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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삼국 피튀기는 전쟁

제 1 장 신라의 발흥(勃興)


진흥대왕(眞興大王)의 화랑(花郞) 설치

화랑은 한때 신라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러 조선이 지나화(중국화)하려는 움직임 속에서도 그 정체성을 지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한문화가 사회 전반에 강하게 퍼지고, 사대주의 성향의 사상과 언론이 학문, 풍속, 민심을 휘어잡으며 조선 사회를 압도하려 했던 시기에, 화랑 정신은 이를 거부하고 배척하며 조선을 조선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송도 중엽 이후로 비록 화랑의 직접적인 영향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그 여운이 여전히 남아 조선의 자주적인 정신을 지탱했던 것이다.

따라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논하려는 것은 뼈대를 빼고 정신을 찾으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랑의 정체와 사적을 직접 기록한 문헌인 선사, 화랑세기, 선랑고사 등은 소실된 상태다. 이에 따라 화랑에 대한 기록은 화랑 외부의 시각에서 쓰인 자료인 유교도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불교도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책에서도 수십 줄에 불과한 제한된 기록만 존재하며, 그나마도 기록의 정확성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이번에는 삼국사기에서 언급된 화랑 설립에 대한 실록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흥왕 본기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37년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게 되었다. 당시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있어,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놀게 하며 그들의 행동을 관찰한 뒤 적합한 자를 선발하려 하였다. 결국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을 선택했는데, 한 명은 남모(南毛), 다른 한 명은 준정(俊貞)이었다. 

이 무리에는 300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지만, 두 여인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질투하며 갈등을 빚었다. 그러던 중 준정이 남모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그녀를 강물에 던져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준정은 처형되었고, 무리는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골라 단장시키고, 그를 화랑(花郞)이라 부르고 받들었다. 화랑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며, 이들은 도의를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산천을 유람하며 길고 험한 곳에도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를 통해 그들의 올바른 행실과 그릇됨을 가려내어 착한 사람들을 선발해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대문(金大門)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군사가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신라에는 현묘한 교(敎)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근원은 신사(神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유교(儒敎), 불교(佛敎), 선교(仙敎)를 포함하여 인간을 감화시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집안에서는 효도를 실천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며, 무위를 추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에 힘쓴다는 것은 석가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당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이 저술한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신라에서는 귀인의 자제 중 용모가 빼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단장시키고 그를 화랑이라 칭했으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고 섬겼다"고 전해진다.


김대문과 최치원의 글을 인용하며 화랑을 크게 칭송하는 듯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주장은 많은 오류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다함전*에 따르면 사다함이 가라 정벌에 참여한 것은 진흥왕 2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진흥왕 37년 이전에 이미 화랑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데, 이제 와서 화랑이 37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논리인가?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화는 여성 교사로서 교단을 이끌던 존재였으며, 원화가 폐지된 뒤 남성 교사를 두어 이를 국선 혹은 화랑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화를 화랑 자체로 보는 해석은 지나치게 비약적이며 논리적이지 않다. 

김부식의 시대는 화랑이라는 명칭이 여전히 쓰이고 있었으며, 관련 문헌과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던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성한 *삼국사기*에서는 화랑 제도의 설립 연대를 불분명하게 기술하고, 그 원류와 구별조차 명확히 하지 못했다. 이는 과연 어떤 이유 때문일까? 

김부식은 유교적 세계관을 대표하던 인물로, 화랑파 윤언이를 내쫓고 화랑의 역사와 관련된 흔적을 말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삼국사기* 안에서 '화랑'이라는 단어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랑과 관련된 기록이 소수라도 남아 있는 이유는 그가 지나(중국)를 숭배하며 중국 서적에 기반한 내용을 특히 중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 기록물에 등장하는 화랑 관련 언급들은 삭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가 사기에 남겨진 것이다. 이렇게 그의 감정과 목적이 어떠했든, 중국 자료와 신라인들의 전승 기록으로 전해지는 대중 유사나 *신라국기* 등을 통해 화랑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인용한 신라국기에는 '택귀인자제(擇貴人子弟)'라는 구절부터 총 24자로 구성된 내용이 짤막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도종의 *설부*에서 언급된 신라국기에는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걱정하며 --- 채용하여 쓰고자 ---"라는 문구가 있어, 이를 통해 보면 이후의 기록과 김대문, 최치원의 논평 등이 신라국기의 내용을 기반으로 발췌해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는 이렇듯 신라국기에 담긴 화랑 설치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을 인용하면서 본국에 전해 내려오던 일부 내용을 말살했다.

이후 *삼국유사*에 실린 화랑의 실록은 다음과 같다. "진흥왕이 즉위하여 크게 선선을 숭상하며 남의 집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선발해 원화로 삼았다. 이는 젊은 이들을 이끌어 선비를 양성하고, 더불어 효, 제, 충, 신(孝悌忠信)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근간이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혹은 俊貞娘) 두 사람을 원화로 선출하니 그를 따르는 무리가 3~4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교정랑은 남모랑에게 시기심을 품어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녀에게 술을 먹인 뒤 몰래 끌어가 죽이고 북천(경주 북쪽의 하천) 물 속에 돌로 눌러 매장하였다. 남모랑의 무리들은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해 슬퍼하며 흩어졌으나, 한 사람이 음모를 알아채고 노래를 만들어 거리의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이를 통해 남모랑의 무리는 그녀의 시체를 북천에서 찾아내었고, 교정랑을 죽였다.

 이 사건 이후, 진흥왕은 원화를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몇 년이 지나 국가의 부흥을 위해 화랑도를 다시 부활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양가 출신의 덕망 있는 남성들을 선발하여 ‘화랑’이라 칭하고, 처음으로 설원랑을 국선으로 삼아 화랑 제도를 시작했다. 이는 화랑국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해 상세한 부분이 있지만, 논리적으로 뜬금없는 내용도 섞여 있어 해석에 혼란을 준다. 예컨대, 진흥왕이 신선을 숭상하며 원화와 화랑을 우대했다고 한 대목은 마치 원화나 화랑을 유랑하는 도사와 같은 존재로 오해하게 한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저자가 불교 신자였기에 《삼국사기》를 집필한 유교도들처럼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겠지만, 기록의 모호함은 여전히 비슷하다.

국선과 화랑 제도는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해 신라에서 도입된 것이다. 고구려에서 선배는 이두 문자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표현되는데, 이 선배라는 집단은 신성한 공간에서 경기로 선발된 뒤 학문에 몰두하고 수박, 격검, 활쏘기, 승마, 태껸, 씨름 등 여러 무예와 기술을 익혔다. 또한 자연을 탐방하거나 시와 노래, 음악 등 예술적 활동에도 능통했으며, 공동생활을 통해 평상시에는 구호활동이나 성벽 복구 같은 공공사업에 참여했고, 전쟁 시에는 생명을 다해 싸우며 국가에 헌신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의 국선(國仙)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국(國)’ 자를 더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이라는 명칭 또한 고구려 선배들이 조백으로 만든 옷을 입고 조의(皁衣)라 불린 데서 착안되어, 신라인 선배들의 화장 습관을 반영하며 만들어진 표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원화는 여성 교사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는 유럽 중세 시대에 예수교 기사단을 지도하던 여성 교사들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화의 목적은 남성 화랑들의 감정과 정서를 균형 있게 조율하는 데 있었다. 《소재만필》에서는 “화랑들은 전쟁에서 죽으면 천상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가 들어 자연사하면 그 영혼도 노화하지만, 젊은 나이에 전사할 경우 영혼 역시 젊음을 유지한다고 여겨 어린 나이에 전쟁에서 죽기를 기뻐했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선(國仙)의 ‘선’ 자를 중국 도교의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개념과 연결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최치원이 “무위의 태도를 유지하고 무언의 교법을 따른다는 도가적 이상”이라고 언급한 것은 국선 교리가 유교, 불교, 도교라는 삼교의 사상을 절충하며 반영했음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선 교리는 투쟁과 실천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어, 무위나 무언처럼 소극적인 이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한 교가 있어 풍류라 한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의 "득오는 이름이 풍류황권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국선의 교를 '풍류'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검군전의 "나는 풍월의 뜰에서 수행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국선의 교리가 '풍월'이라 불리기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풍류는 단순히 문자적인 유희나 놀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음악을 지칭하고 있으며, 풍월 또한 단순히 음풍영월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말의 시가를 나타낸다. 화랑의 도는 다른 학문과 달리 기술적인 측면보다 음악과 시가에 전념하며 인간 세상을 교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삼국사기의 악지에 소개된 진흥왕이 만든 도령가와 설원랑이 만든 사내기물악은 물론, 대부분 화랑이 직접 창작한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매우 숭상하여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향가 역시 화랑 무리에서 창작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에 보면 시가와 음악으로 여러 연극을 행했던 흔적이 나타나며, 삼국지 또한 부여와 삼한 사람들이 노래와 춤을 즐기며 밤낮으로 끊임없이 즐겼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며 시가, 음악, 연극 등을 교화의 방법으로 활용해 국민들의 마음을 고양시킨 결과,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결국 문화적·정치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에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비록 화랑의 기원을 다룬 선사, 선랑고사, 화랑세기 등은 전해지지 않지만, 선사는 신라 이전부터 단군 시대를 포함해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선배'들을 기록한 내용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고구려 본기의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이라는 문구는 선사 본문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선랑고사와 화랑세기는 신라 시대 이후의 선배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 열전에 드문드문 발췌된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이는 의로운 행동으로 공을 세운 일부 화랑만 다뤄진 것에 불과하다. 300여 명의 화랑들과 낭도의 스승들에 대한 기록은 누락되었는데, 이는 김부식이 화랑 정신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여섯 가라(加羅)의 멸망

김수로(金首露)와 그 여섯 형제는 신가라(현재의 김해)·밈라가라(현재의 고령)·안라가라(현재의 함안)·구지가라(현재의 고성)·별뫼가라(현재의 성주)·고링가라(현재의 함창)로 나뉘어 각자의 나라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특히 밈라와 안라 두 가라는 네 나라 동맹에 속해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음이 제4편과 제8편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지증·법흥·진흥 세 왕이 차례로 여섯 가라를 점차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했고, 진흥왕 시기에 이르러 여섯 나라가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경상도가 완전히 하나로 통일되기에 이른다. 이제 여섯 가라의 흥망에 관한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려 한다.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금관국(金官國)이라 기록된 나라로, 초대 왕인 수로왕(首露王)은 신라보다 강력한 국력을 보유했던 시기가 있었다. 신라의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음집벌(音執伐, 현재 경주 북쪽)과 실직(悉直, 현재 삼척) 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자, 수로왕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수로왕은 단 한 마디로 갈등을 해결하여 세 나라 모두 그의 말을 기꺼이 따랐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파사왕은 수로왕을 예우하며 잔치를 벌였지만, 신라 육부 우두머리 중 하나인 한기부장(漢祇部長) 보제(保齊)가 낮은 지위의 인물로 수로왕을 대접하게 하자 이에 격분한 수로왕은 자신의 신하 탐하리(耽下里)에게 보제를 처단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파사왕은 수로왕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고, 대신 탐하리를 숨겨준 음집벌국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러나 수로왕 이후 신가는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밈라가라 등의 침입을 받으며 쇠락의 길을 걷는다. 마침내 신라 법흥왕 19년인 532년, 10대 왕인 구해왕(仇亥王)이 국고와 가족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면서 신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안라가라는 연대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 기록이 부족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진했을 때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 측에 붙어 백제에 저항했다. 또한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구원을 요청했을 당시에도 신라와 네 나라 동맹에 참여하며 고구려를 방어했으니,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당대의 정치적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전사(前史)에서는 안라가라가 멸망한 연대를 기록하였으나,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증왕(智證王) 15년에 "소경(小京)을 아시촌(阿尸村)에 두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안라의 이두(吏讀) 명칭이 아시촌으로 보이니, 이미 지증왕 15년 이전에 안라가라는 멸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법흥왕이 대병(大兵)으로 아시량국(阿尸良國)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돌아간 해를 새 왕의 원년으로 잘못 기재한 사례가 여러 번 보이는데, 이를 참고하면 지증왕 15년(지증왕이 붕어한 해)이 법흥왕의 즉위 원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안라가라는 법흥왕 원년에 멸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제 2 장 조령과 죽령 이북의 10개 군 쟁탈 문제

---고구려 · 신라 · 백제 세 나라 사이의 100 년 전쟁과 지나수·당 침입의 끄나풀이 된 문제 ---

 

무령왕의 북진과 고구려의 쇠퇴

백제의 동성왕이 비록 반란을 일으킨 신하 백가에게 암살당했지만, 그의 아들 무령왕은 영특하고 용맹한 인물이었다.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백가의 난을 평정하고 같은 해 고구려 방어의 허점을 노려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달솔 부여우영에게 정예 병사 5천 명을 맡겨 고구려의 수곡성(현재의 신계)을 기습해 함락시켰다. 이후 몇 년 동안 장령(현재 서흥의 철령)을 점령하고 성채를 쌓아 예족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며 국경을 안정시켰고, 백제 서북쪽의 경계를 대동강까지 확장하여 근구수왕 시절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505년, 고구려 문자왕이 이 치욕을 씻으려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해 가불성(정확한 위치는 미상)에 이르렀다. 이에 무령왕은 정병 3천 명을 이끌고 맞섰다. 고구려는 병력이 적은 백제를 과소평가하며 방심했으나, 무령왕은 교묘한 전략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10여 년 동안 고구려는 다시는 남쪽으로 침범하지 못했다.

무령왕은 이 틈을 활용해 나라 내부의 유휴 노동력을 동원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둑을 쌓아 논을 조성하며 국고를 풍성하게 채웠다. 또한 서쪽으로는 지나, 남서쪽으로는 인도와 대식 같은 나라들과 교류하며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의 24년 재위 기간은 백제 역사상 황금기로 손꼽힐 만한 시기였다.

 

안장왕의 사랑 전쟁과 백제의 패퇴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태자로, 그가 태자로 있을 무렵 상인으로 가장하고 개백 지역, 현재의 고양 행주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씨라는 집안의 딸 주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절세미인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안장은 백제 감시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씨 집안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주를 보았고, 그녀에게 반해 서로 정을 나누며 부부의 약속까지 맺었다. 그는 주에게 자신이 고구려 대왕의 태자임을 밝히며 "고국으로 돌아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차지한 후 너를 데리러 오겠다"며 헤어졌다.

시간이 흘러 문자왕이 죽고 안장은 왕위에 올라 백제를 자주 공격했지만 패배를 거듭했다. 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기도 했으나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그 사이, 주의 빼어난 미모가 알려져 그 지역 태수가 주의 손을 청하고자 그녀의 부모에게 결혼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안장과의 약속을 마음에 둔 주는 "내 이미 정을 준 사람이 있다. 그의 생사 여부를 먼저 확인한 뒤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이는 태수를 격노하게 만들었고, 그는 주를 고구려의 첩자로 의심하며 협박과 회유를 병행했다. 주는 결국 감옥에 갇혔고, 태수는 그녀를 사형에 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옥중에서 주는 한 편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고 또 죽어 백 번을 더 죽어, 백골이 흩어져 먼지가 되더라도, 내 마음속 일편단심은 그대를 향할 것이다." 이 노래를 접한 이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태수는 그녀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주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안장왕은 결국 주가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나 그녀를 구할 방도가 없어 초조해했다. 그는 여러 장수들에게 개백현을 탈환해 주를 구출한다면 황금과 만호후의 작위를 내리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때, 왕의 누이동생 안학이 등장한다. 안학은 경국지색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웠으며, 장군 을밀과 서로 혼인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을밀의 신분이 낮음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을밀은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 중이었다. 그런데 왕의 약속 소식을 들은 을밀은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제게 황금이나 만호후의 작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제게 있어 진정한 소원은 안학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주를 사랑하시는 마음과 제게 있어 안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저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결국 왕은 안학에 대한 사랑과 한주에 대한 애틋한 마음 중 후자를 택하며 을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왕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며 약속을 굳혔다.
 
을밀이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바닷길로 출발하며 왕에게 보고하길, "제가 먼저 백제를 치고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하겠으니, 대왕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천천히 육로를 따라오십시오. 수십 일 안에 한주에서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20명의 결사대를 비밀리에 선발하여 평상복 아래 무기를 숨긴 채 개백현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개백현의 태수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을 맞아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성대한 잔치를 열었으며,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기대하며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려 하였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너를 처형하려 마음먹었으나, 만약 너의 마음이 변한다면 살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태수가 말하자, 한주가 대답하였다. "태수가 차라리 내 뜻을 꺾지 않는다면 오늘은 태수의 생일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며, 내가 살아남는 날은 태수의 죽음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태수는 크게 분노하여 즉각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을밀이의 부하들은 무용수를 가장하여 잔치 자리에 들어가 칼을 꺼내 많은 손님들을 쓰러뜨렸다. 또한, 소리를 높여 "고구려 군사 10만이 성안으로 들어왔다"고 외쳤고, 그로 인해 성 안은 크게 혼란에 휩싸였다. 이후 을밀이는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진입하여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출하였다. 이어 창고와 관청을 봉쇄하여 안장왕의 도착을 기다리며, 한강 일대의 각 지역 성읍들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에 백제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곧 안장왕이 아무런 저항 없이 백제 여러 지역을 거치며 개백현에 이르렀고,そこで 한주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안장왕은 을멸과 한주를 혼인시켰다.

해상잡록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본기에는 안장왕이 개백현을 점령했다는 언급이 없다. 다만 지리지의 개백현 주석에 "왕봉현은 일명 개백현이라 하며,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달을성현 주석에는 "한씨 미녀가 높은 산에서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이했기에 이후 그곳을 고봉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씨 미녀는 한주로 보이며, 현재의 고양 지역이 바로 을밀이가 개백현을 점령하여 대왕과 한주가 만나게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개백'이라는 이름은 해석에 따라 '가맛'으로 읽힐 수 있으며, 이는 '가'가 고구려에서 왕이나 귀족을 뜻하고, '맛'은 만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다양한 음운적 근거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따라서 '개백'이란 이두문자로 쓰인 '가맛'을 의미하며, 이는 한주가 안장왕과 만난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만 후대 역사 기록자들이 본래 명칭을 잊고 이두문의 해독법을 몰라 이를 오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 본기의 성왕 7년(안장왕 11년, 529년)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인 혈성을 점령한 기록이 나오는데, 현대 강화 지역으로 여겨지는 이곳이 바로 을밀이가 행주성을 점령했을 당시의 혈성일 가능성이 높다.

단심가는 흔히 정포은의 작품으로 전해지지만,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아마도 고대 인물인 한주가 지은 노래였던 것을 포은이 불러 조선 태종의 찬가로 답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인다.


이사부(異斯夫)·거칠부(居柒夫) 등의 집권과 신라·백제 두 나라의 동맹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신라에는 두 명의 뛰어난 전략가가 등장하였다. 그들은 김이사부와 김거칠부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사부를 '태종'이라고 기록하였으나, *훈몽자회*에서는 '태(苔)'를 '잇'으로 풀이하였다. 즉, '이사'는 음을 따온 것이고, '태'는 뜻을 따와 '잇'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편, '황(荒)'은 현재도 '거칠황'이라 읽으므로, '거칠' 역시 음을 따른 것이고, '황'은 뜻을 담은 것이다. '부(夫)'에 대해서는 *칠서언해*에서 이를 '사태우'라고 해석했는데, 음은 '우'이며, '종(宗)'의 뜻은 '마루'로 풀이된다. 따라서, 이두(吏讀) 언어로 읽을 때 김이사부와 태종은 '잇우', 김거칠부와 황종은 '거칠우'로 이해할 수 있다.

김이사부는 영리하고 기민한 인물이었으며, 젊은 시절 가슬라(지금의 경주 지역) 군주로 임명되었다. 당시 울릉도에 해당하는 우산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두 병력을 동원해 토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사부는 "우산국은 작고 변방의 섬일 뿐이며, 그 풍습이 몹시 거칠고 무례하여 무력만으로 복종시키기엔 많은 군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계책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나무로 사자를 조각해 배에 실어 우산국 해안에 도착,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너희를 밟아 죽게 하겠다"고 위협하였으며, 이에 두려움을 느낀 우산국은 항복하였다. 이후 이사부는 안라와 미마나(임라)를 정복하고 두 왕조인 지증왕과 법흥왕 치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진흥왕 원년(540년)에는 7세의 어린 진흥왕이 즉위하면서 모후가 섭정을 맡았고, 이사부는 병부령에 올라 전국의 군사와 내정 및 외교 업무를 총괄하며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였다.

김거칠부의 집안은 신라에서도 명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내숙은 '쇠뿔한'(신라 시기의 재상)으로 불렸고, 아버지 물력은 아찬이었다. 왕족 계통의 집안에서 자란 거칠부는 젊은 시절 고구려를 정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승려로 위장해 고구려로 잠입했다. 그는 여러 지역을 탐사하던 중 법사 혜량의 강의에도 참석했다. 혜량은 영민한 인물로 거칠부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대는 어디서 온 사미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거칠부는 "저는 신라에서 스님의 이름을 익히 들었고 불법을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혜량은 "나같이 어리석은 늙은이는 알아도, 고구려 사람들이 그대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소? 빨리 돌아가시오"라고 권하며 신라로 귀환하도록 했다. 이후 혜량은 거칠부를 통하여 신라에 투항하는 것을 희망하게 되었다. 신라로 돌아온 거칠부는 대아찬에 임명되어 이사부와 함께 국정을 논의하며 백제와 동맹해 고구려를 쳤으며, 이후 기회를 엿보아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 확장에 기여하였다.

이때 백제의 성왕은 한강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긴 뒤,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전에 동맹을 맺었던 여섯 가라를 통합해 버렸기 때문에 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가라는 이미 몰락하여 동맹 가능한 제삼국이 없었으므로 결국 사신을 신라로 보냈다. 이사부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공수 동맹을 성립시켰다.

 

신라의 10개 군 탈취와 신라·백제 동맹의 결렬

기원후 548년, 고구려의 양원왕이 예족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 한북 지역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의 동맹에 따라 장군 주진을 파견하여 정예 군사 3천 명으로 지원하였고, 고구려 군사를 격퇴시켰다. 당시 한강 이북 지역은 과거 안장왕의 전투로 인해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북은 현재의 양성, 즉 한강 북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독산성은 지금의 수원과 진위 (평택군) 사이에 있는 독산 고성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 소식을 들은 양원왕은 다시 대군을 조직하여 더 깊이 남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충청도 동북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고구려군은 도살성(현재의 청안)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백제군은 금현성(현재의 진천)에 진을 치며 약 1년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동맹 관계였으나 이 전투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551년, 몽골 지역에서 돌궐족이 동쪽으로 침입해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양원왕은 군대를 분산하여 장군 고흘에게 돌궐족을 격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사이 백제의 달솔 부여달기는 정예 병사 1만 명으로 평양을 기습 점령하였고, 양원왕은 이를 피해 장안성을 새로 건축한 뒤 천도했다.

장안성에 대해 일부에서는 현재의 평양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만약 이를 평양이라 여긴다면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것이 되어 논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장안성은 현재의 봉황성(신평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당시 안동도호부(현재의 요양)에서 남쪽으로 약 800리 떨어져 있던 곳으로,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평원왕 재위 28년에 수도가 장안성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양원왕이 일시적으로 장안성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였으며, 이후 평원왕 때 재차 장안성(신평양)으로 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가 만약 동맹의 의리를 지키며 백제와 협력해 고구려를 공격했다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근접한 백제를 비교적 먼 고구려보다 더 껄끄럽게 여겼다. 또한,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백제가 세력을 확대해 신라가 감당하기 어렵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진흥왕은 비밀리에 백제를 기습하여 새로 확보한 영토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병부령인 이사부(異斯夫)에게 지금의 충청도 동북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한아찬인 거칠부(居柒夫)에게는 팔로(八路)의 군사를 이끌고 죽령(竹嶺) 이북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지시를 받은 백제는 이를 동맹국의 지원군이라 믿고 크게 반겼다.

그러나 국가 간의 싸움에 신의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이사부는 백제와 협력하여 도살성(道薩城)을 되찾고 난 직후, 돌연 백제 군대를 기습하여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했다. 동시에 거칠부는 군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죽령 밖에 있는 백제의 군영들을 차례로 공격해 격파했으며, 백제가 점령 중이던 죽령 밖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고을을 탈환했다. 이로써 백제는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만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독에 갇힌 쥐나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백제는 10개 고을을 빼앗긴 것은 물론 평양으로 진격했던 수만의 대군 역시 퇴로가 막혀 패망하고 말았다.

이 상황은 신라가 맹약을 배신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서에서 일부 내용을 삭제했음이 분명하다. 본기에서는 백제의 평양 공격 성공 이후와 거칠부의 10개 고을 탈환을 누구와의 전투 결과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백제가 먼저 평양을 공격해 승리했다"(百濟先攻破平壞)는 단 일곱 글자가 우연히 남아 있었고, 이 내용이 거칠부전(居柒夫傳)에 실려 후대에 진실을 알리는 기록으로 남겨졌다.

청안(淸安)의 옛 이름은 '도살(道薩)' 혹은 '도서(道西)'로, 이는 ‘돌시울’로 읽으면 되고, 진천(鎭川)의 옛 이름은 흑양(黑壞), 금양(金壞), 금현(金峴), 금물내(金勿內) 또는 만노(萬弩)였다. 우리말에서 천(千)은 '지물', 만(萬)은 '거물'이라 불렀으며, 따라서 진천은 '거물래'로 해석할 수 있다. 흑양의 흑(黑)과 만노의 만(萬)은 '거물'의 의미에 대응하고, 금물(金勿)은 '거물'의 음을 따온 것이며, 양(壞), 내(內), 노(弩)는 모두 '래' 소리에 해당한다. 금양(金壞)과 금현(金峴)의 ‘금(金)’은 금물(金勿)의 간략화이며, ‘현(峴)’은 금물내(金勿內)에 위치한 산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현재의 경기도는 물론이고 충청도의 충주와 괴산까지도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근세에 정약용과 한진서 등 여러 학자들은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 땅을 밟아본 적조차 없다고 주장하며 삼국사기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러나 도살성을 고구려가 점령한 사실을 보면, 고구려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주장은 마치 잠꼬대처럼 들린다. 다만, 이는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지역일 뿐이고, 오랜 기간 동안 황해도 지역조차 백제의 땅이었다. 따라서 충청북도 각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한 삼국사기가 완전히 틀렸다거나 지나치게 왜곡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죽령 바깥과 고현 안쪽에 자리한 10고을은 지금 어디를 말하는가? 죽령은 오늘날의 죽령이며, 고현은 현재 지평, 즉 양평군 용문산의 명치를 가리킨다. 이 10고을은 제천, 원주, 횡성, 홍천, 지평, 가평, 춘천, 그리고 낭천(지금의 화천) 등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들은 이후 신라 9주 중 하나였던 우수주의 관할 군현에 포함된 지역들이다.


백제 성왕(聖王)의 전사(戰死)와 신라의 국토 확장

신라는 10개의 고을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후 강화 관계를 맺고, 이전의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적국으로 삼아 그 동북쪽 지역을 침략하였다. 이를 통해 현재의 이천, 광주, 한양 일대의 땅을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고립되었으나, 격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몰락한 가야계 주민들을 규합해 국원성(현재 충주)을 내어주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도록 했다. 이후 기원후 554년, 백제는 가야계 군사와 연합해 어진성(현재의 진산)을 공격하여 신라군을 격파하고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했다. 그리고 고시산(현재의 옥천)을 추가로 공격하자, 신라 신주의 군주 김무력과 삼년산군의 고우도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백제 성왕은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신라 대본영을 기습하려다 구천(현재 백마강 상류)에서 신라 복병에 걸려 패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승기를 잡고 백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이로 인해 백제 전역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후 신라는 더욱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격하며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남쪽으로는 비사벌(현재 전주)을 점령하고 완산주를 설치했으며, 북쪽으로는 국원성을 점령해 두 번째 가야계 국가를 소멸시키고 해당 지역에 소경을 설치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흥왕은 백제를 격파하고 현재의 양주, 충주, 전주 등 경기·충청·전라도에 걸친 핵심 지역을 확보했다. 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동북쪽으로 현재 함경도와 만주의 길림 동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건국 이래 가장 넓은 국토를 이루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진흥왕 본기는 연월의 혼란과 사실의 누락이 적지 않다. 화랑을 설치한 연대가 잘못됐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14년 가을 7월에 백제 동북 변방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했다고 하면서, 겨울 10월에 백제 왕녀와 결혼하여 소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리 전쟁이 빈번하던 시기라 하더라도, 넉 달 간격으로 전쟁을 통해 땅을 빼앗고, 다시 그 나라와 혼인을 통한 관계를 맺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더욱이, 백제가 신라에 빼앗긴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같은 짧은 시간 안에 화호를 맺고 또 딸을 내어 사위를 삼았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진흥왕 12년 기록에는 왕이 순수를 나아가 낭성에 머물면서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에 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불러 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악지에는 우륵이 성열현, 지금의 청풍 출신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순했고, 이에 진흥왕이 그를 국원에 안치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륵이 고령 출신으로 추정되며, 이후 청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좋아하여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제2 밈라가 점차 힘을 잃자 신라에 귀순하여, 진흥왕이 제2 밈라를 평정한 뒤 그를 국원에 안치시켰다는 내용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진흥왕이 순행 중 우륵을 불러 거문고를 듣던 장소는 현재 충주의 탄금대로 알려져 있다. 국원성인 현재 충주가 신라 영토로 편입된 시점은 진흥왕 16년이었다. 따라서 그가 우륵의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을 들은 것도 16년 이후로 추정되는데, 12년에 낭성에서 이미 들었다고 기록한 것은 모순이다.

그 밖에도 한양 삼각산 북쪽 봉우리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는 백제 정벌 성공의 증거이며, 함흥 초방원에 있는 순수비는 고구려 정복의 유적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이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만주원류고와 길림유력기에서는 길림이 신라 땅이었다고 전하며, 신라의 계림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진흥왕이 고구려를 정복하며 동북 길림까지 차지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또한 박연암집에서는 복건성 천주와 장주도 한때 신라 영토였다고 서술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는 알 수 없어 이를 인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진흥왕이 해외까지도 정벌하며 유적을 남긴 곳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침략과 바보 온달의 전사

 고구려는 백제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었을 당시 신라의 요청에 따라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진흥왕이 동쪽 변방을 공격해 남가슬라에서부터 길림 동북쪽까지 차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전투를 통해 비열흘(현재의 안변 이북)을 되찾았지만, 장수왕과 안장왕 시기에 점령했던 계립령(지금의 조령 서쪽)과 죽령 서쪽의 땅들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북한산은 신라에 점령된 이후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다. 이 땅을 되찾길 열망하며 ‘장한성가’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니, 고구려인들의 슬픔과 애증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거의 매년 신라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마침내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 장군이 전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맞았다. 이 사건은 고구려 시인과 문장가들에 의해 노래와 이야기로 전해졌으며,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고구려 전역에 퍼졌다. 이는 일반 고구려인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키웠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의 평화는 영원히 단절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제 온달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보려 한다.

온달(옛 음은 ‘온대’로 풀이되어, 백산의 뜻을 지닌다)은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성씨도 없는 한 가난한 거지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후덕하고 시원스러웠다. 그는 시각을 잃은 노모를 모시며 매일같이 밥을 구걸해 대접하였고, 그 외에는 거리에서 방황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사회는 가난하고 천한 이를 업신여기는 분위기였고, 특별히 어리석지도 않았던 온달은 사람들에게서 ‘바보 온달’이라는 조롱섞인 별칭으로 불렸다.

한편, 평원왕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울기를 잘했던 딸이 하나 있었다. 왕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장난삼아 “울지 마라, 네가 자꾸 울면 귀한 집안 며느리가 아니라 바보 온달의 아내로 삼겠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시간이 흘러 공주가 성인이 되어 혼인 적령기가 되자, 왕은 그녀를 상부 고씨 가문에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어릴 적 했던 말을 상기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아버님께서 저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 다른 사람에게 보내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항변하며, “차라리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라고 고집부렸다.

평원왕은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 “너는 만승천자의 딸이다. 그런 네가 어찌 거지와 결혼하겠다는 말이냐?” 그러나 공주는 굴하지 않고 대답하기를, “아버님은 만승천자시니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만승천자의 딸로서 그 말씀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 온달에게 시집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왕은 더 이상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니 눈앞에서 사라져라”라고 말하며 그녀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딸은 집을 나설 때 다른 물건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고, 다만 금팔찌 수십 개를 팔에 낀 채 떠났다. 길을 따라가 그녀는 벽이 무너져 내리고 네 기둥만 남은 온달의 집을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온달은 집에 없었고, 그의 노모만이 있었다. 딸은 노모에게 절하며 온달이 어디 갔는지 물었다. 노모는 눈이 멀었지만 귀로는 그녀의 고운 목소리를 듣고, 코로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를 맡아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그녀의 고운 손을 잡고 말했다. "어디에서 오신 귀한 아가씨인지 모르겠으나, 왜 이렇게 가난하고 헐벗은 내 아들을 찾으시는 겁니까? 내 아들은 굶주림에 못 이겨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이라도 벗겨 먹으러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딸은 온달을 찾아 산으로 내려가 느릅나무 껍질을 짊어진 채 돌아오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온달이었다. 딸은 그의 이름을 확인한 뒤 자신이 직접 찾아온 이유, 즉 혼인하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온달은, 부유한 집안의 여인이 빈천한 거지 같은 자신의 배우자가 되려 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크게 소리쳤다. "너는 사람이 아니구나! 여우나 도깨비일 게다. 해가 지니 나를 놀리러 왔구나!"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러나 딸은 포기하지 않고 그 문 밖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그녀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간절히 부탁했다. 온달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기만 했고, 이에 그의 노모가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처럼 가난한 집이 없고, 내 아들보다 더 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당신 같은 높은 신분의 분이 이런 가난한 집에서 남편을 섬기겠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딸은 "종잇장도 함께 들면 가벼워진다고 하잖아요.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결국 그녀는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 논, 하인과 소를 사들이며 온달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도록 도왔다.

하지만 딸의 목적은 단순히 온달을 부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온달에게 말을 타고 활쏘기를 배우라고 권하며 말을 사오라고 했다. 당시 전국 시대였던 고구려에서는 말 관리가 중요하게 여겨졌고, 왕실의 말을 국마라 불렀다. 국마는 잘 먹이고 정성껏 관리했지만, 만약 왕이 말을 타다 다치면 말먹이와 말몰이를 벌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관리들은 종종 훌륭한 준마를 일부러 굶기고 때려 병들게 만들기도 했다.

대궐 안에서 자란 딸은 이러한 폐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온달에게 시장에서 새 말을 사지 말고 버려진 국마를 사오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직접 그 말을 먹이고 돌보며 키웠고, 덕분에 말은 날로 건강해지고 힘차게 자랐다. 한편, 온달의 승마와 활쏘기 실력도 날이 갈수록 뛰어나져 결국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3월 3일 신수두 대제의 경기회에 온달이 참가하여 말타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사냥에서는 가장 많은 사슴을 잡았다. 평원왕은 그를 불러 이름을 묻고 그의 역량에 크게 놀라 감탄하였지만, 딸의 선택에 대한 분노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여전히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후 주나라의 무제가 북쪽을 통일하고 위세를 떨치며 고구려의 강성함을 시기하던 와중에, 요동 지역에 침입해 싸움이 벌어졌다. 배산의 들에서 양측이 대치하던 중 한 병사가 용맹하게 나서 싸웠는데, 그는 검술과 활쏘기의 재주가 뛰어나 수백 명의 적군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알고 보니 그 병사는 바로 온달이었다.

이를 본 왕은 탄식하며 "이는 진정 내 사위로다"라고 말하며 온달을 불러 대형(고구려 관직 중 하나)으로 임명하고 특별히 총애하였다. 이후 평원왕이 세상을 떠나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신라에게 빼앗겼습니다. 그곳 백성들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며,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신뢰해 군사를 내려주신다면 반드시 그 땅을 되찾겠습니다." 영양왕은 이를 허락하고 온달에게 출병을 명했다.

군대를 이끈 온달은 출발에 앞서 맹세하였다. "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그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저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아차성 아래에 이르러 신라 군사와 전투를 벌였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온달의 유해를 고구려 땅으로 옮기고자 했으나, 관이 땅에서 움직이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왕의 딸이 직접 찾아가 통곡하며 말했다. "국토를 되찾지 못한 채 어찌 당신이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저 또한 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후 왕의 딸은 기절하였고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온달과 왕의 딸을 그 자리에 함께 묻으며 그들의 의로운 행적을 기렸다.

관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장례를 주관했던 사람들이 온달의 애국과 충정에 깊이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온달이 생전에 "계립령과 죽령 이서를 회복하지 못하면 나 또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차마 관을 옮길 수 없었다는 데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온달전 말미에는 공주가 관을 쓰다듬으며 "삶과 죽음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돌아가십시다"라고 한 후에야 관이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공주는 국토 회복에 대한 열망도, 남편에 대한 사랑도 담백했다고 해석될 위험이 있다. 또한, 온달이 단순히 상사병으로 인해 죽었다면 그의 모든 행적은 국토를 위해 헌신한 삶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공주가 온달에게 말을 사주고 그를 직접 가르치며 고무했던 의도와, 온달이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전쟁에 나설 수 있었던 진정성은 여기서 무너지게 된다.

조선사략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언급한다. 공주가 통곡하며 "국토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공이 어찌 돌아갈 수 있으리오? 공이 못 돌아가시는데 제가 어찌 홀로 돌아갈 수 있으리까?"라 말하며 기절했고, 결국 고구려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대적 차이로 인해 조선사략의 신뢰성이 삼국사기만큼 높지는 않으나, 해당 서술은 군국(軍國) 시대의 사상과 맥락을 담고 있어 본서에서는 이를 채택하였다.

정다산과 한진서는 고구려가 실제로 한강 이남을 차지했던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그렇다면 온달이 계립령 이서를 우리 땅으로 언급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장수왕이나 안장왕 시기에 잠깐 동안 한강 이남을 점령했던 것이 명확하다. 따라서 온달이 말한 '한수'는 현대의 한강이 아니라 현재 양성 지역의 '한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편 일본인 금서룡은 북경대학에서 강연하며 온달전을 역사로 평가할 가치조차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단순한 무지의 발언이라 볼 수 있다. 온달의 죽음은 고구려와 신라 간 강화의 가능성을 단절시키고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을 이루어, 삼국 간 흥망의 판도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주요한 전환점이었다. 다만 김부식의 첨삭으로 인해 해당 기록의 역사적 가치가 원문보다 줄어들었다는 점은 올바르게 역사를 읽으려는 독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 3 장 동서전쟁(同壻戰爭)

백제왕 손자 서동(薯童)과 신라 공주 선화(善花)의 결혼

기원후 6세기 후반, 백제의 위덕왕의 증손자인 서동은 준수한 외모와 품성을 지닌 청년으로 삼국에서 이름을 떨쳤고, 신라 진평왕의 둘째 딸인 선화는 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로 알려져 있었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선화는 꽃처럼 고운 외모로 인해 특히 사랑받았다. 그는 "신라의 왕이 된 것이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버지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라고 말하며 늘 선화를 위해 적합한 사윗감을 찾았다. 마침 서동의 명성을 들은 진평왕은 그를 선화의 남편감으로 희망하였고, 위덕왕 또한 증손인 서동에게 알맞은 배우자를 찾던 중 선화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서동의 아내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당시 가족 제도와 신분 차이 및 정치적 상황이 이 결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설사 누군가 이 결혼을 제안했다고 하더라도, 진평왕이나 위덕왕 모두 이를 반역 행위로 간주하여 크게 분노하며 처벌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신라가 전통적으로 박씨, 석씨, 김씨라는 세 성(姓) 간에 혼인을 통해 왕위를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왕족 딸이 외부 성씨와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예컨대 소지왕이 백제 동성왕에게 딸을 보냈거나, 법흥왕이 가실왕에게 누이를 보냈다는 사례도 실제 친딸이나 친누이가 아니라, 육부 귀족의 딸이나 누이를 대신 보낸 것이었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김씨인 진평왕의 딸 선화 역시 박씨나 석씨 혹은 동성 김씨 사람과 결혼해야 했으므로, 백제의 부여씨 출신 서동과의 혼인은 불가능했다.

한편, 백제 입장에서도 결혼에 있어 성씨 제한이 신라만큼 엄격하지 않았으나,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 사람이 진평왕의 아버지이자 과거 성왕의 사위였던 진흥왕이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백제 왕실로서는 원수였던 진흥왕의 후손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심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 간 정치적 대립과 복수심이 얽힌 문제로 인해 쉽게 극복될 수 없는 장벽이었다. 더욱이 신라와 백제의 신하들 역시 서로를 전쟁에서 맞서 싸운 적국의 후손들로 여기며 해당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결국 여러 복잡한 사정과 전통적 제약으로 인해 선화와 서동 간의 혼인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 관계 이상의 정치, 사회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만약 백제 왕실이 아닌 신라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선화 공주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볼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결심 끝에 백제 왕궁을 떠나 신라의 수도 동경, 오늘날의 경주로 향했다. 이곳에서 서동은 머리를 깎고 한 대사의 제자가 되어 중이 되었다.

당시 신라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실에서도 스님을 초청해 재를 올리고 설법을 듣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서동은 오랜 시간 그리워하던 선화 공주와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두 사람의 눈이 처음 맞닿는 순간, 선화는 서동이 백제의 사랑받는 사내라 해도 저 중보다는 못할 것이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날 이후 선화는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스님에 대한 연정으로 가득 찼다. 한편, 서동도 만남 이후 확고한 결심을 했다.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노라. 너 역시 내 아내가 될 마음이 없다면 죽음을 맞이하라." 이처럼 두 사람은 깊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동은 선화 공주의 시녀를 매수해 은밀히 그녀의 궁을 드나들며 관계를 이어갔다. 선화는 서동 이외의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주위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결국 두 사람은 고민 끝에 이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소문이 퍼지더라도 이를 통해 세상이 그들의 관계를 허락하면 좋고, 그렇지 않다면 함께 죽기로 약속했다.

서동은 시장에서 엿과 밤, 과일 등을 사들고 아이들을 유혹하여 노래를 가르쳤다.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온전했지만, 반쪽은 서동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만 남아 상사병에 걸렸다네. 서동이여, 어서 오소서. 염통을 돌려주어 선화 아가씨를 살려 주소서." 이 노래는 하루 아침에 신라 동경 전역으로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결국 선화는 진평왕에게 사실을 고백했고, 서동 또한 백제로 귀국해 증조부 위덕왕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둘의 관계를 반대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다고 호소했다. 처음에는 진평왕과 위덕왕 모두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두 사람을 가차 없이 처벌하려 했지만, 사랑하는 딸과 손자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진평왕은 신라의 박·석·김 씨 간의 결혼 관습을 깨뜨려 결혼을 허락했다. 위덕왕 또한 과거 신라와 맺었던 악연을 잊고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하며 두 나라 왕실은 다시금 새로운 인연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결혼 후 10년 동안의 두 나라 동맹

두 사람이 결혼한 이후, 두 나라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추후 신라가 고타소랑의 참혹한 죽음(자세한 내용은 다음 절 참조)을 계기로 백제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백제를 정벌한 후 관련 기록들을 모두 소각하여, 신라 왕가에서 백제로 시집간 사실을 감추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동이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을 소문으로 접하고 머리를 깎은 뒤 신라의 수도로 이동해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여지승람에서는 무강왕이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용화산에 미륵사를 건립했으며, 이 과정에서 진평왕이 여러 기술자와 공인을 파견해 지원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후조선 기준왕의 능을 사람들이 말통대왕의 능으로 불렀다는 점이 언급된다. 또한 주석에서는 백제의 무왕 소명을 '서동'이라고 기록했다. 서동은 시간이 흘러 백제 왕위를 계승하고 42년간 통치한 뒤, 그의 시호가 무왕으로 정해졌다.

후조선의 기준이 무강왕이 아니라는 점은 곧 무왕과 관련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서동과 말통은 이두를 통해 해석하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서동의 ‘서’는 뜻을 취하고, ‘동’은 음을 취하면 '마동'으로 읽을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말통’도 '마동'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 말통대왕의 능은 실상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를 합장한 능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말통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신라와 적대적인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신라가 적국인 백제에 공인을 보내 절 건축을 도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미륵사의 건축은 서동이 왕족으로 있을 때 원당 격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신라와 백제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나라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동맹 관계를 맺었고, 진평왕 1년부터 24년까지 백제의 위덕왕 26년에서 45년, 그리고 혜왕·법왕 시기를 포함하여 무왕 2년에 이르기까지 큰 전쟁이 없었다. 또한, 양국은 수나라에 파견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요청했으며, 이는 수 문제와 양제 시기의 침입 사건으로 이어졌다.

 

동서전쟁(同婚戰爭) :김용춘의 총애 다툼과 무왕(武王)의 항전

백제는 위덕왕 말년 혹은 혜왕과 법왕 시기에 해당하는 시기, 즉 서동이 왕의 증손이거나 손자 혹은 태자였을 때까지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무왕 3년, 서동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인 기원후 602년에 신라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을 공격했고, 이에 신라는 소타이, 외석, 천산, 옹잠 등지에 성책을 쌓아 백제를 방어했다. 백제는 좌평 해수에게 신라의 이 네 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충청북도 충주, 괴산, 연풍, 보은 지역과 지금의 무주, 용담, 금산, 지레 등 지리산 좌우 지역, 그리고 덕유산 동쪽인 함양, 운봉, 안의 등지에서 끊임없는 전투가 이어지며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쟁은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진평왕은 무왕의 아내의 아버지였기에 흔히 말하듯 아내의 처가에도 머리를 숙이라 했거늘, 정작 무왕은 왕위에 오른 뒤 정치적 세력을 잡으면서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 곧 처가인 신라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격하며 군사로 유린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편, 신라에서 왕위는 박·석·김 세 성이 교대로 계승하는 전통을 가졌으나 이는 시조 박혁거세 때부터 정해진 명문헌법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박씨와 석씨가 혼인해 그 아들이나 사위만 왕위 계승 자격을 가졌으나, 건국 약 300년 후 김씨 출신 미추이사금이 점해왕의 사위가 되면서 김씨가 집권 가문에 포함되었고 세 성이 왕위를 돌려가며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니 약 600년 후 부여씨가 이에 포함되어 네 성이 함께 왕위를 계승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백제의 무왕 또한 신라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신라의 전통대로라면 아들이나 사위 중 나이가 많은 자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진평왕에게는 딸만 있었으며 그중 맏딸 선덕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기에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반면 둘째딸 선화의 남편이었던 무왕은 맏사위로서 계승권을 주장할 명분이 충분했다. 이 조건들을 바탕으로 무왕은 신라 왕위 계승에 희망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고, 진평왕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넘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박·석·김·부여 네 성이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하는 체제가 되었을 것이며, 이로써 신라와 백제가 하나의 나라로 합쳐져 두 나라 사이의 계속된 참혹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에는 부여씨를 중심으로 진(眞), 국(國), 해(海), 연(燕), 목(木), 백(백), 협(협) 등 여덟 대가가 존재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부여씨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벌족공화 체제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한편, 신라는 초기에 박, 석, 김 세 성씨가 왕권을 공유하던 공화적 체제를 갖췄으나, 이 무렵에는 김씨 가문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나라의 국왕 간 연대를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하는 데 큰 장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리 간단히 흘러갈 수는 없는 법. 두 나라의 신하들 대부분은 이러한 결혼 동맹에 반대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은 김용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용춘은 누구인가? 그는 진평왕의 셋째 딸 문명의 남편이었다. 선화가 백제로 시집가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진평왕의 애정은 자연히 문명에게 집중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첫째 사위인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 사위인 용춘을 더 아끼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김용춘에게는 신라의 왕위가 서동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에게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서동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반대는 성공했고, 진평왕은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접었다. 대신 출가해 승려의 삶을 살던 맏딸 덕만, 즉 후일 선덕여왕을 불러들여 왕태녀로 임명하였다. 당시 진평왕은 선덕여왕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결정하면서도, 실질적인 권한은 김용춘에게 주는 전략을 취했으리라. 이는 서동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동 또한 총명한 인물이었으니 그러한 계산에 쉽게 속을 리 없었다. 그는 결국 즉위 후 김용춘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 김용춘은 처음엔 은밀히 진평왕의 참모로 활동하다가 이후 내성사신 겸 대장군으로 전선에 직접 나섰다. 그의 지도 하에 전투는 매년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동서전쟁으로 불리는 격렬한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동서전쟁(同壻戰爭)의 희생자

이 전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 동서 간의 신라 왕위 쟁탈전이었다. 두 사람의 충돌은 본질적으로 비열한 이기주의의 대립에 불과했지만, 명분상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세워 사람들을 선동하고, 명예와 관직으로 결사적인 군대를 조직했다. 한편에는 슬픔 속에 울부짖는 민중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영예를 좇아 춤추듯 따라가는 장수와 병사가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여지승람* 합천 부자연(父子淵) 관련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전쟁은 지루할 정도로 길어져 민간에서 전쟁터로 떠난 장정들이 기약 없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어느 늙은 아버지가 자식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는 반가움에 마중을 나갔다. 그들은 부자연으로 불리는 연못 위 바위에서 서로 껴안고 울면서 오랜 세월 그리워했던 애틋한 정과 고난을 하소연했다. 하지만 부주의로 인해 바위 아래로 떨어지고, 결국 그곳에 묻혀 연못 이름이 '부자연'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삼국사기* 설씨녀전에 기록되어 있다. 

설씨녀는 가난하고 친척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단정한 품행으로 인해 모든 이가 그녀를 칭찬하며 부러워했으나 누구도 그녀를 감히 범하지 못했다. 진평왕 시기, 설씨녀의 늙은 아버지가 먼 곳으로 수자리(군역)를 떠나야 할 일이 생기자 딸은 크게 걱정하며 이웃집 소년 가실에게 그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를 들은 가실은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나섰고, 이를 계기로 설씨녀의 아버지는 딸과 가실을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설씨녀는 가실에게 전장에 다녀온 뒤 3년 후 결혼하자고 약속했고, 가실도 이를 수락하며 자신의 말을 그녀에게 맡겼다. 또한, 훗날 서로 확인할 약속으로 거울을 깨어 나누며 한쪽씩 지니기로 했다.

가실은 수자리를 떠났고, 그 약속된 3년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6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설씨녀의 아버지는 결국 딸을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설씨녀는 이를 거부했고,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압박에 그녀는 가실이 남긴 말을 타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던 순간, 남루한 차림에 여윈 모습으로 돌아온 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서로 알아보기조차 힘들었지만, 깨어진 거울을 맞대어 확인하고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국 맺어질 수 있었다.

비록 위 두 가지 이야기는 전국시대 당시 상황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근심과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사(武士) 중심 사회의 모습은 이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으니, 이어지는 글에서는 그러한 예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1) 귀산은 파진간 무은의 아들이며, 사량부 출신이었다.

그는 어릴 적 추항과 가깝게 지내며 원광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법사가 이렇게 말했다. "불교에는 열 가지 계율이 있으나, 너희들이 신라의 신하로서 이를 모두 실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화랑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을 따르거라. 그것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며, 벗을 믿음으로 대하고, 전투에서는 용맹하게 나서며, 생명을 해할 때는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후 진평대왕 건복 19년(602년)에 백제가 신라의 아모산성을 공격하며 포위하자, 왕은 파진간 건품과 무은 등을 보내 방어하게 했고, 귀산과 추항도 이에 동참했다. 백제군이 패퇴하는 척하며 천산으로 물러났으나 매복한 병사들이 신라군을 공격하고 무은을 쇠갈고리로 사로잡으려 하자, 귀산은 "우리 스승께서 전투에는 용맹히 나서라고 가르치셨다.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는가?"라며 추항과 함께 창을 들어 싸움에 임했다. 그는 수십 명의 적을 물리치고 아버지 무은을 구출했으나,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중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2) 찬덕은 모량부 출신으로 용기와 절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진평왕 건복 27년에 가잠성의 성주가 되었는데, 다음 해 10월, 백제군이 성을 포위하며 백여 일이 지나도록 위기가 이어졌다. 왕이 상주, 하주, 신주의 군사 5만을 보내 구원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찬덕은 분개하며 군사들에게 외쳤다. "세 주의 군대가 적의 강함에 주눅들어 진격하지 못하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하지 못하다니 이는 의리 없는 행동이다. 의리 없이 사느니 차라리 의롭게 죽는 것이 낫다!" 찬덕과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물조차 없는 상황에서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며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결국 버틸 힘이 다해 이듬해 정월, 찬덕은 괴목에 머리를 들이받아 골이 부서져 전사했다. 지금의 괴산이라는 이름은 그가 머리로 괴목을 박은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3)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그는 진평왕 건복 35년에 금산당주로 있으며, 한산주의 도독 변품과 함께 가잠성을 탈환하고자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해론은 "여기는 내 아버지가 전사하신 곳이다"라며 적진으로 달려들어 몇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많은 시인들이 장가를 지어 그의 용맹과 희생을 기렸다.

눌최(訥催)는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신라 진평왕 건복 41년(614년)에 백제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속함(速含), 앵잠(櫻岑), 기잠(岐岑), 봉잠(峰岑), 기현(旗縣), 용책(冗柵) 등 여섯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왕은 상주, 하주,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의 다섯 군에 명령하여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섯 장군은 백제의 군세가 강대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중 한 장군이 말했다. 

"대왕께서 오군(五軍)을 우리에게 맡기시며 나라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고 하셨지만, 병법에서는 형세가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나는 것이 기본 원리입니다. 지금 적의 기세가 이토록 강하니 만약 우리가 싸우다 패하면 어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다른 장군들도 모두 그 의견에 동조하며 퇴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면목이 없어 노진성(奴珍城)을 쌓은 후 돌아갔다. 이 틈에 백제는 공격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여 속함, 기잠, 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다. 

눌최는 앵잠, 봉잠, 기현 세 성을 지키며 용맹히 맞섰다. 다섯 장군이 모두 퇴각했다는 말을 들은 눌최는 크게 분노하여 병사들을 모아 선언했다. 

"봄이 되면 모든 초목이 무성하지만 겨울이 오면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지금 구원병도 없고 세 성마저 위태로우니, 이는 진정志士와 의로운 사나이義夫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사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함께 죽기로 맹세했다. 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끝까지 저항하다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목숨을 바치며 싸우다 죽었다.

이 네 전쟁 기록은 신라의 파진간과 도독 및 다섯 장군들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들과 의로운 이들의 간략한 역사이다. 당시 백제에 있어 이 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투로 기록될 만큼 큰 전쟁이었다. 그 외에도 양국 간 크고 작은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비록 백제사(百濟史)는 대부분 유실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제는 신라보다 강하고 호전적인 나라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희생된 충신들과 의사 또한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전쟁과 희생은 궁극적으로 두 나라, 나아가 두 집단의 이기심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당대의 충신과 의사들 또한 이러한 무의미한 전쟁에 의해 희생된 가치 없는 존재들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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