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13 부록

조사께서 탑에 드신 후(722년) 개원 10월 임술 8월 3일 한 밤중이 되었을 때 갑자기 탑 속에서 쇠줄을 잡아당기는 듯한 소리가 나므로 스님들이 놀라서 나가보니 한 상주가 탑에서 달아나므로 자세히 살펴보니 조사의 목에 상처가 있었다.
도적이 든 사실을 고을에 자세히 알리니 현령인 양간과 자사인 유무첨이 통첩을 받고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더니 5일 만에 석각촌에서 도적을 잡았다.
소주로 보내 죄를 심문하니 성은 장이고 이름은 정만인데 여주의 양현 사람이라 하였다.
홍주의 개원사에서 신라 스님 김대비로부터 돈 2만 냥을 받았고 김대비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으로 돌아가서 공양하려 했다 하므로 유수가 이 사실을 듣고 형의 집행을 보류하고 몸소 조계에 가서 조사의 제자 가운데 제일 뛰어난 사람인 영도에게 어떻게 처단해야 할지를 물으니 영도가 말하길,
 “만약 국법으로 논한다면 모조리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불교는 자비로워 원수나 친한 이나 모두가 평등한데 하물며 그 사람이 공양을 하고 싶어서 한 짓이니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므로, 
유수가 감탄하며 “비로소 불문이 넓고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며 풀어주었다.

상원 원년(760년 - 멸도한지 47년째)에 숙종이 사신을 보내어 조사의 의발을 대궐 안으로 가져와 공양하였는데 영태 원년 5월 5일 대종의 꿈에 육조대사가 나타나 의발을 청하므로 7일에 자사인 양함에게 분부하여 이르시길, 
“짐의 꿈에 혜능선사가 나타나서 「법을 전하는 가사를 조계로 되돌려 주라.」하시므로 진국대장군인 류숭경으로 하여금 받들어 보낸다. 짐이 국보로 생각하니 경이 직접 본사에 가서 법대로 잘 모시고 스님 가운데 종지를 친히 이은 자로 하여금 더욱 엄중하게 수호하게 하여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셨다.

그 뒤에 가끔 사람들이 몰래 훔쳐 갔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찾아왔는데 이와 같은 일이 네 번이나 있었다.

헌종(806년)이 대감선사라 시호하시고 탑을 원화영조라 이름 하였다.
그 나머지 사적은 당나라의 상서인 왕유와 자사인 유종원과 자사인 류우석 등이 비문에 실었다.

탑을 지키는 사문 영도가 기록하노라.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