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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임(赴任) 3조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다. (사조辭朝)


1)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署經)이 끝나고서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린다.

《속대전(續大典)》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담긴 규정은 조선 시대의 관료 임명 절차와 기준에 관한 중요한 사료로, 당시 공직 수행에 있어 얼마나 엄격한 원칙을 따랐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규정은 점차 형식적인 요소로 전락하게 되었고, 본래의 엄격함과 실효성을 잃어갔다. 이를 통해 조선 정치제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속대전》에서는 특히 도사(都事)나 수령으로 처음 임명되는 관료들이 반드시 서경(署經)을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서경 절차에서는 관료의 사조(家系와 인맥), 흠결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여 관직 수행 능력을 평가했다. 그러나 일찍이 고위직을 경험한 자들은 이런 서경 절차를 면제받았다. 규정에 따르면 서경 과정은 사헌부와 사간원이 협력하여 진행하며, 특별한 경우에는 단독으로도 처리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두기도 했다. 이 모든 시스템은 관료 임명의 공정성과 엄격함을 추구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점차 서경은 '형식적'인 절차로 변질되었으며, 더 이상 그 목적을 충실히 구현하지 못했다.

《경국대전》은 수령으로 임명되기 전에 응시해야 할 시험의 요건까지 상세히 제시한다. 여기에는 사서오경과 대명률, 경국대전 같은 핵심 경전과 법률에 대한 학습 정도는 물론이고, 지방 통치 전략에 관한 시험도 포함되었다. 또한 시험에서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도태될 것을 명시하며, 높은 수준의 학문적·실무적 자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 역시 시대가 바뀜에 따라 시행 중단되거나 요식 행위로 변모하였고, 결국 역량이 부족하거나 학식이 미흡한 자들도 공직에 쉽게 나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같이 본래 엄격한 절차를 통해 유능한 인사를 선발하려던 제도들이 형식화되고 유명무실해지면서, 조선 후기 공직 사회에도 점진적인 질적 하락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수령 임명과 같은 국가 주요 직책 선발의 기준이 무너졌다는 점은 당시 사회 구조와 관료제 전반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에 문관 3품 이상과 서반 2품 이상의 관원은 각각 수령이나 만호(萬戶, 종4품의 무관)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되, 각자 3명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천거된 인물이 장오(불법 뇌물 수수)나 윤리적인 죄를 범했을 경우, 천거한 자 역시 연좌의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다.

이를 살펴보면, 천거 제도는 현재에도 그 형식만 남아 있을 뿐, 이제는 장오와 같은 죄를 범한 경우에도 천거한 이에게 아무런 책임이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도로 무슨 실효성이 있을 것인가.  


2) 공경(公卿)과 대간(臺諫)에게 두루 하직 인사를 드릴 때에는 스스로 재기(才器)의 부족함을 말할 일이지, 봉록의 많고 적음을 말해서는 안 된다.

고을의 수령으로서 비록 녹봉이 적을지라도, 열 가족이 굶주리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령으로 임명되는 사람이나 이를 임명하는 사람 모두가 마땅히 그 고을의 문제점과 백성들의 걱정거리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것이며, 녹봉이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녹봉이 후하다고 칭찬하는 자에게는 당연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대부분 부정한 재물이 섞여 있을 텐데, 무엇이 그리 기쁘단 말인가?”  
반대로 녹봉이 적어 걱정해주는 자에게는 당연히 이렇게 답해야 한다.  
“결국 열 식구가 굶는 일은 없을 텐데, 무엇을 그리 근심하겠는가?”  
재상이나 대신 가운데 이전에 지방 관찰사나 인근 고을의 수령을 지낸 경험이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지역의 풍속과 문제점을 상세히 물어야 한다. 또한, 이를 바로잡을 방안을 묻고 진심으로 도움을 구해야지 형식적으로만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전에 양만리(楊萬里)가 영릉의 현승으로 있을 때, 제자가 스승을 뵙듯 장위공(張魏公)을 만나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장위공은 이렇게 말했다.  
“원부 연간(송나라 철종때)에는 허리에 금줄을 두르고 자주빛 옷을 입은 사람이 많았지만, 오직  추지완(鄒志完)과 진영중(陳瑩中) 두 사람만이 그 이름이 해와 달과 함께 빛나고 있네.”  

양만리는 이 말을 듣고 평생토록 청렴과 강직함을 바탕으로 올바른 품행을 실천하는 데 힘썼다.  

3) 전관(銓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할 때에 감사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전관(銓官)은 국가를 위해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사적인 연줄이나 은덕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관리들 역시 전관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만약 전관이 직접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적절히 선을 지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전관이 은근히 자신의 추천에 대해 언급하며 부담을 줄 경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존경하는 명공께서 부족한 저를 잘못 추천하셨습니다. 제가 혹여 일을 망쳐 훗날 명공께 누를 끼칠까 심히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날 무신(武臣)으로서 지방 수령으로 임명되는 관리들은 전관의 집을 찾으며 일일이 하직 인사를 하고, 은근히 어떤 부탁이 있는지를 묻는다. 전관이 겸손한 척하며 사소한 선물을 요청하면, 수령은 오히려 이에 더 많은 것을 제공하려고 애쓴다. 또한 이러한 관행은 부임 후에도 이어져, 뇌물을 실어 보태드리는 일이 상례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행태는 염치와 도리를 무너뜨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과거 선배 관리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던 부끄러운 모습이다.  

조선의 사례 중 하나로, 참의(參議) 김변광(金汴光, 1694~?)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는 이전에 기랑(騎郞)의 직위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서 궁핍하게 지냈어도 다시 관직에 나설 것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윤모(尹某)가 삼전(三銓)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아 김변광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발탁했다. 이후 윤씨 집안에 딸의 혼사가 생기자, 윤모는 김변광에게 말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김변광은 답장을 통해 정중히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의 편지는 도덕적 소신과 염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사람으로서 가난한 처지를 서로 도우는 것은 떳떳한 일이지만, 의심받을 만한 상황에서는 군자로서 삼가야 마땅합니다. 저는 공과 이전에 교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었으며, 발탁해 주신 은덕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명분 있는 선물이라고 해도, 남들은 오해할 것이 뻔합니다. 제가 평생 동안 지켜온 자존심과 원칙을 단 하루 만에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청렴한 덕성을 해치고 명예에 오점을 남기는 일일 것입니다.”

김변광은 편지에서 이렇게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예의를 갖춰 거절했다. 결국 심부름꾼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부끄럽고 송구스럽다"고 표현했지만, 그가 보여준 높은 도덕적 기준과 정직은 당시 사회에서도 귀감이 될 만한 태도였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공직이라는 자리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과 도덕적 기준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과 청렴성이 요구되는 자리이어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4) 신영(新迎)하러 온 아전과 하인이 오면 그들을 접대함에 마땅히 장중하고 화평하고 간결하고 과묵하게 해야 할 것이다.

 

신임 수령으로 부임한 관리의 행낭에는 대개 작은 책 한 권이 들어 있으니, 이는 바로 《읍총기(邑總記)》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봉록에 포함된 쌀과 돈을 다루는 방법 그리고 남는 것을 불법적으로 빼돌리는 각종 술책이 적혀 있다. 수리가 새로 부임한 수령을 처음 뵈는 날, 이 책을 내밀어 바치면 수령은 이를 받아보고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세세히 묻고 연구하여 그 속에 담긴 방법을 파악한다. 이는 세상에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수령은 아전이 이 책을 바치는 즉시 이를 돌려보내고,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제나 가까운 친척, 친구들이나 손님들에게까지도 억지로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탐내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단속해야 마땅하다. 

그다음 날 아침에는 수리를 불러 해당 고을의 주요 폐단 한두 가지를 물어보고, 다만 들은 후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침묵으로 일관해야 한다. 만약 문제가 상당히 중대하여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라면, 고을에서 하직 인사를 다니는 날 지역의 전직 감사와 상의하여 그 해결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아전과 하인을 대할 때는 경솔함으로 체면을 잃지 말고, 또한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우월함을 드러내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격조를 유지하면서도 온화하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가장 알맞으며,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다.

박정(朴炡, 1596~1632)이라는 관리가 새로 남원 부사로 임명되었을 때, 신임 수령을 맞으러 온 아전이 자기 고을에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젊은 학사가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단정하게 앉아 있으니 그 마음속 뜻을 짐작할 수가 없다."  
이 말은 금방 널리 퍼졌고, 훗날 박정을 칭송하는 화상찬으로 평가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제나 노비들에게도 엄히 경고하여 아전이나 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반복적으로 단속해야 한다. 또한, 아침 조례가 끝나는 즉시 아전들을 저택에서 돌려보내 다시 방문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음 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며, 설령 시동(통인)이더라도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집안에 머물면 먼저 집안 내외를 의심하고 살피려 할 것이며, 먼 곳에서 왔으니 마땅히 돌아가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약속할 필요가 있다.  
"하직 인사를 다니는 중에도 만약 재상이 아전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에게 부탁한다면, 부임하자마자 중대한 잘못이 있는 자는 면직시키고, 가벼운 경우라 하더라도 즉시 그 직위를 해제할 것이다.“

 

5) 임금을 하직하고 궐문을 나서게 되면 개연(慨然)히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다짐해야 한다.


임금을 하직하는 날, 지방 수령들은 임금 앞에서 ‘수령칠사’를 암송하거나 혹은 승정원에서 이와 관련한 강론을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수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되새기는 중요한 절차였기에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한, 궁궐의 전폐를 오르내리는 동작부터 연석에서의 태도까지 모든 절차를 세심히 익히고 숙지해야만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고려시대를 기록한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 원년에 임금이 교서를 내려 수령의 업무 평가 기준을 다섯 가지로 규정하였다. 여기에는 경작지가 넓어지는 것, 가구 수가 증가하는 것, 부역이 공평하게 이루어지는 것, 소송 절차가 간소화되는 것, 도적의 발생이 근절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이보다 앞선 현종 9년에는 지방 관원들의 업무 내용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일을 비롯하여 수령의 능력과 도적 무리의 활동, 백성들의 법 위반 여부, 효심과 청렴한 기풍을 가진 인물의 발굴, 향리의 재정 운용까지 폭넓게 포함하였다.

조선시대로 넘어와 창왕이 즉위하자, 조준은 상소문을 올려 다섯 가지 업무 기준—경작지 확장, 인구 증가, 소송 간소화, 공평한 부역, 그리고 교육 진흥—에 기반하여 지방 관원들을 순찰해 평가하고 승진이나 해임의 기준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후 성종 대에 이르러 본조의 《경국대전》에서는 이를 발전시켜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여기에는 농업과 양잠의 번영, 인구 증가, 학교 육성, 군사 체제 정비, 공평한 부역, 소송 절차 간소화, 부정의 근절이 포함되었다.

《당서》의 《순리열전》 서문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치민(백성을 다스리는)의 핵심이 지방관(자사)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사가 대궐에서 임명을 받을 때 임금이 직접 임명식을 주재하고 관복을 하사하는 절차를 통해 그들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이와 관련해 상소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성군은 관리의 선발에 있어 매우 신중해야 하며 특히 수령의 발탁은 더욱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의정부와 이조와 병조가 함께 천거하여 문해(文理)와 행정 능력(吏治)에 뛰어난 자를 선정하되 품계와 역량까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수령들에게는 다섯 가지 주요 사안을 강조하여 이를 중점적으로 수행하게 하고, 열 가지 업무 평가에서 우수한 결과를 거둔 자는 반드시 승진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직 관리는 이 같은 특혜가 없었는데, 이는 그만큼 수령의 역할이 중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수령칠사의 구체적 형태가 성종 이후에 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거정이 세조 시기까지도 다섯 가지 업무 기준만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는 성종 때 확립된 제도로 여겨진다. 이는 조선 사회에서 지방 관원의 역할과 책임이 점진적으로 체계화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안정적이고 공평한 지방 행정을 구현하고자 했던 조선의 노력을 증명하고 있다.

우연릉이 건주의 자사로 임명되어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게 되자, 그는 임금 앞에서 하직 인사를 드렸다. 이때 임금이 물었다.
“건주는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그러자 우연릉은 이렇게 답했다.
“약 8천 리 정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에 임금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경이 그곳에서 정치를 잘 하든 못 하든, 이는 내가 모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그곳이 멀다 여기지 말라. 이 섬돌 앞이 바로 천 리, 만 리나 다름없다.”
그 이야기는 다산 정약용의 《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가경 1797년 7월, 내가 곡산 도호부사로 임명되어 떠나기 전, 희정당에서 임금을 알현했던 날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임금은 이렇게 당부했다.
“옛 법에 따르면 수령이 탐욕스럽거나 직무 감당 능력이 부족하면 그 죄는 인재를 추천한 관료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중비로 임명된 자는 더욱 신중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전관에게 손가락질 받을 핑계가 없다. 내가 중비로 경을 임명한 후 여러 번 고민도 있었으나 결국 이름을 골라 낙점했으니, 이는 중대한 신임임을 뜻한다. [사실 이때 전조에서 세 번이나 다른 인물을 추천했지만 내가 경의 이름을 끝내 선택했다.] 이번 임명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니 가서 훌륭히 일해 내 이름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도록 하라.”
그 순간 나는 황송함과 책임감에 진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후 지금까지도 그 날의 엄중했던 임금의 말을 잊을 수 없다.
궁 밖으로 나오며 나는 대궐 문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가슴속에 맹세하며 스스로에게 깊은 다짐을 했다.
“임금께서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의 삶을 소신에게 맡겨 주셨소. 이 뜻을 어기고 성실히 따르지 않는다면, 내 죽어서도 그 죄를 벗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은 나는 고개를 돌려 말을 탔다. 맡은 바 책임의 무게를 마음 깊이 새긴 채로 말이다.


6) 이웃 고을로 관직이 옮겨져 편도(便道)로 부임하게 되는 경우에는 사조(辭朝)하는 예(禮)가 없다.

이것은 이른바 사조(辭朝)를 생략하고 바로 부임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번거로운 절차와 폐단을 줄이기 위한 목적일 뿐, 매일같이 임금과 사악(四岳) 및 여러 목(牧)이 만나며 서옥(瑞玉)을 나누던 과거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당나라의 영호도(令狐綯)는 한때 가까운 친구를 이웃 지방의 자사(刺史)로 발령하며 편리한 방법으로 곧바로 부임하도록 처리한 적이 있다. 이에 임금이 자사의 진사(陳謝) 표문을 읽고 이유를 묻자, 영호도는 "길이 가까워 보내고 맞이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함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에 대해 "짐은 자사가 자주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 백성에게 해가 될까 염려하네. 그러므로 한번 대면하여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들어보고, 그 능력의 우열을 가려 출척(黜陟)을 행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조명이 이미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사가 외방으로 바로 부임하지 못하도록 한 조령을 폐하고 적용하지 않으니, 이는 재상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때는 한겨울의 추운 날씨였지만, 영호도는 땀이 온몸에서 흘러 두꺼운 털옷까지 젖을 정도로 긴장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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