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상법품(無相法品)
그 때에 세존께서는 삼매로부터 일어나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참다운 법의 모습인 결정성(決定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방편과 신통이 모두 모습 없는(無相) 이익을 얻게 하느니라. 유일한 깨달음의 진리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이승들이 알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라.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게는 모두 한가지 맛(一味)의 가르침을 설하느니라.”
이 때에 해탈보살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정법(正法)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무르는 어지러운 말세에 사는 오탁악세의 중생들은 가지가지의 악업이 많아 삼계를 윤회하며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후세 중생을 위해 한가지 맛의 결정적인 진실을 설하셔서 저 중생들이 함께 해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내가 세상에 나온 원인을 물어서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며, 저 중생들이 세상에 나온 결과를 얻게 할 수 있다. 이 오직 하나뿐인 중대한 일(一大事)은 헤아릴 수 없으니, 대자대비의 마음 때문이니라.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즉시 인색함과 탐욕에 떨어지리니, 너희들은 한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여, 만일 중생을 교화한다면 교화한다는 생각도 없고,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내지 않아야 그 교화가 더욱 클 것이니라.
저 중생들이 모두 대상과 주체(心我)라는 생각을 여의게 해야 하느니라. 일체의 대상과 주체는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니라. 만일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마음은 허깨비처럼 변화(幻化)되지 아니할 것이며, 허깨비(幻)도 없고 변화도 없으면 바로 생김(生)이 없는 법을 얻을 것이요, 생김이 없는 마음은 변화함이 없는 데 있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마음의 바탕은 본래 공적합니다. 그 공적한 마음의 주체는 아무런 색깔이나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닦아서 본래 공적한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희들을 위하여 말씀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일체의 마음의 모습은 본래 근본이 없으며, 본래 근본이 없는 곳은 공적하여 생김이 없느니라. 만일 마음에 생김이 없으면 바로 공적함에 들어가나니, 공적한 마음의 경지에서 바로 마음의 공함을 얻느니라. 선남자여, 모습(相)이 없는 마음에는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나니 일체의 법의 모습도 이와 같으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의 중생들이 주체에 사로잡혀 있거나 대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떠한 가르침으로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이 이 얽매임(縛:번뇌)에서 벗어나도록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12인연을 관찰하게 하리라. 12인연은 본래 원인과 결과에서 발생한 것이며, 원인과 결과는 의식의 흐름(心行)에서 일어난 것이니라.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은데 하물며 몸이 있겠느냐? 만일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에게는 있다는 견해를 없애게 할 것이요, 만일 주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에게는 없다는 견해를 없애게 하리라.
만일 대상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생기는 성품(生性)을 소멸하게 하고, 만일 대상이 소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소멸하는 성품(滅性)을 소멸하게 하리라. 없애는 것이 바탕을 보는 것(見性)이요, 바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본래의 생김은 소멸하지 않고 본래의 없어짐은 생기지 않는 것이어서 소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나니, 일체의 모든 법도 이와 같으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이 생기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떠한 견해를 없어지게 해야 하겠습니까?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떠한 견해를 없어지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이 생기는 것을 보았을 때는 없다는 견해를 없어지게 하고,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있다는 견해를 없어지게 하라. 만일 이러한 견해를 없어지게 한다면 법의 참다운 근원(法眞)을 얻으며, 결정된 바탕에 들어가는 일 없이 생김(生)이 없는 것을 결정하게 되리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 중생들이 생김이 없는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생김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김이 없는 곳에 머무른다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머묾도 없고 생김도 없는 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것이니라. 보살이여, 만일 생김이 없는 것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생김으로 생기는 것을 없애려는 것이다. 생김과 소멸함이 함께 없어지면 본래의 생김은 발생하지 않느니라. 마음은 항상 공적하며, 공적함의 바탕은 머묾이 없나니, 마음에 머묾이 없는 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것이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음에 머묾이 없다면 어떻게 수학(修學)할 것입니까? 배울 것이 있습니까, 배울 것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생김이 없는 마음은 마음에 나고 드는 것(出入)이 없나니, 본래의 여래장(如來藏)은 바탕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배울 것이 남아있지도 않고, 배울것이 없는것도 아니니라. 배울 것과, 배울 것 없다는 것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배움이 없는 것(無學)이며, 배움이 있지 아니한 것으로 곧 배울 바를 삼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여래장의 바탕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이란 생기고 소멸하는 분별 망상의 모습이 이치(理)를 가려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 여래장의 바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생기고 소멸하는 분별 망상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이법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느니라. 만일 옳고 그른 것이 있다면, 바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발생하게 되느니라.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분별이 생기고 소멸하는 모습이니라.
보살이여, 근본 바탕과 모습을 관찰할 적에는 이법이 저절로 만족하나니라. 천 가지 생각과 만 가지 분별은 도리에 유익하지 않으며, 부질없이 정신만 소란하게 하여 본래의 마음을 잃게 하느니라.
만일 생각하고 분별함(思慮)이 없으면 생기고 소멸함이 없어서 실답게 일어나지 않나니, 모든 식(識)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며, 식의 흐름이 생기지 않으며, 5법이 청정하게 되리니, 이것을 대승이라 하느니라.
보살이여, 5법이 청정한 데 들어가게 되면 마음에는 바로 망령됨이 없어지느니라. 만일 망령됨이 없어지면 여래의 스스로 깨달은 성스러운 지혜(聖智)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면 일체가 본래부터 생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며, 본래 생김이 없는 것을 알면 망령된 생각이 없어지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망령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마땅히 그치고 쉬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망령된 생각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쉬어야 할 망령이 없느니라. 마음에 주체적인 마음이 없음을 알면 그쳐야 할 마음이 없으므로 분별함이 없으며, 현재의 의식이 생기지 않으며, 그쳐야 할 생김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그침이 없는 것(無止)이요, 또한 그침 없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그침이면서도 그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쳤으되 그칠 것이 없으나 그침이 바로 생기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생김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그치려 하는 것이 생기는 것이거니와, 이미 그치고 보면 그칠 것도 없느니라. 또한 그침이 없는 데도 머무르지 않으며, 머묾이 없는 데도 머무르지 않나니, 무엇을 생기는 것이라 하는가?”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김이 없는 마음에 어찌 취하고 버릴 것이 있으며, 어떠한 법의 모습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김이 없는 마음에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느니라. 마음 아닌 데에 머무르며 법 아닌 데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마음 아닌 데에 머무르고, 법 아닌 데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에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마음 아닌 데에 머무르는 것이요, 법에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법 아닌 것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마음과 법에 생김이 일어나지 않으면 의지할 것이 없으며, 모든 의식의 흐름(行)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양이 없느니라. 예를 들자면 허공에는 움직임도 없고 머묾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만듦(爲)도 없으며, 저것도 없고 이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공한 마음의 눈(空心眼)을 얻고 법의 공한 몸(法空身)을 얻어서 5음과 6입이 모두 공적하게 되리라.
선남자여, 공한 법을 닦는다는 것은 삼계(界)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계상(戒相)에도 머무르지 아니한다. 청정하여 생각이 없으며, 끌어안을 것도 없고 놓아버릴 것도 없으며, 바탕이 금강과 같아서 삼보를 부수어 버리지 아니하며, 마음을 비워서 움직이지 아니하지만 육바라밀을 갖추고 있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육바라밀은 모두 모습(相)을 지니고 있거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법이 세간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설명한 육바라밀이란 모습이 없고 만듦(爲)이 없는 것이니라.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욕심을 여읜 경계에 들어가면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진실하게 방편을 말하여 본각의 이익으로 남들을 이롭게 하나니, 이것이 보시(檀)바라밀이니라.
의지와 생각(志念)이 견고하여 마음에 항상 머묾이 없고, 청정하여 물듦이 없으며, 삼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이 지계 바라밀이니라.
공(空)한 법을 닦아 번뇌를 끊어서 일체의 존재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삼업(三業)을 적정하게 하여 몸과 마음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것이 인욕 바라밀이니라.
이름과 수효를 멀리 여의고, 공(空)과 유(有)의 견해를 끊어서 깊이 오온(五蘊)이 공함에 들어가면, 이것이 정진 바라밀이니라.
공적함도 함께 여의고, 일체의 공함(空)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마음이 머묾 없는 데에 있으나 크게 공함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면, 이것이 선정 바라밀이니라.
마음에는 마음의 모습(相)이 없으며, 허공처럼 비움도 취하지 않는다. 모든 의지적 작용이 생기지도 않지만 적멸을 깨닫지도 않는다. 마음에 나가고 들어옴이 없이 바탕이 항상 평등하므로 가지가지 법의 실제는 모두 결정성이다. 일체의 경지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면, 이것이 지혜 바라밀이니라.
선남자여, 이 육바라밀은 모두 본각의 이익을 얻어서 결정성에 들어가며, 초연하게 세간을 벗어나 걸림없이 해탈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해탈법의 모습(解脫法相)은 모두 상(相)이 없는 의지적 작용이며, 또한 벗어남과 벗어나지 않음도 없나니, 이것을 해탈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모습도 없고 의지적 작용도 없으며, 움직임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는 적정한 열반이며, 또한 열반이라는 모습도 취하지 않느니라.”
해탈보살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일찍이 없던 가르침을 얻었다 생각하고, 그 뜻을 펼치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큰 깨달음으로 만족하신 세존께서
중생을 위하여 법을 펼치시되
모두 일승법을 설하시니
성문연각의 이승의 길은 있을 수 없네.
한가지 맛의 모습 없는 이익은
마치 허공보다 큰 것 같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없건만
그 바탕이 각각 다름에 따라
모두 근본 자리를 얻게 하셨네.
저처럼 객체와 주체를 여의어
하나의 법으로 이루어 진 바
일체 존재의 같고 다른 행위는
모두 본각의 이익을 얻어서
두 가지 모습의 견해 끊게 하셨네.
적정한 열반 또한
깨달음을 취하는데 머물지 않고
결정적인 경지에 들어가니
모습도 없고 의지적 작용도 없네.
마음을 비운 열반의 경지는
적멸한 마음도 생김이 없는 것,
저 금강의 바탕과 같아서
삼보를 부수지 아니하고
육바라밀을 갖추어
일체의 중생들 제도하시네.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게 하지만
모두 소승법으로 하지 않고
한가지 맛의 법인(法印)인
일승으로 이룩하셨네.
그 때 대중들이 이 뜻을 설하는 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대상(心)과 주체(我)라는 생각을 여의고, 공하여 모습(相) 없는 경지에 들어가니 광대하고 광활하였으며, 모두 결정성을 얻어서 오염된 번뇌를 남김없이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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