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간디는 그것을 늘 끊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마다「기타」를 읽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공부할 때 이것을 외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 붙여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글이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 나는 젊어서 서양 사람의 책을 읽노라면 그 속에「기타」소리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뭔지 내용은 모르지만 흔히 그것을 소개하기를 “기독교의 신약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글인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것은 나의 독서 범위가 좁고 열심이 적었던 때문이지만 또 어디서 곧 찾아볼 수 있으리만큼 소개해준 사람이 없던 탓도 있습니다. 불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몇 천 년 불교신앙의 역사를 가지면서 왜 그것을 몰랐는지, 알고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만 숨겨두었던가? 확실히 그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 소리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던들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그를 찾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항상 더럽힘을 당해서 하나님입니다. 더럽혀도 더럽혀도, 수정에 흙물을 끼얹은 듯,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데 하나님의 하나 된 점이 있습니다.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천하고 못나고 악한 것도 부르고 들어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진리 아니겠습니까?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바가바드기타」가 한 권 끼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 꼴 이냐? 하고 책망하겠지만 그런 줄 스스로도 알면서 나는 이것을 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성자만 전도하란 법 없습니다, 망나니도 해야지. 그래서 바울이 한숨 쉬며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참으로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더 괴롭히기 위해 하지만 어쨌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니 좋다고 그랬습니다. 꿀은 옥단지에 담아도 꿀이요 깨진 바가지 쪽에 담아서 더럽고 다 흘러빠져도, 그래서 단 한 방울이 남아도 꿀이 꿀인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둔하고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진리의 말씀을 완전히 변질 말살 왜곡 은폐할이만큼 타락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경험해봤으니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툰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잘한 이의 것을 비는 것이 옳을 듯해 스와미 프라바바난다(Swami Prabhavananda)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공동 번역에 실린「기타와 마하바라타」 「기타의 우주론」두 장을 우선 실어서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
함석헌
책을 읽기 전에
「기타」와「마하바라타」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라고 한다. 그 맨 첨의 원형대로는 2만 4천 절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갈수록 차차 늘어서 나중에는 10만 절에 이르게 됐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단일한 작품이 아니고 여러 개의 이야기가 모여서 된 것이다. 그 중심 되는 제목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인도 옛날의 바라타 대왕족의 이야기다. 마하(maha)란 크다는 뜻이다.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판두(Pandu) 왕이 죽은 다음 그 자리를 그 동생 되는 드리타라슈트라(Dhritarashtra)가 이어 들어서서 판두의 다섯 왕자, 즉 판다바스(Pandavas)들을 거두어 자기의 일백 왕자들과 함께 양육하게 됐다. 그들이 차차 자라 어른이 되자 판다바스들은 그 경건심과 영웅적인 인격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됐다. 그러자 드리타라슈트라의 맏아들 두료다나(Duryodhana)는 샘을 일으켜 그들을 죽일 계획을 하게 됐다.
무료다나는 계책을 꾸며서 한 멀리 있는 성에 궁궐을 짓고는 판다바스들을 초청해서 어떤 종교적 명절 동안을 그 안에서 지내게 했다. 그 궁궐은 아주 불붙기 쉬운 자료로 지어졌으므로 두료다나의 부하들은 손쉽게 거기 불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궁궐은 다 타 재가 됐지만 판다바스들과 그들의 어머니 쿤티(Kunti) 왕비는 마침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 히 도망할 수가 있었다. 두료다나는 그들이 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에서 브라만(Brahman)족처럼 변장을 하고 지내는 동안 가지가지의 고난을 겪었고 모험을 했다. 어떤 날 그 근처의 국왕이 자기 딸을 위해 사위를 고르는 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 뽑히려면 굉장히 강한 활을 당기어 밟아서 아주 조그만 과녁을 맞혀야 한다고 했다. 판다바스들은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변장한 모습으로 그 성에 갔다.
지망자가 전인도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두료다나도 그 속에 있었다. 그 시험에 모든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다 떨어져나가고 맨 나중에 판다바스의 셋째인 아르쥬나(Arjuna)가 일어나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그 활을 꾸부려 밟아가지고 그 과녁을 맞혔다. 공주 드라우파디(Draupadi) 는 그에게 승리의 화관을 씌웠다. 그러나 거기 모였던 왕자들은 겉보기 에 미천하고 무사답지 못한 브라만 사람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크리슈나(Krishna)가 두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하고 아르쥬나가 신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득을 시키지 않았던들, 마치 율리시즈 이야기 모양으로 큰 싸움이 일어날 형세였다. 크리슈나는 판다바스의 사촌이면서도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은 아닌 사람이었다.
5형제는 드라우파디를 데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는 쿤티게로 나가서 큰 목소리로 “어머니, 우린 아주 놀라운 보배를 얻어왔어요” 했다. 쿤티는 “얘들아, 부디 똑같이 나눠가져야 해”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한 처녀가 아닌가. 그래 어쩔 줄을 모르며 부르짖었다. “아이구머니나, 내가 무슨 소리를 했지!”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어머니의 말은 그 아들들에게는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라우파디는 그 다섯 형제들과 다 같이 결혼을 하게 됐다.
드리타라슈트라와 그의 아들들은 이제 판다바스들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강한 임금과 결탁을 하게 된 것을 알았다. 두료다나는 그 국토를 다 차지하려고 했지만 드리타라슈트라가 어질게도 그 숙부 비슈마(Bhishma)의 조언을 들어 그 5형제를 오라 청하여 왕국의 절반을 갈라주기로 했다. 그리해서 왕국을 둘로 갈랐는데 판다바스들은 쟈무나(Jamuna) 강 유역에 있는 가장 나쁜 황무지를 가지게 됐다. 그들은 그것을 개척하여 훌륭한 도시를 건설하고 맏형 유디슈트라(Yudhishtra)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제 5형제는 승리와 영광의 시대를 맞게 되는 반면 두료다나는 그들을 점점 더 미워하게 됐다. 그는 샘 끝에 또 다른 흉계를 꾸며 그들을 해하려 했다. 경건하고 점쟎은 유디슈트라 왕이지만 한 가지 위험한 약점이 있었는데, 노름을 좋아했다. 그래 두료다나는 그를 보고 아주 꾀많고 사기꾼인 사쿠니(Sakuni)와 같이 골패를 치자고 도전을 했다. 그러면 왕은 체면에 걸려 승낙 아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패를 쳤는데 사쿠니가 협잡을 했기 때문에 왕은 매번 져서, 전재산을 대다가, 왕국을 대다가. 나중엔 자기의 모든 형제, 드라우파디, 자기 자신까지 대서 다 졌다. 마침내 그들은 다 무료다나의 노예가 되어 원수 갚음으로 하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게 됐다. 나중에 드리타라슈트라가 견디다 못해 나서서 중재를 해서 비로소 그들은 자유를 얻고 왕국을 돌려받게 됐다.
그렇지만 무료다나는 끝내 그 아버지에게 졸라서 또다시 골패를 한번 치는 허락을 얻었다. 지는 사람은 제 왕국을 내놓고 산림 속에 은거하여 12년을 지내야하고 그 다음 1년은 성내에서 살되 들키지 않아야 한다. 만일 들키면 그 유배의 기간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유디슈트라는 이번 내기에도 졌다. 그래서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그 불행을 복으로 살려 그동안에 정신적으로 수련을 하며 많은 영웅적 행동을 쌓았다.
한번은 그들이 방랑을 해서 다니는 동안 목이 말라 죽게 되는 지경을 당했다. 막내동생 나클라(Nakula)를 시켜 물을 찾아보라 했다. 그는 찾다가 호수를 하나 발견했는데 맑기가 수정 같았다. 엎드려 마시려 하자 소리가 하나 들려오는데 “가만있어,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대답을 해. 그런 다음 마셔라” 했다. 그러나 나쿨라는 너무 목이 타 죽을 지경이므로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곧 죽어버렸다. 그 손위 형 사하데바(Sahadeva)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가 역시 그 호수를 발견하고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모양으로 해서 4형제가 다 죽었다.
맨 나중 유디슈트라 차례가 왔다. 그는 그 시체들을 보고 울기 시작했는데 그때에 그 목소리가 말하기를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그러면 내가 네 슬픔과 목마름을 다 고쳐줄 것이다” 했다. 그가 얼굴을 돌이켰을 때 그는 의무와 덕의 화신인 다르마(Dharma)가 한 마리 학의 형상으로 자기 옆에 선 것을 보았다.
그 학은 물었다.
“천당에 올라가는 길은 무엇이냐?”
“진실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
“올바른 행실로입니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무엇을 정복해야 하느냐?”
“자기 마음입니다."
“사람은 언제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
“허영심이 없을 때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모든 것 중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자기 둘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한 사람도 제 죽을 것을 믿는 사람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참 종교에 이를 수 있느냐?
“토론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경전에 의해서도, 교리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유익이 없습니다. 종교에 이르는 길은 성인들이 밟아간 그 길입니다.”
다르마는 흐뭇이 여겨 자신을 유디슈트라에게 나타낸 다음 4형제를 살려주었다.
유배의 기한이 다 된 다음 유디슈트라는 그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두료다나는 거절했다. 유디슈트라는 자기를 위해서 다만 한 부락과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각각 한 부락씩이면 만족하겠다고 했지만 탐욕에 정신이 빠진 두료다나는 그것조차도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왕실의 장로들이 중재에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인근의 왕국들도 그 싸움에 말려들기 시작해 나중에는 전인도에 미치게 되었다. 양쪽이 다 크리슈나의 도움을 원했지만 크리슈나는 양쪽에 대해 꼭 같은 조건을 내놓고 택하라고 했다. “내 친족 브리슈니스(Vrishnis) 사람들 모두의 도움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 하나만이든지. 그러나 나는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두료다나는 브리슈니스를 택했고 아르쥬나는 크리슈나 자신을 자기의 차부로 택했다.
싸움을 하게 된 곳은 유명한 순례지인 쿠루크쉐트라(Kuru-kshetra) 들이었다.「바가바드기타」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는 여기서 바로 전쟁이 맞붙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은 18일 동안 계속됐고, 두료다나가 전사하고 승리가 온전히 판다바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후 유디슈트라는 인도의 완전한 통치자가 되어 36년간을 다스렸다.
이 얘기는 드라우파디와 판다바스가 하나님이 계신 히말라야에 순례를 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 도중에서 왕비와 네 형제가 다 죽는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가진 채 천당에 올라가기에 넉넉하리만큼 온전히 순결치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자 왕인 유디슈트라만이 자기의 충성스런 개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이 천당에 다다랐을 때 모든 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는 그를 보고 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유디슈트라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자기도 천당 밖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자기를 믿어주었고 즐겨 자기를 보호해주었던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을 거친 들에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끈질긴 토론 끝에 마침내 개와 임금이 다 허락되어 함께 들어갔다. 그러자 그 개가 바로 다르마로 나타났다. 이것이 유디슈트라의 정신적 위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 다음 하나 더 있다. 왕이 사방을 돌아보니 하늘에는 그의 죽은 대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과 동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인드라는 그를 데리고 한 음산하고 끔찍한 곳으로 갔다. 바로 지옥구덩이다. 유디슈트라는 “저도 여기 있을랍니다. 제게는 그들이 있는 여기가 곧 천당입니다” 했다. 그때에 그 암흑과 끔찍한 것은 사라졌다. 유디슈트라와 다른 판다바스들은 그 나타나 뵈는 지옥과 천당을 지나 참 하나님의 사심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곧 영생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힌두 종교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다. 말하자면 인도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긴 세월을 두고 인도의 정신적 문화적 지적 정치적 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주어왔고 지금도 주고 있다. 인도의 사상가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기타」의 연대는 보통 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놓여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의 의견은 이것이 본래는「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이것이 편집 된 것이 그 서사시보다 후라는 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이것은 독립적으로 있었던 듯하다.「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쟈야(Sanjaya), 아르쥬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성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쉐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쟈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크리슈나소(Krishna)님은 인도의 그리스도라 부름받는다. 사실「바가바드 기타」와 그 밖에 관계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생애와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의 사이에는 놀랄이만큼 비슷한 점이 있다. 양쪽이 다 전설과 사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는「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을 맛보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적 진리를 찾기 위해「기타」나 산상수훈을 읽는 독자에게 역사적인 크리슈나나 역사적인 예수가 정말 존재했든지 말았든지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기타」의 주된 문제는 크리슈나 개인에게는 있지 않다. 그러나 브라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구경(究竟)의 실재 그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말할 때 어떤 때는 하나의 개인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신 자신으로서 말을 한다.
나는 브라만이다.
이 몸 안에 있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니
꺼질 날이 없느니라.
나는 진리요
영원한 즐거움이다.
아르쥬나도 크리슈나에 대하는 그의 자세에 있어서 두 가지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택해서 섬기는 비슈누(Vishnu)의 거룩한 화신이다. 아르쥬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자비로운 무지에 의해 그것을 잊어버린다. 사실 그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한 것은 크리슈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계속 하나님과 같이 있는 그 긴장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거룩한 환상을 본 다음 아르쥬나는 우주의 주를 자기가 “친구요 죽을 수밖에 없는 같은 동류로” 대접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한다. 그는 크리슈나에게 엎디어 용서를 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곧 가셔버린다. 다시 그는 잊어버린다. 우리는 예수의 변화의 환상을 보고 난 다음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도 같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오직 한번 말할 뿐이다. 사실로「기타」전편의 이야기는 다 그의 시작하는 한 마디 질문에 대한 산쟈야의 대답이다.
「기타」의 우주론
다른 모든 힌두교의 문헌과 마찬가지로「기타」도 분명하게 짜인 체계적인 우주론 위에 서 있다. 이 우주론의 홀로 하나인 중심적인 참 것을 브라만(Brahman)이라 부른다. 곧 실재자이다. 브라만은 총체적인 신성(神性)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우파니샤드」(Upanishad)는 브라만을 존재요 지식이요 지극한 즐거움(existence, knowledge, bliss)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속성(屬性)은 아니다. 브라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브라만은 존재 그 자체다. 브라만은 어진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절대적인 지식이요 절대적인 즐거움이다. 아마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표현방법은 “브라만은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 해서 나중에 현상적인 우주 전체가 다 없어지고 오직 브라만이 홀로 남게 되는 일일 것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체, 모든 물체 속에 다 있다. 신성은 사람 속에도, 쥐 속에도, 돌 속, 번개 속에도 나타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의 브라만은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다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조금도 어떤 다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또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그는 모든 거룩한 성격 곧 사랑, 자비, 정결, 정의, 지식, 참을 가지고 있다.
브라만은 절대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브라만이 창조했다거나 파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우주를 창조하고 지지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이슈바라, 곧 브라만이 자기의 능력과 하나가 된 분이다. 이렇게 말함은 반드시 이원론(二元論)은 아니다. 브라만의 능력을 브라만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은 마치 불의 열을 불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과 한가지다. 그러나 철학적 분석이 우리를 그 놀라운 신비 속에 더 들어가게 하지는 못한다. 이슈바라란 생각은 인간의 지능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브라만은 성자들에 의해 도달된 초의식적인 지경에서 체험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지경을 사마디(samadhi) 혹은 신과의 합일(合ᅳ)이라고 한다.「바가바드기타」안에는 이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식별(識別), 정신적 훈련, 명상에 의해서 바깥 세계와의 감관(感官)의 접촉이 온전히 끊어질 때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거기 아트만, 곧 속에 와 계시는 신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모든 신비로운 수양의 하는 방법이요 이날까지 모든 진실한 종교에 의해 가르쳐져온 것이다.
힌두교는 더 나가서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Vishnu)와 시바(Shiva)라 부른다. 브라마는 거룩한 창조의 능력을 표시하고 비슈누는 지지(支持)를, 시바는 분해(分解)를 표시 한다. 시바를 흔히는 파괴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 우주가 파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브라만의 영원한 능력 밑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 영원한 과정은 가능성과 나타남의 두 시대를 번갈아 되풀이하고 있다. 그 돌아가는 바퀴의 끝, 혹은 칼파(Kalpa)가 오면 우주는 분해되어 풀어져 가능성의 시대, 곧 씨의 상태로 들어가서 다음 창조를 기다리게 된다.「기 타」8장에는 이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이 나타남의 시대를 ‘브라마의 낮’이라 부르고 가능성의 시대를 ‘브라마의 밤’이라 불렀다. 이 세계에 살면서 이 바퀴에 속해 있는 모든 산 물건들은 다음에 오는 우주 낮, 우주 밤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나고 또다시 풀어진다. 그러나 이 풀어짐을 결코 신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 산 물건은 다만 자기를 내보냈던 브라만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타나는 때가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그 명칭은 서로 왔다갔다한다.「기 타」에 의하면 이슈바라는 언제나 그가 인간 속에 나고 싶을 때는 프라크리티에서 자기를 위한 몸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으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프라크리티의 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신의 화신이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이다. 사람도 프라크리티와 연합한 아트만이다. 그러나 사람은 프라크리티에 눌려서 미혹(迷惑)되어가지고 자기는 아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트만과 연합한다는 것은 그 미혹을 벗어버리는 일이며 살고 죽음의 길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해탈한 사람은 다시 날 수가 없다. 그는 벌써 프라크리티의 세력 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화신은 절대 그 세력에 속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유자재로 우주에 들고 난다.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나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거룩한 자를 건지기 위해
죄인의 죄를 멸하기 위해
정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 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그때에 성들은 가지가지로 서로 다른 마음과 물체에 따라 이루 헬 수 없는 종류의 배합을 이루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성격은 심령적 물질적 세계에 나오는 그들의 소산물에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성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가령 예 든다면 선성은 햇빛 속에서 우세하고 동성은 폭발하는 화산 속에서, 암성은 화강암덩이 속에서 우세하다.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어떤 때는 이 성이, 어떤 때는 저 성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과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낼 수가 있다. 우리는 동성을 배양함에 따라 암성을 이겨낼 수 있고, 선성을 배양함에 따라 동성을 이겨 낼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지만 구경의 지경은, 선성까지도 초월해서, 성의 위로 성의 저쪽인 아트만에 이르는 일이다.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①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②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③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 대 (五大)라는 지 (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물론 현대의 서양 과학의 가설을 인도의 세계 그림에다 억지로 맞추려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그 둘 사이에 어떤 서로 합하는 점이 있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될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물론 절대적인 실재의 관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것은 브라만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또 신비주의자들의 초의식에 대한 주장을 확인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 하는 말은 결국 이런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종류의 체험을 조사해볼 만한 기술을 가진 것이 없다. 당신들이 브라만을 아노라고 할 때는 당신들은 과학 세계 밖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프라크리티와 성을 생각해본다면 과학과 베단타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도 역시 일원론적인 우주를 분명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화학적인 원소들의 각각 다른 결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원소들은 같은 단원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시종일관 이 세계와 하나요 가장 먼 별과도 하나다.
과학은 마음과 물질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서나 가능성이 있다. 과학자는 아직은 돌 속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는 그것은 아직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진화의 어느 섬에서 생명이 들어갔다는, 어느 점에서 인격이 갑자기 태아나 유아 속에 생기게 됐다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게 말하기를 진화는 완전히 영속적인 것이요 또 일반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이상이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요 끊임없이 변천해 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방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의 진화적 사명은, 마치 콜룸부스가 알 수 없는 서쪽을 향해 항해를 했듯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가는 일이다. 과학적 견지에서 한다면 인간의 사명은 환경과 자기의 관계에 대한 보다 더 큰 지식을 얻어서 그것을 점점 더 잘 통제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실 그 환경이란 자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쥬나와 과학자는 둘 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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