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편. 고구려 VS 당나라 전쟁 ①
제 1 장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서유(西遊)와 그 혁명
연개소문의 출생과 소년시절의 서유(西遊)
연개소문은 고구려 역사 약 900년 동안 지속된 전통적인 호족 중심의 공화 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일원화했다. 또한, 장수왕 시기 이후 고착된 서수남진(서쪽을 방어하고 남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바꿔 남수서진(남쪽을 방어하고 서쪽으로 진출하는)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확립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수많은 호족을 제거하며 실질적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서방 강국 당(唐)의 태종과 맞서 싸워 그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이는 단순히 고구려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자리 잡게 했다. 다만 그의 행적에 대한 선악이나 능력 평가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에 대한 언급은 미미하다. 대표적으로 김유신전에서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객관(여관)에 머물게 했다"는 짧은 구절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대부분 당나라에서 기록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같은 중국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들 사료는 모두 연개소문과 적대 관계에 있던 당태종과 그 신하들의 주관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쓰였기 때문에 신뢰성이 상당히 낮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 지역의 명문 가문 출신으로, 서부가 연나(淵那)라고 불렸던 만큼 성씨가 연(淵)인 것이 맞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그의 성씨를 천(泉)으로 기록한 이유는 당나라 사람이 고구려 고조(연개소문의 증조부)의 이름인 '연'을 피휘(이름자를 피하는 관습)하여 천으로 대체한 것을 그대로 전재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문신 장열(張悅)은 규염객이라는 인물의 사실을 기록하며 그를 부여국 사람이라 소개했고, 그는 태원(太原)까지 가서 이정(李靖)과 친교를 맺고 그의 아내 홍불지와 의형제를 맺고자 했다고 전한다. 이어 규염객이 당태종을 만나 그의 기품에 눌려 제왕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한 뒤 귀국해 반란을 일으켜 부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후대 역사가들은 부여국이 곧 고구려이고, 규염객이 바로 연개소문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태종의 기품에 눌려 제왕의 꿈을 접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중국 측이 장려했던 권선징악적 문학 기법일 뿐이다. 연개소문이 과거 중국을 잠시 방문해 상황을 탐지하고 고구려의 정복 야망을 품었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갓쉰동전 등의 설화 역시 위와 유사한 소설 수준의 내용이며, 그 개요를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옛날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나이 50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고, 이에 하늘에 제사를 올려 아들을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결국 아들을 얻었고, 갓 쉰 살에 낳은 뜻으로 아이의 이름을 갓쉰동이라 지었다. 갓쉰동은 성장하며 비범한 용모와 뛰어난 재능을 갖췄고, 연국혜는 그를 손에 든 보배처럼 아끼며 곁에서 늘 떠나지 못하게 했다.
갓쉰동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집 앞에서 놀고 있던 어느 날 한 도사가 지나가다 그를 보고 "아깝다, 정말 아깝다"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연국혜는 도사의 말이 마음에 걸려 뒤따라가 그 이유를 물었다. 처음에는 입을 열지 않던 도사가 결국 털어놓기를, "이 아이는 자라서 큰 부귀와 명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수명이 짧아 그 영광의 때를 누리기도 전에 생을 마감할 운명입니다."라고 했다. 연국혜가 이를 피할 방법이 있는지 묻자, 도사는 "15년 동안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연국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도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하인에게 명해 갓쉰동을 낯선 산천과 물길을 넘어 먼 시골로 데려가 버리게 했다. 다만 훗날 다시 찾기 위해 먹물로 아이의 등에 ‘갓쉰동’이라는 이름을 새겨두었다. 갓쉰동이 버려진 곳은 원주 학성동이었다.
그곳에서 밤중에 부자 유씨가 황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새벽에 꿈속의 장소로 나가 보니 준수한 어린아이가 앞내에 홀로 있었고, 등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유씨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기르면서 그대로 갓쉰동이라 불렀다.
갓쉰동은 자라면서 눈매가 맑고 용모가 영특했으나, 그의 내력을 알 길 없는 유씨 집안 사람들로부터 천민처럼 여겨졌다. 유씨는 갓쉰동을 사랑했지만 주변의 비난이 두려워 그의 신분을 높여주지 못했고, 단지 조금의 글을 가르쳐 집안일을 돕게 했다.
어느 날 갓쉰동은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청아한 퉁소 소리가 들려 지게를 내려놓고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노인이 퉁소를 불고 있었다. 노인은 갓쉰동을 보더니 말했다. "네 이름이 갓쉰동이 아니냐? 배움을 등한시한다면 어떻게 장차 큰 인물이 될 수 있겠느냐?" 그는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갓쉰동은 노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해 해가 질 때까지 정신없이 들었다. 노인은 저무는 석양을 가리키며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갓쉰동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충격을 받았다. 나무를 하러 갔다가 빈 지게만 남겨두고 하루를 다 보내버렸으니 주인의 꾸중이 두려워 내려와 보니, 누군가가 이미 나무를 베어 지게 가득 채워놓은 것이다. 그날 이래로 갓쉰동이는 매번 나무를 하러 갈 때마다 신비로운 노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검술, 병서, 천문학, 지리학 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오면 항상 그의 지게에는 이미 나무가 가득 실려 있었기에 이를 짊어지고 돌아오는 일만 하면 되었다.
장자는 아들은 없는 대신 딸 셋을 두었는데, 이름하여 문희, 경희, 그리고 영희였다. 세 사람 모두 미모가 출중했지만 특히 영희의 미모는 단연 돋보였다. 갓쉰동이가 15살이 되던 봄의 어느 날, 장자는 그를 불러 세 딸을 가마에 태워 꽃 구경을 다녀오라고 명령했다. 갓쉰동이는 장자의 명에 따라 가마군을 준비하고 문희의 방 앞에 다다라 말했다. "아가씨, 가마를 대령했습니다." 그러자 문희는 발을 군말 없이 내밀며 말했다. "맨땅을 밟을 수는 없잖아? 갓쉰동아, 네가 누워라." 그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내어주었고, 문희는 그의 등을 밟고 가마로 들어갔다.
경희의 차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갓쉰동이가 화가 났다. 한 주먹 휘두르고픈 마음이 들었지만 장자의 은혜를 떠올리며 꾹 참아냈다. 마지막으로 영희의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스로 체념하며 미리 뜰에 엎드렸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말했다. "이 년도 그 년의 동생이니 별 다르겠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영희는 문밖에 나와 이 상황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갓쉰동이, 이것이 무슨 짓이에요?" 갓쉰동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갓쉰동이의 등이야말로 하느님이 아가씨들을 위해 만들어 주셨겠지요. 이 등으로 아가씨 방을 데우는 나무를 져오고, 이 등으로 쌀을 져다가 배를 채우고, 또 아가씨들 앉고 싶으시면 자리가 되고, 걷고 싶으시면 다리가 되는 거죠." 그의 말은 끝이 없었으나, 영희는 참다못해 달려와 그를 세우며 말했다. "그만해요! 사람의 발로 사람의 등을 밟다니, 그게 무슨 법이에요?" 이어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갓쉰동이는 그녀의 손길과 꽃 같은 얼굴에서 눈길을 빼앗겼다. 아름다운 살결과 다정한 목소리에 그는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말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릴 적 일을 생각하면 나도 너와 혼인할 만한 집안의 자식인데…" 그 말 끝에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영희 역시 갓쉰동이의 기품 있는 용모와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런 사람이 왜 종로 살아가는지 의문스러워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영희는 갓쉰동이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갓쉰동이는 더불어 영희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갓쉰동이는 고백했다. "일곱 살 때 집을 떠나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쩌면 부모님이 도사의 말을 믿고 저를 떠나보내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훗날 저를 다시 찾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저는 귀한 집 아들이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 둘 결혼하자." 이에 영희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귀인의 아내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 만일 네가 사나이가 아닐진대 귀한 집 아들이라도 내 남편이 못될 것이고, 네가 사내라면 종이라도 나는 너 아니면 아내가 되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그 회포를 말해보아라·” 하였다.
갓쉰동은 "달딸이는 우리 나라를 끊임없이 침략해 백성을 괴롭히고 있지만, 우리는 늘 침입을 막는 데에만 그치고, 적지를 공격한 적이 없소. 이것이 늘 가슴에 사무쳤소. 그래서 한번 달딸 땅을 치러 가 백 년의 평화를 이루고 싶다"고 말하며, 최근 나무하러 갔다가 신비로운 선관에게 검술, 병법, 천문학, 지리학 등을 매일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희는 크게 기뻐하며 "하지만 적을 치려면 그곳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당신이 직접 달딸국에 들어가 그 땅을 돌아다니며 국정을 살피고, 후일 성공할 기반을 다지고 돌아온다면, 내가 부인이 못 되더라도 종이 되어 백 년이라도 당신을 모시겠소"라고 말했다. 갓쉰동은 이를 흔쾌히 허락하고 장자 집에서 도망쳤으며, 영희는 자신이 가진 금가락지와 은그릇들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갓쉰동은 달딸국에 들어가 달딸 말을 배우고 풍습을 익히며, 내정을 파악하기 위해 이름을 "돌쇠"라 고치고 왕의 가노가 되었다. 그의 지혜롭고 영리한 행동은 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왕의 둘째 아들이 갓쉰동이 비범한 인물이며 달딸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차리고는 아버지에게 후환이 될 수 있으니 그를 죽여야 한다고 고하였다. 갓쉰동은 철책에 갇히고 음식까지 끊겨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깨달았지만 대책이 없어 답답함을 느끼던 중, 새장을 발견하고 안에 있던 매를 날려 보냈다. 이 모습을 본 공주는 놀라며 "왜 매를 풀어준 것이냐? 오히려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더 자극하는 죄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갓쉰동은 "내가 갇힌 마음의 답답함을 견디기 힘들어 갇힌 매를 보는데, 나처럼 매도 답답할 것 같아 내 원망과 고통 속에서라도 매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소. 설령 내 목숨이 위태로워도 매의 원망을 받기 싫었다"라고 답했다.
공주는 그의 말에 감동하며 "오라버니 말로는 네가 우리 달딸국의 멸망을 꾀하려 태어난 자라는데, 정말 그러한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갓쉰동은 "만약 하늘이 나를 달딸을 무너뜨리려 보냈다면 나를 죽여도 소용없소. 하늘은 또 다른 사람을 내게 만들 것이오. 오히려 나는 달딸국에 해를 끼칠 힘도 없으며 단지 자유롭게 살아가며 공주님을 위해 기도하고 싶을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공주는 그의 말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며 "내 힘이 비록 작아도 아버지와 오라버니께 상황을 말씀드려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갓쉰동은 이를 만류하며 "공주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돌쇠 한 명 죽는다고 큰일은 아니기에 걱정 말라"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공주는 내전 불당에서 기도한 후 철책의 문을 열어 그를 풀어주었다.
공주는 떠나는 갓쉰동의 손목을 붙잡으며 "처음 만났지만 너를 보내며 내 마음도 함께 떠나는 것 같다. 몸은 멀리 떠나더라도 마음은 나와 함께 하소"라고 말했다. 갓쉰동은 이에 "공주가 나를 잊어도 나는 절대 공주를 잊지 않겠소"라고 답하며 급히 달딸국에서 탈출해 밤낮으로 길을 걷고 풀뿌리를 먹으며 국경을 넘어 귀국하였다.
달딸국의 둘째 왕자가 돌아와 공주가 갓쉰동이를 사사로이 풀어준 것을 알게 되자 크게 분노하여 칼을 뽑아 공주의 목을 베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도 갓쉰동이가 귀국하여 책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고, 영희와 혼인하며, 달딸국을 평정하는 등의 내용으로 이어지지만, 이외의 세부적인 이야기는 생략된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정탐했다는 전설의 일부로 여긴다. 그 이유는 갓쉰동이라는 이름이 개소문(蓋蘇文)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蓋)는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힌다. 또한 국혜는 개소문의 아버지로 알려진 태조(太祚)를 가리키는데, 이는 이름이거나 자(字)로 보인다. 혹은 국혜라는 이름은 작가가 임의로 지은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달딸국왕은 당고조(唐高祖)가, 둘째 왕자는 그의 아들인 당태종(唐太宗)이 모델이다. 고전을 작성하던 당시에는 우리나라 글이 천대받던 시절인지라, 한글로 쓰인 소설조차 중국 황제들을 비판하거나 직접 언급하기를 꺼렸던 이유에서 시대적 변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唐)을 '달딸', 당고조를 '달딸국왕', 당태종을 '달딸국 둘째 왕자'라 고쳐 부른 것이다. 또한 연개소문이 고구려에서 왕과 대신 및 가족들을 죽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소설에서는 빠져 있는데, 이는 권선징악의 전형적인 구소설 특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연개소문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고구려에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갓쉰동이가 책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는 허구일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 과거 급제를 선망하는 이상적 서사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갓쉰동전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각색하고 재구성해 만든 소설로, 본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가치와 신뢰도를 그대로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규염객전과 갓쉰동전 두 책의 서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기록을 비교하고 진위를 추측해보면, 당시 고구려는 수양제(隋煬帝)의 수백만 대군을 대파한 직후여서 전 중국 대륙이 두려움에 떨던 상황이었다. 당시 당고조와 그의 아들은 수양제의 통치하에 있는 태원의 작은 공국의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태원은 본래 고구려가 자주 침입하던 지역이라 고구려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당태종이 다른 노복들 속에서 변장한 고구려인 연개소문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느낀 충격은 상당히 컸을 것이다. 더욱이 당서(唐書)에서도 연개소문을 외모가 괴이하고 용맹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으니, 그가 이런 강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그 놀라움과 기쁨 끝에, 결국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하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갓쉰동전은 신뢰할 만한 요소가 많으며, 신·구 두 당서에서도 당 태종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개소문은 방자하다”, “개소문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개소문은 마치 이리 같은 야심을 품었다” 등의 표현은 비록 개소문을 비난하는 내용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두려워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이위공병서에서는 "막리지(寞離支) 연개소문이 스스로 군사 병법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였다"라는 문구를 통해, 연개소문에게 모멸감을 주려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나, 오히려 두려움과 경외심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만나고 나서 그 기세에 눌려 동쪽으로 물러갔다고 하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규염객전에는 의문점이 많고 신뢰도가 낮다고 판단되었으므로, 본서에서는 규염객전을 폐기하고 갓쉰동전을 채택하였다.
- 연개소문 귀국 후의 내외 정세
연개소문이 귀국한 것은 대략 616년경으로 추정된다. 연 태조와 그의 부인은 아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등에 새겨진 이름을 증거로 삼았고, 먼 곳에서 미혼부를 기다리던 유씨 집안의 영희는 드디어 신랑을 맞았다는 기묘한 이야기가 고구려 국내에 널리 퍼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연개소문이 귀국한 후, 수나라의 양제는 장군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중국 전역은 군웅들이 각축을 벌이며 혼란에 빠졌다. 이내 당공 이연의 아들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반란군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수나라에 신하의 예를 취했지만, 곧 모든 군웅을 평정하고 자신의 아버지 이연을 추대하여 황제로 세운 뒤 이를 넘어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그는 연호를 정관으로 정하고, 15년 동안 정치 및 전쟁에서 큰 성과를 남겼다. 이름난 신하와 재능 있는 관료를 등용하고, 공전제를 통해 토지를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했으며, 상비군과 예비병 체제를 도입하여 병력을 강화했다. 또한, 농업이 아닌 기간에는 백성들에게 말을 타고 활쏘기를 연마하도록 장려했다. 이정, 후군집 등의 장수들을 파견하여 돌궐, 철륵 등 내몽골과 외몽골, 그리고 티베트 지역을 정복하며 문치와 무공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찬란했던 시기 중 하나인 정관의 치로 불린다.
그러면 연개소문이 귀국한 이듬해인 수나라 멸망 이후부터 당나라 정관 15년까지 26년간 고구려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왕의 동생 건무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두 공훈자였으나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을지문덕은 북진남수, 즉 북방을 중시하고 남쪽을 방어하는 입장을 고수한 반면, 건무는 북수남진, 즉 북방을 수비하며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입장을 주장했다. 영양왕이 사망하고 건무가 618년에 왕으로 즉위한 후, 그는 더욱 강력하게 북수남진 정책을 고수했다. 수와 당나라가 교체되는 사이, 을지문덕과 그의 일파는 북쪽으로 영토 확장을 추진했으나 건무는 이를 억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나라와 사절단을 교환하며 화호를 맺고, 수나라 말기에 포로로 잡힌 중국인을 모두 돌려보냈다. 더불어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부활시켜 빈번히 군대를 남쪽으로 보내 신라와 백제를 공격했다.
연개소문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며 당 정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고구려의 최대 위협은 신라와 백제가 아니라 당이라고 판단했다. 과거 신라와 백제가 연합해 고구려의 영토를 공격한 적이 있었으나, 현재 두 나라는 서로 원수로 여겨 갈등이 깊어져 협력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연개소문은 국가의 전략으로 남쪽에 대한 견제를 제시하며,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손잡아 신라를 견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중 하나의 방책만 실행해도 두 나라가 서로 싸울 것이고, 고구려는 남쪽의 부담을 덜고 당과 결전을 벌일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는 이어 과거를 회상하며, 고구려가 수나라의 대군을 패퇴시키고 직접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더라면 당시 당을 쉽게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쳤으며, 이는 많은 고구려인들에게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고 했다. 연개소문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하며, 당시 당 내부는 황실 간의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연의 아들 건성과 세민이 서로를 제거하려 했고, 이연조차 그 사이에서 중재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만일 고구려가 대군으로 공격한다면, 건성이나 세민 중 한 명은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에 협력할 가능성이 높고,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당은 수나라의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지친 상태여서 대규모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을 거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만약 두 형제 중 한 쪽이 승리해 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재정비하며 군대를 강화해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땅과 인구 면에서 열세인 고구려는 버틸 도리가 없을 것이라 경고했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수 있음을 지적했지만, 영류왕과 다른 신하들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후 626년, 당 태종 세민이 무덕 9년에 아버지의 황제 자리를 강제로 빼앗은 후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전쟁을 멈추라고 권고했다. 이어 을지문덕의 전승을 기념해 쌓았던 경관이 두 나라 평화에 걸림돌이 된다며 철거를 요구했다. 이는 영류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곧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 가능성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북방 방어를 우선시하던 정책을 수정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남쪽에 대한 원정을 지속했다. 또한 국내 남녀를 동원해 북부여성에서 요동반도 남단까지 이르는 약 천 리의 장성을 16년간 쌓도록 했다. 이로 인해 농사와 길쌈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국력은 크게 쇠약해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장성은 연개소문의 건의에 따라 축조되었다고 하나, 이는 그가 노자상과 도사를 요청해왔다고 하는 주장처럼 사실이 아니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살육
기원후 646년경, 서부 지역의 살이(薩伊)였던 연태조(淵太祚)가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으려 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늘 당나라에 대한 강경한 공격을 주장해왔으므로, 고구려의 영류왕과 여러 대신 및 호족들은 그를 평화를 위협할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그의 계승을 거부했다. 이는 곧 연개소문의 정치적인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다.
연개소문은 자신만이 고구려를 구할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강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어린 시절 두 차례 타국에서 종살이를 했던 경험이 있어 때를 기다리며 몸을 낮추는 태도도 겸비하고 있었다. 직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자 연개소문은 사부(四部)의 살이와 여러 호족들을 찾아가 간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부족하더라도 여러 대인들께서 큰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단지 계승만 막으신 것만으로도 그 은혜가 지극합니다. 오늘부터 저도 회개하며 여러 대인들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바라건대 한 번 직위를 계승하게 해주셨다가 제가 불초하다면 직위를 다시 빼앗으셔도 됩니다.”
이 간곡한 태도에 여러 호족들이 그를 측은히 여겼고, 결국 연개소문은 서부 살이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에 머무르는 것이 좋지 않다는 판단 아래 그는 북쪽으로 보내져 북부여에서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서부 군대를 이끌고 떠날 날을 정했다.
한편, 당태종은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밀사를 보냈으나, 매번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남해의 작은 나라 삼불제국(三佛齊國)의 왕에게 뇌물을 주며 고구려 군사와 병력 배치, 군용 지리 등 내정을 정탐해달라고 요청했다. 삼불제국은 고구려와 오랜 기간 무역과 조공 관계를 맺어왔기에 쉽게 요청을 수락했고, 이를 빌미로 사신을 파견하여 정탐하였다.
삼불제국의 사신은 고구려를 둘러본 뒤 바다로 나가 당나라로 향하다가 해상에서 고구려의 해라장(海羅長)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해라장은 무사로서 연개소문을 신처럼 숭배하던 사람으로, 조정이 연개소문의 대책을 사용하지 않고 당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삼불제국 사신에게서 비밀 문서를 빼앗아 조정에 보고하려 했으나 끝내 이를 포기했다.
해라장은 “적을 보고도 치지 못하는 나라가 조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며 문서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또한 사신의 얼굴에 먹으로 글자를 새겨 치욕을 주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해동 삼불제의 얼굴에 글자를 새긴 한시가 있었다. "해동 삼불제의 얼굴에 자자하여 내 어린아이 이세민에게 이른다. 금년에 만약 조공이 오지 않으면 명년에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문책하리라." 그런 뒤, 다시 "고구려 태대대로 개소문의 군사 아무개 씀"이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하지만 얼굴은 좁고 글자 수는 많아 먹의 흔적이 흐려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에 이를 종이에 베껴 사신에게 주어 당나라에 보냈다.
당태종은 그것을 보고 크게 격노하여 곧바로 고구려를 침공하려 조서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신하가 나서 간했다. "대대로는 연개소문이 아닙니다. 사신 얼굴에 자자한 연개소문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며, 게다가 연개소문의 부하라는 이름 없는 군사의 죄로 약속을 깨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밀서를 보내 왕에게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에 태종은 그 말을 따랐고, 진위를 확인하고자 밀서를 전달하게 했다.
영류왕은 밀서를 보고 군사를 보내 해라장을 잡아 문초했다. 해라장은 강직하게 모든 것을 시인하며 기탄하지 않았다. 영류왕은 이 일에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단순히 당나라 임금을 모욕한 것 이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가 고구려 태대대로도 아닌 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적고, 많은 대신 중 유독 연개소문을 지목하며 그의 부하군사지휘관으로 묘사한 점을 보면, 연개소문이 따르는 자들로부터 추대를 받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연개소문은 늘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주장하며 조정을 반대하고 민심을 얻고 있었으니, 이는 심각한 반란의 조짐이라 여겼다. 결국, 연개소문의 벼슬을 박탈하고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신들은 하나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의 연개소문은 서부 살이 자리에 올라 많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던 터라, 그의 천성을 감안할 때 체포되기를 거부하고 거세게 저항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를 섣불리 조치하면 국경 내부가 혼란에 휩싸일 위험이 있었다. 다행히 연개소문은 장성 축조 공사의 감독 임무를 맡아 떠날 날이 머지않았기에, 조정은 그가 임금을 찾아 하직 인사를 드리러 올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모반의 죄를 낭독하고 체포하면 혼란을 최소화하며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대신들은 이 계획을 비밀리에 논의하며 그 날을 준비해 나갔다.
천하의 일은 항상 사람의 기대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낮과 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전회의의 비밀이 어떻게든 새어 나간 것을 연개소문이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들과 비밀스럽게 대책을 논의하며 선수를 치기 위한 계략을 준비했다. 그 후 그는 평양성 남쪽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한다고 발표하고, 왕과 각 대신들의 참석을 요청하는 한편, 고구려의 여러 부(部)에도 이를 알렸다.
각 부의 대신들과 호족들은 열병식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불참하면 연개소문의 의심을 사게 되어 큰 정치적 손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모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왕은 직위를 존중해야 한다며 시위병들을 거느리고 왕궁에 남아있기로 했다. 이는 연개소문이 변심했더라도 왕의 위엄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드디어 그날, 모든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에 모였다. 군악대의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들은 군막으로 안내되어 자리에 앉았다. 술잔이 몇 차례 돌던 중, 연개소문은 돌연 “반역자를 잡아라!”라고 외쳤고, 미리 배치된 장수들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며 대신들을 공격했다. 참석한 대신들도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나, 철저히 계획된 포위망과 적은 숫자 때문에 저항할 여지가 없었다. 이 틈에 수백 명의 대신과 호족들이 한순간에 도륙당했고, 열병식장은 피로 물들었다.
그 후 연개소문은 부하들과 함께 왕에게 긴급 명령이 내려졌다고 속이며 성문을 통과, 대궐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왕궁을 지키던 병사들을 제압하고 곧바로 영류왕에게로 향했다. 그는 영류왕을 처단하고, 시신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버리는 끔찍함도 서슴지 않았다. 늘 기세등등했던 영류왕조차 연개소문의 과감한 위세와 치밀한 행동 속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제거한 뒤 왕의 조카 보장을 새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보장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사실상 실권은 연개소문에게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크말치'라 칭하며 정치와 군사를 모두 장악했다. 이는 고구려 초기 세 재상이 호칭되었던 '신가', '말치', '불치'의 이두식 표현에서 기원한 직책이었다. 특히 원래 정권과 병권을 모두 독차지했던 ‘신가’ 직책은 그 권력이 지나치게 크다 하여 폐지되었지만, 연개소문은 자신에게 기존 권위보다 더 강력한 권리를 부여하며 '신크말치'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었다. 그는 이 직위 아래 법과 제도를 개혁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집결시켰다.
그로부터 연개소문은 고구려 900년 역사상 누구도 갖지 못한 절대적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유일무이한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 연개소문의 대당(對唐) 정책
당나라를 격파하고 이를 고구려의 부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은 연개소문의 일생의 목표였다. 젊은 시절 연개소문이 서쪽으로 여행을 떠난 것도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였으며, 혁명적인 방법을 동원해 왕을 제거하고 지방의 유력 가문을 제압하며 정치와 군사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킨 것 또한 같은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영토의 규모와 인구에서 고구려를 몇 배나 능가하는 대제국이었기에, 연개소문은 이를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단독의 힘보다 여러 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 외에도 여러 국가가 존재했는데, 먼저 고구려와 같은 민족 계열인 남쪽의 신라와 백제가 있었고, 고구려와 다른 이민족인 돌궐(현재의 내몽골), 설연타(현 서부 몽골 지역), 그리고 토곡혼(현재의 티베트 지역) 등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처음 영류왕에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연합해 당나라에 맞서 싸울 것을 건의했으나, 영류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신라의 김춘추(훗날 신라 무열왕)가 고타소랑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자(제12편 참고), 연개소문은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김춘추에게 "개인의 복수를 넘어서, 조선 세 나라가 협력하여 당나라에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지만, 당시 신라가 백제와 크게 대립하던 시기였기에 김춘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했던 시점을 보장왕 원년(642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삼국사기》 관행적으로 전 왕의 사망 연도의 사건들을 후임 왕의 첫 해로 내려 썼기 때문이다. 또 《김유신전》에서는 당시 태대대로였던 개금이 김춘추를 객관에 머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후대에 연개소문의 직함을 소급 적용한 오류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뒤 신라는 이미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기에, 그는 백제 의자왕과 사신을 통해 조건부 동맹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백제가 신라와 전투를 벌일 경우 고구려가 당나라를 공격해 당이 신라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고, 반대로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신라가 당나라에 협조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연개소문은 오족루를 돌궐 등 여러 나라에 파견해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경우 이들로 하여금 당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돌궐 등 주요 국가들은 당나라에게 정복당해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설연타의 진주가한만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그 외에는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세력이 없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한탄하며 "고구려가 남진 정책에만 매달리다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제2장 요수(遼水) 전쟁
요수에서 벌어진 싸움은 역사 기록에서 대부분 누락되었다. 그러나 신당서의 고려전에 따르면,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이 오선 400척을 보내 식량을 운반하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을 통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이는 645년 안시성 전투 이전 요수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이로 인해 당이 크게 패배했음을 암시한다. 이에 따라 당나라 사관들은 국가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춘추의 필법을 이용해 모호하고 간략한 몇 문장만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이는 연개소문 혁명 이후 고구려의 민심이 흔들리는 상황을 틈타 당 태종이 해군을 급파해 기습을 시도했으나, 고구려 수군에 의해 패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이 부족해 구체적인 정황을 상세히 적기는 어렵지만, 이 사건이 안시성 전투로 이어지는 서막이며 양국 충돌의 첫 시작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실마리만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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