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석분 3)분별발취도상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도에 일체 보살이 발심 수행해서 향해 나아가는 이치이다. 간략히 말하면 발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
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떤 사람이 어떤 행을 닦아야 믿음(信)이 성취되어 능히 발심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른바 부정취(不定聚) 중생이 선근을 훈습한 힘이 있음을 의하는 까닭에 업의 과보를 믿어 능히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수행하여 일만 겁을 지나면 신심이 성취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들로 하여금 발심케 하는 것이다. 혹은 대비심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바른 법이 멸하고자 함을 인하여 법을 보호하려는 인연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이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끝내는 물러나지 않게 되나니, 이를 일러 여래의 종자 속에 머물러서 바른 인(正因)에 서로 응한다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약하여 여러 겁 이래로 번뇌가 두터우면 비록 부처님을 만나서 공양을 올린다 해도 겨우 인간과 하늘의 종자를 일으키거나, 혹은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면 설사 대승을 구하는 이가 있더라도 근기가 안정되지 않나니, 혹 전진해 나아가고 흑 후퇴하기도 하는 것이다. 혹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 해도 일만 겁을 지나기도 전에 도중에서 인연을 만나 발심하는 이도 있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색상(色相)을 보고 발심하는 이도 있고, 혹은 스님들에게 공양 올림을 인하여 발심하는 이도 있으며, 흑은 이승의 가르침을 인하여 발심하는 이도 있고, 혹은 남에게 배워서 발심하는 이도 있으나, 이러한 발심들은 모두가 안정되지 못한 까닭에 나쁜 인연을 만나면 간혹 물러나서 이승의 경지에 떨어지기도 한다.
다시 다음에 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가? 간략히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의 법을 똑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 모든 선행을 즐기어 닦기 때문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건져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
위에서 말하기를 법계가 한 모습이요, 부처의 본체는 둘이 없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진여만을 생각케 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고 배우는 것에 의해야 한다 하는가?【답】
비유하건대 큰 마니(摩尼)의 바탕이 밝고 맑으나 광석의 티가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본성을 알고는 있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로 갈고 닦지 않으면 마침내 밝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의 진여법도 바탕과 성품은 비고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와 때가 있을 때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인 줄은 알고 있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로 훈수(熏修)하지 않으면 그 또한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때가 한량이 없어 온갖 법에 두루하므로 일체 선행을 닦아서 대치해야 되기 때문이며,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면 자연히 진여의 법에 돌아가 수순하기 때문이다.
방편(方便)에 대하여 간략히 말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행의 근본이 되는 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제 성품이 생함이 없어서 망견을 여읜 것으로 관하고 생사에 머무르지 않으며 일체법은 인연이 화합해서 업과(業果)가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관하고 대비를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기 위하여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법성은 원래 머묾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악을 그치게 하는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니, 이른바 부끄러움을 알고 허물을 뉘우쳐서 능히 일체 악한 법을 그치게 해 더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법성은 모든 허물을 여의었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자라나게 하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니, 이른바 삼보께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고 수희(隨喜)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하고 청하는 일이다. 삼보께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순박하고 두터운 까닭에 믿음이 늘어나면 비로소 능히 위없는 도에 뜻을 두어 구하게 된다. 또 불ㆍ법ㆍ승의 힘으로 가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능히 업장을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나니, 법성이 어리석은 장애를 여의었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큰 서원이 평등한 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원을 세우되 “미래세상이 다하기까지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고 제도하여 그들 모두로 하여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리라” 하는 것이니, 법성의 끊임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며 둘이 없으니 너(彼)와 나(此)를 생각지 않으면 끝내 적멸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렇게 발심하기 때문에 조금만큼의 법신을 볼 수 있으며, 법신을 본 까닭에 그 원력에 따라 능히 팔상(八相)을 나투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에서 물러나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며,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도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법신이라 이름하지 않나니, 그 까닭은 과거 무량한 세상에서부터 유루의 업을 끊어 다하지 못한 까닭에 태어나는 곳마다 약간의 괴로움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에 얽매인 괴로움(業繫苦)은 아니니, 큰 서원이 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가운데에서 간혹 말씀하시기를 “악취(惡趣)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고 한 것은 실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초발심 보살이 바른 지위에 들지 못하고 게으른 이들이 겁을 내기 때문에 용맹해지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또 이 보살들이 한 번 발심한 뒤에는 겁내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 끝내 이승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어려운 행을 부지런히 행하여야 비로소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듣더라도 겁내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원래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이라 함은 더욱 수승한 경지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일으킨 뒤로 첫째 아승기겁이 차려고 하는 까닭에 진여의 법 안에서 깊은 견해가 현전하고 수행한 바가 상(相)을 여의게 되나니, 법성 자체에는 간탐(慳貪)이 없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에는 물듦이 없고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에는 괴로움이 없고 성냄과 번뇌를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에는 몸과 마음의 모습이 없고 게으름을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비리야바리밀(毘梨耶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본체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선바라밀(禪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은 본체가 밝아서 무명을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행한다.
증발심(證發心)이라 함은 정심지(淨心地:第一地)로부터 보살의 구경지(究竟地:第十地)에 이르기까지에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함이니,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라 하나 이를 증득하는 이에게는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의 지혜일뿐이므로 법신이라 한다.
이 보살이 한 생각 사이에 능히 시방의 끝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들께 공양하고 법륜 굴리기를 청하되 오직 중생을 깨우치고 인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함일 뿐이요, 문자에 의하지 않는다.
흑 지위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을 이루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겁 많고 나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요, 혹 말하기를 “나는 무량한 아승기겁을 지나고서야 불도를 이루었다”고 함은 게으른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시현함이 불가사의하나 실제에 있어 보살은 종자 성품(種性)과 근(根)이 동등하고 발심이 동등하며 증득한 내용도 동등하여 그 이상 넘어서는 법이 없다. 모든 보살은 모두 삼 아승기겁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의 세계는 동일하지 않아서 보는 이와 듣는 이의 근기ㆍ욕망ㆍ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행하는 곳에 차별이 있는 것같이 시현하신다.
또 이 보살이 발심하는 모습에는 세 종류의 미세한 마음의 모습이 있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스럽게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의 공덕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일체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시현한다. 이른바 한 생각에 서로 응하는 지혜(一念相應慧곳)로써 무명을 활짝 끊어 다한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나니, 자연스럽게 부사의한 업이 생겨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문】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고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고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마음씨의 차별도 무변하다. 이와 같이 경계는 그 분제를 가릴 수 없어 알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만일 무명이 끊어지면 마음(心想)도 없어질 것이거늘 어찌 능히 분명히 분별할 수 있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는가?【답】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인지라 생각을 여의었건만 중생이 허망하게 경계를 보는 까닭에 마음에 분제(分齊)가 있게 되었고, 허망하게 생각을 일으켜서 법성에 부합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능히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보는 상(見想)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모든 법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일체 허망한 법을 훤하게 비추어 큰 지혜의 작용이 생겨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알아들을 만한 능력에 따라 갖가지 법과 이치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한다.
【문】
모든 부처님께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능히 온갖 곳에 나타나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면 만약 일체 중생은 그 몸을 보거나 신통 변화를 보거나 그 말씀을 듣고서 이익을 얻지 못하는 이가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세간에는 많은 무리가 보지 못하는가?【답】
모든 불ㆍ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일체 처소에 두루하시지만 작의(作意)가 없는 까닭에 자연이라 말할 뿐이며 중생의 마음에 의해 나타날 뿐이다. 중생의 마음이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티가 있으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못하는 것같이 중생도 마음에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