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2 오온[蘊] ⑨ 장로 품 ⓒ
■ SN 22.88 - 앗사지 경
8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앗사지 존자는 깟사빠까 숲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있었다. 그리고 앗사지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십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앗사지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앗사지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어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가만히 있거라, 앗사지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 겠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앗사지여, 그대는 참을만한가? 그대는 회복될 것 같은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고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에게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
“앗사지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앗사지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앗사지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전에 제가 병으로 아팠을 때는 몸의 작용을 계속적으로 고요하게 하면서 제4선에 들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앗사지여, 삼매를 닦음의 중심으로 여기고 삼매를 사문의 결실이라 여기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삼매에 들지 못하면 그들에게 ‘우리는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앗사지여, 이와 같이 보는 비구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집착할만 것이 못된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즐거워할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집착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즐거워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집착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즐거워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앗사지여,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앗사지여,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철저히 안다.
“예를 들면, 앗사지여, 기름을 조건으로 심지를 조건하여 기름 등불이 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등불에 시시때때로 기름을 부어넣지 않고 심지를 올려주지 않으면 그 기름 등불은 꺼질 것이다.
앗사지여, 그와 같이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몸이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거워할만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철저히 안다.”
■ SN 22.89 - 케마까 경
8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렀다. 그 무렵 케마까 존자는 도자기 굽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로 비구들은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다사까 존자를 불러서 말했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참을만 합니까? 그대는 회복될 것 같습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참을만 합니까? 그대는 회복될 것 같습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반이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
그러자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움 느낌이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라고.”
그러자 장로 비구들은 다사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을 설하셨습니다. 즉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감수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지각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형성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입니다.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까?’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까?’라고”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 다사까여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그런데 만약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도반이여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그런데 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들 가운데 그 어느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나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물질적 요소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는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라고."
“도반 다사까여,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왜 그대가 이런 일로 왔다갔다해야 합니까? 도반이여, 지팡이를 주십시오. 내가 장로 비구들에게 직접 가겠습니다.”
그러자 케마까 존자는 지팡이를 짚고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케마까 존자에게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적 요소를 두고(물질적 요소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물질적 요소를 떠나서(물질적 요소와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무엇입니까?”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적 요소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두고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비록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들 가운데 그 어느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향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꽃잎의 냄새다.'라거나, '줄기의 냄새다.'라거나, '꽃가루의 냄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도반이여, 바르게 말하는 자는 '꽃의 향기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적 요소를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두고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비록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턷음이 나에게는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이렇게 물질적 요소가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감수작용이 있고 … 이렇게 지각작용이 있고 … 이렇게 형성작용들이 있고 … 이렇게 식별작용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사라짐이 있다.’라고.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 뽑힙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더럽고 때가 묻은 천이 있습니다.주인이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러면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비벼서 맑은 물에서 씻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천은 청정하고 깨끗하게 되었지만 (미세한)소금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뿌리 뽑히지 않았습니다. 세탁업자가 이런 천을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주인은 그 천을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에 넣습니다. 그러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소금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도 제거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이렇게 물질적 요소가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감수작용이 있고 … 이렇게 지각작용이 있고 … 이렇게 형성작용들이 있고 … 이렇게 식별작용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사라짐이 있다.’라고.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 뽑힙니다."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케마까 존자를 귀챦게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가르침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가르침을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였습니다.”
케마까 존자의 말을 들은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즐거워하면서 케마까 존자의 말을 기뻐했다. 그리고 이 상세한 설명이 말해졌을 때 60명의 장로 비구들과 케마까 존자는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 SN 22.90 - 찬나 경
90. 한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찬나 존자는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열쇠를 가지고 이 승원 저 승원으로 찾아 다니며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본경은 찬나에게 이러한 최고의 처벌이 내려진 후에 생긴 일화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찬나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감수작용은 무상하고, 지각작용은 무상하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식별작용은 무상합니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감수작용은 무아이고, 지각작용은 무아이고, 형성작용들은 무아이고, 식별작용은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작용들(형성된 것들.제행무상(諸行無常)은 무상이고,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제법무아.諸法無我).
그때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감수작용은 무상하고, 지각작용은 무상하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감수작용은 무아이고, 지각작용은 무아이고, 형성작용들은 무아이고 식별작용은 무아이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모든 법들은 무아다’라고. 그러나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작용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근거를(붙잡음)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떠남, 소멸, 열반에 대해 나의 마음은 들어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동요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 참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그래서 찬나 존자는 거처를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꼬삼비에 있는 고시따 숲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찬나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한때에 저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렀습니다.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열쇠를 가지고 이 승원 저 승원으로 찾아 다니며 장로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장로 비구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 찬나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감수작용은 … 식별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식별작용은 무상합니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 식별작용은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무상이고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라고. 도반이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 감수작용은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 식별작용은 무아이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모든 법들은 무아이다.'라고. 그런데 모든 형성작용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탐욕의 떠남이고, 소멸인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모든 재생의 근거를(붙잡음)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떠남, 소멸, 열반에 대해 나의 마음은 들어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동요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도반이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 참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말씀을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도반 찬나여, 나는 찬나 존자의 말을 듣고 이치에 맞는 의문과 질문때문에 기쁩니다. 그리고 찬나 존자는 이제 스스로를 활짝 열었고 자신의 방만함을 부수었습니다. 도반 찬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단지 그정도의 말씀으로도 ‘참으로 나는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시는구나!’라고 커다란 희열과 환희가 생겼다.
“도반 찬나여, 나는 세존의 앞에서 깟짜나곳따 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그러나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없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있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경향과 집착에 묶여 있다. 그런 마음의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결정과 경향과 잠재성향에게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접근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일어나고 있는 괴로움은 일어난다. 소멸하고 있는 괴로움은 소멸한다).’라고 회의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이런 점에서 바른 견해이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한끝이다). ‘모든 것은 없다.’라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두 번째 끝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벗어나서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형성작용들)이 있다.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식별작용)이 있다.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명색)이 있다.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감수작용)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있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기 때문에 행들이 소멸한다. 행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별작용이 소멸한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도반 아난다여,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수행자들을 연민하고 그의 이로움을 원하여 충고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그리고 저를 위한 아난다 존자의 이 설법을 듣고서 저는 법을 이해했습니다.”
■ SN 22.91 - 라훌라 경 ①
91. 그 무렵 라훌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쪽에 앉았다.한쪽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식별작용(의식)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보의, 혹은 거칠건 미세한, 혹은 열등하건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본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보의, 혹은 거칠건 미세한, 혹은 열등하건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본다.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식별작용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 SN 22.92 - 라훌라 경 ②
92.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우리의 마음은 식별작용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서 ‘나’라는 생각과 ‘의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평화롭게 되고 원만하게 잘 해탈하게 됩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실하게 알아차려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마음은 식별작용을 가진 이 몸과 밖의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평화롭게 되고 해탈하게 된다.”
제9장 장로 품이 끝났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