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행신심분
이미 해석분을 설했으니 다음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하겠다.
여기서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에 의하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수행하는 법을 설한다.
어떤 것들이 신심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략히 신심을 설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信根本)이니, 이른바 진여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처님께 무량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信佛有無量功德)이니 이른바 항상 친히 가까이할 것을 생각하여 공양하고 공경하며,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信法有大利益)이니, 이른바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승가가 능히 바르게 수행해서 나와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믿는 것(信僧能正修行)이니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들을 친히 가까이해서 여실한 행을 배우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수행에는 다섯 문(門)이 있어서 능히 믿음을 성취하나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시문(施門)이요, 둘째는 계문(戒門)이요, 셋째는 인문(忍門)이요, 넷째는 진문(進門)이요, 다섯째는 지 관문(止觀門)이다.
어떻게 시문을 수행하는가?
만일 일체 중생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거든 능력에 따라 재물을 베풀어 주어 스스로의 간탐을 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며, 만일 액난과 공포에 시달림을 당한 이를 보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일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아는 힘에 따라 방편으로 설해 주되 명리(名利)나 공경을 탐내지 않고 오직 자리이타(自利利他)만을 생각하나니,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이른바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어(妄語)ㆍ기어(綺語)를 범하지 않으며, 탐(貪)ㆍ질(嫉)ㆍ기(欺)ㆍ사(詐)ㆍ첨(諂)ㆍ곡(曲)ㆍ진(瞋)ㆍ에(恚)ㆍ사견(邪見)을 여의는 것이다. 만일 출가한 이라면 번뇌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소욕지족(少欲知足)ㆍ두타(頭陀) 등의 행을 닦아야 한다. 나아가 작은 죄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어 참회하고 고치고 뉘우쳐서 여래의 계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남의 비방과 혐의도 잘 막아야 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망령되이 죄와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이른바 남이 주는 고통을 잘 참아서 보복할 마음을 품지 않으며, 또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ㆍ칭(稱)ㆍ(譏)ㆍ고(苦)ㆍ낙(樂) 등의 법도 참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문(進門)을 닦는가?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뜻 세움이 굳고 강하여 겁내는 마음을 멀리 여의며, 과거 끝없는 옛부터 온갖 몸과 마음의 고통을 헛되이 받아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서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으로 고통을 여읜다.
다시 또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을 수행한다 때도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은 까닭에 삿된 마(魔)와 모든 귀신에게 시달림을 받거나 흑은 세간의 업무 때문에 갖가지로 끄달리거나 혹은 병고에 시달리거나 하는 등 이러한 갖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용맹하게 정진하되 밤ㆍ낮 여섯 때로 모든 부처님에 예배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권청(勸請)하고 수희(隨喜)하여 보리에 회향(廻向)하되 항상 쉬지 않아야 한다. 모든 장애를 면하고 선근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이른바 지(止)라 함은 모든 경계의 모습을 그쳐 쉬게 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의 이치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관(觀)이라 함은 인연생멸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니 비발사나관(毘鉢舍那觀)의 이치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가지 이치를 차츰차츰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않게 하면 두 가지가 쌍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지(止)를 닦으려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하고 호흡(氣息)을 의지하지도 않으며, 몸 형태(形色)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허공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 생각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제거하되 제거했다는 생각도 제거할지니, 일체법은 본래 생각 없음(無想)이어서 잠시도 생하지 않고 잠시도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깥 경계를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따라 주다가 나중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하겠다고 생각하지도 말지니, 만일 마음이 흩어지거든 곧 거두어다가 바른 생각(正念)에 머물게 해야 한다.
이 바른 생각이란 곧 마음뿐이어서 바깥 경계가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제 모습이 없어서 잠시도 그 모습을 얻을 수가 없다.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거나 나아갔다 멈추거나 할 적에 무엇인가를 하게 되거든 모든 시각에 항상 방편을 기억하여 수순하고 또 관찰해야 한다. 오래 익히어 순박하고 두텁게 익어지면 그 마음이 머무르게 되리니 그 마음이 머무른 까닭에 차츰 용맹스럽고 날카로워져서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 번뇌를 깊이 조복시키고 신심이 늘어나서 속히 불퇴전(不退轉)의 지위를 얻을 것이다. 다만 의혹하고 믿지 않고 비방하고 죄와 업장이 무겁고 교만스럽고 게으름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이런 사람은 능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이 삼매에 의하는 까닭에 법계가 한 모습임을 알게 되나니, 이른바 일체 부처님들의 법신은 중생들의 몸과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진여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니, 어떤 사람이 이를 수행하면 차츰차츰 무량한 삼매가 생긴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중생에게 선근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마근과 외도와 귀신에게 홀림을 받나니 흑은 앉은 자리에 형상을 나타내어 겁나게 하거나 흑은 단정한 남녀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거니와 오직 마음일 뿐임을 생각하면 그 경계가 곧 사라져서 마침내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혹은 하늘 무리의 형상이나 보살의 형상을 나타내며, 혹은 여래의 형상이 상호가 구족하게 나타나되 때로는 다라니(陀羅尼)를 설하며 혹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등을 설하며, 혹은 평등ㆍ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원(無怨)ㆍ무친(無親)ㆍ무인(無因)ㆍ무과(無果)이어서 끝내 공적한 것이 참 열반이라고도 설한다.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간 숙명(宿命)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며, 타심지(他心智)를 얻어서 말솜씨가 걸림 없게도 한다. 다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리에 탐착케 하거나,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화를 내거나 기뻐하게 하는 등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흑은 인자함과 사랑하는 마음이 많게 하며, 많이 자고, 많은 병으로써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한다.
흑은 갑자기 정진할 마음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곧 늦추거나 멈추게 하며, 혹은 믿지 못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과 걱정이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업을 닦게 하며, 흑은 세상사에 집착되어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삼매의 비슷한 적은 부분을 얻게도 하나니, 모두가 외도들이 얻는 바로서 진정한 삼매가 아니다.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이틀 사흘 내지 칠 일까지 선정 속에 머무르게 하며, 자연스럽게 향기롭고 맛난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즐거워져 시장하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하여 다른 이들이 이를 부러워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에 한계(分齊)가 없어 때로는 많이 먹고 때로는 조금 먹게 하며, 얼굴빛이 자유로이 달라지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행자들은 항상 지혜롭게 관찰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행(正念行)을 부지런히 닦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능히 모든 업장을 멀리 여윌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외도의 삼매는 모두가 견(見)과 애(愛)와 아만(我慢)을 여의지 못한 것이다.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탐내기 때문이니, 진정한 삼매는 본다는 상에도 머물지 않고 얻는다는 상에도 머물지 않으며, 선정에서 나온 뒤까지도 게으름이 없어서 모든 번뇌가 차츰 미약하고 얇아지게 된다.
만약 모든 범부로서 이 삼매법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의 종자성품에 들 수 있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그 까닭은 세간의 모든 선과 삼매를 닦으면 대개 맛(味)에 집착을 일으켜 아견(我見)에 의해서 삼계에 얽매이므로 외도와 같아지나니, 만일 선지식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부지런히 마음을 전일케 해서 이 삼매를 닦고 배우는 이는 현세 동안에 열 가지 이익을 얻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시방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온갖 악마와 악귀가 두렵게 하지 못하고, 셋째는 아흔다섯 가지의 외도와 귀신 등이 능히 흘리지 못하고, 넷째는 매우 깊은 법을 비방한 죄를 멀리 여의어 무거운 죄와 업장이 점점 얇아지고, 다섯째는 온갖 의흑과 모든 나쁜 지식을 소멸하고,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에 대하여 믿음이 늘어나고, 일곱째는 근심과 뉘우침을 멀리 여의어 생사 속에서도 용맹스럽게 겁내지 않게 되고, 여덟째는 마음이 부드럽고 교만을 버리어 타인의 시달림을 받지 않고, 아홉째는 비록 선정은 얻지 못했으나 모든 시각과 모든 경계에서 능히 번뇌를 줄여 세간 일을 즐기지 않게 되고,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바깥 반연과 일체 음성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다시 다음에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혹 게으름을 일으키고 선한 일 닦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비(大悲)를 멀리 여읜다. 이런 까닭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
관을 닦는 이는 관하기를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무는 것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해 무너지며, 일체 마음씨는 생각생각에 생멸한다. 그러므로 괴로움(苦)이다”라고 해야 하나니, 과거에 생각하던 모든 법의 황홀함이 꿈같다고 관하며, 현재에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갯빛 같다고 관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이 황홀히 일어난다고 관하며, 세간의 일체 몸은 모두가 다 청정하지 않은 것이며 여러 가지로 더럽고 오염되어 하나도 즐거울 만한 것이 없다고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옛적부터 모두가 무명에 훈습된 까닭에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탐으로써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온갖 큰 고통을 받는 것이다. 현재에도 무량한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괴로울 일도 한량이 없어서 버리기도 여의기도 어렵거늘 그런 줄을 깨닫지도 못하니, 중생은 이와 같이 가여워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용맹스럽고도 큰 서원을 세우되 ‘내 마음에 분별을 여읜 까닭에 시방에 두루하도록 일체 모든 착한 공덕을 수행하고 미래가 다하도록 무량한 방편으로 일체 괴로움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열반의 제일가는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원을 세운 까닭에 모든 때와 모든 처소에서 모든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닦아 배우기를 버리지 않고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앉아서 지(止)를 전념할 때만은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 시각에는 지어야 할 일과 짓지 말아야 할 일을 관찰해야 한다.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일어날 때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행하여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원래 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시 인연이 화합하는 선과 악의 업과 고(苦)와 낙(樂)의 과보는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비록 인연이 화합하는 선과 악의 업보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시 그 성품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지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머물러 집착하는 허물을 물리치고, 이승의 겁내는 소견을 능히 버릴 수 있다. 만일 관을 닦으면 이승이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좁고 열등한 마음의 허물을 물리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는 허물을 멀리 여읜다. 이런 까닭에 이 지와 관 두 문은 서로 도우면서 여의지 않나니, 만일 지와 관을 갖추지 못하면 보리의 도에 들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중생이 처음으로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 많고 약한 이는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 걱정하기를 ‘모든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 것이며, 끝내 신심을 성취하지도 못하리라’ 하여 물러서려고 한다. 이런 이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께서는 수승한 방편이 있으시나니 이른바 전일한 뜻으로 염불하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 원에 따라 다른 불국토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뵈옵고 영원히 나쁜 갈래를 여윌 수 있다.
예컨대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전일하게 염하고, 그렇게 닦은 선근을 회향하여 그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곧 왕생 (往生)함을 얻으리니, 항상 부처님을 뵙는 까닭에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리라” 하셨다. 만일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해서 항상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끝내 왕생하여 바른 선정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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