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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육근 십이처 십팔계 분석


“또 아난아, 어째서 6입(入)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眞如)의 성품(性品)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곧 저 사람이 눈동자를 멍하게 뜨고 피로한 것은, 눈과 피로를 겸하여 깨달음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밝음과 어둠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보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보는 성질은 밝음과 어둠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는 작용은 밝음과 어둠에서 오지도 않고, 눈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밝은 데서 온다면 어두울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고, 어두운 데서 온다면 밝을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눈에서 나온다면 밝고 어둠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보는 정기는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앞에서 경계의 모양을 보았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보아야 한다. 또 허공이 제 스스로 보는 것이니, 네 눈의 보는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눈의 보는 기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꽉 막는다면, 귀의 감관이 피로하여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귀와 피로를 겸하여 깨달음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듣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듣는 성질은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듣는 성질은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데서 오지도 않고, 귀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듣는 성품이 조용한 데서 왔다면 움직일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소리의 움직임을 듣지 못해야 하고, 만일 움직이는데서 왔다면 조용할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조용함을 깨닫지 못해야 하며, 만일 귀에서 생긴다면 움직임과 조용함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듣는 자체는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은 듣는 작용으로 성품을 이뤘으니 허공이 아니며, 또 허공이 제 스스로 들으니 너의 듣는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귀의 듣는 기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급히 코로 숨을 들이켜서 들이켠 숨을 조금 길게 끌어 피로해지면, 콧속에 서늘한 느낌이 생긴다. 이 느낌으로 인하여 통함과 막힘의 허와 실과, 이와 같이 온갖 향기와 추한 기운들을 분별하는 것은, 이 코와 피로를 겸하여 깨달음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통함과 막힘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냄새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냄새 맡는 성품이라고 하며, 이 냄새 맡는 성질은 저 통함과 막힘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냄새 맡는 작용은 통함과 막힘에서 오지도 않고, 코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통한 데서 온다면 막힐 때는 냄새 맡는 작용이 사라지니 어떻게 막힘을 알겠으며, 만일 막힘 때문에 있다면 통할 때는 냄새 맡는 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향기와 추한 냄새 등의 느낌을 밝히겠느냐? 만일 코에서 생긴다면 분명 통함과 막힘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냄새 맡는 기능은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온다면 이 냄새 맡는 작용은 돌아와서 네 코를 냄새 맡아야 하며, 또 허공 자체가 스스로 냄새를 맡는 것이니 네 코의 맡는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코의 맡는 기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조금 오래 핥았을 경우, 병 있는 사람은 쓴맛을 느끼고 병 없는 사람은 조금 단맛을 느낀다. 단맛과 쓴맛으로 혀의 감각이 나타나고 혀를 움직이지 않을 때는 항상 담담한 맛이 있는 것은, 이 혀와 피로를 겸하여 깨달음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맛보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맛보는 성질은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은 달고 쓴맛에서 오지도 않고 담담한 맛 때문에 있지도 않으며, 또 혀에서 나오지도 않고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달고 쓴맛에서 온다면 담담할 때는 맛보는 작용이 사라지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만일 담담한 맛에서 왔다면 달고 쓴맛을 느낄 때는 담담한 맛이 없어지니 어떻게 달고 쓴 두 맛을 알겠느냐? 만일 혀에서 생긴다면 분명 달고 담담하고 쓴 경계와 상관없으니 이 맛을 아는 기능은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 스스로 맛보는 것이지, 네 입이 맛보는 것이 아니다. 또 허공 자체가 맛보는 일이니 네 혀의 맛보는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혀의 맛보는 기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한쪽의 차가운 손으로 다른 쪽의 더운 손과 맞댈 경우, 차가운 기운이 더운 기운보다 많으면 더운 기운은 차가운 기운을 따라 차가워지고,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차가운 기운은 더운 기운을 따라 더워진다. 이와 같이 이 맞대어 깨닫는 촉감이 뗄 때에는 떼는 줄을 아는 작용으로 나타나니, 끼어드는 기운이 이렇게 성립하는 것은, 피로한 촉감이 그 원인이며, 이 몸과 피로를 겸하여 깨달음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떼고 합하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촉감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촉감의 성질이라고 하며, 이 촉감 자체는 서로 떼고 합함의 어기고 따르는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촉감은 떼고 합함에서 오지도 않고, 어기고 따름에 있지도 않으며, 몸의 감관에서 나오지도 않고, 또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합할 때 온다면 뗄 때는 합함이 이미 사라지니 어떻게 떼는 작용을 알겠느냐? 어기고 따르는 두 모양도 마찬가지다. 만일 몸에서 나온다면 분명 떼고 합하고 어기고 따르는 네 가지 모양이 없으니, 네 몸의 감촉 기능은 원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 스스로가 촉감이니 네 몸의 감촉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몸의 감촉 기능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곤하고 나른하여 잠이 들었다가 푹 자고 나서 깨었을 때, 경계를 보면 기억하고 기억을 잃으면 잊어버림이 바로 뒤바뀐 생주이멸이니라. 이를 빨아들여 익히고 의식 가운데로 돌아가서 서로 뛰어넘지 않음을 의식의 인식 기능이라고 하며, 이것은 의식과 피로를 겸하여 깨달음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생기고 사라짐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아는 작용을 모으고 그 속에 있으면서 안의 경계(內塵; 곧 法塵)를 빨아들여 보고 들음이 흐름을 거슬러서 기억하거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잊는 작용을 지각하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지각하는 성질은 자고 깨는 생멸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지각의 기능은 자고 깸에서 오지도 않고, 생기고 사라지는 데에 있지도 않으며, 의식의 감관에서 나오지도 않고,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잠 깬 데서 온다면 잠잘 때는 곧 따라 사라져버리니 무엇으로 잠을 자며, 분명 생길 때 있다면 멸할 때는 같이 없는데 무엇이 멸하겠느냐? 만일 멸하는 데 있다면 생길 때는 곧 멸함이 없는데 무엇이 생기는 것을 알겠느냐? 만일 의식의 감관에서 나온다면 자고 깨는 두 모양은 몸의 열리고 닫힘을 따르는 것이니, 이 열리고 닫히는 두 체를 떠나면 이 지각작용은 허공 꽃과 같이 끝내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 제 스스로 아는 일이니, 너의 의식작용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의식 기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12처(處)를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너는 또 이 기타원의 나무와 숲과 샘과 못들을 보아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색이 눈의 보는 작용을 내겠느냐? 눈이 색의 모양을 내겠느냐?
아난아, 만일 또 눈이 색의 모양을 낸다면 공을 볼 때는 색이 아니니, 눈이 낸 색의 모양은 마땅히 소멸할 것이며, 소멸하면 드러낼 모양은 아무것도 없다. 색의 모양이 이미 없다면 무엇이 공의 본질을 밝히겠느냐? 눈이 공의 모양을 내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일 또 색의 경계가 눈의 보는 작용을 낸다면 공을 볼 때는 색이 아니니, 보는 작용은 곧 소멸할 것이며, 소멸해버리면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 공과 색을 밝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보는 작용과 색과 공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색과 보는 작용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이 기타원에서 공양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식단으로 대중을 불러 모을 때는 종을 치니, 너는 그 때마다 앞뒤로 서로 이어지는 북소리와 종소리를 듣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들 소리가 귀가로 오겠느냐?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가겠느냐?
아난아, 만일 소리가 귀가로 온다면, 내가 사위성에서 걸식할 때는 기타림 숲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이 소리가 분명 아난의 귀가로 와버린다면, 목련과 가섭은 함께 듣지 못해야 할 텐데, 어찌 더욱이 1,250 사문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다같이 공양할 곳으로 오는 것이냐?
만일 네 귀가 저 소리 나는 곳으로 간다면, 내가 기타림 숲에 돌아와 머물 때는 사위성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네가 북소리를 듣고 그 귀가 이미 북 치는 곳으로 가버린다면, 종소리가 겹쳐 나도 마땅히 함께 들을 수 없어야 하는데, 어찌 더욱이 그 가운데 코끼리와 말과 소와 양들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듣는 것이냐? 만일 오고 감이 없다면 듣는 작용도 없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듣는 작용과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으니 듣는 작용과 소리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향로의 전단향기를 맡아보아라. 이 향기는 비록 1수만 태울지라도 사위성의 40리 안에서는 동시에 향내를 맡느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나오겠느냐? 네 코에서 나오겠느냐? 허공에서 나오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향기가 네 코에서 나온다면, 코에서 생긴다는 말이니 당연히 코에서 나와야 하며, 코는 전단이 아닌데 어떻게 콧속에 전단 기운이 있겠느냐? 네가 향내를 맡는다는 말은 당연히 코로 들어온다는 뜻이니, 콧속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는다고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만일 허공에서 난다면, 허공의 성질은 한결같으니 향기도 항상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향로에 마른 향나무를 태워야 하겠느냐?
만일 전단나무에서 난다면, 이 향의 본질은 타면서 연기가 나기 마련이니, 코가 향내를 맡을 적에 연기와 함께 맡아야 한다면, 그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서 채 멀리 퍼지기도 전에 40리 이내의 사람들은 어째서 이미 향내를 맡는 것이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향기와 코와 맡는 작용은 다 함께 처소가 없으니, 맡는 작용과 향기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언제나 두 때에 대중과 함께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간혹 소락(치즈)을 가장 잘 정제된 제호(우유 엑기스)를 만나면 훌륭한 맛이라고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은 허공에서 생기느냐? 혀에서 나느냐? 음식에서 나느냐?
아난아, 만일 이 맛이 네 혀에서 난다면 네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가 일단 우유 맛이 되었다면, 검은 꿀을 먹어도 맛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만일 달라진다면 혀는 여럿이 아닌데 어떻게 한 혀로 여러 맛을 다 알겠느냐?
만일 음식에서 난다면, 음식은 아는 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제 스스로 알겠으며, 또 음식이 제 스스로 안다면 남의 음식과 같으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너는 허공을 씹어 보아라. 어떤 맛이 나느냐? 그 씹은 허공이 분명 짠맛이라면 이미 네 혀를 짜게 하였으니 네 얼굴도 짜야 한다 .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짠맛 속에 사는 바닷고기와 같이 조금도 싱거운 맛을 알지 못하리라. 만일 싱거운 맛을 모른다면 짠맛도 깨닫지 못해야 한다. 또 아무 맛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맛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맛과 혀와 맛보는 작용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맛보는 작용과 맛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새벽마다 언제나 손으로 머리를 만지리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져서 아는 것은 어느 쪽이 촉감을 아는 주체이냐? 그 촉감을 아는 주체는 손에 있겠느냐? 머리에 있겠느냐?
만일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알지 못할텐데 어떻게 촉감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머리에 있다면 손에는 촉감이 없을 텐데, 어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각각 따로 있다면 너 아난에게 마땅히 두 몸이 있어야 하리라. 만일 머리와 손에서 똑같이 한 촉감이 생긴다면, 손과 머리는 당연히 같은 일체가 되어야 한다. 만일 같은 일체라면 촉감은 성립되지 않으리라. 만일 다른 이체라면 촉감은 어느 쪽에 있겠느냐? 대는 쪽에 있으면 닿는 쪽에 있지 않을 것이며, 닿는 쪽에 있으면 대는 쪽에 있지 않으리라. 당연히 허공이 너에게 촉감을 주었다고도 못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촉감을 아는 작용과 몸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몸과 촉감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언제나 의식 가운데 인연하는 선과 악과 무기의 세 성질로 법칙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 법은 마음과 일치한 상태에서 생기겠느냐?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아난아, 만일 마음과 일치 하다면, 법칙은 경계가 아니므로 마음의 인연대상이 아니니, 어떻게 처소가 성립되겠느냐?
만일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가 있다면 법의 자성은 아는 작용이냐, 아는 작용이 아니냐? 아는 작용이라면 마음이라 하겠으나, 너와는 다르면서 경계도 아니니,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으리라. 너와 일치하면서 마음과도 일치 하다면, 어떻게 네 마음이 다시 너에게 둘이 되겠느냐? 만일 아는 작용이 아니라면 이 법의 경계는 이미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떼고 합함과 차고 따뜻함과 허공의 모양도 아닌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느냐? 이제 색과 허공에서 전혀 표시할 수 없고, 인간이 또 허공밖에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마음이 인연할 대상도 아니니, 법의 처소는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법칙과 마음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뜻과 법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18계를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네가 밝힌 대로 눈과 색이 연이 되어 눈의 인식이 생긴다면, 이 인식이 눈 때문에 생긴다 하여 눈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색 때문에 생긴다 하여 색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인식이 눈 때문에 생긴다면, 눈 자체에는 이미 색과 공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는데, 너의 인식이 있다 한들 무엇을 상대로 작용하겠느냐? 또 너의 보는 작용은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것이 아니니 표시할 길이 없는데, 무엇으로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이 인식이 색 때문에 생긴다면, 공하여 색이 없을 때에는 너의 인식도 마땅히 없어질 텐데, 허공의 성질을 어떻게 알겠느냐?
만일 색이 변할 때 네가 색의 모양이 변천하는 상태를 안다면, 너의 인식 자체는 변천한 일이 없는 것이니, 경계를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또 색의 변천을 따라 인식이 변천한다면, 경계의 모양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또 인식이 색을 따라 변천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한결같으리라. 그러면 이미 색에서 생겼으니, 마땅히 허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리라.
만일 두 가지를 겸하여 눈과 색이 함께 눈의 인식을 낸다면, 눈과 색이 합해져 있을 때는 인식이 자리할 중간이 없을 것이며, 눈과 색이 떨어져 있을 때는 눈과 색의 양쪽으로 갈라서 합해야 한다. 그러면 자체의 성품이 어지럽게 뒤섞일 텐데, 어떻게 경계를 이루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눈과 색이 연이 되어 눈의 인식경계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눈과 색과 색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네가 밝힌 대로 귀와 소리가 연이 되어 귀의 인식이 생긴다면, 이 인식이 귀 때문에 생긴다하여 귀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소리 때문에 생긴다하여 소리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귀 때문에 생긴다면,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두 모양이 이미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귀에는 아는 작용이 성립되지 않는다. 분명 알 대상이 없으면 아는 작용도 오히려 성립될 수 없는데, 인식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일 귀의 듣는 작용을 취해서 인식이라 한다면,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이 없기 때문에 듣는 작용도 성립될 수 없는데, 어떻게 색과 향과 미와 촉의 4진으로 섞여 짜인 귀의 형체를 인식의 경계라고 하겠으며, 귀의 인식영역은 또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만일 소리에서 생긴다면, 인식이 소리 때문에 있으니, 듣는 작용과 관계가 없으며, 듣는 작용이 없으면 소리의 모양도 있는 자리가 없으리라. 인식이 소리에서 난다 하여 소리를 듣는 작용에 따라 소리 모양이 있다고 인정하면, 듣는 작용은 마땅히 인식 자체를 들어야 하리라. 인식 자체를 듣지 못한다면 소리의 경계가 아니며, 인식 자체를 듣는다면 소리와 똑같아서, 인식 자체가 이미 듣는 대상이 되었으니, 무엇이 인식 자체를 듣는 줄 알겠느냐? 만일 아는 작용이 없다면 결국 초목과 같으니, 당연히 소리와 듣는 작용이 섞여서 중간의 경계가 성립되지 않으리라. 경계의 중간자리가 없으면 안팎의 모양은 무엇으로 성립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귀와 소리가 연이 되어 귀의 인식경계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귀와 소리와 소리 경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코와 냄새가 연이 되어 코의 인식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코 때문에 생긴다 하여 코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냄새 때문에 생긴다 하여 냄새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인식이 코 때문에 생긴다면 너는 마음속에 무엇을 코라고 생각하느냐? 쌍 손톱 모양의 살덩어리를 코라고 생각하느냐? 냄새를 맡아서 동요하는 성질을 코라고 생각하느냐?
만일 살덩어리를 가지고 코라고 한다면, 살덩어리는 몸이고, 몸의 아는 작용은 촉감이니, 몸이라면 코가 아니며, 촉감이라면 경계이니라. 그러면 코는 오히려 이름이 없을 텐데 어떻게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냄새 맡는 작용을 가지고 코라고 한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무엇이 맡는다고 생각하느냐? 살덩어리가 맡는다고 한다면 살덩어리의 맡는 작용은 원래 촉감이지 코가 아니며, 허공이 맡는다고 한다면 허공이 제 스스로 맡는 것이니, 살덩어리는 마땅히 느끼지 못해야 하며, 허공이 맡는다면 마땅히 허공이 바로 네가 되고 네 몸은 알지 못해야 하며, 지금의 아난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냄새 자체가 맡는다고 하면 맡는 작용은 저절로 냄새 자체에 속하는데 너와 무슨 상관이냐? 만일 향냄새와 추한 냄새가 분명 네 코에서 난다면, 저 향내와 구린내의 두 가지 흐르는 기운은 이란 나무와 전단 나무에서 생기지 않으리라. 이 두 나무가 없는데서 너는 스스로 코를 맡아보아라. 향내가 나느냐? 구린내가 나느냐? 구린내라면 향내가 아니며, 향내라면 분명 구린내가 아니다. 만일 향내와 구린내를 둘 다 맡는다면, 너 한 사람에게 마땅히 두 코가 있어야 하고, 또 나에게 도를 물을 때도 두 아난이 있어야 하니, 어느 쪽을 네 몸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코가 하나라면 향내와 구린내의 둘은 구분되지 않아서, 구린내가 이미 향내가 되고 향내가 또 구린내가 되어, 두 성질이 있지 않을 텐데 경계를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냄새 때문에 생긴다면, 인식은 냄새 때문에 있으니, 마치 눈에 보는 작용이 있으나 제 눈을 볼 수 없듯이 냄새 때문에 인식이 있으므로 마땅히 냄새를 맡지 못해야 하리라. 인식이 냄새를 안다면 냄새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인식이 아니니라. 냄새가 맡는 작용을 근거로 있지 않다면, 냄새의 경계는 성립되지 않으며, 인식이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인식의 경계는 냄새에서 건립되지 않는다. 이미 중간이 없고 안의 감관과 밖의 경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저 온갖 맡는 성질은 마침내 허망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코와 냄새가 연이 되어 코의 인식경계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코와 냄새와 냄새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혀와 맛이 인연이 되어 혀의 인식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혀 때문에 생긴다 하여 혀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맛 때문에 생긴다하여 맛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혀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감자와 오매와 황련과 석염과 세신과 생강과 계피들은 모두 맛이 없으리라. 너는 스스로 혀를 맛보아라. 단맛이냐, 쓴맛이냐? 만일 혀의 성질이 쓰다면 무엇이 와서 혀를 맛보겠느냐? 혀는 스스로 맛보지 못하는데 무엇이 지각하겠느냐? 혀의 성질이 쓰지 않다면 맛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맛 때문에 생긴다면, 인식 자체가 맛이 되리라. 그러면 혀의 감관이 스스로 맛보지 못함과 한가지니, 어찌 인식이 맛인지 맛 아닌지를 알겠느냐? 또 일체 맛은 한 물건에서만 생기지 않으니, 맛이 이미 많이 생김으로 인식도 당연히 여러 체라야 하리라. 인식의 체가 만일 하나이며 체가 분명 맛에서 생긴다면, 짠맛과 담담한 맛과 단맛과 신맛과 화합한 맛과 본래 가진 맛과 변하여 달라진 맛들은 똑같이 한 맛이 되어 분별이 없으리라. 이미 분별이 없다면 인식이라고 이름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또 혀와 맛의 인식경계라고 하겠느냐? 그렇다고 허공이 너의 심식을 내지는 않았으리라. 혀와 맛의 화합으로 난다면 곧 이 가운데는 원래 제 성품이 없을 텐데 어떻게 경계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혀와 맛이 연이 되어 혀의 인식경계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혀와 맛과 혀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몸과 닿음이 연이 되어 몸의 인식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몸 때문에 생긴다 하여 몸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닿음 때문에 생긴다하여 닿음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몸 때문에 생긴다면, 분명 합하고 떼는 둘을 깨달아 아는 인연이 없으니 몸이 무엇을 알겠느냐?
만일 인식이 닿음 때문에 생긴다면, 분명 네 몸이 없는데, 몸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어서 대고 뗌을 알겠느냐?
아난아, 물체는 닿아도 알지 못하고, 몸이 아는 작용은 닿음에 있으니, 몸을 알리는 작용이 곧 닿음이며, 닿음을 아는 작용이 곧 몸이다. 따라서 인식이 닿음이면 몸이 아니며, 인식이 몸이면 닿음이 아니니, 몸과 닿음의 두 모양은 원래 처소가 없느니라. 또 닿음이 몸과 합하면 곧 몸 자체의 성품이며, 닿음이 몸을 떠나면 바로 허공과 같은 모양이니, 이렇게 안과 밖이 성립되지 않으면, 중간의 인식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또 중간의 인식이 성립되지 않으면 안과 밖의 성질이 공하여 없으니, 너의 인식이 생긴들 무엇으로 경계를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몸과 닿음이 연이 되어 몸의 인식경계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몸과 닿음과 몸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뜻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뜻 때문에 생긴다 하여 뜻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법 때문에 생긴다 하여 법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뜻(意) 때문에 생긴다면, 네 뜻 가운데 반드시 생각할 법이 있어야 너의 뜻을 밝히겠는데, 만일 앞에 법이 없다면 뜻이 생길 곳이 없으며, 인연을 떠나서는 형체가 없으니, 인식이 무엇을 가지고 작용하겠느냐?
또 너의 식심이 온갖 사량과 요별을 겸한 성품과 더불어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뜻과 같다면 그대로 뜻이니, 무엇이 생기겠으며, 뜻과 다르다면 같지 않으니, 마땅히 인식할 곳이 없어야 하리라. 만일 인식할 곳이 없다면 어떻게 뜻에서 생긴다고 하겠으며, 만일 인식할 곳이 있다면 무엇이 인식을 낸 뜻이겠느냐? 같고 다름의 두 성질이 성립되지 않으면, 경계를 어떻게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법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모든 법은 다섯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니, 너는 색법과 성법과 향법과 미법과 촉법을 보아라. 모양이 분명하여 제각기 다섯 감관을 상대할 뿐, 뜻이 거두는 법이 아니다. 너의 인식이 결코 법을 의지하여 생긴다면, 너는 이제 자세히 살펴보아라. 경계의 법은 어떤 모양이냐? 만일 색과 공(色空)과 움직이고 고요함과 통하고 막힘(通塞; 香法)과 합하고 뗌(合離; 觸法)과 생기고 사라짐(生滅; 味法)을 떠난다면 이 온갖 모양을 벗어나서는 끝내 얻을 것이 없느니라. 생긴다면 색과 공의 온갖 법이 생기고, 멸한다면 색과 공의 온갖 법이 멸할 뿐이다. 이미 원인 할 곳이 없는데 원인이 생겨 인식이 있다면, 어떤 형상이 되겠으며, 형상이 없다면 경계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뜻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경계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뜻과 법과 뜻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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