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태조 왕건 ①
아버지가 송악 지역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신하였다 정도의 정보 외에는, 왕건의 조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조선 문종 시기에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 고려 태조실록에서 발췌된 왕건의 3대 조상 추존 묘호가 기록된 정도다.
고려를 건국한 후 왕건은 증조부를 원덕대왕, 증조모를 정화왕후, 조부를 의조 경강대왕, 조모를 원창왕후, 부친을 세조 위무대왕, 모친을 위숙왕후로 추존했다. 이 내용이 왕건 조상에 대한 모든 공식 기록이다. 그러나 고려 의종 때 인물인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에 이들에 얽힌 민담들이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 민담에는 왕건의 탄생 설화도 포함되어 있으며, 설화는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 도선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고려사』에는 정식 이름이 륭이라 기록됨)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정착한 곳은 송악산 남쪽 기슭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선을 만나게 된다. 당시 도선은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풍수지리법을 배우고 귀국하던 중 용건의 집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다만, 도선의 당나라 유학설은 오늘날 정설로 인정받지 않는다). 도선은 그 집 앞을 지나며 혼잣말처럼 "어허, 기장을 심어야 할 곳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용건의 아내는 급히 남편에게 전했고, 그 말을 들은 용건은 곧바로 도선을 뒤쫓아갔다.
도선을 붙잡은 용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르쳐준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큰 기운에 맞닿아 내년에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왕건이라 지으십시오." 도선은 작은 봉투 하나를 만들어 주고, 겉면에는 한 구절을 적었다. "삼가 이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며,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위대한 주인인 대군자를 당신께 드리노라." 용건은 그 봉투를 받들어 절을 올렸고, 도선이 가르쳐준 대로 집을 지었다. 그러자 그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보였고, 열 달 뒤 아이가 태어났다. 부부는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으로 지었으며, 이는 877년 1월의 일이었다.
이 설화는 김관의 『편년통록』의 기록을 『고려사』로 옮긴 내용이다. 이는 실화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왕건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운명론은 흔히 위대한 인물들에 관한 전형적인 설화 구성 방식으로 보인다.
왕건 탄생 설화에 도참사상의 대가인 도선을 등장시킨 것은 설화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편집자의 극적 장치로 해석된다. 도선이 신라 말기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을 활용하여 왕건 탄생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도선과 왕건의 관계가 단순히 탄생 설화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지가 저술한 『편년강목』에는 왕건이 17세 되던 해, 도선이 다시 송악산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왕건을 찾아온 도선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하늘이 선택한 명당에서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당신이 이 혼돈 속에서 그들을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선은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는 법과 진을 치는 방법, 유리한 지형을 고르고 시기를 포착하는 법, 산천의 지세를 파악하여 그 이치를 헤아리는 기술 등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기록 외에는 왕건의 어린 시절을 담은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태조" 편에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용맹스러운 얼굴에 이마뼈는 해처럼 둥글었다. 턱은 가지런하고 얼굴 폭은 넓었으며, 기상은 탁월하고 음성은 웅장하여 세상을 구할 만한 그릇이었다."
왕건의 생애 중 상대적으로 정확히 기록된 부분은 그의 청년기 이후의 이야기이다. 왕건이 청년으로 성장하던 900년 전후의 한반도는 말 그대로 혼란기였다. 신라는 진성여왕 시기를 거치며 국력이 심각하게 쇠약해졌고, 국정 운영능력은 거의 상실되었다. 나라의 재정은 바닥났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강제 징수하느라 온 나라가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 반란이 급증했고, 도적들이 횡행하며 민생 경제는 극단적으로 피폐해졌다.
8세기 말부터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 봉기는 9세기에 들어 점차 무장투쟁으로 발전했으며, 9세기 말엽에는 전국적인 농민봉기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왕건이 청년으로 성장한 10세기 초에는 신라가 통치 체계를 완전히 잃어버리며, 궁예의 태봉과 견훤의 후백제에게 국토 대부분을 빼앗긴 채 경주 인근만 가까스로 유지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흔히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후삼국 시대는 궁예가 태봉을, 견훤이 후백제를 각각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봉을 세운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경쟁에서 밀려난 탓에 신라 왕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한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신라 국력이 쇠퇴하며 곳곳에서 봉기 세력이 일어나자 환속하여 권력 추구의 길로 나섰다.
궁예가 처음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891년(진성여왕 5년), 죽주(현재의 안성 죽산)에서 봉기를 일으킨 기훤을 찾아갔을 때부터이다. 당시 기훤은 반란군을 이끌며 경기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훤은 성품이 거만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는 인물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궁예는 이듬해 기훤의 부하들과 함께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은 당시 북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성했던 인물로, 궁예가 많은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자 이를 반겨 맞았다. 그는 군사를 나누어주며 궁예로 하여금 북원 동쪽 지역을 공략하도록 했다.
강원도 동쪽 지역을 담당했던 궁예는 여러 차례의 승전을 거듭한 끝에 894년 명주(현재의 강릉)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군사력을 3,500명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궁예는 양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10여 개의 군현을 정복하여 철원을 거점으로 삼았으며, 895년에는 내외 관직을 정비하고 국가 조직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무렵 왕건의 가문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섰다. 왕씨 가문은 당시 송악(현재의 개성)의 유력한 호족이었으나, 날로 커지는 궁예의 세력에 압도되어 896년에 부하들을 이끌고 그에게 귀순하게 된 것이다.
왕건 일가의 귀순으로 궁예는 송악과 황해도 일대를 장악했으며, 898년에는 주요 거점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양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충청, 경기, 황해, 강원의 신라 북부 지역 전체를 장악했다. 이러한 확장을 바탕으로 궁예는 901년 고구려 부흥과 신라 타도를 내세우며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왕에 등극했다. 그는 신라 북부 지역 주민들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임을 고려하여 국호를 후고구려라 정했는데, 이는 그들의 신라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고구려라는 국호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국력이 강화되자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변경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정부 관제를 새롭게 정비하며 국가 체제를 한층 강화했다. 905년에는 수도를 다시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는 또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했다. 이를 통해 보다 완벽한 국가 형태를 갖춘 궁예는 후삼국의 구도 속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후삼국 시대를 형성한 또 다른 세력은 견훤의 후백제였다. 견훤의 본래 성은 일반적으로 이씨로 전해지지만, 아버지 아자개가 진흥왕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는 [이제가기]에 언급된 내용에 기반을 두지만,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아 견훤의 성은 대체로 이씨로 간주된다.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현재의 문경)에서 농부로 살았으나 후에 장군이 되었고, 견훤은 그의 장남으로 전해진다. 웅장한 체구와 출중한 무예를 지녔던 견훤은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기 위해 무장이 되었고, 서남 해안 지역에서 변방 비장으로 활동하며 점차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의 치세 아래 나라의 기강이 심히 문란해져 총신들의 횡포가 극심했고, 곳곳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이러한 혼란의 틈을 타 견훤은 892년 현재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라 자칭했다. 이어 원주에서 세력을 키우던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려 초적 세력을 포섭하며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그런 뒤 900년에는 전주를 새 수도로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칭하며 본격적으로 국가를 수립했다.
궁예와 견훤이 각각 태봉과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한반도는 이른바 후삼국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신라는 점차 멸망의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나, 천 년 동안 왕권을 유지해온 신라 왕족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많은 백성들은 신라 왕을 자신들의 군주로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민심은 후삼국 시대의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후삼국 시대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부터 고려가 재통일을 완성한 936년까지 약 44년간 지속되었다. 그 초기에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가졌다. 후백제는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 전역, 경상도의 진주와 합천 등 서남부 지역, 동쪽으로는 상주, 북쪽으로는 청주와 공주 등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와 달리 태봉은 경기, 황해, 강원, 충청 북부 등 산악 지대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이는 견훤이 정규군을 중심으로 세력을 다진 반면, 궁예는 산적 무리와 지방 호족의 연합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예가 세력을 정비하고 후백제의 곡창 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양상은 점차 변화했다.
궁예가 이러한 공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건이라는 탁월한 장수가 있었다. 왕건은 병법에 능할 뿐만 아니라 덕망이 높아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추종자도 많았다. 그의 성품과 지도력은 백성들에게 긍정적 평가를 얻었고, 이는 각종 전투에서 유리한 입지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왕건은 충주와 청주 등 충청 지역과 경상도의 상주를 점령하며 태봉의 세력을 확장했고, 나주를 공격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를 단절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후백제는 태봉과 신라의 협공에 의해 사방에서 압박받게 되었다. 특히 태봉의 나주 점령은 후백제의 위축을 불러왔으며, 이 공로는 왕건에게 돌려졌다. 이때부터 왕건은 궁예에 이어 태봉의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고려 건국
시간이 지나며 후삼국의 세력 구도가 굳어지는 듯했으나, 태봉 내부의 분열로 인해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왕건의 뛰어난 활약 덕분에 태봉은 후삼국의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건의 지위도 점차 격상되었다. 결국 913년, 그는 파진찬 겸 시중으로 임명되며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왕건의 권세가 높아지자 자연스레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궁예는 변덕스럽고 포악한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왕건은 언젠가 자신에게 화살이 겨눠질 것을 직감했다. 불안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중앙에서 벗어나 변방으로 나갈 것을 요청했다. 중앙에 머무르는 것보다 변방에서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이미 여러 전략적 변방을 순회하며 세력을 형성했던 장군이었기에 변방에서 머무는 동안 자신을 보호할 기반이 있었다.
왕건의 요청을 받아들인 궁예는 그를 다시 수군 지휘의 책임자로 보냈다. 왕건이 수군을 맡자 후백제 군사들은 위축되었고, 그는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전해들은 궁예는 왕건을 칭찬하며 “나의 장수들 중 그와 견줄 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왕건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궁예는 급히 왕건을 소환해 그를 견제하려 했다. 역모 혐의를 씌우며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궁예는 평소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는 이러한 독심술을 근거로 수백 명의 장수와 신하들을 처형했는데, 모두 역모죄라는 이유였다. 그의 처벌 방식은 잔혹하기로 유명했으며, 특히 여성에게 가한 형벌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여러 차례 목격한 왕건은 궁예의 역모 의심에 깊은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하루는 궁예가 왕건(후일의 태조)을 대궐로 급히 불렀다. 당시 궁예는 처형된 이들에게서 몰수한 금, 보물, 가재도구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왕건을 보자 궁예는 노엽게 쏘아보며 말했다.
“너는 어젯밤 군사들을 모아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왕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궁예는 계속 몰아붙였다.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지금 곧 너의 마음을 읽어보겠다.”
이 말을 하고 궁예는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르며 한참 동안 몰입했다. 이때 최응이라는 인물이 옆에서 일부러 붓을 떨어뜨린 뒤 주우는 척하며 왕건에게 조심스럽게 귀띔했다.
“장군,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에 왕건은 가짜로 역모를 인정하며 말했다.
“사실 제가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갑자기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진실로 정직한 사람이로군.”
이렇게 말하며 그는 금으로 장식된 말 안장과 굴레를 하사했고, 말끝에 경고를 덧붙였다.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궁예의 이런 처사는 마치 자비를 베푸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불안감과 혼란스러운 판단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결국 태봉 내 권력 구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예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허위로 모반을 시인함으로써 목숨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궁예가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해 그를 자신의 확고한 편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궁예의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왕건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마침내 흥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반란을 꾀하자고 설득했고, 왕건은 처음엔 망설였으나 부인 유씨의 권유가 결정적 동기가 되어 군사를 모아 궁예의 왕성으로 진격했다.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왕성을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싸워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 변장을 하고 몰래 성을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산야를 떠돌던 그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남의 보리 이삭을 베어 먹다가 발각되어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당했다.
918년, 무인년 7월 병진일에 왕건은 마침내 왕위에 올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라 선언했다.
'고려'라는 국호는 고려 건국 시에 새롭게 창안된 것이 아니다. 어원적으로 고구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라는 명칭의 기원을 살펴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고'는 한자어에서 높임이나 미칭으로 붙이는 접두사에 불과하며, 의미를 부여하자면 '위대한', '숭고한', 또는 '고씨의'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구려'는 고구려어로 성, 읍, 마을 등을 뜻하는 '흘', '골', '구루' 등을 음차한 것으로, 고구려는 '고씨의 성', '위대한 성' 등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고려는 고구려의 축약어나 '구루'를 음차한 한자 표기라고 볼 수 있다.
고려와 고구려가 동일 명칭이라는 점은 [편년통록]에서 왕건의 조상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이 배를 탔을 때 중국인들이 이미 그를 '고려인'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서도 고려와 고구려를 동일 국가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 역시 고구려를 고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코리아(Korea)'나 '꼬레(Coree)' 같은 알파벳식 명칭도 사실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를 지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 이미 고구려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인도와 티베트를 포함한 중국 서쪽 문화권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하게 인식했으며, 인도 승려 마라난타와 묵호자가 중국 경유 후 불교 전파를 목적으로 고구려를 방문했던 기록으로도 이를 증명할 수 있다. 또한, 고려 건국 이전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가 755년에 사라센 군대와 맞서 싸웠던 사건을 통해 그의 명성이 아라비아 세계에까지 고려인(또는 고구려인)으로 알려졌을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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