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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아난에게 견성의 실상을 설하다

 

이때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가 사부대중을 가련하게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중이 여래께서 밝히신 정교한 보는 작용이 색과 공인지, 아닌지에 대한 두 가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앞에 인연하는 색과 공 등의 모양이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라면 반드시 가리켜 보일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볼 수 없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중은 지금 이 뜻이 돌아간 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고 있을 뿐, 옛날부터 바른 근성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베푸셔서, 이 온갖 물상과 보는 정기는 원래 무엇이 길래, 그 중간에 그렇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문수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 여래와 뛰어난 보살들이 스스로 머문 삼마지 가운데는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와 생각하는 모양들은 허공 꽃과 같이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라. 이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는 원래 깨달음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데, 어찌 이 가운데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있겠느냐?
문수여, 너에게 묻겠노라. 너 그대로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은 문수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문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은 문수다라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문수다라고 한다면, 바로 두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변함없는 문수이니, 이 가운데 참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두 모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과 허공과 온갖 경계도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고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와 허공과 보고 듣는 작용으로 변했으니, 마치 곁 달을 보면서 어느 것은 달이고, 또 어느 것은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수여, 단지 참 달 하나뿐이니,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보는 정기와 경계를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작용은 허망한 생각이니, 그 가운데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경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이기 때문에 가리켜 밝힐 수 있다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경계에서 너를 벗어나게 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은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고요한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서, 그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을 예전의 범지 사비가라가 말하는 '명제'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외도 및 온갖 외도들이 말하는 '참 나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 어떻게 다릅니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에서 대혜보살 등에게 이 뜻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이라고 설하나, 내가 말한 인연은 저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제 살펴보니, 깨달음의 성품은 자연으로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멀리 일체 허망한 뒤바뀜을 벗어났으므로, 인연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야만 온갖 사견에 들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성품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줬는데,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과 헷갈리는 것이냐?
아난아, 만일 틀림없이 자연이라면 '저절로'가 반드시 분명하여 자연의 체가 있어야 한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게 보는 작용에서 무엇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이 보는 작용을 밝음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어둠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빈곳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막힘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또 만일 빈곳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갖 어둠 등의 모양을 자체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겨 없을 텐데 어떻게 밝음을 보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저는 이제 인연으로 생긴다고 밝히려 하나, 제 마음은 오히려 아직 분명하지 못해서 여래께 묻습니다. 이 뜻은 어떻게 해야 인연의 성품에 부합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노라. 너는 지금 보는 작용으로 인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하니, 이 보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 곳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만일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빈 곳과 막힘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예와 같다.
아난아, 이 보는 성품은 또 밝음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빈 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 하며, 만일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빈곳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밝음과 어둠을 연하는 경우도 빈 곳과 막힘의 예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묘한 밝음은 인도 아니고 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가운데, 일체의 모양을 떠나서 일체의 법과 일치하느니라. 너는 어째서 이 가운데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하는 온갖 명상으로 분별하려는 것이냐?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듯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인데,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이 인도 아니고 연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비구들에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에 네 가지 연을 갖췄으니, 이른바 빈곳을 인연하고 밝음을 인연하고 마음을 인연하고 눈을 인연한다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세간의 인연상을 설했을 뿐, 가장 뛰어난 뜻을 설한 것이 아니다.
아난아, 또 네게 묻겠노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라 하고,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이 보이면 보는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밝음이 없을 때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분명 어둠을 본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을 뿐이지, 어째서 보는 것이 없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어둠 속에 있을 때 밝음을 못 본다는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밝은 데 있으면서 어두운 모양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두 모양을 함께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리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빼앗아 바뀔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밝음과 어둠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분명히 알라. 밝음과 어둠을 둘 다 보는 것인데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밝음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빈곳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빈곳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막힌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네가 물은 네 가지 뜻이다.
너는 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는 정기를 볼 때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 진견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이라고 하겠느냐?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을 모르고 있느니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 곰곰이 잘 생각하여 묘한 깨달음의 길에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과 모든 화합상과 화합하지 않는 이치를 말씀해주셨으나, 여기에 마음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이제 다시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지금은 더욱 미혹하여 답답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넓으신 사랑으로 큰 지혜의 눈을 베푸셔서 저희들에게 깨달음의 마음을 밝혀 맑히는 법을 깨우쳐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슬피 울며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거룩한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이때 세존께서는 아난과 대중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장차 대다라니와 모든 삼마제와 묘한 수행의 길을 설하시기 위하여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기억력이 좋을지라도 단지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 채웠을 뿐, 사마타의 미세하고 심오한 관조의 지혜는 아직 마음속 깊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나는 너를 위해서 분별하여 열어 보이고, 또 장래의 번뇌에 얽힌 중생들도 깨달음의 과위를 얻게 하리라.
아난아, 일체 중생이 세상에서 윤회하는 것은 두 가지 뒤바뀌어 분별하는 허망한 보는 작용을 따라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여 바로 그 업으로 바퀴 돌 듯 구르기 때문이니라.
두 가지 보는 작용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요. 둘째는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다.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세상 사람들 가운데 눈에 붉은 삼 병이 있는 사람은 밤에 등불에서 남달리 5색이 둥글게 겹친 등 무리를 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밤 등불에 밝게 나타난 등 무리를 등불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보는 작용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일 이것이 등불의 색이라면 삼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등 무리를 보지 못하는데, 어째서 오직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이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만일 보는 작용의 빛이라면 보는 작용은 이미 빛이 되었는데, 저 삼 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등 무리는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또 아난아, 만일 이 등 무리가 등불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옆자리의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돗자리를 볼 때에도, 당연히 등 무리가 나와야 하며, 보는 작용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분명 눈이 보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은 눈으로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빛은 실제로 등에 있으며, 보는 작용의 병이 등 무리가 되었느니라.
등 무리와 보는 작용이 다 삼 병일지라도, 삼 병을 보는 자체는 병이 아니니, 끝내 등 무리를 놓고 등 탓이다 보는 작용 탓이다라고 말하거나, 그 가운데서 등 탓이 아니요 보는 작용 탓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곁 달은 달 자체도 아니고 달그림자도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곁 달은 눈을 눌러 생겼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이 눈을 눌러 생긴 곁 달의 근원을 두고 '달 모양이다 달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보는 작용과 보는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벗어났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등 무리도 역시 그러하여 삼 눈병으로 생겼는데, 이제 무엇을 이름하여 등 탓이다 보는 탓이다라고 하겠으며, 어찌 더욱이 '등 탓이 아니다 보는 탓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려고 하겠느냐?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이 남섬부주에는 큰 바다를 제외한 중간의 육지에만 3천 섬이 있는데, 한 복판의 대륙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한데 묶어 세어 보면 2천 3백 개의 큰 나라가 있느니라. 그 나머지 작은 섬은 여러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3백 나라 2백 나라가 있기도 하고, 또 한 나라 두 나라로부터 서른 나라 마흔 나라 쉰 나라까지 있기도 하다.
아난아, 만일 이 중 어느 한 작은 섬에 단 두 나라만 있는 데서, 오직 한 나라 사람들만이 공동으로 나쁜 인연에 물들었다면, 그 작은 섬의 해당 국토 중생은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된다. 혹은 두 해를 보기도 하고 두 달을 보기도 하며, 내지 햇무리, 월식과 일식, 해의 귀걸이, 살별, 사방으로 뿔 돋친 별, 빗겨 나는 별똥 별, 아래로 흐르는 별똥 별, 해를 등진 무지개, 암수의 쌍무지개 등 가지가지 나쁜 모양을 보느니라. 이 모양은 단지 이 국토 중생들만 볼 뿐이며, 저 국토 중생들은 본래 본 바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이 두 가지 일을 앞뒤로 맞춰서 밝혀보리라. 저 중생이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으로 본 등빛에 나타난 등 무리가 비록 경계와 유사하게 나타났을지라도, 결국 저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뤄졌으니, 삼 병은 보는 작용이 피로하여 나타난 모양일 뿐, 빛 자체에서 만들어진 모양이 아니다.
그러나 삼 병을 보는 자체는 결국 보는 자체의 허물이 없느니라.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작용에 견주어 보면, 모두 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병으로 이뤄진 모양이니라.
보는 작용과 보는 작용의 인연이 앞에 나타난 경계인 듯하나, 원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으로 허망하게 인연 대상을 보는 삼 병이니, 깨닫고 보는 것이 곧 삼 병이지만, 본각의 밝은 마음으로 인연을 깨치는 것은 삼 병이 아니니라.
그러니 깨달아야 할 삼 병을 깨달으면, 이 깨달음은 삼 병 가운데 있지 않느니라. 이것이 참으로 보는 정기를 보는 진실한 봄이니, 어찌 깨닫고 듣고 알고 보는 허망한 마음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 자신을 보고 모든 세간의 온갖 중생을 볼지라도, 다 보는 작용의 삼 병이요, 삼 병을 보는 진실한 자체가 아니다. 저 보는 작용의 정밀하고 진실한 성품은 삼 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작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저 중생들이 본 공동 몫의 허망한 보는 작용을, 저 허망하게 본 개별 업의 한 사람에 견주어 보면, 눈에 삼 병 걸린 사람은 저 한 나라와 같다. 또 저 한 사람이 본 등 무리는 삼 병으로 허망하게 생겼으며, 이 공동의 몫으로 본 불길한 모양은 공동으로 보는 업의 전염병처럼 나쁜 기운에서 일어났으니, 모두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허망에서 생겼느니라.
염부제의 3천주 가운데 네 큰 바다를 겸한 사바세계와 아울러 시방의 모든 번뇌가 있는 국토와 중생들을 견주어 보면, 다같이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 화합하여 허망하게 죽는 것이니라.
만일 모든 화합하는 인연과 화합하지 않은 것을 멀리 벗어날 수 있다면, 온갖 나고 죽는 원인을 멸하여 없애고, 원만한 깨달음의 생멸을 떠난 성품이요, 청정한 본래 마음인 본래 깨달음이 영원히 머물게 되리라.
아난아, 네가 비록 앞서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아난아, 내가 이제 또 앞 경계를 들어 너에게 물어보리라. 너는 지금도 오히려 일체 세상의 망상으로 화합한 온갖 인연의 성질을 가지고 스스로 보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의혹하고 있느니라.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어울렸느냐, 어둠과 어울렸느냐? 통함과 어울렸느냐, 막힘과 어울렸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렸다면 또 너는 밝은 것을 보아라. 밝은 것이 바로 눈앞에 닿아 있으니 어느 곳에 보는 정기와 섞였느냐? 보는 정기와 밝은 모양은 가려낼 수 있을 테니, 섞인 것은 어떤 형상이냐?
만일 밝은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밝은 모양을 보겠느냐? 만일 밝음이 곧 보는 정기라면 어찌 보는 정기 자체를 보겠느냐?
만일 분명 보는 정기가 원만하다면 어느 곳에 밝음과 어울리겠으며, 만일 밝음이 원만하다면 당연히 보는 정기와 어울리지 못하리라.
보는 정기는 분명 밝음과 다르므로, 섞이면 저 성품이 밝다는 명분을 잃게 되며, 섞여서 밝은 성품을 잃었으니, 밝음과 어울린다는 말은 옳지 않다.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린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또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합하였느냐, 어둠과 합하였느냐? 통함과 합하였느냐, 막힘과 합하였느냐?
만일 보는 정기가 밝음과 합하였다면, 어두울 때는 밝은 모양은 이미 사라져서, 이 보는 정기는 온갖 어둠과 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어둠을 보겠느냐?
만일 어둠을 볼 때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했다 하며, 밝음이 어둠이 아닌 줄을 알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한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사유해보니 이 미묘한 깨달음의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와 마음으로 생각하는 작용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또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내가 다시 네게 묻겠노라. 이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어둠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통함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막힘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고 어디까지가 보는 정기의 경계이냐? 또 보는 정기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느냐?
아난아, 만일 밝은 경계 안에 보는 정기가 없다면, 서로 닿지 않아서 그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경계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리는 예와 마찬가지다.
또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하지 않았느냐? 어둠과 합하지 않았느냐? 통함과 합하지 않았느냐? 막힘과 합하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합하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이 그 성질과 모양이 서로 어긋나서 마치 귀와 밝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아도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히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하는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너는 오히려 아직도 일체 실속 없이 뜬 경계에서 환술처럼 변화하는 온갖 모양이, 바로 그 곳에서 생겨났다가 그 곳을 따라 사라져버림을 밝히지 못하여, 허망한 환영을 모양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진실 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음과 6입과 12처에서 18계에 이르기까지,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난다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지만, 단지 이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옴이 본래 여래장으로서, 영원히 머물러 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고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의 성품임을 잘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성품의 진실하고 영원불변한 가운데서는 아무리 가고 옴과 미혹하고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 없느니라.
아난아, 어째서 5음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허공을 볼 때, 오직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맑게 개인 빈곳만을 보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게 바로 뜬눈이 피로해지면, 허공에서 따로 어물거리는 헛꽃을 보기도 하고, 또 일체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온갖 어물거리는 헛꽃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드나듦이 있다면 허공이 아니며, 허공이 만일 빈 것이 아니면, 스스로 그 꽃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눈에서 나왔다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이 꽃의 성질이 눈에서 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보는 작용이 있어야 하며, 만일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에서 꽃이 되었으니, 돌아와서는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한다. 만일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하리라. 또 꽃을 볼 때도 눈에는 당연히 가린 것이 없는데, 어째서 맑은 허공을 보아야만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색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과 발이 편안하고 온 뼈마디가 고루 화평하여 살아 있다는 것도 잊고 마음에 어기고 따르는 일도 없는 가운데, 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허공에서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빈다면, 두 손 사이에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한 여러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수음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모든 허망한 촉감은 허공에서 오지도 않고 손바닥에서 나오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손바닥은 촉감을 잘 아는데 어째서 몸에는 촉감이 없느냐? 허공이 닿을 곳을 가려서 닿게 하지는 않으리라.
만일 손바닥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두 손바닥이 합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또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쳤을 때 손바닥이 알았다면, 떼었을 때는 촉감이 들어갈 것이니, 손목과 팔목의 골수들도 마땅히 들어갈 때의 종적을 느껴야 한다. 또 반드시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나오는 것을 알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저절로 한 물체가 몸 속을 오고 가는 것이니, 어째서 마주 합하기를 기다려서 알아야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수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신 매실을 말하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높은 벼랑을 밟는다고 생각하면 발바닥이 껄끄럽고 시쿰한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상음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아난아, 시다는 말에서 생긴 침은 매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입으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침이 매실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매실 자체가 말해야 하는데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느냐?
만일 입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어찌 꼭 귀를 기다려 듣겠느냐? 만일 귀로만 듣는다면 이 침은 어째서 귀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냐?
높은 벼랑을 밟아 오른다는 생각도 매실 비유와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상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세찬 흐름이 물결을 서로 이어 흐르면서 앞뒤를 서로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이, 행음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흐름의 성질은 허공을 근거로 생기지도 않고, 물을 근거로 있지도 않으며, 물의 성질도 아니고, 허공과 물을 떠나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을 근거로 생긴다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은 끝없는 흐름을 이루어 세계는 자연히 온통 물 속에 빠져 잠기리라.
만일 물을 근거로 있다면 이 세차게 흐르는 성질은 당연히 물이 아니니, 물의 소유한 모양이 있으면 마땅히 지금 눈앞에 뚜렷이 보여야 한다. 만일 그 흐름이 물의 성질이라면 맑고 고요할 때는 분명 물 자체가 아니어야 한다.
만일 허공과 물을 떠나서 흐름이 따로 있다면 허공은 바깥이 있지 않으며, 물을 떠나서는 흐름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행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빈가병을 취하여 두 구멍을 막아서 그 속에 공기를 가득 채우고 천리의 먼 길을 행하여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식음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허공은 저 곳에서 오지도 않고 이 곳에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저 곳에서 왔다면 그 병 속에 이미 허공을 담아서 가지고 갔으니, 그 병이 있었던 자리의 허공은 마땅히 조금 적어져야 한다. 만일 이 곳에서 들어간다면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일 때는 당연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식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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