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1. 부임(赴任)  제1조 수령에 임명됨 - 제배(除拜)

1) 다른 관직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관직은 구해서는 안 된다.

위를 섬기는 사람을 민(民)이라 하고, 그 민을 다스리는 사람을 사(士)라 부른다. 

사(士)란 곧 벼슬하여〔仕〕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관(京官)은 왕을 받들거나 수호를 직분으로 삼는 경우가 있어, 조심하고 근신(謹愼)한다면 큰 죄를 지을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 수령(守令)은 직접 만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자로, 매일 수많은 일을 처리하며 군왕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그 위치는 실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상공(上公)이 다스리는 지방이 100리, 후백(侯伯)은 70리, 자남(子男)은 50리였으며, 50리 이하의 경우 부용(附庸)이라 불렀다. 이들 모두 제후(諸侯)라 하여 각자 자신의 영역을 책임졌다. 오늘날에는 큰 주(州)가 상공에 해당하고, 중읍은 후백, 하읍은 자남, 잔소한 읍은 부용과 비슷하다. 벼슬 명칭은 달라도 그 임무는 옛 제후와 다르지 않다. 옛 제후들은 정승, 삼경(三卿), 대부(大夫), 백관 등 각기 맡은 바를 처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기에 제후로서의 임무를 비교적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령은 아무런 지원 체계 없이 홀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간사한 백성 몇을 좌(佐)로 삼고, 부패한 아전 몇십 명을 보(輔)로 삼으며, 사나운 인물을 막빈(幕賓)으로, 무법자들을 복례(僕隷)로 근무하게 하니 이들 무리가 뭉쳐 수령의 판단력을 가리고 끝없는 사기를 일삼는다. 결국 백성들이 피해를 본다.

옛날 제후들의 직위는 세습되었고, 신민이 죄를 지으면 그 가문에까지 연좌제가 적용되어 자리 승계가 어렵게 만들어졌다. 이는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며, 악인이 있더라도 감히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령은 몇 달에서 길어야 2년 사이에 바뀌고 만다. 이는 마치 여관을 지나치는 과객과도 같고, 오히려 좌(佐)·보(輔) 등 아전들은 세습하며 장기적으로 그 지위를 유지한다. 이같이 권한이 일시적인 수령과 지속성을 가진 아전들 사이의 권력 균형이 심하게 기울어져서는 제대로 된 통치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수령의 임무는 공후(公侯)보다도 백 배는 더 어렵다.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부족하면 힘들고, 의욕이 있더라도 능숙하지 못하면 수행하기 어렵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수령이 되면 백성들은 고통을 겪게 되고, 비난은 물론이요 그 죄악이 자손으로까지 이어지는 재앙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무관(武官)들이 전관(銓官)에게 청탁하여 수령 자리를 얻으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그 재능과 역량으로 직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커녕, 서로 묻거나 검증하려는 절차조차 생략된 채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심각한 잘못이다. 문신(文臣)들 또한 부모 봉양을 이유로 고을살이를 청원하는 문화가 고착화되었는데, 이는 도리와 어긋난다. 중국의 우(虞), 하(夏), 은(殷), 주(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사례는 없었다.

대체로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님이 연로하여 끼니조차 이을 수 없는 상황은 분명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로 보자면, 품격과 능력으로 직책을 감당할 사람을 골라야 하는 것이지, 개인의 사정을 위해 벼슬이 주어져야 하는 법은 없다. 한 가정의 생계를 위해 온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타인의 신하가 된 자가 국가에서 걷어들인 재물로 자신의 부모를 부양하려 한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만민에게 명하여 특정 개인의 부모를 부양하도록 허락하는 것도 옳지 않다.

만약 능력이 출중하고 올바른 도리를 깨우친 사람이 자신의 자질을 판단해 백성을 이끌 준비가 되었다고 여긴다면, 그 스스로 나서서 간청하고 자신을 천거하여 한 지역을 다스리겠노라 자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집이 가난하고 부모 부양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관직을 구걸하는 것은 명백히 부당하다.

고대에는 경연에 참여하던 재능 있고 신망 있는 신하가 한 지역 관직을 맡게 되길 청하면, 조정과 백성 모두 이를 기꺼워했다. 국왕은 그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우려하지 않았으며, 지역 주민들 또한 그를 환영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자질도 덕망도 없는 이들이 그럴듯한 전례를 들먹이며, 가난하지도 않고 부모 부양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경우조차 무례하게 관직을 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으니 이는 예가 아니다. 이런 비정상적 관행을 답습해선 안 될 일이다.

퇴계는 이강이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러한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좋은 음식을 부모님께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 입장에서 큰 걱정거리일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부모 봉양을 핑계 삼아 도리에 어긋난 국록을 취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공동묘지에서 제사 음식을 훔쳐다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모의가 수령에 임명된 것을 좋아하자, 장봉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던 일화는 또 다른 관점에서 풀어내볼 수 있다. 모의는 본래 조용히 은거하려 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뜻을 굽혔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긍정적으로 여겨진 것이다. 반대로, 의롭지 않은 방식으로 수령의 직책을 얻고서 이를 기뻐했다면 장봉은 차마 침이나 뱉고 돌아섰을 것이다”라며 올바르지 못한 처신의 문제를 꼬집었다.

따지고 보면 능력도 부족하고 집안도 넉넉하면서 관직을 구해 부모 부양을 핑계로 삼으려는 것은 분명 불의한 행위다. 그러나 만일 진정으로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있다면 당당히 자천하여 스스로 기회를 구하는 것은 허락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사례는 있다. 후한 시대 경순은 한 지역을 관리하는 자리에 나서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이에 황제는 “경이 백성을 다스리며 능력을 바치려 하다니 훌륭하다”며 그를 동군 태수로 임명했다. 
또한, 당나라 시대 이포진은 자신이 한 주의 행정을 맡아보며 시험해 보겠다고 청원했고, 결과적으로 노주와 회주에서 8년간 그 지역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진정 공정하고 올바른 태도로 백성을 위한 리더십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2) 임명된 처음에 재물을 함부로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

수령의 봉록은 매달 정해지며, 자세히 살펴보면 날로 나누어지는 방식으로 관리된다. 따라서 달이나 날을 당겨 미리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사용해서는 안 될 재물에 손댄다는 의미이며, 이는 탐욕의 징조로 볼 수 있다. 수령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경비를 쓴다면 이는 용납될 수 없으며, 서울을 떠나기 전에 고을 재물을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락되며,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새로 부임하는 수령이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릴 때, 액례나 원례 등의 명목으로 궐내행하라는 이유를 들어 돈을 요구한다. 비용은 많으면 수백 냥, 적어도 50~60냥에 이르는데, 음관, 무관, 또는 시골 출신으로 지위가 낮은 이들은 이 금액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때문에 무례한 요구와 욕설, 심지어는 옷소매를 잡아끌려가며 모멸감을 받는 일이 발생한다. 선대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여 승정원이 액수를 조정하고 더 이상 임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규정을 마련했으나, 여전히 이 같은 관행은 공물 징수와 다를 바 없이 지속되고 있으니 이는 올바른 예라 보기 어렵다.

본래 조정이 백성을 위해 수령을 파견할 때에는 경비를 절감하고 민생을 아끼도록 해야 옳다. 하지만 먼저 액례나 원례를 요구하며 명목 없는 돈을 징수한 뒤, 이를 기생과 함께 술 마시거나 음악을 즐기는 데 사용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정의와 예절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심지어 근신들이 수령에게 경박하게 독촉하며, 백성의 고혈을 먹는 대가로 부당한 접대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에 수령도 순응해 스스로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며, 자신이 풍요로운 고을에서 이익을 누릴 테니 이러한 비용을 무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관행은 명백히 예가 아니다.

각 고을 간의 관례가 제각기 달라 궐내행하 비용을 민고에서 충당하는 사례도 있다. 결국, 액례와 원례를 이용해 백성을 착취하는 행위로 귀결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조정에서 강력히 제재해야 할 문제지만, 수령으로 부임하는 이들도 기존의 전례를 따르며 이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개선이 쉽지 않다.

또한, 궁핍한 친구나 가난한 친족, 혹은 고모나 형수, 누이 등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를 완전히 외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체자(신청서)를 작성해 부임 후 일정 기간이 지나 요청에 응하겠다고 명기한다. 
예를 들어 부임지까지 10일이 걸리면 10일 후를 약속하고, 5일 거리라면 5일 후를 약속하는 식이다. 다급하지 않은 요청에는 좋은 말로 미루며 부임 후 한두 달 안에 관청에서 해결하겠다고 설명하고, 지나치게 많은 채무를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체자(帖子, 일종의 문서로 금품이나 물건을 받은 표)를 주고 명시된 금액과 일정을 첨부해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저보(邸報)를 내려보내는 처음에 폐단을 덜 만한 것은 덜어야 한다.


신임 관리가 부임할 때 따르는 예절 가운데는 여러 가지 절차가 있다. 첫째, 지장을 봉해 바치는 일, 둘째 관아와 관사의 수리를 준비하는 일, 셋째 각종 깃발을 사용해 행차를 영접하는 일, 넷째 풍헌과 약정 등 지방 관리들이 문안을 드리는 일, 다섯째 중도에서 문안을 교환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 중에는 생략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만약 저리(邸吏)가 사람을 파견한다고 알린다면, 수령은 고을의 공형(이방·호장 등)에게 아래와 같이 지시해야 한다.  
"지장에 포함될 물품은 술과 마른 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말 것. 관아 수리는 지시를 받은 뒤 착수할 것. 신임 관리가 부임하는 날 고을 경계에서 사용할 기는 단지 영기 두 쌍만 문졸이 들도록 하고 나머지는 사용하지 말 것. 읍내와 외촌을 망라하여 군졸 한 사람에게도 미리 작정을 알리지 말고, 이를 악용해 가렴주구하는 행위는 엄중히 금지할 것. 또한 외촌 풍헌, 약정 및 군대 장교들에게는 전혀 귀뜸하지 말고, 중도에서의 문안 절차는 서울에서 반쯤 도달한 위치에서 한 번 진행하되 물품은 일절 바치지 말도록 하라."

전래의 관례에 따르면, 지장으로 안장, 의복감, 종이, 반찬 등 여러 물품을 제공했으며 이를 받아본 관리가 친척들 사이에 나누어주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유교적 미덕으로 여겨졌지만, 중세부터 군읍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고 피폐해지면서 절약이 필수가 되었으므로 이러한 관행은 생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관아와 청사를 수리하는 과정에서도 종이를 비롯한 자원이 낭비되고 백성과 승려가 징발되는 폐단이 있었다. 그래서 수리는 부임 후 상황을 보아 적합한 시기에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임 시 사용되는 깃발은 주로 속오군을 포함한 군역에 동원된 자들로 하여금 들게 했는데, 이로 인해 읍내에 온 자는 수십 일 동안 머무르고 읍외에 있는 자들은 사사로이 징수당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농번기에는 이러한 부담이 백성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음으로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

또한, 촌민이 읍내로 들어와 장기간 체류하는 것은 민폐를 초래하므로 풍헌과 약정 등 지방 행정관들이 문안을 드리는 절차는 생략함이 옳다. 신임 관리가 처음 부임하면 고을 아전들의 문안 인사가 잇따름으로써 이들이 소요하는 비용 부담이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다. 도임 후에는 이를 빙자해 아전들이 마을에서 비용을 징수하거나 심지어 "동령(빈손 구걸)"이나 "조곤(술병을 차고 구걸)" 등의 명목으로 부당 이득을 취한다. 이는 여러 경로에서 이루어지고 외딴 섬이나 산간 지역에서도 벌어지니, 이러한 행위를 막고 문안을 드리는 인원의 빈번한 출입을 제한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다산필담》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관직에 부임하며 공무에 불필요한 인력과 절차를 줄이는 데 깊은 철학을 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가장 쓸모없는 추종 인물 중 하나로 정약용은 이방을 언급한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내가 부임할 때 어머니와 아내를 모시고 간다면, 이방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홀로 이동한다면 이방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관료제 내에서 효율성을 고민하던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정약용은 이어 부임 시 저보(공식 문서)를 발송할 때 강조해야 할 점들을 제안한다. 그는 공직 수행에 있어 간소함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린다. 
"본관(정약용 자신)은 혼자 떠나니, 모든 절차를 간단히 하고 간략화하는 데 집중하라. 이방은 절대 올라오지 말고, 경계선까지만 나와 기다려라. 형리(사법 업무 담당) 한 명이 요리 관리(감상)를 겸하고, 관리(숙소 담당), 통인(사령 전령 역할을 하는 수행원) 한 명, 시노(곁에서 노래나 의식 등을 준비하는 사람) 두 명, 추종 두 명, 조례(잡무 보좌) 세 명만 동행하도록 하라. 이외의 인원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그는 추가적으로 상황에 따라 반드시 필요한 일이 생겨 인력을 늘려야 한다 해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인다. 이는 당시의 복잡하고 낭비적 요소로 가득했던 관료제 속에서도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고민했던 그의 실학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현대적으로 보더라도 다산의 이러한 생각은 업무 간소화와 팀 효율화를 추구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준다. 지금 시대에도 불필요한 절차와 비용을 줄이고, 핵심 인력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입하는 사고방식은 조직 관리의 본질로 여겨진다.


4) 신영(新迎)하는 쇄마(刷馬)의 비용을 이미 국비로 타고, 다시 백성에게서 거둬들인다면, 이는 임금의 은혜를 감추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짓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


영조 22년 간행된 법전인 《속대전》에 따르면 외관(外官)을 맞이하거나 보낼 때 사용되는 쇄마(刷馬, 지방에 비치하였다가 관청 용으로 제공하는 말)는 이동 거리〔道里〕를 감안하여 마리 수를 정한다고 한다. 이는 〈호전〉 외관공급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서관(西關)과 북관(北關)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는 쇄마가 정해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주(州)와 부(府)는 20필, 군(郡)과 현(縣)은 15필로 규정되었다. 여기에 상ㆍ중ㆍ하도의 세 등급 및 대ㆍ중ㆍ소로 구분된 읍의 규모에 따라 추가로 배정되었는데, 멀고 규모가 큰 지역에는 최대 6필까지 더했고, 가까운 소읍에는 2필만 더 주는 방식이었다. 단, 경기 지방에 대해서는 말의 수가 오히려 감축되었다. 서관의 박천 서쪽과 북관의 홍원 북쪽 지역에는 쇄마 대신 역마(驛馬)가 지급된다고 적혀 있다. 이는 〈병전〉 역마조에 나타난다.

원래 쇄마의 비용은 쌀로 지급되었으나, 균역법 시행 후 삼남 지방 해안 지역에서는 이를 돈으로 대체했다. 많이 지급할 경우 4백 냥이 넘기도 했고, 적게는 3백 냥에 달했다. 《대전》에 따르면 쇄마전을 도입한 초기에는 관리들이 이 명목으로 백성을 착취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중앙에서 쇄마전이라는 이름으로 재정을 지원해 민폐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신임 관리가 부임하고 전임 관리가 떠날 때마다 신ㆍ구관 모두 민간에서 쇄마전을 징수했으며, 징수 금액이 국비의 갑절에 이르거나 국비와 비슷한 수준에 달하는 일이 관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떠나는 전임 관리에게는 국비 지원이 없다.

군왕은 백성을 위한 배려로 말을 지급한 것인데, 이러한 은혜는 잊힌 채 백성들의 재산을 추가로 약탈하는 것은 갈백(葛伯)이 기증품을 먹어 치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옛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특히 신임 관리는 자신의 책임을 향청(鄕廳)에 떠넘기지만, 부임 이후에도 이미 걷힌 돈을 민간에 돌려주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결국 착취한 결과나 다름없다. 자신이 직접 거두지 않았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미 부당하게 얻은 재화를 돌려줄 의사가 없다면, 차라리 조속히 이를 직접 개혁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 올바른 처사일 것이다.
조정에서 내려온 저보를 배포하는 날이라면, 반드시 해당 지역 관료(공형)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전해야 할 것이다.

신임 수령의 부쇄가(공무원 부임 비용)는 이미 국고에서 지출된 사항이므로 민간에서 추가적으로 징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 만약 민간에서 이미 징수된 자금이 있다면 이를 다시 환수하는 과정에서 중간에서 새나가는 경우가 생길 우려가 있다. 이에 따라 여러 동네의 부역 예산 중 매달 반드시 징수해야 하는 항목인 군전(군사자금)이나 세전(세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대체 처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즉, 이미 부쇄가를 납부한 이들에게는 별도의 납부를 면제하도록 하고, 기존 징수 대상 금액에서 이를 조정해야 할 것이다. 이 방침은 반드시 지역 행정 기관(향청)을 통해 전파하고, 주민들에게 상세히 알리도록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다.

만약 신임·구임 수령의 교대가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본 지역에서는 정확한 사항을 알지 못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려야 한다.

"신임 수령의 부쇄가는 이미 국비로 지급되었으니, 민간으로부터 다시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지침을 전할 때는 한 글자도 추가하거나 생략하지 말아야 한다.

신임 관료가 새로 부임하면 백성들은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점에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다면 백성들의 환호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칭송 가득한 노래들이 먼저 들려올 것이다. 권위는 청렴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에 따라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백성들은 기꺼이 명령에 따르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겨우 300냥을 버린 것이지만 그로 인해 들려오는 환호성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상하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몇 백 년, 종횡으로 따지면 4천 리 나라 가운데, 이처럼 담백하고 의로운 명령을 먼저 내린 수령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결코 수령으로 나서는 이들이 청렴성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무 경험이 없는 자는 이러한 선례를 잘 알지 못하고, 부임한 이후에는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이미 관례에 어긋난다고 여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 누구보다 먼저 이 의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얼마나 통쾌할 것인가.

지역의 관행은 천차만별이다. 청사를 수리한다든지 일산이나 쌍교와 같은 물품 비용으로 민간에서 추가적인 금전을 거두는 일이 흔히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도 부쇄가와 연계하여 다뤄야 할 필요가 있으니 해당 사항은 저리(저보 담당 공무원)에게 고을의 관례를 직접 확인토록 하고, 관례상 필요한 경우라면 적절히 처리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자세로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한다면 그 효과는 오래도록 빛날 것이며, 통치자로서의 권위와 명성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