 악업에 끌려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날 때는 금생의 원력을 따라 반드시 반야에 머물러 현세 성불의 경계에서 노닐 것입니다. 이것은 확정된 것이니, 의심할 수 없습니다.
중생 세계에서 일들은 배우려고 매달리지 않아도 다겁생을 내려오며 무시이래로 훈습되어 익혀왔습니다. 인생의 여로에서도 익숙하고도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데, 일상 어디에서나 그 근원을 만나서 반드시 뽑아버려야 합니다.
세간을 벗어나는 반야의 마음을 배우는 것은 무시이래 [우리가 살아오던 흐름의 세간법을] 위반하는 것이라서, 선지식의 말씀을 언뜻 듣는다고 저절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확고한 뜻을 세웠다면, 그러한 습기들을 우선적으로 몰아내어야 하는데, 출세간법과 세간법 두 가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반야의 자리에서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저 세간의 자리에서는 온갖 마장이나 외도들을 물리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 설은 것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낯설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평소 공부를 해나가는 자리에서 [내달리는 마음의] 손잡이를 꽉 쥐다가 점차 힘이 덜어지는 시절을 깨닫는다면, 그때가 바로 힘을 얻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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