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제4장 수도고행


 1. 왕사성으로 가다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불전의 하나인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 의하면 태자는 아노마하 강반에서 모든 세속의 옷차림과 몸단장을 버리고 말라족의 나라의 아누피야라는 마을에 들어가 그곳의 암바나 숲(망고 숲) 속에서 칠일동안을 보내고 왕사성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먼저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셈이다. 일 길은 왕사성과 사위성과를 연결하는 당시의 큰길의 하나이며, 석존은 성도한 뒤에도 주로 이 길을 따라 두 도시 사이를 왕래한 것이다.
 당시의 인도에는 문명의 중심지가 셋 있었는데 하나는 북쪽 간다라의 타크샤실라이고, 다른 하나는 석존의 고향에 제일 가까운 코살라국의 사위성(舍衛城, 슈라바스티)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마가다국의 왕사성(王舍城, 라자가하)이었던 것이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타크샤실라는 오랜 학문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멀리 이곳을 찾아 유학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북방은 인도 아리안족의 발상의 땅이며, 따라서 상당히 신성시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사위성은 당시의 사대강국의 서울이며, 그 왕국은 상당히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확실히 대도시이고, 또 문명의 한 중심지였을 것은 틀림이 없다. 아마 왕사성에 비하면 구문명을 대표하는 보수적인 도시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왕사성은 인도 아리안족이 점차로 동진하여 갠지스강의 하류에 정착하게 되어 생긴 도시로서 토착민과의 접촉도 잦고 신흥의 기운이 넘치던 도시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 나라의 서울이 화시성(華子城, 파탈리푸트라)으로 옮겨졌지만, 이 나라는 뒤에 전 인도의 정복자가 된 것을 보면 그만큼 신흥의 기운이 충만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새로운 종교 사상가는 대체로 이 도시 근처에서 나왔고 또 그리로 모여들었던 모양이다.
 <숫타니파타>에 의하면 석가는 출가 후 칠일을 보낸 뒤 왕사성으로 왔다. 거리에 나가 탁발을 끝내고 석가는 사람들에게 이 도시의 출가자들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출가자들이 판다바산의 동면에 거처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곳으로 갔다. 코살라국의 보호 밑에 있던 샤카족의 태자가 출가했다는 소문은 그곳의 대왕 빔비사라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빔비사라왕은 시신을 데리고 판다바산으로 가 태자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소?"
 "히말라야산 쪽에 있는, 씨로 말하면 아아딧챠, 성으로 말하면 샥카족 출신이올시다."
 "당신은 아직 젊고, 이제부터 무엇을 하실 분인데 어째서 출가하셨소. 만일 자기 뜻을 펼 수가 없는 까닭이라면 내가 어떤 편의라도 보아드리겠소이다. 다시 한번 속세로 돌아가 보시지요? 이 나라의 절반이 필요하다고 하신다면 절반을 드리겠고, 또 전체를 필요로 하신다면 전체라도 맡겨 드리겠소이다."
 "대왕의 뜻은 매우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구하는 것은 세간의 것이 아닙니다. 생노사를 초월한 출세간(出世間)의 것입니다."
 "당신의 출가의 뜻이 굳다는 것은 그 말씀으로 잘 알겠오. 그만한 결심이라면 반드시 구하는 해탈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오. 그 날에는 다시 이 도시에 와서 나를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알았습니다."
 태자가 왕사성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을 <숫타니파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눈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여 출가하였나,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출가를 기뻐하였나, 그의 출가를 나는 말하기로 한다.
 "이 재가의 생활은 답답하고 번거롭고 먼지가 쌓여 있는데, 출가는 넓고 넓은 들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출가를 한 것이다. 출가 후에는 육신에 의한 악행을 멀리 떠났다. 말로 인한 악행도 버리고 생활을 모조리 정화했다.
 부처님은 마가다국의 산에 둘러싸인 왕사성에 들어갔다. 훌륭한 상호가 넘치는 부처님은 탁발을 하려고 그곳에 간 것이다. 빔비사라왕은 궁전의 고루에 올라서서 그를 보았다. 상호에 가득찬 그를 보고 왕은 이처럼 말하였다.
 "너희들, 저 사람을 보라. 아름답고 크고 맑고 위의가 갖추어져 있고, 그 눈은 앞만을 볼뿐이다. 그는 눈을 아래로 뜨고 조심하고 있다. 이 사람은 천한 집 출신은 아닌 것 같다. 시자들아, 달려가 그 뒤를 쫓아라. 이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부처님이 '눈을 아래로 뜨고 조심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출가 편력행자의 예의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길바닥 위의 벌레까지도 밟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길 위를 주시하면서 조심하여 걷지 않으면 안된다.
 파견된 왕의 신하들은 그 뒤를 쫓아갔다. "이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든 감관을 억제하여 잘 지키며, 올바르게 자각하고 조심하면서 집마다 걸식을 하며 그 바리를 속히 가득 채웠다.
 성자는 탁발을 끝마치고 성밖으로 나와 판다바산으로 갔다. 그는 거기에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처님이 자기의) 거처에 가까이 간 것을 보고, 모든 신하들은 그를 쫓아갔다. 그리고 한 신하는 돌아가 왕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대왕마마, 이 수행자는 판다바산의 굴속에 호랑이나 황소, 그리고 사자와 함께 앉아 계십니다."
 신하의 보고를 듣자, 크샤트리아는 화려한 수레에 타고, 급히 판다바산으로 갔다.
 그 크샤트리아는 수레를 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몰고 가고 거기서 수레에서 내려 걸어가, 그 옆에 가까이 앉았다. 앉아서 왕은 즐겁게 인사말을 교환했다. 인사말을 교환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젊고 청춘에 넘쳐흘러, 인생을 갓 시작한 젊은이입니다. 모습도 단정하고, 집안도 귀한 크샤트리아인 것 같습니다. 코끼리 떼를 선두로 하는 정예한 군대를 정비해서 당신에게 재물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받으십시오. 나는 당신이 어떤 가문의 태생인가를 묻습니다.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의 중복에 한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옛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이며 재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성으로 말하면 '태양의 후손'이라고 하며 종족으로 말하면 샥카족이라고 합니다. 왕이여, 내가 출가한 것은 그 가문으로부터입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욕망에는 우환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출리는 안온이라고 보고 노력정진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마음은 이것을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석존은 이상적인 제왕, 전륜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것을 버리고 종교상의 왕이었다. 세계를 통일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전륜성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브라아만교, 쟈이나교 등에 있어서 공통된 관습이었다. 불교도 그러한 관습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하여 불전은 석가가 그 전륜왕으로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마다하고 종교상의 왕자가 된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2. 두 선인을 찾다

 태자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 먼저 '알라라 칼라마'라는 선인을 찾았다. <불소행찬>에 의하면 이 선인은 빈디야산맥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를 찾기 위해 출발해서 그 도중에 왕사성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고, 그 후 이 선인을 방문했다고 하나 그 장소가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방광대장엄경>에 의하면 알라라 칼라마는 바이샬리시의 근처에 삼백명의 제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팔리경전이 전하는 그 방문 대화의 이야기는 이미 앞서 말해둔 바 있다.
 알라라 칼라마를 찾아보고 난 뒤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았다고 하는데 이 웃다카가 '非想非非想處'를 설했다는 것은 후세의 불전도 승인하는 바다.
 알라라 칼라마가 목표로 하고 있던 경지는 '無所有處'라고 한다. 사실 '無所有'라고 하는 것은 초기 불교시대에는 불교 이외의 일반 수행자들이 한결같이 목표로 삼고 있던 경지였다. 바라문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팔리경전들이 이 '무소유' 즉 '소유하는 바가 없다'는 이상을 빈번히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기 불교는 틀림없이 불교 이전부터 있던 이 불교 이외의 사상을 받아서 그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선정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웃다카 라마풋다는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도 역시 초기의 원시불교가 설하고 있던 것이다. 그 이상은 이를테면 선정에 의해서 '생각'을 없앰으로써 '세계의 넓이란 의식'을 없앤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선정의 단계들이 한 개의 단계, 혹은 방편으로는 그 의의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원시경전들 속에서도 같은 교훈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선인은 단순히 보이기 위한 선정, 다른 기본적 조건을 구비하지 않은 위선적 선정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팔리어 경전 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라아마의 아들 웃다카는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에 실로 환히 아는 자가 있다. 여기에 실로 일체를 이긴 자가 있다. 파버리지 못했던 마디 있는 뿌리를 여기에 다 뽑아버렸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라마마의 아들 웃다카는 환히 알지 못하는 자이면서 "나는 환히 아는 자다"라고 했고, 일체를 이기지 못한 자이면서 "나는 일체를 이긴 자다"라고 했고, 또 마디 있는 뿌리를 파버리지 못한 자이면서 "나는 마디 있는 뿌리를 다 뽑아버렸다"고 말한다. …….
 소전에 의하면 웃다카는 상당히 오만불손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팔리어 경전 중의 다음과 같은 일절도 또 그와 같은 실천 없는 선인의 범용성을 규탄하고 있다. 사미 춘다에 대한 석가의 말이라고 전하는 그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춘다야, 실로 라아마의 아들, 웃다카는 이런 말을 했다. "보되 보지 않는다"라고. 무엇을 보면서 보지 않는 것일까? 날이 선 면도의 표면은 보지만 그 칼날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되 보지 않는다"는 말인 것이다. 웃다카가 말한 것은 비열하다. 범부의 일로서 성스럽지 못하고 의의 없는 것이다. 그는 면도의 그 겉모양만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석가의 말은 그가 최초로 만난 두 선인이 참으로 종교적 진리를 체득치 못하고 있었던 위인이기 때문에 배척할만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3. 악마의 유혹

 수행 중의 태자를 악마가 유혹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거니와 석가 자신이 자기의 회상으로써 술회하였다는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네란자라 강가에서 안온을 얻기 위해 노력정진에 전심하고 명상하고 있던 나에게 악마 '나무치'는 위로의 말을 던지며 가까이 와서 말했다. '당신은 여위고 안색도 나쁘오. 죽을 날이 가까워 오고 있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이란 천의 하나의 예요. 살아야 하오. 사는 편이 낫고 목숨이 있고서야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이오. 당신이 <베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깨끗한 행위, 즉 성화에 물건을 바치고서야 많은 공덕도 쌓을 수가 있는 것이오. 열심히 해서 무엇이 된단 말일까? 노력정진의 길은 가기 어렵고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오.'"
 이런 말을 시구로 엮어 외우고 나서 악마는 석가의 옆에 섰다. 그 악마가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석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태만한 자들, 악한 자여, 너는 선업을 구해서 여기 왔지만 나는 그 선업을 구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좋다.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와 같이 전심하고 있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을 말하는가? 노력정진에서 생기는 이 바람은 강물의 흐름도 고갈시킬 것이다. 일심으로 전념하는 내 몸의 피가 어째서 고갈하지 않을까? 피가 말라버리면 담즙도 담도 마르리라. 육신이 없어지면 마음은 더욱 맑아 온다. 내 염하는 바와 지혜와 선정은 더욱 안립하기에 이른다.
 나는 이와 같이 안주하여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므로 내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보는 일이 없다. 보라, 몸과 마음이 깨끗한 것을. 악마의 첫째 군사는 욕망이며, 둘째 군사는 혐오며, 셋째 군사는 기갈이며, 넷째 군사는 애집이라고 부른다. 악마의 다섯 번째 군사는 태만·수면이고, 여섯 번째 군사는 공포라고 부른다. 네 일곱 번째 군사는 의혹이며, 네 여덟 번째 군사는 허세와 억지다. 잘못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그리고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 이것들은 악마의 군세다. 시커먼 마귀의 공격군이나,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것에 견디지 못한다. 용감한 사람은 능히 승리를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내가 그 원수들에게 항복하고 만단 말일까? 이 속세의 생은 부질없는 것이로다. 나는 져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것을 더 마땅하다고 여긴다. 어떤 도인들, 바라문들은 이 악마의 군대 속에 빠져버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덕행 있는 사람들이 가야할 길도 알지 못하고 있다.
  군세가 사방을 포위하고 악마가 코끼리에 타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서서 그들과 싸울 것이다. 나를 여기서 물러나게 하지 말라. 신들도 속세의 사람들도 그 악마의 군세를 격파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 군세를 지혜로써 파한다. 마치 아직 굽지 않은 흙바리를 돌로 깨뜨려버리는 것과 같이 나 자신 생각을 잘 가다듬고, 염하는 바를 굳건히 하여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편력하리라. 널리 제자들을 인도하면서.
 제자들은 내 가르침을 실행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전심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근심 없고, 욕심 없는 경지에 들어가리라."
 악마는 말하였다 "나는 칠년 동안이나 세존에게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해 가서 성화를 먹였다. 그러나 조심성 있는 정각자에게서는 공격해 들어갈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까마귀가 기름진 살빛을 한 바위를 돌면서 '여기에 부드러운 것이 있을까? 맛있는 것이 있을까?'하고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 까마귀는 거기에서 맛있는 것을 찾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버렸다. 바위 돌에 접근해 갔던 그 까마귀와 같이 우리들은 싫증이 나서 고타마를 버리고 달아났다."
 기가 꺾인 악마의 겨드랑이에서 비파가 철썩하고 떨어졌다. 그러자 그 야차는 의기소침해서 거기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석가에 대한 악마의 유혹을 말하는 최고의 문장이다.
 위의 문장 가운데에 있는 네란자라강은 한역 불전에서는 '니련선하' 등으로 음사되어 있는 강인데, 지금은 파루구강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이 강은 붓다가야 근처를 흘고 있어 우기에는 다소 물이 흐리지만 강가의 모래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태자는 그 옆의 우루벨라촌에서 고행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악마는 칠년 동안 수행 중의 태자를 쫓아다녔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후세의 불전에서는 악마의 유혹과 그것의 극복이 성도 직전의 일인 것처럼 쓰고 있는 것이 많으나 그것은 후세의 불전작자가 성도의 극적 효과를 인상적으로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묘사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에서 먼일일 것이다. 적어도 초기의 불교도들은 후세의 불전작자와는 달리 부단한 정진, 유혹에 대한 칠년 간의 부단한 투쟁이 석가의 수행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경전은 계속해서 갈애, 불만, 탐욕 등 악마의 세 딸이 나타나 기운 없이 돌아온 애비 마왕을 위로하고, 성장을 하여 태자를 유혹하려 했으나, 모두 다 실패하고만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연꽃 줄기로 산을 부수려는 것이나 다름없고, 손톱으로 바위산을 파내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또 이빨로 쇠를 씹는 것이나 다름이 없이' 석가에 대한 유혹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돌아왔다고 경전은 적고 있다. 후세의 불전이 악마의 금강좌 습격과 그 실패를 적은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경전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앞서 인용한 <숫타니파나>에 나오는 악마의 십군은 후대에 이르러, 용수보살도 그 <대지도론> 가운데서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악마란 요컨대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애욕의 별명이다. 집요하게 밀어닥치는 이 모든 애욕의 변화를 격퇴하면 자연히 지견이 맑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서 불교에 있어서 생각된 악마의 종류에 어떤 것이 있었던가에 관해 몇 마디 적어 두고자 한다. 보통 불교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악마를 든다. 즉 천마, 사마, 오온마, 번뇌마의 넷이다. 이 악마들은 모두 마라 파순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그것은 마라 파피마란 범어에서 나온 말이다. 마라란 죽이는 것, 죽게끔 하는 자란 뜻이며 파순이란 악한 자란 뜻이다. 또 악마를 '죽음'이니, '껌정'이니, 혹은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자' 등으로 부르는 수도 있다. 사마라고 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무섭고 싫은 것이니까 그렇게 부른 것이다. 번뇌마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의 역적이란 의미이며, 오온마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심신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색(色, 형태), 수(受, 감각작용), 상(想, 사유생각), 행(行, 행동의지), 식(識, 분별판단) 즉 감관작용과 심리작용을 말한 것이다. 천마라고 하는 것은 제6천의 마왕이라고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좀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소위 삼계설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이 그 윤회의 과정에 들게 될 세 가지 세계를 생각하고 있다. 그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셋이다. 욕계란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다. 거기에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른바 신들의 세계가 또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신들을 흔히 한역 경전에서 천이라고 했고 또 그 천들이 사는 세계도 천이라고 했는데, 그 천에 여섯 가지가 있고 또 그것이 그냥 욕망의 세계이므로 이 세계를 육천이니 또는 육욕천이라고도 한 것이다. 그 육욕천의 제1위가 타화자재천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이를테면 제육천의 마왕인 것이다. 타화자재란 말은 남이 화작한 것을 마음대로 자기의 것으로 향수한다는 뜻인데, 그 천이 마왕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욕계의 왕자,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근본으로 하고 욕망으로 된 인간'이 욕의 지배하에 있을 동안은 욕계왕과 그 배하의 충신이지만 한번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욕심에 반성을 가하고 욕심의 무서운 기반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 그 욕계의 왕과 그 배하는 그것을 막으려고 달려든다. 이것이 곧 악마의 유혹, 습격으로 석가나 그 제자들에게 항상 닥쳐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욕계왕의 지배 밑에 있다는 것은 그 제육천마왕의 배하로서 사마, 오온마, 번뇌마의 무서운 지배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수도의 마음이 생기면 자연히 우리는 그러한 악마들과의 투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지면 그냥 그대로 죄수인 것이며, 이기면 세간을 초월한 출세간의 새 세계가 열려 천마도 도리어 귀화하여 수호를 맹세하고 사마도 자취를 감추고 오온마인 처자권속은 같은 믿음의 길에 들어선 동포가 되고, 육체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그릇이 되고, 번뇌마는 일전해서 보리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여러 가지 종류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기는 하나 결국 세간적인 것을 일괄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후세의 대승불교철학자 용수 보살이 "제법실상을 제외하고 그 외의 일체법을 모조리 마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4. 고행

 흔히 후세의 불전에 의하면, 석가는 산림속에 칩거하면서 육년 동안이나 고행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이 고행의 결과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빛깔은 죽은 재처럼 되었으나 그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침내 고행이 참된 수도의 길이 아님을 알고 마을의 한 소녀가 바친 우유를 마시고 개울에서 몸을 닦고 고행을 버리고 말았다. 기력을 회복하고 나서 그는 붓다가야의 땅으로 가, 거기에 있는 한 나무 밑에 가서 정좌하고 명상하여 드디어 크게 깨닫고 붓다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고 한다.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전설이 후대의 소산일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전설은 아마 불교가 발전해서 다른 여러 종교의 실천법과 다른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태자가 수행한 햇수는 오래된 시구에 의하면 칠년 동안이었다. 어떤 시구에는 석가가 "칠년 동안 자비의 마음을 닦았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실로 태자의 수행의 중심이 자비의 정신을 닦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고행을 통한 수행방법은 그 당시 바라문교도들이 행하고 있던 수행법을 본보기로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석가 자신의 회상으로서 경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는 "그리하여 선한 것을 구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정적한 경지를 찾아 마가다국을 돌아다니다가 우루벨라의 세나 동네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이 실로 수행의 자리로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앉았다. 세나 동네는 바라문촌이었다고 한다. 그 숲속에 홀로 앉아 수행을 한 것이다. 그것은 무척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밧티의 제타 숲에 있을 때 한 바라문 승려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지나간 수행기간을 회상하였다. 바라문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타마, 숲속에 숨어산다는 것, 벽추의 땅에 홀로 있다는 것, 그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하기 어려운 것이요, 혼자 산다는 것은 낙이 없는 노릇이요, 숲은 정신통일을 얻지 못한 수행자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대해 석가는 대답하기를 "바라문아, 나도 깨닫기 전에는 꼭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네"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이런 생각이 생겼소. 누구든지 어떤 도를 닦는 사람이든지 몸과 입과 마음의 모든 행위 모든 생활이 아직 온전히 맑아져 있지 않을 때, 숲속에 숨어 살고, 벽지에 홀로 있다면 그렇게 모든 행위와 생활이 아직 온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때문에 좋지 못한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행위와 생활이 아직 온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채 숲속에 숨어 벽지에 홀로 사는 것이 아니오. 나는 그 모든 행위와 생활이 깨끗해진 성자로서 숲속에 살며, 한적한 곳에 홀로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오. 나는 몸과 입과 마음의 행동, 생활이 깨끗해지는 것을 나 스스로 깨달았으므로 숲속에 사는 것에 더욱 자신을 얻었소.
 어떤 사람이든 도를 닦는 사람이 탐욕하고, 애욕이 강하고, 질투의 마음, 분노하는 마음, 나쁜 의욕이 있고, 또 침울하거나 혹은 잠이 많고, 마음이 산란하여 고요하지 못하고, 의심 많고, 깨닫는 마음이 적고,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훼방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이익과 존경, 인기를 얻고자 원하며, 태만하여 노력하지 않고, 실념하여 주의 깊지 못하며, 마음의 통일이 없고, 산란해 있으며 숲속에 숨어 살며, 벽지에 홀로 산다면 그런 사람들은 실로 그런 까닭에 좋지 않은 공포와 불안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오. ……
 바라문, 그래서 나는 특정한 날 밤, 즉 반월 때마다, 14일 15일 및 8일 밤에, 숲속의 신령한 곳, 나무 밑의 신령한 곳, 무섭고 솜털이 일 지경인 그런 곳에 자리를 마련하고 머물러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오. ……
 내가 그렇게 하고 있을 때 짐승이 내 곁으로 가까이 오고, 공작은 나무가지를 떨어뜨리고, 바람은 낙엽을 불어 흔들었소. 그때 나는 이제 정말 무서움, 두려움이 생기나보다 했소. 그때 나는 '왜 공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오면 오는 그대로 그 무서움과 두려움을 배제해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었소. 그래서 내가 천천히 걷다가, 섰다가, 앉았다가, 누웠다가 할 때에 그 무서움과 두려움은 닥쳐왔고, 나는 그러면서 그 무서움과 두려움을 제거해 버릴 수 있었소."
 석가 자신의 회상으로서 기록된 많은 경전의 구절은 그 고행이 매우 심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행동, 그 실천, 그 난행으로써도 나는 인간의 성질을 넘어선 특별히 온전한 성스러운 지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고 있고, 또 다른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술회가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극도로 여윈 몸으로서는 그 안락을 얻을 수가 없다. 자, 이제는 음식다운 음식인 유미죽을 먹었다. 그때 내게는 다섯 명의 수행자가 가까이 와, '수행자 부처님이 만일 법을 얻으면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던 참이다. 그런데 내가 이 유미죽을 마신 탓으로 그 수행자들은 나를 싫어하여 '수행자 고타마는 욕심 있는 사람으로 노력정진하기를 저버리고 사치해졌다'하고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음식다운 음식물을 취학 힘을 얻어 모든 욕망을 떠나고 불선한 일들을 떠나서, 그 결과로 생긴 기쁨이며 즐거움인 초선을 얻어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그 뒤에 사선의 하나하나를 얻은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이 그대로 들어 있는 한역은 없다. 그리고 이 팔리어 구절도 상당히 후세에 편찬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어쨌든 고행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비교적 후세의 경전일수록 더 상세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섯 사람의 수행자는 후대의 어떤 불전에 의하면 태자의 둘째 스승 웃다카 라마풋타 밑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가 태자가 짧은 시일 안에 선생이 도달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을 알고, 그들의 선생 웃다카를 버리고 태자를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라 한다. 태자와 이 다섯 사람의 수행자는 가야산정으로 가서 한 나무 밑에 풀을 깔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유미를 취했다'고 하는데, 후대의 불전에 의하면 우루벨라의 세나니촌의 장자의 딸인 수자타란 처녀가 유미를 바친 것이라고 한다. 다른 불전에 의하면 우루벨라촌의 촌장인 '세나파티'란 사람에게 열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은 보살이 이미 고행을 버린 것을 알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바쳤다. 며칠 안가서 얼굴 모습은 환하게 빛나게 되었다." 열 명의 딸 중 제일 젊은 사람이 수자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행을 버렸다는 전설에도 발전된 흔적이 보인다.
 초기의 불경에는 고행을 권장하고 있는 곳이 많다. 불교도도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명언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도가 행하는 고행이라는 것이 자이나교도의 고행에 비한다면 훨씬 쉬운 것이었음은 틀림없다.
 자이나교도들은 스스로 '고행에 의해 악을 싫어하고 멀리 떠나는 자'라고 칭하고, ① 모두 냉수를 쓰지 않는다, ② 모두 악을 배척한다, ③ 모두 악을 배척함으로써 악에서 떠난다, ④ 모든 악을 떠나기에 이른다. 이런 네 가지 제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냉수를 쓰지 않는 이유를, '그 속에 적은 벌레가 있을 수 있어 그것을 마심으로써 살생의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엄한 고행은 불교도가 채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