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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목민심서>는 지방관이자 수령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와 행정을 다룬 치민(治民)의 필독서이다. 정약용은 이 책을 통해 당시 관리들이 본받아야 할 관리의 청렴성과 백성을 사랑하는 자세를 역설하며, 지방 행정의 중요성과 함께 관리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고 주민과 직접 소통하는 수령의 역할은 그 중요성에서 어떠한 중앙 관직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수령이 되려는 사람은 높은 도덕성과 청렴, 깊이 있는 행정 지식, 그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봉사의 마음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정약용은 이를 자신의 짧았던 수령 경험과 조부 및 부친의 공직 생활에서 비롯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엮어냈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수령의 책무와 동시에 조선 행정 체계의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목민심서>는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비롯한 국내외 다양한 법전과 문헌에서 중요한 사안들을 추려 12편으로 정리했으며, 각 편을 6조로 세분화해 총 72조로 구성되었다. 또한 이 조들을 '강'과 '목'으로 나눠 설명하였는데, 원문과 함께 '강'을 기록하고, 양이 방대했던 '목'은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특히 지나치게 세부적인 사항은 제외하고, 모범이 될 만한 역사 속 훌륭한 관료들의 이야기를 책 곳곳에 담아내 독자들에게 더 큰 교훈을 주고자 했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광주의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정재원이었으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였다.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시호는 문도(文度)로 불렸다. 그는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조선 최고의 실천적 학자로 자리 잡았다. 그의 행정 실무 경험 중에서도 특히 곡산부사를 지낸 36세 무렵의 활동이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으며, 이후 형조참의를 지내며 내관직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며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된 그는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무려 18년 동안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목민심서>로, 당시의 유배지에서 탄생한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유배가 해제된 뒤에는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생애를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며 마무리했다. 그는 1836년(헌종 2년), 향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목민심서> 외에도 그는 국가 혁신과 민생 개혁을 다룬 <경세유표>, 형법 체계를 논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방대한 저술들은 후일 <여유당전서>라는 묶음으로 간행되었으며, 근대적 사고를 고민했던 조선 후기의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목민심서>는 오늘날에도 공직자의 덕목과 책임감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고전으로 자리하고 있다.

《목민심서》의 12편(篇 강(綱)) 72조는 《경세유표(經世遺表)》 의 수령고적(守令考績)에서 제시한 9강 54목을 확대, 구현 시킨 것이라 하겠다.

《목민심서》의 12편 72조는 다음과 같다.

 

 

1. 부임(赴任)

제배(除拜)ㆍ치장(治裝)ㆍ사조(辭朝)ㆍ계행(啓行)ㆍ상관(上官)ㆍ이사(莅事)

2. 율기(律己)

칙궁(飭躬)ㆍ청심(淸心)ㆍ제가(齊家)ㆍ병객(屛客)ㆍ절용(節用)ㆍ낙시(樂施)

3. 봉공(奉公)

선화(宣化)ㆍ수법(守法)ㆍ예제(禮際)ㆍ문보(文報)ㆍ공납(貢納)ㆍ왕역(往役)

4. 애민(愛民)

양로(養老)ㆍ자유(慈幼)ㆍ진궁(振窮)ㆍ애상(哀喪)ㆍ관질(寬疾)ㆍ구재(救災)

5. 이전(吏典)

속리(束吏)ㆍ어중(御衆)ㆍ용인(用人)ㆍ거현(擧賢)ㆍ찰물(察物)ㆍ고공(考功)

6. 호전(戶典)

전정(田政)ㆍ세법(稅法)ㆍ곡부(穀簿)ㆍ호적(戶籍)ㆍ평부(平賦)ㆍ권농(勸農)

7. 예전(禮典)

제사(祭祀)ㆍ빈객(賓客)ㆍ교민(敎民)ㆍ홍학(興學)ㆍ변등(辨等)ㆍ과예(課藝)

8. 병전(兵典)

첨정(簽丁)ㆍ연졸(練卒)ㆍ수병(修兵)ㆍ권무(勸武)ㆍ응변(應變)ㆍ어구(禁寇)

9. 형전(刑典)

청송(聽訟)ㆍ단옥(斷獄)ㆍ신형(愼刑)ㆍ홀수(恤囚)ㆍ금포(禁暴)ㆍ제해(除害)

10. 공전(工典)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선해(繕廨)ㆍ수성(修城)ㆍ도로(道路)ㆍ공작(工作)

11. 진황(娠荒)

비자(備資)ㆍ권분(勸分)ㆍ규모(規模)ㆍ설시(設施)ㆍ보력(補力)ㆍ준사(竣事)

12. 해관(解官)

체대(遞代)ㆍ귀장(歸裝)ㆍ원류(願留)ㆍ걸유(乞宥)ㆍ은졸(隱卒)ㆍ유애(遺愛)

 

자서

옛날 순 임금은 요 임금의 뒤를 이어 12목을 설치하여 이들이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였고, 주문왕은 사목을 세워 수령으로 삼아 정사를 펼쳤다. 또, 맹자는 평륙에서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백성을 양육하며 관리하는 것을 ‘목’이라 부르는 것은 성현들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본래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사도에서 만백성을 가르쳐 각자가 몸과 마음을 닦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는 태학에서 귀족 자제를 교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덕을 쌓고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선도하고 다스리는 일인 ‘목민’은 수신(몸과 마음의 닦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군자의 학문은 반은 수신이고 반은 목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의 시대가 지나고 그 가르침 또한 희미해지며,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 어떻게 목민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며 절망 속에 빠져들고 있는데도, 수령들은 자기만 좋은 옷과 음식을 누리며 배를 불리고 있다. 이는 참으로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나의 선친께서는 성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지역에서 현감, 군수, 도호부사, 그리고 목사 등의 직책을 맡으셨다. 선친은 모든 임지에서 훌륭한 치적을 남기셨고, 비록 부족한 저 자신도 선친을 따라다니며 보고 배운 바가 있어 어느 정도 깨우침을 얻었다. 이후 수령의 직책을 맡아 그 배움을 실행해보니, 약간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일에서 멀어져 이를 실천할 곳이 없어져 버렸다.

먼 고장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사서와 오경을 반복해 연구하고 스스로 수신하는 학문에 전념했지만, 이는 학문의 절반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더해 중국의 역사서인 23사와 우리나라의 역사 및 문집 등에서 옛날 수령들이 백성을 다스린 기록을 찾아 세세히 살펴보고 이를 분류한 뒤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남쪽 변방 지역은 전세를 바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라 간사하고 교활한 관아 관리들이 농간을 부려 온갖 부정과 폐단이 뒤섞여 있었다. 이에 나처럼 처지가 낮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상세히 보거나 들을 수 있었기에 이러한 내용도 따로 분류하여 대략적으로 기록하고 나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 책은 총 12편으로 구성되었다. 1편은 부임, 2편 율기, 3편 봉공, 4편 애민이며, 그 외 육전 관련 조목들이 뒤를 잇는다. 마지막으로 11편 진황(흉년 구제)과 12편 해관(직무 마침)이 있는데, 각 편은 다시 6개 항목으로 나뉘어 총 72개 항목으로 작성되었다. 혹 몇 개 항목을 모아 한 권으로 하거나 한 개 항목을 나누어 여러 권으로 꾸민 경우도 있어, 최종적으로는 48권의 책이 한 부를 이루게 되었다. 비록 시대와 풍속에 따라 선왕의 법도에 완벽히 부합하지는 못하였으나, 목민에 관한 조례를 갖추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한다.
고려 말기에는 처음으로 오사라는 기준을 통해 수령들의 공과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조선에서도 이를 이어받아 실행하다가 후에 칠사로 항목을 늘렸다. 그러나 이는 수령의 임무를 대략적으로 열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 책임이 막중한데, 여러 조항을 나열해도 모든 내용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울까 두렵다. 하물며 수령 자신이 스스로 숙고하여 이를 완전히 실행한다고 기대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은 부임과 해관에 대한 두 편을 제외한 나머지 열 개의 편에만 해도 총 60개의 조항이 담겨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진 수령이 자신의 직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가진다면 이 방법들이 결코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 부염은 '이현보'를, 유이는 '법범'을 저술했으며, 왕소에게는 '독단'이, 장영에게는 '계민집'이 있었다. 진덕수는 '정경'을, 호태초는 '서언'을, 정한봉은 '작비암일찬'의 '환택편'을 저술했으니, 이는 모두 이른바 목민서를 대표하는 저작들이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대부분 시대를 거치며 전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무의미한 말들과 기이한 구절들만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렇다면 비록 내가 이 책을 썼더라도 세상에 제대로 전해질 수 있겠는가. 다만, 주역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앞선 사람들의 말씀과 지나온 행적들을 많이 배우고 익혀 자신의 덕을 쌓는다."

이는 본래 내 스스로를 수양하기 위함이지 오직 목민(牧民)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의 이름을 '심서'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이를 직접 실행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순조 21년 신사년 늦봄, 열수 정약용이 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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