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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태조 왕건 ②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지 불과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는다. 반란의 주동자는 마군장군 환선길로,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지만 아내의 꾀에 넘어가 왕건의 자리를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왕건은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를 무마시켰다. 이 틈을 노린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내전에 침입해 신하들과 논의 중이던 왕건에게 칼을 겨누었다. 하지만 왕건은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며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환선길은 복병이 있을 것이라 짐작해 겁을 먹고 도망쳤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 끝에 잡혀 처형되었으며,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붙잡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들 형제 외에 청주 출신 무리도 역모를 꾸몄다. 청주 출신 순군 리 임춘길을 비롯해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 계획을 세우고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계획이 탄로나자 이들은 모두 도망쳤는데, 배총규를 제외한 세 명은 체포되었다. 왕건은 이들을 처형하려 했으나, 청주 출신 관료 현률이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현률은 역모 일당 중 한 명인 경종이 청주 성주 공직의 처남임을 밝히며, 그를 처형하면 청주성이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아 공직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회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왕건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역모 혐의자들을 살려두려 했으나 마군대장군 염상진이 강하게 반대했다.

염상진은 경종이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음을 증명할 만한 정황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경종이 최근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방 성주는 아들을 수도에 볼모로 두어야 했는데, 이는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도 이러한 이유로 수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는 이를 몹시 걱정하며 동생 경종에게 조카를 데려가라고 은밀히 요청했다. 볼모를 수도에서 데려간다는 것은 곧 반역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경종의 행보는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드러낸 셈이었다. 이에 왕건은 염상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종을 포함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왕건을 위협한 또 다른 인물은 웅주 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새 왕으로 등극하자 웅주의 성주직을 버리고 철원으로 상경했다. 이로 인해 웅주는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이흔암은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성주로 자리 잡았던 인물이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으며, 궁예 역시 그를 매우 총애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흔암은 궁예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왕건은 이흔암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지만, 그가 응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해 특별히 문책하지는 않았다. 한때 동료 장수였던 이흔암을 처벌하기에는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명분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이흔암의 이웃이었던 수의형대령 염장이 이흔암을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염장은 이흔암이 역모를 꾀하며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즉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이흔암을 감시하기 위해 염탐꾼들을 보냈고, 곧 그의 역모와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다. 염탐꾼의 전언에 따르면, 이흔암의 아내 환씨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한숨 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 테니 걱정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계기로 왕건은 이흔암을 체포해 시장 한복판에서 공개적으로 그의 목을 베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이흔암의 역모 사건은 명백히 조작된 정황이 드러난다. 이흔암이 실제로 역모를 계획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전혀 없었으며, 왕건은 궁예의 측근이었던 이흔암이 철원 지역에 머무르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본보기로 그를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이흔암의 입장에서 왕건은 자신이 섬기던 왕인 궁예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은 반역자였기에, 그를 인정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응주성을 포기하고 철원으로 돌아온 것도 이러한 맥락을 반영한다. 만약 그가 정말로 역모를 꾀하려 했더라면, 응주성을 거점 삼아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흔암은 오히려 안전한 응주성을 떠나 홀로 철원으로 돌아왔으며, 이는 그가 전혀 역모할 뜻이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이흔암 사건은 철원 지역 주민들이 왕건에 대해 가지고 있던 거부감과 불신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로 평가된다. 왕건이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긴 데에는 이러한 지역 정서와 민심에 대한 불안감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건국 다음 해 1월, 도성을 송악(현재의 개성)으로 옮긴다. 철원은 전왕 궁예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철원 주민 대부분이 왕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에게 유리한 지지 기반이 있었던 송악으로 도성을 이전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건의 정치적 입지는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태봉은 본래 궁예를 중심으로 결집한 호족 연합 국가였으나, 궁예가 축출되면서 호족 간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은 내부적으로 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균형을 잡아야 했고, 외부적으로는 점점 강성해지는 후백제와 맞서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유연하고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이러한 내외 문제를 능숙히 다뤘다. 각 지역 유력 인물들과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어 호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특히, 후백제의 견훤도 왕건의 유화정책에 호응했다. 매우 호전적이었던 궁예와 비교했을 때, 왕건은 상대하기 더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는가 하면, 몇 차례에 걸쳐 신하들 간 교류를 추진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오랜 전쟁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안정시키고,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를 통해 국가 이미지를 새롭게 하며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주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목표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신라 역시 왕건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 신라 장수 출신인 견훤을 역적으로 간주하며 경계했으나, 호족 출신인 왕건은 비교적 믿을 만한 인물로 여겼다. 이에 따라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고려 건국 초기 2년 동안은 이러한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927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을 침범하면서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합천 대야성이 함락되자, 신라는 자신들의 진주, 거창, 산청 등 경상 서부 및 북부 지역이 위협받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후백제의 통일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불안감을 느낀 경상 북부 지역 일부 호족들이 고려로 귀순하기에 이른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불쾌감을 드러내던 고려는 925년 조물성(현 경상 북부) 전투를 시작으로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양측 간 전력 차가 크지 않아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휴전을 선언하며 화의를 맺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인질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견훤은 사촌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육촌 동생 왕신을 후백제에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고려로 간 진호가 병사하면서 두 나라 간의 화의는 깨지고 말았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며 인질로 잡고 있던 왕신을 살해한 뒤 공주성을 기습했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후백제 간 본격적인 통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가 전쟁에 돌입하자 신라는 고려를 지지하기로 결정한다. 경애왕은 견훤의 약속 불이행과 군사 행동을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일이라 말하며, 왕건에 대한 지원 의사를 밝혔다.  

양 세력의 전쟁이 시작될 즈음, 북방에서는 거란족의 침입으로 발해가 멸망하였고, 발해 유민들이 대거 고려로 이주해왔다. 이들 유민 덕분에 왕건은 병력을 확충할 수 있었으며, 견훤과의 전투에서도 이들을 동원하게 된다.  

한편, 전쟁 중 견훤이 경주를 침공하면서 신라 백성들은 점차 고려에 더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927년 9월, 견훤은 경상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작스럽게 경주로 진로를 바꾸어 기습적으로 점령하였고, 경애왕을 비롯한 왕족 다수를 살해한 뒤 김부를 신라왕으로 세웠다.  

신라는 견훤의 침공 소식을 접하자마자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이미 함락되었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군의 접근을 의식해 철수하는 도중 공산(팔공산)에서 고려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공산싸움에서 견훤은 고려군을 대파하였고, 고려는 수천 명의 병력을 잃으면서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 등의 장수들도 전사했다. 왕건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개경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 이후 고려는 열세에 몰리며 경상도 서부 지역이 견훤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하지만 견훤 군의 만행과 약탈로 인해 경상도 주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많은 호족들이 고려로 귀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한동안 수세에 있던 고려는 병산군(현재 안동) 전투를 통해 전세를 뒤집었다. 치열한 공방 끝에 유금필 장군의 활약으로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섬멸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병산싸움 이후 급격히 약화된 후백제는 서해안 일대를 공략하며 힘을 회복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 틈을 타 왕건은 재암성(경북 진보)에서 투항한 장군 선필의 주선으로 경주를 방문하였다.  

왕건의 경주 방문은 경순왕 김부와 신라 귀족들의 신뢰를 높였으며, 이를 계기로 강릉과 울산 지역의 110여 성들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귀순이 이어졌다.  

고려가 이렇듯 유화책을 펼치며 국력을 강화하고 있던 시기에 후백제 내부에서는 견훤의 아들들 간 내분이 격화된다. 견훤에게는 장남 신검을 비롯해 양검, 용검, 금강 등 네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에 대한 견훤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를 질투한 나머지 세 아들은 935년 3월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 뒤 신검을 왕위에 올렸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6월 간신히 탈출하여 나주의 고려 진영으로 몸을 의탁하였다. 왕건은 고려에 투항한 견훤을 유금필을 통해 데려오게 하고, 그를 환대하며 개성에 머물도록 배려해 주었다.  

견훤에게 후한 대접을 하는 모습을 본 경순왕 역시 같은 해 11월 신라 왕국의 막을 내리며 고려에 항복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 왕건은 민족 통일에 대한 확신을 품고, 936년 9월 8만7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검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왕건이 이끄는 군대는 고려군 4만3천 명과 지방 호족 및 발해 유민들로 구성된 4만4천 명의 연합군으로, 이는 명실공히 하나된 민족의 군대였다. 고려 연합군과 신검의 부대는 처음 일선(지금의 선산)에서 격돌하였고, 이곳에서 신검은 대패하여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후 연합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황산(익산)의 탄령 고개를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신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항복을 선택했다. 왕건은 완산주에서 신검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민족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다.  

당나라의 외세를 빌어 이루어진 신라의 통일과 달리 고려의 통일은 민족적 화합이라는 자주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심에는 왕건과 그의 고려 건국 세력이 있었다. 통일전쟁 과정에서 발해 유민이 합류한 것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과 백성들까지 이에 호응해 연합군에 가담하였으며, 심지어 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포용함으로써 진정한 민족 대화합 속에서 통일이 성사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자주적 노력에 의해 이룬 통일 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의 통일은 한민족이 단일 민족으로서 단일 문화를 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문화 중심지도 기존의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다. 개성이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경주를 기반으로 한 신라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산했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문화를 되살릴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더불어,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고려 건국의 큰 성과로 평가된다.  

신검을 몰아내고 후백제의 두 번째 왕으로 있던 그를 단호히 항복시킴으로써 왕건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은 자주적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는 대외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크게 높였고, 대내적으로는 대화합을 바탕으로 한 단일 민족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이루어낸 왕건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첫째는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대내외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한 고구려 고토회복 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비록 통일을 이루었지만, 통일 직후의 고려는 여전히 호족 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이에 따라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언제든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했던 장수들 역시 사병을 거느린 세력으로 크게 성장해 있었기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에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 세력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쳤다.

고려 건국 초기, 왕건은 정주의 무송 김씨, 평산의 유홍씨, 경주의 김씨, 황주의 황보씨, 광주의 왕씨, 충주의 충주 민씨 등의 지방 호족 딸들과 혼인하며 그들을 왕후나 부인으로 맞았다. 이후 통일 시점에는 의성의 홍씨, 평산의 박씨, 신천의 신씨 등 다양한 가문과의 혼인이 더해져 왕건의 후비는 총 29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혼인정책은 중앙집권체제를 아직 완전하게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중요한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 왕건은 확고한 지배체제를 확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국가조직 내 호족의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혼인정책이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혼인정책은 왕건 사후 고려를 왕권 다툼의 무대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이복 형제들을 앞세워 각 호족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경쟁은 결국 고려 왕실을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속으로 밀어넣었다.

이 같은 내부 갈등의 가능성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혼인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그는 이를 통해서만이라도 고려를 통일된 국가로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혼인정책 외에도 왕건은 호족들에게 자신의 왕씨 성을 내려줌으로써 의제상의 가족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그가 이처럼 호족들을 혈연과 성씨로 묶으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직 통일국가 고려의 정치적 안정과 장기적으로 중앙집권적 체제의 구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왕건의 통일 중심적 정치이념과 유화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일관된 화합정책은 고려를 단일 민족국가로 유지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의 혼인정책은 단순히 호족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을 넘어, 민족의 대화합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족 대화합 정책과 더불어 왕건이 추진했던 또 하나의 숙원 사업은 고구려 고토 회복 운동이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명확히 밝힌 만큼, 왕건에게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938년 발해 유민 3천여 호를 이끌고 귀순한 박승을 받아들이는 등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했으며, 평양에 서경을 설치하여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여건은 왕건의 북진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는 강성해진 거란이 자리 잡고 있었고,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왕건은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말년까지 북진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으나, 만주 지역의 회복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강력한 북진 정책은 서쪽으로는 청천강, 동쪽으로는 영흥 이북까지 진출하면서 여진족을 몰아내는 성과를 이뤄냈다. 비록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 회복하는 데 그쳤지만, 호족 연합체 성격이 강했던 당시 고려 체제를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의미 있는 결과였다.

청천강에서 영흥을 경계로 한 이북 지역은 비록 넓은 영토였지만, 농사가 쉽지 않은 척박한 토지와 험한 지형, 불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인간 거주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지 못했던 당시 고려로서는 여진과 끊임없는 전쟁을 감수하며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청천강과 영흥 이남 지역을 안정된 거주지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942년 거란이 사신과 낙타를 보내며 화친을 제안했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왕건은 "거란은 발해와 동맹을 맺었다가 이를 배반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며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는 거란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방치해 굶겨 죽이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민족 화합 정책과 북진 정책을 통해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왕건은 정신적 통합에도 힘썼다.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승불 정책을 적극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라 출신 승려 충담을 왕사로 임명했다. 940년 충담이 사망하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직접 비문을 짓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개태사를 완성했고, 신흥사를 중수하며 공신탑을 설치했다. 공신들의 모습을 벽화에 그려 보존하고 무차대회를 열어 신분과 상관없이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물품을 나누어주는 등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을 이어갔다. 이러한 전통은 매년 지속되며 고려 국가의 기반이 됐다.

왕건은 관제의 정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집권기에 고려의 관제는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의 관제를 함께 활용하며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당시 관제는 중앙 집권적 요소와 지방 분권적 요소가 혼재된 초기 시스템을 보여준다.

태봉의 관제는 최고 행정기관으로 광평성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중요 직책과 부서를 배치하였다. 주요 직위로는 광치내(고려 시기의 시중에 해당), 서사, 병부, 대륭부, 수춘부, 봉빈부 등이 있었고, 행정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내봉성, 금서성, 원봉성, 비룡성, 물장성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삼림과 기물 등과 같은 세부 부서를 두어 다양한 국정 사안을 관리하였다. 군사 조직은 장군, 정기대감, 성주장군 등 군사 중심의 고위직을 바탕으로 편성되었다.

왕건은 이러한 태봉의 행정 및 군사 조직 체계를 기반으로 중앙 정부를 정비하는 동시에 지방에는 호족 자치제를 도입하였다. 그는 호족들에게 호장, 부호장과 같은 지방 관직을 부여하여 각자의 지역 치안을 맡게 했으며, 더불어 호족 자녀들을 인질로 중앙에 머무르게 하는 기인 제도를 시행해 지방 반란에 대비하였다.

고려의 안정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던 왕건은 943년 4월, 병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측근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였다. 이 훈요십조는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일종의 왕실 헌장이며, 후대 왕들에게 전하는 정치적 유훈이었다. 훈요십조에는 왕건의 정치 이념과 사상이 담겨 있었으며,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둘째,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셋째,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넷째,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다섯째, 서경(평'料에 1백 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일곱째.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여덟째,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멸금강)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아흡째,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열째,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왕건이 작성한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의 통치 이념과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불교를 융성하게 하되 사찰의 혼란과 승려의 지나친 권력을 억제하고, 자주적인 풍습과 문화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덕망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 백성의 존경을 받게 하고, 참소보다는 진심 어린 간언에 귀를 기울이며 공정하고 청렴한 자세로 정사를 돌볼 것을 주문했다. 이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꾀하였고, 후백제 멸망 이후 고려에 반감을 가진 백제 지역 인사들에게 관직을 주지 않아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직책을 공정하게 운영해야 함을 역설했다. 역사와 경전에 소홀하지 말고 반성하는 자세로 국정을 이끌라는 가르침도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훈요십조'를 남겼던 왕건은 943년 5월,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임종을 지켜보는 신하들이 슬픔에 목 놓아 울자 그는 미소를 띠며 "인생이란 원래 덧없는 것이니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태조 왕건의 능은 현릉으로 불리며, 그의 첫 번째 비(妃)인 신혜왕후 유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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