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석분 2) 생멸문 : 대치사집
다시 다음에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가는 법을 드러내어 보이리니,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과 마음을 추구하는 일이다. 육진(六塵)의 경계는 끝내 생각이 없고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에 구하여도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미혹한 까닭에 동(東)을 서(西)라고 해도 실제로 본래의 방위는 바뀌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무명으로 미흑한 까닭에 마음을 생각이라 여기나 실제로 마음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일 관찰해서 마음에 생각이 없는 줄 깨달으면 곧 수순하여 진여의 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대치사집(對治邪執)이라 함은 모든 삿된 집착은 모두가 ‘나’라는 소견(我見)에 의한 것이니, 만일 ‘나’를 여의면 삿된 집착이 없어진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아견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요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인아견이라 함은 모든 범부에 의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하나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여래의 법신은 필경에 적막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 한 것을 듣고도 집착을 깨뜨려 주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허공이 곧 여래의 성품이라 하나니, 어떻게 대치(對治:물리침)할 것인가?
허공의 모습은 허망한 법인지라 본체가 없어서 실답지 않으나 색을 상대하는 까닭에 이러한 볼 수 있는 모습(可見相)이 있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한다. 그리하여 일체 색법은 본래 마음인지라 실로 바깥 색이 없고 만일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뿐이건마는 허망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일 마음의 허망한 움직임을 여의면 오직 하나의 참마음뿐이어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이를 여래의 광대한 본성지혜(性智)의 마지막 이치(究竟義)라 이르나니, 허공의 모습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세간의 모든 법이 끝내는 바탕이 공하며, 나아가 열반이나 진여의 법까지도 역시 끝내 공이니, 본래부터 저절로 공하여 일체 상을 여의었다” 한 것을 듣고도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여와 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뿐이라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진여ㆍ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않음을 밝히니, 무량만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여래장(如來藏)은 늘고 줄어듦이 없어서 자체에 일체 공덕이 되는 법을 갖추고 있다” 한 것을 듣고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장에는 색ㆍ심 등 모든 법의 제 모습이 차별되게 존재한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직 진여에 의해 설한 까닭이며, 생멸의 물든 이치를 인하여 시현(示現)해서 차별되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일체 세간의 생사와 물든 법이 모두가 여래장에 의해서 있는 것이므로 일체 모든 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 한 것을 듣고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이 구족해 있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여래장이 본래부터 항하사 수보다 많은 등의 모든 맑은 공덕이 있어 여의지도 않고 끊이지도 않아서 진여와 다르지 않은 이치만이 있기 때문이며, 항하사 수보다 많은 등의 모든 번뇌와 물든 법은 오직 허망으로 있는지라 성품이 본래 없는 것이어서 끝없는 옛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하지 못한 까닭임을 밝힌다. 만일 여래장의 본체에 허망한 법이 있는데 그를 증득해 알면 영원히 쉬게 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여래장에 의거한 까닭에 생사가 있고, 여래장에 의거한 까닭에 열반을 얻는다” 한 것을 듣고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중생이 시초(始)가 있다 하고, 시초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얻은 열반도 끝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여래장이 전제(前際)가 없는 까닭에 무명도 또한 시초가 없다고 말한다. 만일 삼계 밖에 다시 어떤 중생에게 비로소 일어남이 있다면 이는 곧 외도(外道) 경전의 말일 것이다. 또 여래장에는 후제(後際)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얻은 열반도 상응하여 후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법아견(法我見)이라 함은 둔근(鈍根)인 이승에 의한 까닭에 여래께서 인무아(人無我)만 설해 주셨으나, 그 설이 완벽한 구경은 아니므로 오음(陰)의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여기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허망하게 열반을 취하려 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음법은 제 성품이 생하지도 않고 멸함도 없어서 본래부터 열반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끝까지 허망한 집착을 여읜다 함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물든 법과 맑은 법이 모두가 서로 기다렸을 뿐 설할 만한 제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본래부터 색도 심도 아니며, 지혜도 식도 아니며, 있음도 없음도 아니어서 끝내 설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언설(言說)이 있는 까닭은 마땅히 여래의 선교방편으로 언설을 빌려 중생을 인도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본뜻은 모두가 다 상념을 여의고 진여에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해서 진실한 지혜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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