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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제업장 : 네 가지 허망한 관념

이 때에 정제업장 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이마를 조아려 예배하고 존경의 표시로 우측으로 세 번 돌며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으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크게 자비로우신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하여 널리 이와 같은 부사의한 일체여래의 인지행상(因地行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 부처님이 오랜 세월 끊임없이 애쓴 경계인 일체 수행의 노력을 마치 한 생각인 듯 보게 하시니, 저희 보살들은 스스로 깊이 기뻐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깨달음의 마음의 본래 성품이 청정하다면, 어떻게 오염되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미혹 흐릿하게 하여 원각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까. 오직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널리 저희들을 위하여 법성(法性)을 가르쳐 주시어, 이 법회에 모인 대중과 말세의 중생들로 하여금 미래를 살아가는 안목을 갖게 하옵소서.”
이 말을 마치고서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거듭 세 번 청함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청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 정제업장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여, 너희들이 능히 법회에 모인 대중과 말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여래의 이와 같은 방편을 묻는구나.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그러자 정제업장 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환희하며 모든 대중과 함께 묵연히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선남자여, 일체중생은 무시이래로 망상으로 나와 남, 중생(衆生)․수명(壽命)을 집착하고, 이 네 가지 전도된 것을 실제 자신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저 허망한 바탕에서 증오와 사랑의 두 경계가 문득 생기니, 거듭 허망함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두 허망한 것이 서로 의지하여 허망한 업(業)의 길을 만들었다. 허망한 업이 있음으로 허망하게 윤회를 보고, 윤회를 싫어하는 자는 허망하게 열반을 보니, 이로 인해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깨달음이 깨달아 들어갈 모든 사람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니,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각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 생각 움직이거나 멈추는 것이 모두 미혹하고 흐릿한 곳으로 돌아간다. 무슨 연유인가. 무시이래의 무명이 자기를 움직이는 주체가 됨으로써, 일체중생이 태어나면서 지혜의 눈이 없어 신심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성품이 모두 무명이기 때문이니, 이는 비유하면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명근(命根)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는 수순하는 마음이 일어나나, 나에게 수순하지 않는 자에게는 증오와 원망하는 마음을 낸다. 그 증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명을 키우기에 도(道)를 계속하여 구한다 해도, 그 도는 모두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선남자여, 무엇을 아상(我相)이라 하는가.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증득한 바를 말한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몸의 상태가 좋아 몸이 어떤지 모르고 있다가, 사지가 땡기거나 늘어지는 등의 몸의 섭생을 잘못하여 그 자리에 살짝 침이나 뜸을 뜨게 되면, 그 반응으로 내 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증득하여 취하는 것이 있어야 ‘나’라는 몸의 정체가 나타난다.
선남자여, 그 마음이 여래가 필경에 요지하는 청정열반을 증득했다 해도 모두 다 아상(我相)이다.
선남자여, 무엇을 인상(人相)이라 하는가.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증득한 바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선남자여,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다시 ‘나’를 ‘나’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깨달은 바가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 또한 이와 같다. 깨닫는 것이 일체 증득한 것을 초월했더라도 모두 다 인상(人相)이 된다.
선남자여, 그 마음에서 열반이 모두 다 ‘나’라는 사실을 원만하게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 깨달았다는 내용을 조금이라도 가지고서 증득한 이치를 두루 갖추었다면, 이를 두고 모두 다 인상(人相)이라 한다.
선남자여 무엇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하는가. 모든 중생의 마음이 스스로 증득해 깨달은 내용이 미치지 않는 곳을 말한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나는 중생이다”라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말하는 중생은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님을 아는 것과 같다. 무엇을 ‘나’가 아니라고 하는가. 내가 중생이라면 ‘나’가 아니다. 무엇을 ‘그’가 아니라고 하는가. 내가 중생이라면 ‘그’도 ‘나’도 아니다.
선남자여, 단지 모든 중생이 증득하고 깨달아 아는 것은 모두 아상과 인상이 되니, 아상과 인상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것을 깨달아 아는 바가 존재하여 있다면, 이를 두고 중생상이라 한다.
선남자여, 무엇을 수명상(壽命相)이라 하는가. 모든 중생의 마음이 청정한 자리를 비추어 깨달아 안 바를 말하니, 일체 업을 아는 지혜 그 자체로 업의 근본을 보지 못하는 바가 마치 명근(命根)과 같다.
선남자여, 만약 마음이 일체의 깨달음을 비추어 보았다면 이것은 모두 번뇌가 되니, 깨달음과 깨달은 것은 번뇌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물로 얼음을 녹일 때 따로 얼음이 있어서 얼음이 녹는 것을 아는 얼음이 따로이 없듯, 내가 있어서 나를 깨닫는다는 것도 또한 이 예와 같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사상(四相)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오랜 세월 부지런히 애써 도를 닦는다 하더라도 단지 유위(有爲)일 뿐이니, 끝내 일체의 성스런 과보를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정법(正法)의 말세라고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나를 인정하여 열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증득함과 깨달음이 있어 이를 성취했다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도적을 자기의 아들이라 주장해도, 도적이 끝내 그 집안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무엇 때문인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또한 열반을 좋아한다는 것이니, 나를 좋아하는 뿌리가 잠복하여 열반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또한 생사를 싫어하는 것이니, 좋아한다는 것이 진짜 생사임을 알지 못하므로 따로이 생사를 싫어하니, 이 생사를 ‘해탈하지 못한 것’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해탈하지 못한 법을 어떻게 알겠는가.
선남자여, 저 말세의 중생이 보리(菩提)를 수습하는 데 있어, 자신의 조그마한 깨달음으로써 자기의 청정을 삼는 것은, 아상의 근본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의 법을 찬탄하면 즉시 환희심을 내어 문득 그를 제도하려 하거나, 그의 법을 비방함에 한(恨)을 품고 문득 성을 낸다면, 이것으로 그는 아상을 견고하게 집착하여 그것을 근본마음인 아뢰야식에 감추고 모든 감각기관(根)에 노닐면서, 일찍이 아상(我相)을 끊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선남자여, 그런 도를 닦는 자는 아상을 제거하지 않았기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
선남자여, 아공(我空)을 안다면 나를 훼손할 것이 없다. 내가 있어 법을 설하는 것은, 아직 나를 끊지 않았기 때문이며, 중생상과 수명상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은 병을 법이라 설하니, 이 때문에 가련한 사람이라 한다. 그들이 비록 애써 정진하더라도 모든 병만 더 보탤 뿐이니, 그러므로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사상을 알지 못하고 여래의 앎과 실천하는 삶을 자기의 수행처로 삼는다면, 이 중생은 공부를 끝내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혹여 중생들이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고, 증득하지 않은 것을 증득했다 하며, 공부 잘하는 사람을 보고 마음에 질투심을 낸다면 이는 그 중생이 아직 아애(我愛)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은 도 이루기를 희망하나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고, 오직 많이 듣기를 원하여 아견(我見)만을 더한다.
선남자여, 단지 부지런히 정진하여 번뇌를 항복 받고, 대용맹심을 일으켜 얻지 못한 것을 얻고 끊지 못한 것을 끊도록 한다면, 탐(貪)․진(瞋)․애(愛)․만(慢)과 아첨 및 질투가 상대하는 경계에서 생겨나지 않고 피차의 은혜와 사랑이 일체 적멸할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사람은 점차 도를 성취할 사람”이라 하셨으니, 이 사람이 선지식을 구한다면 삿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구하는 곳에서 따로 증오나 사랑하는 마음을 낸다면 청정한 원각의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때에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정제업 보살이여 마땅히 알라.
시방세계 일체의 모든 중생은
모두 다 아애(我愛)를 집착하여서
무시이래 허망하게 윤회를 하니
사상(四相)을 제거하지 못하였다면
보리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애증이 마음에서 생겨 나오고
아첨하는 마음이 생각에 있어
이 때문에 미혹하고 흐릿하여서
깨달음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
깨달음의 국토에 돌아가고자
맨 먼저 탐진치를 제거하고서
법애(法愛)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점차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네.
나의 몸도 본래가 있지 않거늘
증애가 어디에서 생겨날 건가
이 사람이 선지식을 구하게 되면
끝끝내 삿된 견해에는 안 떨어지네.
구할 바에 다른 생각 일어난다면
구경에 성취하는 깨달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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