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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석분 1)현시정의 - 체상용

 

다시 다음에 진여자체상(眞如自體相)이라 함은 일체 범부ㆍ성문ㆍ연각ㆍ보살과 모든 부처님들은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는 것이다. 앞 시각에 생겨난 것도 아니고 뒤 시각에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끝내 항상한 것이다. 본래부터 자기 성품에 일체 공덕을 만족한 것이니 이른바 자기 본체에 큰 지혜가 빛나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이치이기 때문이며, 자성의 청정한 마음인 이치이기 때문이며, 항상함(常)ㆍ즐거움(樂)ㆍ자재함(我)ㆍ맑음(淨)의 이치이기 때문이며, 청량하여 변치 않고 자재한 이치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항하사 수보다 더 많은 여의지 않고, 끊이지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였고, 나아가서는 만족해서 모자라는 것이 없는 이치이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는 여래 법신(如來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문】
 위에서 말하기를 진여는 그 본체가 평등하여 일체 모습을 여의었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다시 말하기를 본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하는가?

【답】
 비록 실제로 이러한 갖가지 공덕의 이치는 있으나 차별된 모습이 없기에 동등한 한맛(一味)으로서 오직 하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어떠한가? 분별이 없으며, 분별의 모습도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이 없다.
 

 

다시 무슨 이치에 의하여 차별을 말하는가? 업식(業識)에 의하여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은 본래부터 마음뿐(唯心)이어서 실제에는 생각이 없으나 허망한 마음이 있어서 모르는 결에 생각이 일어나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이라 말하거니와, 심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큰 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의 이치이기 때문이며, 마음에 견(見:본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게 되고 심성이 견을 여의면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기 때문이며,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고, 자재함이 없는 것이며 항상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아(我)도 아니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뜨겁고 번거롭고 변하고 쇠퇴해서 자재하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항하사 수보다 많은 허망한 이치가 있게 된다.

이런 이치에 맞서기 때문에 심성에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사 수보다 많은 모든 맑은 공덕의 모습과 이치가 드러난다. 만일 마음에 일어남이 있고서 다시 눈앞의 법을 생각할 것이 있다고 여긴다면 모자라는 바가 있거니와 이러한 맑은 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一心)인지라 다시 더 생각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만족한 것을 이름하여 법신여래의 장(法身如來之藏)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진여의 용(眞如用)이라 함은 이른바 모든 불ㆍ여래께서 본시 인행지(因行地)에 계실 적에 대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으시고 중생들을 거두어 교화하시려고 큰 서원을 세우셨다. 그리고는 온 중생계를 다 제도하시려 하되 겁의 수를 한정하시지도 않고 미래제(未來際)가 다하여 일체 중생을 취하시는 것이 자기의 몸과 같이 하시므로 중생이란 상도 취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이른바 일체 중생과 자기의 몸이 진여 위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여실히 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큰 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해 없애고 본래의 법신에 자연스럽게 부사의한 업의 갖가지 용(用)이 있어 진여와 동등해서 일체 처소에 두루했음을 보되 또한 용의 모습(用相)에 집착하지도 않으신다.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모든 불ㆍ여래는 오직 법신이며 지혜 모습의 몸(智相之身)인지라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세속제(世俗諦)의 경계가 없고 모든 동작(施作)을 여의어 중생이 보고 들으면 이익을 얻는 쪽을 따르기 때문에 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바를 이름하여 응신(應身)이라 하나니, 전식(轉識)이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외부로부터 온다고 여기고 색의 갈피(色分齊)를 취하나니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업식에 의하는 모든 보살들이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의 마음으로 보는 바를 보신(報身)이라 하나니, 몸에는 무량한 색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도 한량없고 갖가지 장엄이 있어서 어디에나 시현하되 가없어서 끝까지 다할 수가 없다. 분제(分齊)의 모습을 여의어서 감응하시는 바에 따라 항상 능히 제자리에 머무르되 훼손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가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의 행과 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바이니, 무량한 즐거운 모습을 구족했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 하는 것이다.

또 범부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 중생들의 보는 바가 제각기 같지 않음에 따라 갖가지로 다른 종류의 즐겁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초발의 보살들이 보는 바는 진여의 법을 깊이 믿음으로써 조금만 보나니 저 색과 상의 장엄 등의 일은 가고 옴이 없고 분제(分齊)를 여의었으므로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났을 뿐, 진여를 여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은 스스로 분별하나니, 아직 법신의 지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면 보는 바가 더욱 미묘하여 그 용이 더욱 수승할 것이요, 보살의 지위가 다한 데 이르면 보는 다가 궁극에 이를 것이요, 만일 업식을 여의면 본다는 모습(見相)이 없으리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쪽저쪽의 색상으로는 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내는가?

【답】
 이 법신은 곧 색의 바탕이기 때문에 능히 색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닌지라 색의 성품이 곧 지혜인 까닭에 색의 본체가 형상이 없음을 지혜의 몸(智身)이라 하고, 지혜의 성품이 곧 색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했다 한다.

 

나타난 색도 분제(分齊)가 없어서 마음을 따라 시방 세계에서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報身)과 무량한 장엄으로 나투어 보이되 각기 차별되어 모두가 분제가 없으므로 서로 방해하지도 않는다. 이는 마음이나 식의 분별로는 알 바가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용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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