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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임(赴任) 제2조 부임할 때의 행장 (치장 治裝)

 

1) 행장을 차릴 때, 의복과 안마(鞍馬, 안장을 얹은 말)는 모두 옛것을 그대로 쓰고 새로 마련해서는 안 된다.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으며, 비용을 절약하려면 검소함이 기반이 된다. 검소해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해야 비로소 백성을 자애롭게 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검소함은 목민관이 되어 백성을 돌보는 데 가장 먼저 힘써야 할 덕목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배움이 부족하고 지식이 없어 값비싼 옷을 입고 화려한 갓을 쓰며, 잘 꾸민 안장에 준마를 타고 다니면서 허세를 부리고 이를 세상에 과시하려 한다. 그러나 노련한 관리는 새로 부임한 관리의 태도를 볼 때 의복과 말부터 살펴본다. 만약 그가 사치스럽고 화려하다면 비웃으며 "대충 짐작이 간다"고 생각하는 반면, 검소하고 소탈하다면 놀라며 "두려운 분이다"라고 경외심을 가진다. 그런데도 이런 차이를 깨닫지 못한 채, 거리의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치를 뒤쫓는 것을 식견 있는 사람들은 천박하게 여긴다. 결국 그것이 무슨 이익이 될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타인의 부러움을 받는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부러움은커녕 미움을 산다.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명예까지 실추시키고, 남들의 반감까지 불러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사치는 본래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수령으로 임명된 자는 대부분 경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미 의복과 말에 대해 기본적인 준비는 되어 있을 터이니, 굳이 새로 마련하려 하지 말고 기존의 상태로 임지에 나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새로이 무엇인가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피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선비가 갑작스레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타는 말과 거느리는 종, 먹는 음식과 입는 옷들까지 부유한 집안사람들과 비교될 정도로 화려하게 꾸미려 한다면, 그 모든 것은 반드시 빚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무거운 빚을 안고 관청을 둘러보고 임지로 향하게 되는데, 결국 그 빚을 갚기 위해 국고를 빼돌리거나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방법으로도 갚을 수 없지 않겠는가?“

송나라의 범공칭(范公偁)이 쓴 《과정록(過庭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친께서 수주로 부임하실 당시 소지품이라곤 단 세 짐밖에 없었고, 관직을 내려놓고 돌아갈 때에도 그 모습은 한결같았다. 일신이 간소했기에 이동이 편리했을 뿐 아니라, 외관상으로도 민망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위 관직에 있었던 이들의 청렴함과 소탈함을 엿볼 수 있다. 
양성재(楊誠齋)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도 어떤 물건도 사들이지 않았다. 돌아갈 때 짐이 많아질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범우승(范右丞) 또한 부임길에 단 세 짐만을 휴대했던 이유가 행장이 간편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청렴하지 못한 거래나 탐욕스러운 행위는 애초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나라의 해서(海瑞)는 남총헌에 부임하던 날 단 두 개의 작은 상자만을 가지고 떠났다. 그의 배가 상하(上河)로 도착했을 때조차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소박한 출발이었다. 어느 날 병이 들어 의원을 집으로 불렀더니, 의원은 방 안을 둘러보며 깜짝 놀랐다. 그의 침구는 모두 흰 베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소박함은 오히려 궁핍한 선비를 떠올리게 했다.

또 다른 예로, 참판 유의(柳誼)가 홍주 목사로 재직할 때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는 찢어진 갓을 쓰고,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낡고 간단한 띠를 두르고 느릿한 말을 탔다. 그의 침구도 남루해 요도나 베개조차 없이 지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높은 품격과 위엄은 자연스레 드러났고, 작은 벌로도 간사한 자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며 깊은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단순히 관료들의 검소한 생애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과 태도는 소박함과 청렴함이 얼마나 큰 덕목이며,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암쇄화(寒巖瑣話)》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참판 윤광안(尹光顏)이 외각에서 교서를 검토할 때는 입은 거친 베도포가 상복(喪服)과 같아 보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경상도 감사로 부임하자, 그의 위엄은 가는 곳마다 널리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참판 유강(柳焵)이 충청도의 감사로 있을 때는 밀랍으로 만든 장식을 관의 끈으로 활용하였는데, 그의 정직하고 간소한 태도에 열읍(각 고을)이 두려워하며 순종했다고 한다.  

사서 김서구(金叙九)는 검소한 삶을 지향해 늘 거친 베옷 위에 간단한 양갖옷을 걸치고 다녔으나, 거리의 아이들에게 조롱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해남의 현감으로 임명된 후에는 백성들에게 은혜와 위엄이 함께 전해졌으며, 학질에 걸린 백성이 오히려 그것을 따라했다.

옛날 청렴한 관리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검소하고 청빈했던 것이다.  

청렴하게 살면 재물에서 손해를 보아 실천하기 어렵다 하겠지만, 검소하게 산다면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는다. 어찌 이것이 쉽지 않겠는가?  

최근 한 무관이 해남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비단으로 된 주머니 끈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이를 본 강진의 한 아전이 "그 주머니의 매무새를 보니 반드시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할 것이다"라며 예측했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독특한 관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통찰력은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간교한 아전들조차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다. 어찌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 일산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당하관(당하에 속한 관료)은 반드시 검은 일산(흑산)을 들었는데, 이는 바로 옛날의 조개(皁盖)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풍속이 바뀌어 흰 것을 선호하게 되면서 대신에서 현감까지 모두 흰 일산을 사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검은 일산은 햇빛을 제대로 가리지만, 흰 일산은 햇빛이 틈새로 들어온다. 일반적으로 지방관이 외출할 때에는 당상관(상급 관료)과 당하관을 막론하고 반드시 흑산을 사용해야 한다. 다만 품계와 직위에 따라 끈의 길이나 장식 재료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색깔로 구별하기도 하고, 동이나 철과 같은 재질로 차이를 두는 방식이다. 설령 사람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흰 일산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유옥교의 청익장은 대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당하관이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선조 시절에는 이와 관련한 금령이 매우 엄격하여 이를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나, 최근에는 이런 규범이 잘못되게 전해져 예를 크게 어기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매우 부당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수레와 복식을 공적에 따라 나누어 사용하는 것은 통치자로서의 중요한 권한이다. 《주례》에서는 수레와 복장을 각각 여섯 등급으로 구분하였고, 이를 통해 지위와 신분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유옥교의 청익장 역시 벼슬의 품계에 따라 사용을 제한함으로써 이를 금지한 것은 바로 《주례》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어기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한나라 법에 따르면 천 석 이상의 장관만이 조개와 주번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황패가 양주 자사로서 빼어난 치적을 보여 임금이 특별히 높이 한 길이나 되는 거개를 하사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게 했고, 소량 역시 기주 자사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거와 고취를 하사받았다. 이처럼 공적에 따른 의식은 임금의 권한으로 내려지는 것이니,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권장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작은 고을의 수령조차도 모두 옥교를 사용하며 나라의 금칙을 사사로이 어기고, 저마다 자신들의 영귀함을 과시하려 든다. 이러한 풍조는 국가의 기강과 법도가 완전히 무너진 결과라 볼 수 있다. 

무신은 말을 타는 것이 본래의 예이며, 이를 어기는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백헌 이경석은 허후가 남긴 말을 기록한 바 있다. 허후는 "감사가 교자를 사용하되 겨울에는 휘장을 내리고 여름에는 휘장을 걷은 채 일산(날개 모양의 우산)으로 햇볕만 가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3면에 걷는 휘장을 두르니, 이는 임금의 승여를 본뜬 참람한 행위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 심정이다.

우리나라 법전을 검토해 보면, "쌍마교는 관찰사와 2품 이상의 관원만 탈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승지를 지낸 사람이나 의주 부윤, 동래 부사도 쌍마교를 탈 수 있다. 요즘에는 제주 목사도 허용된다"고 했으니, 이를 바탕으로 하면 3품 관원도 쌍교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3품 관원조차 임금의 특별한 명령이 없다면 쌍마교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쌍마교는 여러 가지 폐단이 있으니 상신과 정경 정도만 이용하고, 아경과 하대부는 유옥교를 타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쌍마교에도 3면에 휘장을 두르는 장치가 있으므로, 허공의 의견이 전적으로 맞다고 보기 어렵다.

반자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법에 따르면 천자는 육마를 이용하고 좌우참을 배치하며, 삼공과 구경은 사마에 좌참을 둔다. 한나라 제도에서는 구경이 이천 석 급수로 우참을 타며, 태수는 기본적으로 사마를 이용한다. 그러나 벼슬 급수가 이천 석 중위에 해당하면 우참이 허용되었다. 이로 인해 오마를 태수의 미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학림(學林)》에서는 "한나라 당시 조신이 사신으로 나가 태수가 될 경우 말을 1필 더 지급하여 오마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돈재한람》에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보건대, 옛날 태수들은 관할 고을을 순행하면서 공무를 수행했으니,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감사와 유사한 역할에 해당한다. 하지만 작고 미미한 고을의 수령들이 태수라는 칭호를 스스로 붙이고, 오마를 이용하여 체면을 세우려 하는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풍원숙은 준의와 시평 두 고을의 수령직을 맡았을 때 모두 단 한 필의 말을 타고 부임하였다. 또 위나라 최임은 언릉령에 취임하면서 도보로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야인우담(野人迂談)》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관원을 맞이하거나 떠나보낼 때 별도로 사람이나 말을 지급하지 않고, 관원은 단지 문서 하나만 가져가면 된다. 그러면 관리와 유생, 기로, 백성들이 성 밖에서 나와 환영한다." 


2) 동행(同行)이 많아서는 안 된다.


현대적 관점에서 특정 사안을 다룰 때는 항상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과거의 사례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는 관직에 임하는 자세와 행동에서 나타나는 당시의 기준과 풍습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과거에는 새로운 직책을 맡거나 지방 관직에 임할 때, 동행하는 인원이나 행동 규범을 엄격히 제한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는 공과 사를 명확히 하고, 부패나 사적인 이득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관료는 자신의 서체가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글을 대신 작성할 서기를 한 명 정도 동반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추가 인원은 불필요하게 데려가지 말 것을 권장했다. 이는 공적인 규율을 무너뜨릴 여지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겸인(傔人)"이라 불리는 조력자나 노복(하인)을 데려가는 일은 강하게 금지되었다. 겸인은 종종 관청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절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만일 부득이하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공적인 대가를 약속하고 이용하는 방식을 택하라고 지침을 두기도 했다. 대신, 개인적인 하인을 데려가야 할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그들의 역할도 분명했다.

나아가, 관속들과의 접촉 또한 엄격히 관리되었다. 상급 관리가 아전이나 하인들과 과하게 말을 섞는 것은 경계 대상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아전들에게 “상급자의 자제들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만약 네가 먼저 말을 건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너에게 있다”는 식의 단속 규정이 내려졌다. 이러한 금지는 불필요한 친분 관계나 유착을 막기 위함이었다.

흥미로운 일화로 허자(許鎡)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청렴과 강직함으로 이름난 관리였으며, 지방으로 부임할 때 아들 한 명과 종 한 명만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 일화는 당시 검소하고 깨끗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겨울에 아들이 추위를 호소하며 숯을 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가 들려준 대처 방식은 조금 각박하게도 느껴진다. 허자는 숯 대신 창고에 있던 나무막대기를 내주며 발로 굴리면 따뜻해질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태도는 청렴함을 유지하고 공적 자산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인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고 평가받는다.

이 모든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무엇이 옳고 적합한 태도인지 고민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균형 잡힌 의사 결정을 위해 과거 사례들을 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지나친 절제와 지나친 융통성은 모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조청헌(趙淸獻)이 성도로 부임할 당시 거북 한 마리와 학 한 마리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재임 시에는 그마저도 놓아주고 단지 하인 한 명만 동행했다. 이를 두고 장공유(張公裕)는 시를 지어 그의 부임을 기념하였다. 

말은 옛날 다녔던 길을 알아 편히 오갔고 (馬諳舊路行來滑)  
거북은 장강에 풀어주니 함께 오지 않는구나. (龜放長江不共流)

양계종(楊繼宗)이 가흥의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에도 종 한 명만 데리고 갔으니, 마치 나그네 같았다. 그는 9년 동안 임기를 채우면서도 가족을 끝내 데려오지 않았다.  

운남 지방의 순무로 파견된 왕서(王恕)는 하인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대신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시를 내걸었다.  
“집안 하인을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일이 두려웠소. 그러니 늙은 몸 하나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온 것이오.”  
그의 성품에 감복한 백성들은 향을 피우며 예를 표했다.  

영풍현의 현령이 된 당간(唐侃)은 부임할 때 가족을 동행하지 않았으며, 하인 두세 명만 거느리고 소박한 나물밥과 콩국으로 생활했다. 그런 그의 청렴한 태도가 오래되자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 그를 신뢰하며 따르게 되었다.  

사자양(謝子襄)은 30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그 청렴함을 잃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가족을 데리고 관직지로 가지 않았다.  

위 내용은  《명사(明史)》에서 전해지는 일화들이다.


3) 이부자리와 솜옷 외에 책 한 수레를 싣고 가면, 청사(淸士)의 행장(行裝)일 것이다.


요즘의 사례를 보면 새로 현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은 겨우 역서(曆書) 한 권만 챙길 뿐, 그 외의 다른 책은 아예 짐 속에 넣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뻔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숱한 재물을 챙겨 무거운 짐을 지게 되니, 책 한 권조차 짐스러운 걸로 여긴다는 것이다.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그들의 마음가짐이 이렇게나 비루하니,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문사를 벼슬살이로 내려보내면, 자연스레 이웃의 선비들이 궁금한 점을 물으며 찾아오거나 배움을 청하러 올 것이다. 혹은 과거(科擧)를 준비하는 선비들을 위해 글짓기를 지도할 때, 글의 제목 하나를 정하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책이 있어야 할 일이다. 더 나아가, 가까운 고을의 관리들이나 동료들끼리 모여 산수를 벗 삼아 시를 읊조릴 때면 고인의 시집 하나쯤은 필수적일 것이다. 이뿐인가. 농정(農政), 부역, 구휼, 형벌과 같은 실질적인 행정 업무 또한 옛 책을 참고하지 않고 어찌 논의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생각해보라. 남북 변방은 기후와 풍토가 크게 다르다. 질병이 유행하기 쉬운 데다 의원조차 찾기 어려우니, 의서를 몇 권쯤 챙겨가지 않고 어찌 대비할 수 있겠는가? 변방에서의 통치는 더욱 민감하다. 군대를 책임지며 매일같이 변란을 경계해야 하기에 척계광, 유대유, 왕명학, 모원의 등의 병법서와 같은 자료들은 손에 닿는 곳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책들을 가득 실은 수레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일을 제대로 해낼 도리가 있을까?

오히려 부임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값진 토산물이나 재물을 챙기지 말고, 양심과 백성을 위한 지혜가 담긴 이 책수레만 끌고 오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돌아오는 길에는 맑은 바람만이 가득할 것이고, 이는 참으로 청렴하고 아름다운 운영의 표본으로 기억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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