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유태인의 격언 - 마음의 양식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모두 웃을 것이다.
히브리어에 '훗파'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한마디로 명료하게 번역하여 표현하기는 어렵다.’몹시 무례하다'혹은 '사람을 더 이상 우롱할 수 없다'라는 의미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사내아이가 부모를 살해한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자. 이때 사내아이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판장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가엾은 고아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스개 소리이다.
어느 때인가 로드 공항에서 총기 사건으로 소동을 일으켰던 오카모드란 자가 재판정에서 '나는 스타가 되고 싶다'라고 떠들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훗파'라고 비웃었다.
하늘과 땅을 웃기고 싶거든 먼저 고아를 웃겨라고 하는 말이 결코 '훗파'의의미를 띤 행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늘지고 비참한 어떤 곳이고 간에 웃음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말하는 고아란 의지할 데 없는 가엾고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아처럼 가엾고 불행한 사람을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디이고 밝아지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별로 눈길을 끌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따뜻한 웃음이 이 세상 모두를 밝게 해 준다는 말이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상을 당해도 한달 이상 슬픔에만 잠겨 있어서는 안된다. 유태인이 존경하는 하나님은 태양처럼 밝고 즐거우며 게다가 아주 웃음을 즐기는 분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직책에만 빠져 있었서는 안된다. 우울한 기분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으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해야 한다.’ 이러한 경구말고도 <탈무드>에는 사람은 쾌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많다. 한가지 더 인용하여 보면, '잘못 때문에 법정에서 벌을 내렸으면 신나게 휘파람을 불면서 나오라. '이러한 일 때문에 유태인들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뻔뻔스럽다는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 이면에는 앞에서와 같은 생활 철학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
가난하기로 소문난 남자가 어느 날 랍비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랍비님! 저의 집은 성냥곽만한 데다가 새끼들은 주렁주렁 딸렸고, 게다가 마누라는 이 세상 둘도 없는 포악스러운 여편네입니다. 랍비님! 이 가엾은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유태인 사회에는 기독교와는 달리 부부지간의 이혼이 허용되고 있다. 이때는 랍비의 허락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남자의 눈물 어린 호소를 들은 랍비가 물었다.
[당신은 염소를 기르고 있소?]
[예, 있고 말고요. 유태인인데 염소를 기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염소를 집 안에 가둬 놓고 기르도록 하시오.]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얼굴로 돌아간 뒤, 다음날 다시 랍비를 찾아왔다.
[랍비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못된 여편네 등살에다가 염소까지 한군데에서 뒹구니 말입니다.]
다시 랍비가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닭을 기르고 있소?]
[기르고 말고요. 닭을 안 기르는 유태인이 어디 있습니까?]
닭은 유태인들이 즐겨 기르는 동물이다. 랍비가 다시 일렀다.
[오늘부터 닭을 모두 집 앞에 가둬 놓고 기르도록 하시오.]
집으로 돌아갔던 남자가 다음날 또다시 찾아왔다.
[랍비님! 정말 이젠 끝장입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러운가?]
[말도 마십시오. 여편네 등살에다 염소에다 닭까지…. 아이구 맙소사.]
랍비가 이 남자에게 다시 명령하듯 일렀다.
[오늘 돌아가서는 염소와 닭을 예전처럼 밖으로 내놓고 그리고 내일 다시 오시오.]
다음날 그 남자가 다시 찾아왔는데, 얼굴에는 환하게 기쁨이 넘쳤고, 마치 황금덩이라도 얻은 듯 밝아 보였다.
[랍비님! 말씀하신대로 염소와 닭을 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집은 대궐같이 넓습니다. 랍비님, 부디 큰 축복있으시길 빕니다.]
일생동안 울고 허송해서도 안 되고, 웃고만 보내서도 안된다.
이 말은 앞에서 보아온 격언과는 상치되는 말이다. 격언이란 불변의 진리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인생에 대한 하나의 암시적인 말이기도 하다. 나 역시 여기에서 '~ 을 하시오'라고 단정짓듯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함께 음미해 볼만한 것들을 보여 주고자 힘쓸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좌우를 서로 대칭이 되도록 만들었듯이 동물이나 물고기도 이처럼 만들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인간의 절반은 하늘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땅에 속해 있다하여, 인간에게는 천성과 수성이 함께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갖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희로애락 가운데 어느 한가지 감정에만 빠져 치우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이란 균형이다. 우리는 하루 온종일 울거나 화를 내거나 웃거나 하는 일로 보낼 수는 없다. 여기에도 균형이 있어야 한다. 유태인들은 어느 한쪽에만 빠져 있는 맹신자들을 싫어한다. 비록 정의로운 일이라 해도 맹목적인 행위자를 보면 행복하지도 인간답지도 않다고 여긴다. 매사에 있어 균형, 균형…. 일생 동안 잠시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깊었던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라.
이미 해 치워버린 일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과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는 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후회가 남을까?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는 묻는다면 대부분 후자의 일에 대해 큰 후회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실패때문에 소중하고 큰 것을 잃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잃은 것 못지 않은 만큼 값진 교훈도 얻게 된다.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일을 놓칠 때에는 교훈같은 걸 얻을 기회가 없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것이지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믿는 낙관적인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하여 너무 낙관하고 있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낙관적 자세에서 진보는 이루어져 왔다.
우리가 실패한 일, 이 실패가 곧 경험이 되었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실패에 의해 좌절하기도 하지만, 이때 경험과 값진 교훈을 얻기 때문에 가능성에 희망을 걸게 되고 그 좌절을 가볍게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실패는 곧 성공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데 유익하지만, 일 그 저차에 힘쓰지 않았다는 것은 가능성의 토양을 모두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하나님은 밝은 사람을 축복해 준다. 낙관하는 마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밝게 해 준다.
유태인들은 얼핏 보기에 슬픈 눈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한없이 밝다. 이들은 진정한 슬픔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밝음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며, 어두운 밤을 알기 때문에 그만큼 밝은 태양의 감사함을 기쁜 마음으로 즐길 수가 있다.
'비관의 길을 좁지만 낙관의 길은 넓다.’ 낙관은 모든 것들을 포용해 받아들이지만 비관으로 모든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만다.
어느 마을의 랍비에게, 매일 노름으로 밤샘을 하는 자가 있다는 진정이 들어왔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잘하는 일이군. 한번 밤샘을 하게 되면 <탈무드> 공부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도 밤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낙관이란 이렇게 관용의 자세이기도 하며 포용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관은 자기 자신에게도 착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나설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그동안 당해온 가혹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굳건하게 살아온 것도 이들의 낙관하는 마음가짐 때문이리라.
행복을 얻으려면 만족하게 멀어져야 한다.
인간이란 행복하지 않으면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상태의 것인가? 도대체 행복의 크기는 어떻게 잴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사람마다의 대답은 각기 다른 것이고, 또한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란 평생을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나 당신 그리고 어느 누구이고 모르는 일이다. 행복을 어떤 방법으로 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암시해 보겠다. 그 하나는 우리의 행복은 얻음으로써 그 얻음에 의해 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얻은 것에 따라 행복의 크기를 잰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잃는 것에 따라 행복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우리들은 건강과 질병에서 보듯이, 평소 건강할 때에는 건강에 대한 행복감을 모른다. 건강을 잃고 병마에 시달릴 때 비로소 건강을 되찾고자 몸부림친다.
병마는 몸으로 하여금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 준다. 하지만 우리가 건강할 때는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행복에 취해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이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고통에 의해 그 소중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잃고 나서야 '나는 행복했었는데…. '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어차피 같은 햄을 먹는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라.
이미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유태인들은 계율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음식이 많다. 돼지고기로 만든 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유태인들의 특성이라면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아주 낙관적인 성품이라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끝도 없이 낙관적이기만 하다. 이들은 어차피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지니고 살아가자는 마음가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세상을 축복 속에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유태인들에게는 햄을 먹지 못하게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 이러한 금지 속에서도 만약 햄을 먹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죄의식을 갖기 보다는 차라리 즐거운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정말로 유태인적인 성품을 보여주는 속담이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도 같다. 이 때는 당신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는다.
유태인들은 특히 선물 주기를 즐기는데, 이것은 자선하는 것을 의무시하는 유태인 사회이기 때문이리라.
히브리어에서는 '자선'과'정의'가 '체다카'라고 하는 같은 말로 쓰이는데, 영어에서 자선을 뜻하는 '체리티'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의 '기독교인이 사랑'이라는 말이며, '남에게 베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태인들의 의식으로는 자선이란 남에게 베푼다는 뜻이 아니라 해야 할 당연한 행위로 되어 있다. 유태인의 어떤 가정에서고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저금통을 갖게 하는데, 이 저금통이 바로 자선에 쓰이는 것이다. 저금통이 가득 채워지면 '시나고케'를 통해 자선에 쓰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자선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다. 자기 수입의 어느 일정한도 이상을 자선에 내놓는 일은 계율로 금지되어 있다. 부자로 사는 여유있는 사람의 경우 5분의 1정도가 허용되고, 보통 가정의 경우 10분의 1까지 허용된다. 물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받게 된다.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볼 수 있는 복지제도의 바탕이 된 구민법이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17세기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유태교의 계율에서는 복지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제다카'정신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유태인 사회는 동족끼리는 마치 친형제와 같이 가깝게 지낸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기쁘게 돕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탈무드>는 남의 힘에 의해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훈계하고 있지만, 지금도 유태인 지역에 생활이 어려운 동족이 있으면 서로 수입금의 일부를 내 놔 어려운 동족을 돕고 있는 현실이다. 친절과 선행을 베풀어 남을 기쁘게 해 주는 일은 물론 자기 자신도 함께 즐거움을 갖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의 강요에 의해 베푼 자선은 스스로 한 자선의 절반의 가치밖에 없다.
<미드라시>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거리의 모퉁에에서 눈이 먼 거지가 구걸하고 있는 데 두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동전 한닢을 적선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쳤다. 이때 사신이 나타나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가엾은 거지에게 적선을 한 사람은 앞으로 50년 동안 더 살 수 있다. 하지만 적선을 외면한 자는 곧 세상을 하직해야 할 것이다.]
사신의 말을 들은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지면 말했다.
[지금 곧 거지에게 최선을 베풀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뒤에 그 배 밑에 구멍이 났는지 아닌지를 찾아보아 무엇하겠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천사에게 베푸는 친절과 같다.
어느 유태인 지역에 이름난 랍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또한 아버지 못지 않게 정직하고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랍비인 아버지에게 간절한 소원을 호소하였다.
[아버지, 성서에 등장하는 성인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흔히 듣고 있는 전설같은 것을 보면, 죽은 자들도 일년에 몇차례씩 이 땅 위에 내려온다고 들어온 것처럼 이 아들도 그런 얘기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네게 달려 있다. 항상 바르고 경건하게 생활에 충실하면 성인들도 만날 수 있지.]
아버지의 이같은 대답을 믿은 아들은 더욱 경건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속한 대로 성인들을 만나게 해줄 기색이 보이지 않아 아들이 물으면 '인내를 갖고 좀더 기다려 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착한 일을 했다고 하여 내일 당장 모세를 만날 수 있겠느냐?]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서 또 1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소에 남루한 거지가 찾아와 하루 저녁만 자고 가자고 하였다. 아들은 거지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쫓아내었다.
[여기는 잠을 자는 여관이 아니고 경건한 예배소요. 어서 나가시오.]
아무 생각없이 거지를 쫓아낸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 오늘도 후회없는 하루를 보냈느냐?]
아들은 저녁때 있었던 거지와의 일을 숨김없이 말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랍비는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회를 놓쳤구나. 바로 그 사람이 네가 기다리던 성서 속의 현자였단다.]
아들은 너무도 기가 막히고 안타까워 다시 애원하였다.
[아버지, 그렇다면 저는 평생 이 일을 후회하며 살아야 합니까?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없나요?]
[또 기회는 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너를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허함이다.
남달리 믿음이 좋은 어떤 사람이 랍비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는 지금껏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 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나는 역시 무식하고 재주없는 시시한 놈일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기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큰 축복을 받을 것이오. 자기 스스로 자신이 어떻다는 지혜를 배웠소. 당신의 겸허한 태도가 바로 그것이오.]
여기서 말하는 겸허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상대방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기만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의 의견과 뜻을 인정하려고 노력한 태도이다. 친절함과 겸허는 한 형제와 같다. 결코 겸허해지지 않고 친절할 수 없으며, 친절하지 않고는 겸허해질 수가 없다.
만약 손님이 기침을 하면 수저를 내 놓아라.
어느 집에나 초대를 받은 손님은 항상 예의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식탁에 만약 수저가 없더라도 '여기 수저 좀 주시오'하고 말하기가 여간 쑥스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손님은 기침소리를 몇 번내서 주인에게 눈치를 채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손님이다. 이 격언에서 말하는 손님은 바로 우리가 일생 동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늘 주변에서 만나고 있는 이웃들에게 주의 깊게 마음 쓰라는 교훈이 담겨 있는 속담이다.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는데 힘쓰는 사람은 남의 결점을 찾지 않으며, 남의 결점만 찾아내는 사람은 자기 결점은 찾지 못한다.
<탈무드>에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에 취해 자기만 의식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자기 잘못을 너무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온종일 남들이 자기만을 주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자신을 갖지 못한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는 자와 똑같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있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며 오만하다. 이것은 자기과신에서 오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의 반대도 진실일 수 없다.
강철보다도 강한 반면 파리보다도 약한 것이 인간이다.
맨허턴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도쿄의 고 층 빌딩을 보면 인간의 힘이 실로 강철보다도 강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강철을 녹이고 늘이고 하는 강한 인간도 하찮은 파리나 모기에 물려 고통을 받기도 하며, 때로는 이것들이 옮기는 전염병에 걸려 생명을 잃기도 한다.
이 격언을 통해, 유태인 자녀들에게 만능의 힘을 가진 인간도 작은 벌레에 물릴만큼 아주 약하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인간보다 약한 것에도 항상 두려움을 갖고 오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를테면, 겸허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모두 위험한 것뿐이라는 경계이다.
인간이란 재물을 모으고 명성을 얻으면 오만해진다. 오늘의 인간도 우리가 만든 문명에 의해 얼마나 성공적인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얼마나 작은 것에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성공하였다해도 좀더 겸허한 자세로 생활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을 가는 것은 두뇌를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이 속담은 '옳은 것을 배우기보다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명망있는 랍비가 제자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리고는 포도주를 먹기 전에 외우는 기도를 올리라고 했으나 제자는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기도문도 다 외우지 못했고, 지금까지 자기가 가르친 내용도 충분히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랍비에게 꾸중을 들은 제자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고개를 들지못하고 돌아갔다.
며칠 뒤 랍비는, 지난번 제자가 앓고 있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일해 번 수입으로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랍비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선행의 주인공인 제자를 다시 불렀다.
[마음속에 작정한 것은 즉시 행동으로 실천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비록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이 쌓았다 해도 마음을 갈지 않으면 그것은 알고 있는 것에 그치고 만다.]
무거운 포도송이일수록 아래로 늘어진다.
이 격언은, 인간은 겸손할수록 허리를 굽힌다는 뜻이 다. 유태에는 다음과 같은 옛날 이야기가 있다.
솔로몬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굉장한 선물을 받았다. 이 선물은 비단으로 짠 융단이었는데, 이것을 타면 하늘을 날아 어느 곳이고 갈수가 있었다. 그래서 솔로몬왕은 다메섹에서 아침을 먹고 메데에서 저녁을 먹는 마치 꿈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솔로몬왕이 이 융단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데, 어디선가 개미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왕개미가 부하 개미들에게, 하늘에 솔로몬왕이 날아가고 있으니 보이지 않도록 숨으라는 명령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솔로몬왕은 땅으로 내려와 여왕개미에게 물었다.
[왜 나를 피해 숨으라고 했느냐?]
[폐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니까요. 훌륭한 분들은 아주 무섭거든요.]
[너는 아주 작은 벌레다. 내가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듯이 너는 높이 날 수도 없지 않느냐?]솔로몬왕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여왕개미가 곧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페하의 융단에 저도 좀 태워 주십시오.]
솔로몬왕은 여왕개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융단에 함께 탄 뒤 하늘을 날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여왕개미는 솔로뫈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자 보세요. 내가 폐하보다 더 높이 날 수도 있지요.]
신의 천지 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광명과 암흑, 하늘과 땅, 물, 그리고 모든 생물을 만드신 뒤 비로소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시었다. 하나님은 여섯번째 날에 인간을 만드시고 다음날인 7일째 쉬었으므로, 이 날이 안식일의 유래가 되었다.
필자는 여러분들 한테 성서를 반드시 읽도록 권하고 싶다. 방대한 양의 성서를 모두 읽기가 힘들면, 일부만이라도 읽어 많은 교훈을 얻었으면 싶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마지막 날에 만드셨는가에 대해 고대의 랍비들은 생각하였다.
우리가 지금 열중하고 있는 <탈무드>가 이에 대한 <논의집>이라고나 할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마지막 날에 만드신 것은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였다고 믿고 있다. 인간을 다른 생물보다 늦게 창조함으로써 그러한 생물에 대해 우월과 자만심을 갖지 않고 자연에 겸손하게 순응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였다.
몸을 닦는 것은 비누이고, 마음을 닦아내는 것은 눈물이다.
인간들의 몸을 씻어주는 것은 비누이고, 마음의 때를 닦아주는 것은 마음이다. 이런 아름다운 속담도 있다.
'천당 한쪽에는 기도가 무엇인지 모른 사람이었지만, 평소 올 줄 알았던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 '기쁨, 슬픔, 노함, 즐거움, 울음을 모르는 사람은 즐거움도 모른다. 밤이 없으면 밝은 낮도 없듯이. ' '감정대로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기쁨을 나타낼 때도 진정 기뻐하지 않고, 기쁜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껏 울고 나면 마음이 맑아진다. 마치 목욕을 한 뒤 상쾌해지는 기분처럼, 신은 인간의 메마른 영혼에 단비를 내리듯이 눈물을 내려주셨다. 감정대로 울고나면 기다렸던 비가 내려 가문 밭을 적셔주듯이 우리 마음에도 움이 트고 신록의 싱그러움이 만들어 진다.’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기계의 노예가 되어 위험 상태에 빠진 것은 눈물을 부끄럽고 무익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울고 싶은 때 감정대로 울어야 한다. 자기자신과 자기의 이웃을 위해서도 말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만약 돌이 없으면 언덕을, 언덕이 없으면 자기의 구두를 탓한다. 이렇듯 사람은 좀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다.
항상 자기만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기야 자기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금이라 해도 이 세상 모두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서로서로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피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 잘못했다고 조작되어야 한다. 나는 항상 옮기만 하고 다른 사람이 언제나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공동 생활의 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위험한 생각에 우리 인간들은 쉽게 빠진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위험한 생각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공동 사회의 일원인 우리는 서로서로 겸손해 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미 행해진 행동은 변하지 않고 남게 되지만,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변해 간다.
<탈무드>에 있는 말이다. 성서에 있는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결코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같이 잘못되어진 행위는 지탄해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잘못은 인간은 나날이 변화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개선되어 간다. 성경은 노력하는대로 발전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인간에 대한 믿음과 낙관을 가르치고 있다.
'날이 날마다 새로운 일이 생긴다. 이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인간은 매일새로 태어나므로, 결코 좌절해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마음을 먼저 보고, 그 다음 그의 두뇌를 본다.
참된 인간은 그가 지닌 마음에서 좌우되므로 먼저 착 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이란 그 다음의 것이다.
남다르게 많은 학문을 닦은 학자라 해도 그가 지닌 마음이 가난하고 어두우면 마음이 고운 가난한 농군만도 못하다.
시설이 훌륭한 대학도 이런 경우 가난하지만 화목한 작은 가정만도 못하다고 할 것이다. 신은 인간이 지닌 지성보다는 그가 지닌 마음을 본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이렇다.’<탈무드>의 내용 모두를 외우는 것보다는 작은 덕행이라도 한가지 몸소 익히는 것이 낫다'고 하였고, '인간의 지성이 마음에서 행해지는 덕행 보다도 낫다고 믿는 자는 끝내는 그 지성마저도 잃어 버린다'고 가르치고 있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 오늘 현재의 앞일도 모르면서. .
인간이란 앞날을 미리 알 수 있을 만큼 위대하지 못하므로 인생살이에 대해 너무 걱정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앞날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한다거나 또는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은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결코 앞날을 점칠 만큼 위대한 동물은 아니다.
운이 좋다든가 운이 나쁘다고 해서 웃고 우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앞날에 일어날 일들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속단하는 낙관이나 비관은 인간의 힘이 그만큼 앞날에 미치고 있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일이란 것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도 비관도 하지 말라. 앞날에 생기는 일에 대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탓에 우리들 인간은 그나마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죽여가는 자는 이승도 저승도 갈 곳이 없다.
매일매일 스스로를 죽여간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스스로를 매일매일 죽이고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하고 있거나 학대함으로써 삶에 의욕을 잃고, 이 때문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쳐 끝내는 인생 모두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유태인들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사람이란 매일 새로운 일을 만나게 되고, 이렇게 됨으로써 새로운 일에도 전해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렇듯 우리의 하루는 각각 다르게 펼쳐진다. 때문에 지나친 비관도 후회도 낙관도 금물인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스스로 비관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이러한 경우와는 반대의 생활에 젖어 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자살이 가장 큰 죄악이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자살한 사람은 장사를 지내주지 않으므로써, 그를 유태인 사회에서 아주 추방해 버렸다.
하루하루 스스로가 죽어가는 자는 인생의 참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있으므로 세상을 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자살한 자는 유태인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되었으므로, 이들은 이승에도 저승에도 갈 곳이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유태인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나, 반대로 불행을 행복으로 가꾸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가장 불행한 고통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간의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불행한 늪에서 하우적이던 사람이 행복의 정상을 얻기까지는 실로 오랜 세월, 아니 평생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본래부터 지나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고 만족할 수 없으므로 평생동안 행복감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에게도 가끔 불화 때문에 상담하러 오는 부부가 있다. 그 가운데는 이혼까지도 생각하는 부부도 없지 않다. 그 때마다 나는 며칠이 아니고 3년간 깊이 생각해 보고 다시 찾아오라고 일러보낸다.
왜냐하면, 불행을 딛고 행복의 정상을 차지하는 데는 아주 오랜 세월 즉 평생을 보낸 끝에 그 방법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은 바르게 사는 자를 시험해 본다.
성서에는 이런 격언도 있다.
랍비 요나단이 말하기를, '도공은 이미 망가진 그릇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시험해 보지 않는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그릇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두드려 보면서 시험해 본다. 이와같이 신도 이미 잘못된 악한자는 시험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는 착한 사람을 시험해 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랍비 벤 허니나는, '자기가 팔고 있는 베가 좋다고 생각한 삼베 장사가 있다면 그는 그 삼베를 계속 다듬이질하여 윤기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 베가 나쁜 품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꾸 두드리면 곧 헤어져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도 바르게 사는 자만을 골라 시험해 본다.’고 말하고 있다.
랍비 에레아잘도, '한 마리는 건강하고 다른 것은 좀 약한 두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는 농군이 있다면, 그 농군은 건강한 소에게 멍에를 지게할 것이다. 이처럼 신은 건강하고 바르게 사는 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 마음의 양식에 관한 격언
* 마음에서의 문은 입. 마음에서의 창은 귀이다.
* 마음에 바를 수 있는 약은 없다.
* 인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원한을 풀고 난 뒤의 당신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해 준 뒤의 마음은 시원하고 맑다.
* 사람의 자신을 해하는 자는 사람의 몸을 해하는 자보다 더 죄가 크다.
*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보다 스스로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더 귀한 존재다.
* 남을 속이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더 어렵다.
*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벗은 지성이며, 가장 무서운 적은 욕망이다
* 인간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소홀히 생각하고 자기에게 없는 것은 탐을 낸다.
* 악한 것은 처음엔 달콤하지만 나중에 쓰다. 그러나 선한 것은 처음은 쓰지만 나중엔 달다.
* 천국의 출입구는 기도에는 닫혀 있을 수 있는 눈물에는 열린다.
* 병자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병자의 기도는 두 배의 힘을 가진다.
* 만일 한쪽 다리를 잃는다면 다른 한 다리가 남아 있는 것을 신께 감사해라. 만일 두 다리를 모두 잃게 되면 아직 목이 남아 있음을 감사해라. 또 목이 부러진다면 그 뒤엔 걱정이 없다.
* 많이 가진 자는 신을 주머니 속에 모셔 두지만, 가난한 자는 마음속에다 신을 모셔 둔다.
* 포도주를 마시는 시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말라. 그 시간에 당신의 마음은 편하게 쉬고 있다.
*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가령누 곳은 긁으면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고, 미운 사람은 생각할수록 더 미워지기 때문이다.
* 누구나 거울을 통해 좋아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자기의 피부병은 불결하다고 생각지 않지만, 남의 병은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 사람의 얼굴이 각자 다르듯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비밀도 다르다.
* 어떤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지만 그는 남의 것을 훔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듣는 칭찬일 뿐이다.
* 착한 사람의 나쁜 점이 악한 사람의 좋은 점보다 낫다.
* 누구이고 어딘가에 잘못된 곳이 있다.
* 벌레는 과일의 썩지 않으면 속으로 파고 들지 않는다.
* 영웅의 첫발은 용기를 갖는 일이다.
* 아무 방법도 없을 때,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용기를 갖는 일이다.
* 노예라도 현실에 만족하면 자유롭고, 자유스러운 인간도 현실에 불만이 있으면 바로 노예이다.
* 돈이 없는 것은 인생에서의 절반을 잃은 것이고, 용기가 없는 것은 인생 모두를 잃은 것이다.
* 너무 지나치게 후회하지 말자. 그것은 옳을 일에 나설 용기를 해치기 때문이다.
*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한 일보다 더 나쁘다.
* 당신은 의지에는 주인이 되고 양심에는 노예가 되라.
* 지나친 겸손은 거만함과 다를 게 없다.
*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왕이 있다. 하나는 땅을 지배하는 왕이고, 하나는 마음을 지배하는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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