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보각선사서 (상권)
[대지 : 삿된 견해를 배척하고 바른 견해를 보이다]
참선학자 혜연 기록
정지거사 황문창이 거듭 펴내다.
0. 대혜선사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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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는 선주 영국현 사람이며, 성은 혜씨奚氏이다.
모친의 꿈에 신장님이 한 스님을 데려왔는데, 뺨이 거무스레하고 코가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한다. 침실에 오기에 사는 곳을 물으니, 북악이라 대답했다. 깨어나 보니 태기가 있었는데, 태어나던 날이 되자 백광이 방 밖으로 뻗어나오니, 고을 전체가 신이함에 놀라워 했다. 그리고 바로 남송 철종 원우 4년(1089) 11월 10일 사시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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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휘는 종고이니, 13세가 되어 향교에 들어가 동문수학하는 친구들과 놀다가 벼루를 집어던졌는데, 잘못해서 선생님의 모자를 맞혔다. 300냥으로 물어내고는 돌아와 말했다.
“세간의 책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탐구하는 것보다 나을까?”
16세에 동산 혜운원의 혜제 대사에게 가서 출가하였고, 17세에 삭발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19세에 여러 곳을 다니다가 태평주의 은적암에 이르렀다. 암주가 매우 두텁게 맞이하며 말하였다.
“어젯밤 꿈에 가람 신중님이 부탁하며 말하기를 ‘내일 운봉열 선사가 절에 당도할 것이다’하였는니, 그대가 맞습니까?”
그러면서 운봉열 선사 어록을 보여주었다. 선사가 한번 보고 외워버리니, 이때부터 사람들은 운봉열 선사의 후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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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조동종의 스승에게 참학하여 그 선지를 모두 얻었지만, 선사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21세(휘종 대관 3년 기축, 1109)에 담당무준 담당문준(湛堂文準, 1061~1115, 북송)
임제종 황룡파의 진정극문(眞淨克文, 1025~1104) 선사의 법을 이었다. 남악의 13세 법손으로, 늑담문준, 보봉문준이라고도 불린다. 강서성 예장의 운암사에서 법을 펼치다가, 강서성 융흥부의 늑담보봉사로 옮겼다. <담당준화상어요湛堂準和尙語要>가 남아있다.
화상을 참례하여 7년을 시봉하며 크게 깨달된 바가 있었다. 담당무준 화상이 임종에 들면서 원오극근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 남송)
임제종 양기파의 오조법연(五祖 法演 : 1024~1104)의 적손으로 이름이 극근이며, 법명은 불과(佛果)이다. 혜근불감, 청원불안과 함께 법연삼걸(法演三傑)·법연삼불(法演三佛)로 꼽힌다.
어릴적 머리 모양이 물소처럼 생겼으며 묘적원의 자성에게 출가하여 문희 민행(文熙 敏行)을 따라 경론을 배웠다. 이후 오조법연 문하에서 선을 배우는데, 잡역만 도맡아 하면서 법을 물어도 대꾸없이 매질만 당하기 일쑤였다. 이후 스승을 하직하였다가 10년이 지난후에야 방편이었음을 깨닫고 스승에게 돌아와 용맹정진 끝에 인가를 받았다.
촉땅으로 가서 세수 73세, 법랍55세에 입적하니, 남송의 고종황제가 진각(眞覺) 선사 시호를 내렸다.
저술로는 설두중현이 쓴 <송고백칙>에 수시와 착어, 평창을 덧붙여 새롭게 편찬한 <벽암록>이 있고, <원오불과선사어록圜悟佛果禪師語錄>,<원오선사심요圜悟禪師心要>가 전해진다.
임종게 : 아무 것도 한 것 없어 게송 남길 필요 없구나. 오직 인연에 따를 뿐 보중하고 보중하시게. [已徹無功 不必留頌 聊爾應祿 珍重珍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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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는 37세에(선화 7년 을사, 1125)에야 비로소 변경 천녕사에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배하였는데, 겨우 40일을 지냈는데, 하루는 원오극근 선사가 법회를 열고 다음을 들어보였다.
“어느 스님이 운문 선사에게 여쭈었다. ‘모든 부처님들이 출현하신 곳은 어떠합니까?’ 이에 운문 선사는 ‘동산의 물이 위로 흐른다.’고 이르셨지만, 나라면 그렇지 않고 다르게 말할 것이다. ‘향기로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 모퉁이 청량하다’하리라.”
대혜종고 선사가 그 말을 듣고 홀연 앞 뒤의 경계가 끊어졌다. 원오 선사는 대혜 선사로 하여금 택목당에 머물며 시자의 소임은 조금도 하지말고 보임保任에 전념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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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원오극근 선사가 선실에서 어느 납승에게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마치 등나무 넝쿨이 나무를 의지한 것 같다는 화두’를 묻는 것을 들었다.
대혜 선사가 원오극근 선사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화상께서 오조법연 스님 회상에 있을 당시에 이 화두를 여쭌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오 선사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자 대혜종고 선사가 말했다.
“화상께서 대중들의 물음에 이미 답해주셨는데, 지금 말씀하신다고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원오 선사가 부득이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오조법연 선사께 ‘유구와 무구가 마치 등나무 덩쿨이 나무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함은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여쭈었다. 오조법연 선사께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고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여쭈었는데, ‘나무가 쓰러지고 등나무가 말라버리는 때가되면 어떻게 합니까?’ 오조 선사께서 ‘서로 따라온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혜 선사가 그 자리에서 활연대오하고는 말했다.
“제가 알겠습니다.”
원오 선사가 여러 가지 인연들을 골고루 제시하면서 대혜 선사에게 물으니 모두 응답함에 막힘이 없었다. 원오극근 선사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너를 속이지 않겠다.”
그리고나서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선사에게 부촉하고 기록하게 하니, 선사는 비로소 원오 선사의 법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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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되어, 원오 선사가 촉 땅으로 돌아가시니. 대혜 선사도 이에 종적을 감추고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훗날 호구사로 건너가 화엄경을 열람하다가 제칠지보살이 무생법인을 증득한다는 곳에서, 홀연히 담당무준 화상이 제시했던 ‘앙굴마라가 탁발하다가 출산하는 부인을 구한 인연’을 통연히 남김없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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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에(소흥 7년, 1137)에 황제의 명으로 쌍경사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원오 선사의 부음 소식을 받았다. 대혜 선사는 직접 조문을 지어 제를 올리고, 바로 저녁 소참법문에서 들어보였다.
“납승이 장사경잠 선사께 물었습니다. ‘남전보원 선사께서 입적하신 뒤에 어디로 가십니까?’ 장사경잠 선사 장사경잠(長沙景岑, ?~868, 당)
남전보원의 법제자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유행하며 생을 마쳤다고 한다. 젊었을 적에는 기백이 대단했는데, 선기가 매우 준엄한 호랑이 같다하여 잠대충(岑大蟲)이라 불렸다.
경잠선사가 하루는 앙산혜적선사와 함께 달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앙산선사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구나"
그러자 경잠이 말하기를 "너를 고용해서 사용해야겠구나."
이에 앙산선사가 "너는 어떻게 사용할 예정이냐?" 하니 경잠선사는바로 앙산선사를넘어뜨려 밟아버렸다.
그러자 앙산선사가말하기를 "악! 한 마리의 호랑이로구나."
이때부터 사람들은 경잠선사를‘잠대충’이라 불렀다.
<조당집>에는 장사경잠 선사의 무정설법의 일화도 전한다. 어떤 스님이 경잠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무정설법입니까?"
그러자 경잠 선사가 동쪽의 노주(露柱)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스님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듣습니까?"
"저 스님이 들을 것이니라."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다라니입니까?"
그러자 경잠 선사가 대답하기를 "대덕도 물은 바 없고, 노승도 대답한 바 없느니라."
"어떤 사람이 읽습니까?"
선사가 의자의 왼쪽 다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대사가 읽을 줄 아느니라."
"어떤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
선사가 다시 의자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스님이 들을 수 있느니라."
대덕이 다시 물었다.
"저는 어째서 듣지 못합니까?"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참된 읽음은 소리가 없고, 참된 들음은 들음이 없다'하였느니라.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시전신[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
백척 높은 장대끝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바로 한몸이 된다.
이 역시 장사경잠 선사의 명언이다.
선사께서 말씀하였다. ‘동쪽 마을에서 당나귀가 되고, 서쪽 마을에서는 말이 되겠지.’ 스님이 묻기를 ‘그 뜻하는 지취가 무엇입니까?’하자 장사경잠 선사가 답하셨다. ‘올라타고자 하면 바로 올라타고 내리고자 하면 바로 내린다.’ 만약에 나 경산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니, 어떤 납승이 ‘원오 선사께서 입적하시고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다면 다르게 말하리니, ‘대아비지옥을 향한다’할 것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배고프면 구리 먹고, 목마르면 쇳물 마신다’고 하리라. 누군가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물으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니, 어째서 구할 수 없다고 하는가. 이것이 바로 이 늙은이가 평소 숭늉에 밥 말아 먹는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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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5월에(소흥 11년, 1141) 간신인 재상 진회가 선사를 장구성의 일당이라 하여 법의와 승적을 없애도록 주청 올렸고, 형주로 내쫓겨 15년을 지냈다.
68세 10월에(소흥 26, 1156) 황제의 명으로 매양으로 옮겼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선사로써 모습을 회복하고 풀려나 돌아왔으며, 11월에 황제의 명으로 아육왕사에 머물렀다.
71세에(소흥 28년, 1159년)에 교지를 내려 선사로 하여금 다시 경산사에 머물게 하니, 원오극근 선사의 종지가 널리 퍼졌다. 수행과 법력이 치성하여 당대에 으뜸이었으니, 대중은 이천여명에 이르렀다.
73세 봄에(고종 31년, 1161) 봄에 명월당으로 물러나 기거하였는데, 이듬해 주상이 호를 내려 ‘대혜 선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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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효종 융흥 원년, 1163), 명월당에 머무르던 어느 날 저녁, 대중들은 별 하나가 절 서쪽으로 유성처럼 밝게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선사가 갑자기 질병의 조짐을 보이더니 8월 9일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일 가련다.”
그날 밤 오경새벽(오전3시~5시)에 손수 황제에게 올리는 유표를 쓰고, 아울러 뒷일을 부촉하였다.
요현이라는 스님이 게송을 청했다.
[선사는 큰 소리로 말했다.
“게송이 없으면 죽지도 못하겠구나.”]
선사가 큼지막하게 쓰면서 말했다.
“산다는 건 이러하고 죽는 것도 이러한데, 게송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무슨 번뇌인고?”
편안하게 가시니, 세수 75세요, 법랍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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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의 애통함이 그지 없으시니, 시호를 내려 ‘보각’이라 하고, 탑호는 ‘보광’이라 하였다.
오늘날 살아계실 적 호와 돌아가신 뒤의 시호를 들어서 ‘대혜보각’이라 하는 것은 남악회양 선사의 호 역시 ‘대혜’이기에 구분하기 위한 까닭이다. 어록은 80권이 있는데, 대장경에서 유통되고 있으며, 법을 이은 사람은 8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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