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의 분별(1) ―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그렇다면 어떤 법이 대법에서 선택된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로 인해 부처님은 대법을 설하셨다고 전해집니다'라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존재합니다. 도제(道諦)를 제외한 나머지 유위법은 번뇌가 증가하기 때문에 유루라고 불립니다.
무루는 도제와 함께 세 가지 무위를 포함합니다. 여기서 허공은 장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택멸(擇滅)은 이계(離繫)와 관련이 있으며, 각기 다른 계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땅히 생겨나야 할 법이 장애가 된다면, 비택멸을 얻게 됩니다.
모든 법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두 가지 종류, 즉 유루와 무루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루법은 도제를 제외한 유위법을 의미하며, 그 이유는 모든 누(漏)가 동등하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멸제와 도제와의 관계에서는 누가 생겨나지만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유루가 아닙니다.
무루는 도성제(道聖諦)와 세 가지 무위를 의미합니다. 세 가지 무위는 허공과 두 가지 멸(택멸과 비택멸)입니다. 이러한 무위와 도성제를 무루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누가 증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공은 장애가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색이 그 안에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택멸은 유루법의 계박을 멀리 떠나 해탈을 증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혜(慧)의 차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유루법이 동일하게 택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계박되는 것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견고소단의 번뇌를 멸할 때 모든 번뇌를 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대치도를 닦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떤 이유로 멸에는 동류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을까요? 멸에는 그 자체 동류인(同類因)의 의미가 없으며, 다른 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은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동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서는 택멸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생겨날 법을 영원히 방해하여 비택멸을 얻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의 법이 생겨나는 것을 영원히 방해함으로써 얻는 멸로, 앞서 언급한 택멸과는 다르기 때문에 비택멸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비택멸의 획득은 [혜의] 간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연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眼)과 의(意)가 하나의 색에 집중할 때, 다른 색이나 성, 향, 미, 촉 등은 과거로 떨어져 나가게 되며, 이러한 경계를 반연하는 5식신(識身) 등은 미래에 생겨날 수 없게 됩니다. 즉, 이러한 5식신은 과거의 경계를 반연할 수 없기 때문에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아 비택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법의 멸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서는 4구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제법은 오로지 택멸만을 획득하며, 이는 과거와 현재에 생겨난 법입니다. 또 어떤 제법은 오로지 비택멸만을 획득하며, 이는 불생법이면서 무루와 유위법입니다. 또한 어떤 제법은 두 가지 멸을 함께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불생의 온갖 유루법입니다. 반면, 어떤 제법은 두 가지 멸을 함께 획득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과거와 현재에 생겨난 온갖 무루입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종류의 무위에 대해 이미 논의하였습니다. 앞서 '도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유루라고 한다'고 언급했는데, 유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모든 유위의 법은 색 등의 5온(蘊)으로, 세로(世路), 언의(言依), 유리(有離), 유사(有事) 등으로도 불립니다.
'색 등의 5온'은 색온(色蘊)에서 시작하여 식온(識蘊)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다섯 가지 법은 모두 유위에 속하며, 모두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법도 하나의 연(緣)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미래의 법도 방해받지 않으며, 이는 젖과 땔감과 같은 성질을 지닙니다.
이러한 유위법은 '세로(世路, adhvan)'라고도 불리며, 이미 작용하였고 현재 작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작용할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무상(無常)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의(言依, kathavastu)'라는 용어는 말[語言]을 의미하며, 이러한 말의 의미는 명사적 단어와 함께하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언의는 모든 유위제법을 포함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품류족론』에서 언급된 내용과 모순될 것입니다.
또한 유위를 '유리(有離, sani sara)'라고도 하며, 여기서 '리(離)'는 영원히 떠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열반을 나타냅니다. 모든 유위법은 이러한 '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명명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위를 '유사(有事, savastuka)'라고도 부르며, 이는 원인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해준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명칭들은 유위법을 구분짓는 요소들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유위법 중 하나인 '유루'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유루는 '취온'이라고도 불리며, '유쟁'이라는 명칭으로도 언급됩니다. 또한 고(苦), 집(集), 세간(世間), 견처(見處), 3유(有) 등으로도 표현됩니다.
이제 취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온'이라고 불리는 것 중에는 단순히 '온'일 뿐 취온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루의 행(무루온)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번뇌는 '취'라고 불리며, 유루의 온은 취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명명됩니다. 이는 마치 풀이나 겨에서 생겨난 불을 '초강화'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합니다. 또한 유루의 온은 취에 속하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불리며, 이는 신하가 왕에 속한 것을 '제왕의 신하'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유루의 온은 취를 낳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불리며, 이는 꽃이나 과실을 낳는 나무를 '화과수'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유루법은 '유쟁'이라고도 불리며, 번뇌는 '쟁'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선한 품성을 자극하여 동요하게 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유루법에는 이러한 '쟁'이 증가하기 때문에 '유쟁'이라고 명명됩니다.
또한 유루법은 '고'라고도 불리며, 이는 성심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괴로움을 초래하는 원인입니다. '세간'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생, 주, 이, 멸의 네 가지 상에 의해 훼손되고, 성도에 의해 대치되는 것입니다. '견처'라고도 불리며, 이는 견이 거기에 머물고 번뇌를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3유'라고도 불리며, 이는 유루법이 존재의 원인과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명칭들은 유루법을 설명하는 데 있어 그 의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색 등의 5온을 유위법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색온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색은 오로지 5근과 5경, 그리고 무표로 구성됩니다. 5근은 안(눈), 이(귀), 비(코), 설(혀), 신(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경은 색, 성, 향, 미, 촉으로 구성됩니다. '무표'는 무표색을 의미하며, 이와 같은 요소들에 기반하여 색온이라는 명칭이 설정되었습니다.
이제 5근의 특성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5근은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을 의미하며, 이는 앞서 언급한 색 등의 5경에 대한 인식을 나타냅니다.
이 텍스트는 불교 철학의 5근과 5경에 대한 설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5근은 안, 이, 비, 설, 신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의미하며, 이들은 각각의 인식의 기초가 됩니다. 또한, 5경은 색, 소리, 맛, 향, 촉의 다섯 가지 감각적 경험을 설명합니다. 색은 현색과 형색으로 나뉘며, 각각의 세부 사항이 언급됩니다. 예를 들어, 현색은 청, 황, 적, 백의 네 가지로 나뉘고, 형색은 다양한 형태로 구분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불교 경전에서의 설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5경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겠습니다. 색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소리는 여덟 가지, 맛은 여섯 가지, 향은 네 가지, 촉은 열한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분류는 불교 철학의 깊이를 보여주며, 각 감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불교의 감각적 경험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의 실체 안에서 두 가지가 모두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나의 실체 내에 현상과 형상의 두 가지 색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식론적 의미에서의 유지(有智義)이지,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유경(有境義)은 아닙니다. (비바사사의 답변) 만약 그렇다면 신표업에서도 현상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표업 역시 현상과 형상의 두 가지 색을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논주 세친의 평석) 색처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한 바 있습니다.
이제 성처(聲處)에 대해 논의할 차례입니다. 소리는 여덟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유집수(有執受)와 무집수(無執受)라는 두 가지 대종을 바탕으로 하며, 유정명(有情名)과 비유정명(非有情名)의 구분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뉘고, 다시 가의(可意)와 불가의(不可意)로 나누어 여덟 가지가 됩니다.
유집수 대종에 해당하는 소리는 말이나 손 등으로 발성되는 음성을 의미하며, 무집수 대종에 해당하는 소리는 바람, 숲, 강 등에서 발생하는 음성을 말합니다. 유정명의 소리는 어표업(語表業)을 포함하며, 그 외의 소리는 비유정명의 소리에 해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부 소리는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 모두에 해당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바사사들은 하나의 현색 극미가 내외의 두 가지 종류의 사대소조(四大所造)로 인정하지 않듯이, 소리도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처에 대한 논의는 여기까지 마쳤습니다. 이제 미처(味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맛은 여섯 가지 종류로 나뉘며,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쓰고, 담백함의 차별이 있습니다.
미처에 대한 논의도 마쳤습니다. 다음으로 향처(香處)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향은 네 가지 종류로 나뉘며, 호향(好香), 오향(惡香), 등향(等香), 부등향(不等香)의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론에서는 향이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호향, 오향, 평등향이 그것입니다.
향처에 대한 논의도 마쳤습니다. 이제 촉처(觸處)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촉은 열한 가지로 나뉘며, 4대종(大種)과 매끄러운 성질, 거친 성질, 무거운 성질, 가벼운 성질, 차가움, 허기짐, 목마름을 포함합니다. 대종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논의할 예정입니다. 유연함은 '매끄러운 것'으로, 거칠고 강함은 '거친 것'으로, 칭량할 수 있는 것은 '무거운 것'으로, 그 반대는 '가벼운 것'으로 설명됩니다. 또한 따뜻함을 바라는 것은 '차가움'으로, 먹고 싶어하는 것은 '허기짐'으로, 마시고 싶어하는 것은 '목마름'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촉은 원인에 따라 결과의 명칭이 설정된 것이므로, 차가움, 허기짐, 목마름으로 설명됩니다.
제불(諸佛)의 출현은 즐거움이며, 정법(正法)을 연설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승가의 대중이 화합하는 것도 즐거움이며, 모두 함께 수행하고 용맹정진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색계(色界)에서는 허기짐과 목마름의 촉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외의 촉은 존재합니다. 그 세계에서 입는 의복은 특별하여 칭량할 수 없지만, 많이 쌓이면 칭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거움 등도 존재합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차가움의 촉이 소의신을 감손시키지 않더라도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다양한 색처에 대한 논의를 마쳤습니다. 이제 안식(眼識)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텍스트는 다양한 사물의 인식과 그에 따른 구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물에 대한 인식이 발생할 때, 그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으며, 여러 사물이 동시에 인식될 경우에는 구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의 집단이나 숲의 다양한 색상과 형태를 멀리서 관찰할 때와 같은 경우입니다.
또한, 신식(身識)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촉각적 경험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논의하며, 인식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계의 강도에 따라 인식이 달라질 수 있으며, 만약 경계가 동일한 강도를 가진다면, 특정한 인식이 먼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무표색'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며, 이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원인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불교 철학의 깊은 이해를 요구하며, 다양한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분이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표는 대종소조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종(大種)이란 무엇일까요? 이를 게송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대종은 4계(界)로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의미하며, 이들은 각각 보지(保持) 등의 작용을 성취하고, 견(堅), 습(濕), 난(煖), 동(動)을 본질로 합니다. 대종은 4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자상(自相)과 소조색(所造色)을 보지하기 때문에 '계(界, dahtu)'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4계는 '대종(mahabhuta)'이라고도 하며, 이는 모든 색(즉 소조색)의 근본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體)가 광대하고, 지(地) 등이 쌓인 무더기의 형상이 크기 때문에 '대'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4대종은 어떤 작용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이들은 순서대로 보지(保持), 화섭(和攝), 성숙(成熟), 증장(增長)의 네 가지 작용을 성취합니다. 지계(地界)는 물체를 보지하며, 수계는 인섭하고, 화계는 성숙하게 하며, 풍계는 증장하게 합니다. 여기서 증장(長)은 '증가시키고 왕성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동시켜 끌어당긴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대종의 작용이 이렇다면, 그 자성은 어떠한가요? 이들은 견고성, 습윤성, 온난성, 운동성을 본질로 하며, 지계는 견고한 성질, 수계는 축축한 성질, 화계는 따뜻한 성질, 풍계는 운동의 성질을 가집니다. 이러한 풍계의 운동성 덕분에 대종과 소조색을 끌어당겨 다른 곳에 이르게 하여 상속 생기하게 합니다. 이는 마치 등잔불에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품류족론(品類足論)』이나 계경(契經)에서는 "풍계란 무엇인가? 가벼움 등으로서 운동의 성질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가벼움의 성질은 소조색으로 설명되었으므로, 풍계는 운동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들 문헌에서는 작용을 통해 풍계 그 자체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가벼움'이라고도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땅과 지(地) 등의 계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이를 게송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땅은 현색과 형색으로 세간의 언어적 관념에 따라 설정된 명칭이며, 물과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바로 계(界)로서, 세간에서도 움직이는 성질에 대해 바람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땅과 같은 세간의 언어적 관념에 따라 명칭이 설정된 것처럼, 바람에도 현색과 형색이 있기 때문에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텍스트는 세간에서의 다양한 바람의 종류를 예로 들며, '풍'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색(rupa)'이라는 용어는 변괴(변화와 파괴)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변괴하기 때문에 색취온(색의 집합체)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변괴는 고통을 동반하며,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색이 욕망의 허물어짐으로 인해 괴로움을 주는 이유는 색이 변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색이 변애(변화와 방해)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극미(극히 작은 것)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이와 같은 논의는 색의 본질과 그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과정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무표색은 변애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색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논의는 색과 무표색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텍스트는 그림자와 같은 현상들이 각각 4대종에 의존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록 그림자나 빛이 나무나 보주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무표색의 경우와 그러한 소의의 경우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바사사에서는 소의가 되는 대종이 소멸하더라도 무표색은 그에 따라 멸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내용은 여전히 힐난에 대한 해석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러한 힐난을 다르게 해석하여, "안식 등 다섯 가지는 그 소의가 일정하지 않아 어떤 것은 변애를 지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변애를 지니지 않기도 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眼) 등의 근은 변애를 지니고, 무간(無間)의 의근(意根)은 변애를 지니지 않지요. 그러나 무표색의 소의는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앞서의 힐난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변애를 일컬어 색이라고 한다'는 사실의 이치는 성취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내용을 게송으로 표현하자면, "이 가운데 근(根)과 경(境)을 바로 10처(處)·10계(界)라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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