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의 침입과 붙잡힌 백제 의자왕
- 신라와 당의 연합군 침입
기원후 654년, 진덕여대왕이 서거한 후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니, 그는 바로 태종무열왕이다. 태종의 아버지 김용춘 시절부터 이미 왕권은 실질적으로 그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동서 사이였던 백제 무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비롯된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왕의 명의를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에게 양보하였다. 이들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나라 간 분열로 인한 상처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깊어졌기에 태종은 결국 왕의 명의까지도 정식으로 차지하게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김품석 부부에 대한 복수를 서두르는 한편, 백제의 계속된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태자 김법민을 당나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 당나라는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한 상황이었으며, 고구려에 대한 복수심으로 여러 차례 공략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겪고 있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힘을 합쳐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후 고구려를 공동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으며, 신라의 구원 요청을 수락하였다.
- 계백(皆伯)과 의직(義直)의 전사
660년 3월, 신라 왕자 인문은 당나라의 행군대총관 소정방과 함께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주에서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에 도착했다. 신라 태종은 금돌성에 진을 치고, 태자 김법민과 대각간 김유신, 장군 진주와 천존을 포함한 이들이 병선 100척으로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소정방은 김법민에게 신라와 당나라 군군이 수륙으로 나뉘어 진격하고,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였던 소부리에서 합류할 계획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법민과 유신은 금돌성에서 돌아와 김품일, 김흠순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정병 5만을 이끌고 백제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백제의 의자왕은 긴 연회를 마치고 여러 신하들을 소집해 방어와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 좌평 의직은 당나라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 기진맥진했을 것이라며 상륙 직후 기습 공격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좌평 상영은 당군이 상륙 시 강력한 저항을 펼칠 가능성이 높으니 험지를 방어하며 적의 식량이 고갈되고 군사가 피로해진 뒤에 싸우는 전략이 효과적일 것이라 제안했다. 또한, 신라군은 과거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를 겪어왔으니, 먼저 신라군을 격파하고 그 뒤 당군과 맞서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은 엇갈렸고 논의는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
한편, 과거 전쟁 시기에는 명료한 결단력을 발휘했던 의자왕도 이날은 무당과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갈팡질팡하며 명확한 해결책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지략으로 이름 높던 좌평 부여흥수를 떠올리게 되었다. 부여흥수는 이전에 성충의 인맥으로 지목되어 고마미지로 유배된 인물이었다. 의자왕은 흥수에게 사자를 보내 전략을 묻자, 그는 탄현과 기벌포가 국가의 주요 방어 지점이라며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탄현에서는 신라 군사를 막고, 기벌포에서는 당나라 군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예 병력을 배치하되, 왕은 수도를 방어하며 상황을 지켜볼 것을 권했다. 적군이 양식이 다하고 피곤해진 틈을 타 맹렬히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사자가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자,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세력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 생활을 하며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은혜를 떠올리며 복수를 꿈꿔왔습니다. 이제 그는 성충이 남긴 상소문의 잔여를 주워들며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당나라 군대를 기벌포로 들여보내고, 신라 군대를 탄현을 넘어오게 한 뒤 힘껏 공격하면, 이는 독 안에 든 거북이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두 적을 모두 무너뜨릴 수 있을 텐데, 왜 험준한 지형에서 적군과 대치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여 우리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십니까?" 왕은 그의 의견이 옳다고 여겨 궁녀들에게 술과 노래를 준비하게 하여 전쟁이 가까이 있음을 잊고 지냈다.
7월 9일, 신라의 대장 김유신과 김품일은 5만 군사를 이끌고 탄현을 넘어 황등야군에 도달했다. 이에 의자왕은 장군 부여 계백을 보내 신라군을 막게 했다. 출전하기 전에 계백은 탄식을 남겼다. "탄현의 천험을 버리고 5천 명으로 10배의 적을 상대하려 하니 내일의 결과가 예상되도다." 그는 가족들을 불러 칼을 빼 들고 말했다. "적의 포로가 되느니 내 손에 죽으라." 그렇게 그들을 모두 죽인 뒤 군대로 돌아와 병사들을 모아 말했다. "고구려 안시성의 양만춘은 5천 명만으로 당나라의 70만 군사를 물리쳤다. 우리도 병사 한 명당 열 명쯤은 상대할 수 있는데, 어찌 신라의 5만 군사를 두려워하겠느냐!" 그는 병사들을 사기로 채우고 황등야군으로 돌격해 험지에 진영을 세우고 세 곳으로 나눠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유신은 네 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유신은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당나라 군대와 약속한 7월 10일이 되었음을 깨닫고 다급한 마음으로 김품일과 흠순에게 말했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만약 당나라 군대가 홀로 싸우다 패한다면 우리가 쌓아온 복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오. 반대로 당나라가 승리한다 해도 우리가 그 힘에 의존한 채 복수를 이루면 결국 신라가 당나라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될 텐데, 어찌해야겠소?"
이에 품일과 흠순이 답했다. "오늘 열 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인들은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먼저 제 자식을 희생시켜 다른 병사들을 독려하여 죽음을 각오한 혈투를 벌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흠순은 아들 반굴을, 품일은 아들 관창을 불렀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화랑은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만약 수천의 백제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화랑도 망하고 신라도 끝장날 것이다. 너희는 화랑의 지도자로서 그 명성을 망치고 싶단 말이냐?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자식으로서 효를 다해야 마땅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목숨을 바쳐야 충성과 효도를 완수한 것이다. 오늘이 바로 너희가 충효를 다하고 나라에 공을 세울 때 아니겠느냐!"
반굴은 "네" 하고 대답하며 자신의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영으로 돌격해 모두 전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관창, 겨우 16살로 화랑 중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홀로 백제의 진영에 뛰어들어 몇 명을 죽인 뒤 사로잡혔다. 백제의 장수 계백은 관창의 용맹함에 감탄하며 그를 차마 해치지 못하고 "신라에 이렇게 용감한 소년들이 많으니 가련할 뿐이다"라며 그를 풀어주었다.
관창이 신라 진영으로 돌아오자 아버지 품일에게 "오늘 적진에서 적장을 베지 못했으니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을 마시고 목마름을 달랬으며, 다시 말에 올라 창을 잡고 백제의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결국 계백은 그를 죽인 뒤 머리를 말꼬리에 매달아 신라로 보내버렸다. 이를 본 아버지 품일은 오히려 기뻐하며 "내 아들의 모습이 산 사람과 같구나.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그것은 곧 산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신라 군사들은 모두 감격해 사기가 충전되었고, 이에 김유신 장군이 전면 공격을 지시하자 신라 군사들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계백이 직접 북을 치며 맞섰으나, 백제 군사의 숫자가 적어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계백과 그의 군사들은 전장에서 희생되며 백제 역사의 종말을 장식했다. 신라 군사들은 승리를 거두며 백제의 수도를 향해 나아갔다.
한편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은 배를 몰아 백강 어귀 기벌포에 도착했으나 넓은 진흙펄 때문에 진격이 어려웠다. 그는 풀과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어 간신히 앞으로 나아갔는데, 당시 백제의 왕은 임자의 조언대로 이 지역을 지키지 않았다. 백제 수군은 강물 변을, 육군은 언덕 위를 방어하느라 분산되어 있었는데, 당군은 이미 진흙펄을 통과해 백제의 수군을 격파하고 언덕까지 올라왔다.
의직 장군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의 용맹함은 계백에 뒤지지 않아 당나라 군사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의직이 전사한 곳을 조룡대(釣龍臺)라 부르며 그를 죽인 일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했다.
여지승람에 따르면, "소정방이 백강에 도착했을 때 비바람이 강하게 불어 행군이 어려웠다. 무당의 말에 따르면 강을 수호하는 용이 백제를 지키고 있다고 하여, 소정방이 흰 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강 이름이 '백마강'으로 불렸다고 하지만, 사실 이 이름은 소정방 도착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는 성충의 유언에서 언급된 백강 어귀와도 일치한다.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며, 일본에서는 '백촌강(白村江)'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기서 ‘촌(村)’은 ‘말’을 의미하므로 백촌강 역시 백마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용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크게 어긋나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해상잡록에서 보인 바와 같이 의직이 전사한 곳이라는 설명이 더 타당할 것이다.
- 의자왕의 포로됨과 백제의 두 서울 함락
김유신 등이 계백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이튿날인 11일에 백마강에 도달하자 소정방은 신라의 독군 김문영이 약속 기일을 넘겼다며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에 김유신은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려는 태도에 분개하여, 칼을 빼들고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듯한 모습으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잠시 두고 당나라와 싸우자”고 외쳤다. 이는 당나라 측 장수 일부에게 알려졌고, 그들이 중재해 결국 김문영은 풀려났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협력해 '솝울'(소부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의자왕에게는 태자를 비롯해 몇 명의 적자와 40여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왕은 평소 이들 모두에게 좌평의 직함을 주어 국정에 참여하게 했으며, 심지어 실질적인 권한도 행사하게 했다. 그러나 이 위급한 상황에서 왕자들은 크게 세 파로 나뉘었다. 태자 효는 북경 곰나루성(熊津城)으로 가서 의병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둘째 아들 태는 솝울을 끝까지 지키며 군신이 힘을 합쳐 적을 막으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했다. 반면 왕자 융 등은 고기, 술, 폐백을 적군에게 바치며 퇴각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사오십 명의 자식들이 각기 자신들의 주장을 펴며 떠들어댔고, 의자왕은 어느 쪽 의견을 따를지 몰라 결국 각 제안을 수용했다. 융에게는 화친을 시도할 권한을, 태에게는 방어전에 대한 책임을 맡기며, 자신은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로 피신했다.
융은 소정방에게 퇴군을 요청하며 고기와 술을 바쳤지만 거절당했다. 이때 태는 스스로 대왕의 자리에 올라 군사와 백성을 독려하며 방어전에 나섰다. 그러나 태자의 아들 문사는 이를 두고 “대왕과 태자가 살아 계신데 삼촌이 어찌 스스로 왕위에 오르느냐? 만약 모든 일이 평정되면 삼촌을 따르던 자들은 역적으로 처벌될 것이다”라며 좌우를 이끌고 성에서 탈출했다. 이에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병사들 또한 싸우려는 의지를 상실했다. 융 역시 화친이 성립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성문을 열고 항복했으며,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은 성으로 들어갔다. 왕후와 태자의 비빈들은 적군에게 욕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대왕포로 달아나, 바위 위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해당 바위는 낙화암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들의 절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른 왕자들 중 다수는 자살하거나 도망쳤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으로 몸을 피하며 성을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성을 지키는 수성대장이 임자를 비롯한 그의 무리와 함께 왕을 붙잡아 적에게 항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의자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태자인 효와 아들 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포로로 붙잡혀 끌려갔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은 거의 죽음에 이른 의자왕을 조롱하며 이렇게 물었다. "이제도 대국에 맞서겠느냐?" 신라 태자인 법민도 왕자 융에게 앙갚음을 하며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부부를 죽인 일을 기억하느냐?"라고 모욕을 가했다.
이때 신라 태종은 소정방에게 예를 갖추고자 금돌성에서 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소정방은 이미 당 고종으로부터 백제를 정벌한 뒤 틈을 보아 신라까지 공격하라는 밀명을 받고 있었기에 신라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김유신이 태종에게 보고하며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다미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우리 군사가 백제 군복을 입고 당나라 진영을 공격한다면, 당나라는 우리 군영에 지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군사로 갑작스레 습격해 당나라 군사를 격파한다면 백제 전역을 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북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는 당나라에 맞서 백성을 위로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때를 기다린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멸시하겠습니까?"
이에 태종은 이렇게 응답했다. "이미 당나라의 은혜로 적국인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다시 당을 공격한다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 그러자 김유신이 거듭 강조했다. "개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물게 됩니다. 하물며 당나라는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지금 그들이 우리의 꼬리를 밟고 나아가 머리를 깨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태종은 끝내 김유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대신 군중에 명하여 철저히 대비하기만 하라고 지시했다.
소정방은 신라군의 경계심을 알아차리고 모든 음모를 포기했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함창 지역의 당교에서 신라군이 당나라 군대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명시하며 부인하고 있다.
백제는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온 나라였기에 백성들은 전쟁에 익숙하고 의리에 용맹함이 있었다. 그러나 유교를 수입한 이후, 사회 전반은 명분이라는 굴레에 얽매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충과 흥수가 외적을 물리칠 만한 재능과 지략은 있었으나, 명림답부처럼 폭군을 제거할 담력은 부족했다. 또한, 계백과 의직은 스스로와 가문을 희생한 충성과 절개를 지녔지만, 연개소문과 같은 내부의 적을 제거할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다. 그 결과, 어리석은 의자왕을 처치하지 못하여 임자와 같은 소인배 무리가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평소에는 국고를 사리사욕과 향락에 낭비하였고, 혼란기에는 나라를 통째로 적국에 넘기는 배신을 저질렀다. 중경과 상경은 모두 왕자들의 항복으로 함락되었으며, 삼경과 기타 지방들도 적들의 손에 저항 없이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다물 운동’, 즉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예상외로 격렬했다. 이는 왕과 관료들이 나라를 배신하고 판매한 뒤, 분노한 백성들이 맨손으로 적군에 맞서 싸우며 망국의 마지막 순간을 피비린내 나는 결말로 장식했다.
만약 그들이 유교의 명분론에 미혹되지 않고 혁명의 기상을 품고 있었다면,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백제의 다물운동에 대해 대략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제5장 백제 의병(義兵)의 봉기
- 의자왕이 포로가 된 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솝울이 이미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백제의 고관들과 귀인들은 대부분 나라를 배반한 임자와 충상 같은 무리들이었다. 이들로 인해 성과 고을은 유수(留守)로 머물던 채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충과 뜻을 같이했던 이들, 즉 벼슬에서 물러난 옛 신하들과 초야에 은거하던 의사들은 망국의 비극을 막고자 각지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저항을 시작했다. 이러한 열정적인 다물운동(다시 잃은 땅을 되찾으려는 운동)을 벌였던 의병들은 신라 역사가들에게 패잔한 도둑으로 폄하되어 그 행적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이름조차 묻히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했다.
이에 신라본기, 김유신전, 해상잡록, 당서, 일본서기 등의 문헌을 참고해 보건대, 당시 백제 의병들은 대략 세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백제 남부 동북쪽, 현재 전라도 동북 지역에 해당하는 금산과 진안 일대였고, 두 번째는 백제 서부의 서쪽 절반, 현재 충청도 서쪽 지역으로 대흥에서 홍주(오늘날 홍성), 임천 등을 포함한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지역은 백제 중부에 해당하는 현재 충청남도 연기 일대였다.
이제 이 세 지역에서 벌어진 저항의 전말을 간략히 정리하여, 백제 말년의 치열했던 혈전사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 패망한 중 · 남 두 지방 의병과 굳게 지킨 서부 의병
서부 의병대장 부여복신은 백제 무왕의 조카로, 젊은 시절 고구려와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백제의 서부은솔로 임명된 이후, 임존성을 견고히 수리하고 성 안 창고에 양식을 비축하는 한편, 통주에 쌀가루를 저장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임자의 참소로 인해 관직을 내려놓게 되었고, 이를 안타까워한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광경이 이어졌다.
당나라 군대가 백제의 중경 솝울과 상경 곰나루를 함락하고 왕을 포로로 잡아가자, 임존성의 군사들은 복신을 중심으로 다시 의병을 조직했다. 복신은 백제를 되찾기 위해 신중한 전략을 강조하며, 당나라 군대가 물자와 군량을 확보하지 못하게 될 경우 자연스레 철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복신은 중요한 요새를 방어하며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무와 자진은 이를 따르지 않고 과감히 전투를 감행했다.
결국, 곰나루성과 그 남동쪽 진현성 등지에서 벌어진 교전은 잇단 실패로 이어졌고, 정무는 두시성으로, 자진은 주류성으로 후퇴하여 웅거했다. 한편, 당나라는 곰나루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1만 명의 당군과 7천 명의 신라군을 배치해 주요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각각의 의병들은 신라와 당군의 협공에 맞서 계속 항전했으나 피해가 속출했다.
특히 신라 태종과 태자 법민, 김유신 등 주요 장수들이 남하하여 여례성을 공격하며 북쪽 방어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진무는 이 과정에서 전사했으며, 남쪽 진현성 및 왕흥사 일대에서 2천 명 이상의 의병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복신은 임존성 방어를 끝까지 고수하며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끝내 신라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11월 1일 철군했다.
- 부여복신(扶餘福信)의 연전연승
이듬해 2월, 백제의 복신은 강서 지역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강을 건너 진현성을 되찾았고, 이에 당의 장수이자 웅진도독인 유인원이 정예병 1천 명을 보내 맞섰다. 그러나 복신은 중도에서 기습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단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이에 유인원은 신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 태종은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으로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무훌과 욱천에게 남천주대감을 맡기고, 문품에게 서당장군을, 의광에게 낭당장군 임무를 맡겨 도움을 보내니, 3월 5일 신라 선봉부대가 두량윤성(지금의 정산)에 도착해 진지를 살폈다.
복신은 신라 군의 대오가 정렬되지 못한 것을 보고 기습 공격을 감행해 이를 전멸시키고, 신라 군의 군수품을 탈취해 보강하며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 방어를 굳혔다. 이후 신라 대군이 도착해 성을 포위하며 36일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큰 사상자만 내며 철수했다. 복신은 주변의 의병들을 지휘해 끊임없이 돌격하며 신라와 당의 장수를 격파하고 물자와 장비를 탈취했다. 그는 가소천으로 진격해 신라가 보낸 구원병인 김흠순과 맞붙어 크게 승리하였고, 김흠순 등은 목숨만 간신히 건져 달아났다. 이후로 신라는 감히 추가 병력을 내보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복신은 백제 왕자 풍을 맞아들이며 새로운 왕으로 삼았다. 그는 곰나루성을 포위하고 신라로부터 양식을 운송해오는 길목을 끊어 명성을 드높였다. 백제의 여러 성과 지역들이 이에 호응해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처단하고 복신에게 귀부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남생은 구원병을 보내 북한산성에서 싸우며 복신을 원거리에서 지원했고, 일본은 화살 10만 개를 보내며 복신의 대의를 도왔다.
제 6 장 고구려의 당군 격퇴와 백제 의병의 전성(全盛)
- 연개소문 사후(死後) 고구려의 내정(內政)
고구려 말기 역사는 주로 당(唐)나라의 기록에서 그대로 가져온 왜곡된 내용들로 인해 사실과 거리가 먼 부분이 많다. 이러한 잘못된 기록은 1)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를 고의적으로 연장시키고, 2) 연개소문이 요수 서쪽에서 얻은 영토를 축소하며, 3) 연개소문 생전 및 사후의 고구려와 당의 관계를 속이는 방식으로 고구려 멸망의 진상을 왜곡했다. 그 결과, 고구려와 백제 간의 관계조차 분명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657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된 바 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이는 아들인 연남생이었다. 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9세 때부터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아 조의선인이 되었고, 이후 아버지의 추천으로 낭관에 올랐다. 이후 중리대형, 중리위두대형 등 고위직을 거쳐 24세에는 막리지(대군 총사령관)에 올라 삼군대장군을 겸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연개소문 사후 그의 직책을 연남생이 계승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연개소문이 사망한 이후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된 역사 기록은 없지만, 신당서와 구당서의 고려전 및 정명진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당 고종 영휘 6년(655년)에 정명진과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해 5월에 요수를 건너 귀단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으며, 1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록인 구당서 유인궤전에서는 당 고종 현경 2년(657년)에 유인궤가 정명진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귀단수에서 물리치고 3000명을 참살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태종이 과거 안시성 전투에서 연개소문에게 패배하고 퇴각하던 중 화살 부상으로 숨진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들 고종과 신하들인 이적, 소정방 등은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강력한 위엄을 두려워해 오랜 세월 동안 군사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이 죽은 해인 657년이라는 기회를 틈타 결국 귀단수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이는 만회할 적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신당서와 구당서의 고려전 및 정명진전에서는 이 귀단수 전투를 657년이 아닌 영휘 6년(655년), 즉 연개소문 사망 3년 전이라고 기록했을까? 이는 처음부터 이 전투가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당나라가 복수를 꾀하며 일어난 사건임에도 후대 당나라 사관들이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를 일부러 늦춰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본래 전투 동기였던 ‘연개소문 사망’ 사실이 흐릿해졌다. 대신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신라가 요청한 구원의 명목을 빌려 연도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부분의 역사 기록에서 싸움의 시기가 왜곡되었으나 구당서 유인궤전만이 검열 실수로 실제 연도를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당이 고구려를 처음으로 공격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상세한 승패는 전해지지 않지만, 대체로 당이 연개소문에 의해 점령당했던 산해관 서쪽 영역, 즉 과거 당의 영토를 되찾고자 했던 움직임이었다. 이후 당은 여러 차례 요수 동쪽 지역을 침범했으나 패배를 경험하고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당은 단독으로는 고구려를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신라와의 연합을 통해 양방향에서 협공하려는 전략을 매우 간절히 모색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백제와 고구려 역시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신라의 북쪽 경계에 군사를 파견해 빈번히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신라 태종이 새로 즉위한 뒤,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당에 보내 구원군을 요청하면서 백제의 상황을 설명했다. 특히, 백제의 충성스러운 신하 성충이 이미 죽고, 의자왕은 교만과 횡포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며 실질적으로 나약해진 상황임을 강조했다. 두 나라의 군대가 연합하면 백제를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자, 당의 황제와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13만 대군을 동원해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를 정벌했다.
백제의 멸망은 이미 앞서 언급된 바 있으나, 이때 고구려가 중요한 시점에서 백제에 구원 병력을 보내지 못한 것은 큰 실책으로 평가된다.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당군이 철수하고 백제 의병들이 대거 봉기했을 시점에, 고구려가 군대를 파견하여 복신과 자취 등과 연합했다면 백제가 다시 부흥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만약 백제가 다시 일어섰더라면 신라를 견제하며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는 고구려에 연개소문이나 양만춘 같은 영웅이 없더라도 당군이 평양까지 손쉽게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침입했더라도 결과적으로 수나라 양제가 겪었던 대패를 반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의 몰락을 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신라와 당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야 소수 병력을 파견해 칠중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섰으며, 부여 복신이 일으킨 군사가 백제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한 상황에서도 고구려는 겨우 수천 명의 병사를 지원하는 데 그쳤다. 이조차도 북한산성에 주둔한 2,700여 명의 신라인 병력을 전멸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며 퇴각해야 했다. 이외에도 고구려는 백제를 구원하는 데 아무런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생은 국가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간 책임 외에도 이미 나라에 막대한 위기를 초래한 죄를 피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연개소문이 이와 같은 무능력한 인물에게 정권을 넘기고 세상을 떠난 것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할 것이다.
- 평양(平壤)의 당군(唐軍)과 웅진(態津) 신라군의 대패
기원후 662년, 당은 임아상, 계필하력, 소정방, 설인귀, 방효태 등 여러 장수를 보내 하남, 하북, 회남 등 67개의 주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35개 부대로 나누어 고구려 평양을 침략하게 했다. 이와 함께 낭장 유덕민을 함자도 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로 들어가 신라군과 협력하여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며, 동시에 신라의 양식을 평양으로 운반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신라에서는 태종(김춘추)의 상사(애도 기간)가 있었지만, 새롭게 즉위한 왕인 문무왕(법민)은 김유신, 김인문, 김양도 등 아홉 장수들에게 전국의 군사를 총동원하도록 명령했다. 이와 함께 대거 20량을 제작해 쌀 4천 섬과 벼 2만 2천 섬 이상을 실어 평양에 주둔한 당군에게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백제의 의병들이 태산(금산)에 근거를 두고 복신과 호응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당의 웅진도독 유인궤가 급히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내 말하였다. "만일 태산에 있는 백제군을 방치하여 그들이 세력을 키운다면, 양식 운반로가 끊겨 주둔 중인 두 나라의 군사 1만 7천 명이 모두 굶주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웅진이 다시 백제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백제가 부활하면 고구려 공략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태산성을 정벌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9월 15일 태산성에 도달하여 항복을 권유하고 부귀로 유혹했으나, 의병들은 거절했다. 그들은 "우리 성은 작지 않으나, 모두 의로운 마음으로 용감히 싸울 것이다. 싸우다 죽어 백제의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여 신라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라고 외쳤다. 이후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고, 여드레 만에 성 안의 군사 수천 명이 전멸하며 결국 태산성이 함락되었다.
신라군은 이어 우술성(현재의 회덕)으로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이 우술성은 복신이 신라의 군량 운반로를 끊기 위해 장수를 보내 수비를 강화했던 곳이다. 성 안에서는 수십 일간 저항이 계속되었으나, 끝내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적군과 내통하면서 성 안의 의병 1천 명이 모두 전사하였고, 우술성 또한 함락되었다.
이로써 웅진으로 가는 양식 운반로가 열리긴 했으나, 평양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군에 큰 패배를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패강도총관 임아상이 유시에 맞아 전사하고, 옥저도총관 방효태도 아들 13명과 함께 사수(현재의 보통강)에서 패전하여 군대가 전멸했다. 소정방을 비롯한 당나라 군사는 한시성(현재 평양 부근의 서시촌)에 머물렀으나 양식이 다 떨어져 신라의 보급을 간절히 기다리며 연이어 사자를 보냈다.
이에 신라의 김유신은 군사를 두 부대로 나누었다. 한 군단은 김유선이 이끌어 평양으로 양식을 운반했고, 다른 한 군단은 김흠순이 지휘해 웅진으로 양식을 보냈다. 그러나 칠중하에 이르자 모든 장수들이 두려워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유신은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으면 백제가 다시 일어나고 신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우리가 어찌 위험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험난한 길을 통해 강을 건너 갔다. 고구려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험준한 산을 넘으며 수십 일을 걸린 끝에 평양에 도착해 소정방에게 양식을 전달하였다.
양식을 받은 소정방의 군사는 배불리 먹었으나 여전히 패배 끝에 재정비가 불가능하다며 바닷길을 따라 퇴각하였다. 이에 신라 군사들은 남아 전투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고구려군과 맞설 병력이 부족하였고, 퇴각하려 해도 고구려군의 추격이 예상되어 상황이 난감했다. 결국 김유신은 깃발을 그대로 꽂아두고 소와 말의 꼬리에 북과 북채를 매달아 소리를 내며 진을 친 듯 위장한 뒤, 병사들은 몰래 빠져나와 철수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춥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칠중하에 이르러 고구려군의 추격을 간신히 피해 돌아왔다.
동시에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던 또 다른 신라 군사들도 돌아오는 길목에서 폭설과 백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살아남은 병사는 거의 없었다. 한편, 부여복신은 곰나루성에 이르러 성 주변에 목책을 세워 신라와 당나라 군대의 교류를 차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백제 전역은 호응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임명한 새로운 관리들을 제거하고, 백제 측 관리들이 복귀해 부여복신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다. 이로써 백제의 다물운동(망국 회복 운동)은 사실상 목표를 이뤘다고 할 수 있었다.
제 7장 부여복신(扶餘福信)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
- 적과 내통하다 붙잡혀서 참수당한 자진(自進)
부여 복신이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켰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남의 지휘 아래에 있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려우니, 공처럼 무왕의 조카이고 명망이 높은 분은 스스로 왕이 되어 전국의 군사를 이끄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복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그런 행동은 사적인 욕심을 백성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니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대신 의자왕의 아들인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세웠다. 또한, 자진(自進)이 의병 활동을 주도한 공로와 과거 좌평의 벼슬을 지냈던 경력을 고려하여 그를 영군대장군(領軍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복신 자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의 직책을 맡아 강서(江西) 지역의 군사를 전담하였다.
복신은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며 곰나루성을 포위 공격했다. 이에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감히 맞서 싸우지 못했다. 게다가 소정방 등이 평양에서 패퇴하며 달아나는 바람에 당군은 크게 혼란에 빠졌다. 결국, 당 고종은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웅진성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군을 바닷길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유인궤는 퇴각 준비를 하며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복신은 이를 알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퇴각 중인 당군을 공격하여 유인궤를 사로잡으려 계획했다. 그러나 자진은 처음부터 복신이 자신보다 재능과 명망에서 뛰어난 것을 시기하고 있었다. 그는 복신이 더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유인궤에게 복신의 작전을 밀고하였다. 나아가 유인궤에게 "당 황제가 백제의 독립을 인정해 주신다면, 백제는 오래도록 당의 은혜를 감싸 안고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대신 복신 등을 생포하여 바치겠습니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유인궤는 귀국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자진과 계속 연락하며 공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복신의 부장인 사수원(沙首原)이 자진의 배신 행적과 음모의 증거를 포착해 복신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크게 분노한 복신은 연회를 열 것이라 속이고 여러 장수들을 모은 자리에서 자진을 체포했다. 그는 자진의 죄를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왕 풍에게 보고한 뒤 처형하려 하였다.
왕은 자진이 죄를 범하였으나 대신인 만큼 극형은 과하다며 처벌을 감경하길 원했다. 그러나 복신은 나라를 배반한 자는 살려두어선 안 된다며 끝까지 고집했다. 결국 자진은 참형에 처해졌다.
- 피살당한 부여복신(扶餘福信)
풍왕은 복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항상 병권이 여러 장수들의 손에 있는 것을 불안해하며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복신이 자진을 처형하고 전국의 병권을 손에 넣자, 왕의 주변 신하들이 복신을 참소하며 말했다. "복신이 제멋대로 행동하여 대신을 죽이는 데, 대왕을 어찌 안중에 두겠습니까? 만약 복신을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머지않아 대왕께 화를 미칠 것입니다."
이에 풍왕은 복신을 제거할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마침 그 해 2월, 복신이 병에 걸려 굴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풍왕은 문병을 핑계로 신뢰하는 신하들을 데리고 복신에게 갔다. 그 자리에서 복신을 급습하여 결박한 뒤, 왕명을 내려 좌평 이하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복신의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가죽 끈으로 꿰어 그의 죄를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왕 역시 복신이 죽으면 적병을 막을 자가 없음을 알았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망설이며 물었다. "복신의 죄는 죽임을 당함이 마땅한가?" 이에 달솔 득집이 나서서 답했다. "이런 악독한 반역자는 죽여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정도입니다."
복신은 득집을 향해 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 같은 놈아!" 끝내 그는 회자수의 칼 아래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복신의 죽음 소식을 들은 백제 백성들은 하나같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구당서》에 따르면, 용삭 2년(서기 662년) 7월에 유인궤와 유인원이 군사를 이끌고 복신의 잔당을 웅진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여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다. 이때 복신은 병권을 독점하면서 부여풍과 점차 시기와 갈등을 빚었고,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습격해 죽이려고 했으나, 부여풍이 이를 눈치채고 친임들을 이끌고 와 복신을 기습하여 죽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천지 2년(서기 663년) 6월에 백제왕 풍장이 복신의 반역 의도를 의심해 그의 손바닥에 가죽끈을 꿰어 결박했다고 기록한다. 달솔 득집은 이런 악독한 반역자를 살려두어선 안 된다고 하여 복신의 목을 베어 소금에 절였다고 전한다. 이후 8월 갑오일에 신라가 곧바로 공격하여 주류성을 차지하려 했다고도 언급한다.
이처럼 두 기록은 사건의 연도와 사실관계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복신이 죽은 해는 《일본서기》와 일치하며, 그 당시 상황으로 봐도 복신은 이미 대군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병권이 없는 부여풍을 죽이는 데 있어 굳이 문병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구당서》의 첫 번째 의문점이다. 또한, 신라와 당이 복신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고 1만 7천의 외로운 군사로 겨우 성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상황 변화 없이 갑작스레 나와 싸우며 지라성과 윤성 등 여러 성을 평정했다는 점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은 《구당서》의 두 번째 의문점이다. 마지막으로, 의병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백제 전 지역이 거의 회복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풍장이 복신을 제거하여 군권을 확대하려 했던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각지의 성책이 대부분 함락된 후에야 복신을 죽였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것이 《구당서》의 세 번째 의문점이다.
따라서 《구당서》보다는 《일본서기》를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며, 《해상잡록》의 전설을 취해 백제 최후의 위인의 공적에 대한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복신(福信) 사후 풍왕의 망함
유인궤는 곰나루성에서 포위되어 고립되었으나 신라와 당나라는 모두 복신을 두려워하여 구원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 고종은 장군 손인사에게 2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게 하여,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당에서 포로로 지내던 왕자 부여융을 백제왕으로 삼아 함께 귀국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들은 바닷길을 통해 덕물포에 상륙한 후,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렸다.
"풍왕은 잔인하고 시기심 많아 스스로를 옹립한 뒤, 공적이 큰 부여복신까지 죽였습니다. 하물며 다른 장수들은 어떻겠습니까? 당은 백제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백제가 고구려와 손잡는 것을 막으려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했을 뿐입니다. 이제 융은 백제 선왕의 사랑받던 아들로 대세를 알며 황제의 신뢰를 얻었기에, 백제왕의 지위를 부여받아 대군의 호위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백제의 지혜롭고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은 이 말을 믿고 융을 왕으로 받든다면, 힘든 전쟁 없이 고국을 되찾고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군에 저항한다면 모두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잔혹한 풍왕을 계속 왕으로 받든다면, 패배 시에는 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승리한다 해도 풍왕의 시기로 복신처럼 참혹한 최후를 마주할 것입니다. 이런 길이 과연 현명한 선택이겠습니까?"
당의 이러한 메시지는 풍왕 측 장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남부 달솔 흑치상지와 진현성주 사타상여는 복신을 죽인 풍왕에 대한 원망으로 결국 그들이 관할하던 200여 성을 항복시키고 부여융에게 투항하였다. 이후 흑치상지는 서부 달솔 지수신에게 편지를 보내 폭정을 일삼던 풍왕이 백제를 부흥시킬 왕이 아니라고 말하며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지수신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우리는 상좌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으나, 간신들의 계략으로 비운을 맞게 되었소. 그러나 상좌평이 싸운 이유는 원래 당나라 적군을 몰아내기 위함이었소. 어찌 상좌평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복수를 핑계로 당나라에 투항할 수 있단 말이오? 그것은 상좌평뿐 아니라 백제를 배반하는 일이며, 상좌평의 영혼이 있다면 그가 받았던 형벌보다도 더 큰 아픔을 겪게 할 것이오. 나는 공이 이 결정을 후회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소."
하지만 흑치상지는 응답하지 않고 8월에 신라와 당군의 선봉장이 되어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제는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지수신이 통솔하는 서부 지역은 풍왕에게 충성하며 '서백제'라 불렸고, 흑치상지가 통솔하는 남부 지역은 부여융에게 귀속되어 '남백제'로 불리게 되었다. 서백제는 당나라와 대치하며 맞섰지만, 남백제는 당나라의 지휘 하에 동족인 서백제를 공격하였다.
결국, 백제 부흥이라는 대업은 처참하게 중단되었고 그 책임은 풍왕에게 돌아갔다. 그는 상좌평 복신을 처형하며 백제의 재기를 막았고, 이는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풍왕이 아무리 비난받을 만한 왕이라고 해도, 백제를 배반하고 당나라의 노예가 되어 서백제를 공격한 흑치상지도 백제 멸망의 또 다른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전사(前史)에는 단지 당서(唐書)의 평가에 따라 흑치상지를 극도로 칭송하였으니, 어찌 어린아이의 서투른 글씨 놀이와 다를 바 있겠는가? 풍이 복신을 죽인 후, 적병을 막을 방책이 없자 곧바로 고구려와 왜(倭)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우려하며 군사를 보낼 수 없었고, 왜는 병선 400척을 파병하여 지원하였다. 왜병은 백마강 가운데 주둔하였고, 서백제의 군사는 강 언덕에 진을 치고 남백제, 신라, 당 세 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신라의 병선이 강 상류에서 내려와 왜의 병선들을 공격해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이에 왜병은 패하여 붕괴되었고, 대부분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언덕 위에 있던 서백제의 군사 또한 남백제와 당군에게 패배하였다. 결국 세 나라의 연합군이 힘을 모아 주류성을 공격하자 풍은 도주하였고, 그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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