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난의 탈무드
<탈무드>의 편찬은 바빌로니아에서 기원후 50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1334년에 손으로 직접 쓴<탈무드>가 나왔는데, 이것이 현존하고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 인쇄된 <탈무드>는 1520년 베니스에서 나왔다.
1244년엔느 파리에 있던 모든 <탈무드>가 기독교인들에 의해 몰수되어 24대의 수레에 실린 채 불태워 없어졌다. 1263년에는 기독교와 유태인 대표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탈무드>과연 기독교의 교리에 상반되는 것인가에 대해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후 1415년에 이르러 유태인들의 <탈무드>를 법령으로 금지하였고, 1520년에는 로마에서 또 한번 <탈무드>가 불태워 없어졌다.
<탈무드>를 읽어보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무지때문에 <탈무드>를 까닭 없이 혐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후에도 <탈무드>의 소각은 수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1562년에는 기독교의 교회측이<탈무드>를 검열하여 부분부분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오늘의 <탈무드>는 완전한 내용의 것이 아니다.
<탈무드>를 마이크로필름에 보관해 두기 위해 찍을 때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서 다른 페이지의 내용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백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새로운 <탈무드>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탈무드>를 읽다보면, 중간중간 이야기의 연결이 애매한 곳이 간혹 있다. 이것은 행한 교회측의 검열 과정에서 부분부분을 잘라내 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비난한 것으로 생각되는 곳은 가차없이 잘라 버렸다. 하지만 현재의 <탈무드>는 세계 각국의 말로 옮겨져 읽히고 있어 <탈무드>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탈무드>는 일종의 연구서이다. 특히 유태인에게 있어서 공부는 인생 최대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유태인을 이해하려면, <탈무드>가 유태인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유태인들은 신의 뜻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탈무드>를 공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탈무드>에 대한 공부는 지적인 공부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공부이고 연구였다.
유태인들에 있어 신을 찬양하는 최대의 행위는 공부하는 일이다.’공부와 연구가 올바른 행동을 만든다'는 말이 유태 민족의 오랜 금언으로 간직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유태의 도시나 고장은 그곳에 세워진 학교의 이름에 의하여 알려졌다. 예배를 보는 곳은 곧 공부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로마인들은 유태인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유태인들의 <탈무드>에 대한 공부를 엄격하게 금했다. 그들에게서 배우는 일을 빼앗아 버리면 유태인은 이미 진정한 유태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공부'를 지키기 위하여 수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지식은 끝내 모든 것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마련이다.
나도 유태인으로서,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기 전에 일어나 <탈무드>에 대한 공부를 진정한 유태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신의 뜻이라고 이미 진정한 유태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공부'를 지키기 위하여 수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지식은 끝내 모든 것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마련이다.
나도 유태인으로서,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기 전에 일어나 <탈무드>를 공부하는 많은 유태인을 보았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 또는 버스나 지하철 속에서도 유태인들은 쉬지 않고 공부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어김없이 몇 시간이고 공부에 열중한다. 20권의 <탈무드>중 한 권의 공부만 마쳐도 대단한 경사로 여겨 이웃과 친지들을 모아 놓고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기도 한다.
유태인들에게 기독교의 로마 교황과 같은 절대 권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최고 권위자는 바로 <탈무드>일 뿐이다. 그래서 <탈무드>에 대한 공부가 권위의 척도로 측정되고 있다. <탈무드>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랍비'이며, 그래서 랍비가 유태인들의 존경을 받는 권위자가 된 것이다.
탈무드의 내용
<탈무드>는 모두 6개의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농업, 제사, 여자, 민법과 형법, 사원, 순결과 불순 등이다. <탈무드>는 반드시 '미슈나(mishna)'라 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 규칙이 있다. 이 미시나는 유태 민족에 있어 오랜 전통의 가르침과 약속이 구전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기원후 200년경에 이르서야 체계적으로 모아져 빛을 보게 되었는데, 500그램에 불과한 가벼운 책이다.
이 미시나에 대한 별다른 이견은 없다. 이러한 미시나를 중심으로 더욱 발전된 토론과 논의가 바로 <탈무드>이다. 이 토론은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는 '하라카'라고 하는 토론이고, 또 하나는 '아카타'라고 하는 토론이다.
유태인은 세계의 많은 민족 중에서 종교에 대한 계율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동시에 그만큼 종교에 심취해 있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종교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의 평소의 생활 그자체가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라카'라는 말은 유태인적인 생활 방법이라고나 할까,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숭고한 것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 건강, 예술, 식사, 언어, 대화, 대인관계 등 평소 생활에서의 일체의 행위가 이 '하라카'에 합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의 교인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교인이 되지만, 유태인은 그렇지가 않다. 유태인에 있어서는 오직 행위만이 유태인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또한 '아카타'는 <탈무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철학, 신학, 역사, 도덕, 시, 속담, 성서 해석, 과학, 의학, 수학, 천문학, 심리학, 형이상학 등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지혜가 담겨져 있다.
■ 랍비의 직업
과거 로마인들이 유태민족을 억압하던 시절, 그들은 유태인을 말살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를테면, 유태인 학교를 폐쇄시키고, 예배와 민족적인 축제를 금하고, 유태인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책을 불태우고, 랍비의 교육까지도 금하였다.
랍비가 정해진 교육을 마치면, 졸업식과 같은 랍비의 임명식이 있는데, 이때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랍비를 임명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한 지역은 없애버린다는 령을 내렸다. 이러한 탄압은 로마인들의 탄압 중 가장 현명했다고 할 만큼 효과적인 조치였다. 왜냐하면, 도시나 마을을 멸망시킨 원인이 된 랍비는 그만큼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태 민족에 있어 랍비가 없어지면 유태 사회가 정지되고 말기 때문이다.
랍비는 정신적 지도자임은 물론 의사요, 변호사이며, 유태인들의 모든 권위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바로 랍비의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앞에서와 같은 현명한(?)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때에 어떤 랍비가 로마인들의 숨은 계략을 눈치채고, 아끼는 제자 5명을 데리고 빠져나가 산속에 숨었다. 행여 거기에서 붙잡혀 죽는다해도 아무 상관없는 도시의 멸망만은 막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랍비가 숨은 곳은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도 2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랍비는 5명의 제자를 랍비로 임명했는데, 결국 로마인들의 눈에 띄고야 말았다.
걱정이 된 제자들이, [랍비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자, 랍비는 동요하지 않고 신념에 찬 얼굴로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 늙었으니 별걱정 없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랍비로서의 할 일이 많으므로 서둘러 피하도록 하여라.]
제자들은 명령대로 피했으나, 늙은 랍비는 붙잡혀 3백번의 칼질을 당하는 무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까닭은 유태인들의 사회에서 랍비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랍비는 일종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탈무드>가 그들 사이에서 얼마나 막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유태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모든 유태인들은 <탈무드>의 모든 것을 통하여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가르침과 이치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하루라도 <탈무드>에 대한 공부를 빠뜨리지 않아야 할 만큼 이것은 당순한 학문 연구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는 유태인들에게 있어 신을 모시고 신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 어느 누구이건 <탈무드>를 공부하는 유태인이라면 하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마련이다.
랍비 가운데는 지위에 있어서 상하나 정해진 서열은 없다. 또한 랍비들끼리 어떤 종류의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랍비가 다른 랍비에 비해 더 지혜롭다고 인정되면, 자연히 그 랍비가 많은 유태인들의 어려운 질문이나 복잡한 의식을 주재하게 마련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종교 학교에서는 9세가 되면 <탈무드>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그후 고등학교의 과정까지 마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탈무드>에 대한 공부밖에는 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10년 내지 15년 동안을 <탈무드>의 공부만 하는 셈이 된다.
랍비를 교육하는 미국의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 대학에서 학사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것은 랍비를 교육하는 학교가 대학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시험을 거친 뒤, 4년에서 6년 동안에 <탈무드>를 공부하는데, 처음부터가 아니라 중간 정도에서부터 배우게 된다.
그것은 이미 입학하기 전에 <탈무드>에 대한 것을 많이 배웠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입학시험은 그만큼 어렵고 까다롭다.
입시 과목을 보면 성서. 히브리어, 아랍어, 역사(4000여 년에 걸친 유태인 역사이기 때문에 대단한 분량이다) 유태문학, 법률, 심리학, 설교학, 교육학, 처세철학, 철학 등이 있으며, 이것 외에도 몇 편의 논문도 써야 한다. 이러한 과목들은 어느 것이고 매우 어려운 시험이다. 게다가 졸업할 때는 4년에서 6년에 걸쳐 배운 것에 대한 최종 시험을 또 치러야 한다.
이 모든 과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동시에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탈무드>이다. 탈무드 이외의 과목에 대한 공부는 일반 교수에 의한 강의로 메워지지만, 강의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하는 <탈무드>의 공부만은 탁월한 지혜의 인격자가 맡게 된다.
학교에서 <탈무드>를 교육할 수 있는 교수는 현인으로서 지성을 갖춘 인격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탈무드>적인 말로 표현해 보면 왼쪽손으로는 학생을 냉정하게 몰아치고, 오른쪽손으로는 학생을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는 능력있는 인격자인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학생들도 <탈무드>를 가르치는 선생과 일반 과목을 맡고 있는 선생을 대하는 자세에 차이가 있다.
<탈무드>의 공부는 혼자보다는 두 사람씩 짝이 되어 공부한다. 이를 테면,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읽고 다른 학생이 따라 읽는 방법 같은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조를 이루고 3년 동안이나 한 자리에서 <탈무드>를 공부하는 것이다. <탈무드>의 선생은 공부하는 요령 같은 것을 가리켜 주지 않기 때문에, 학생은 스스로 생각하고 터득해 가며 배운다. 이렇게 혼자 공부한 뒤 두 사람 씩 짝이 되어 있는 교실로 나간다.
<탈무드>에 대한 공부는 다만 소리내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참다운 진리를 파악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시간의 수업을 위해 4, 5시간의 예복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도 졸업을 앞둔 고학년이 되면 1시간의 수업에 무려 20여 시간의 준비 학습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탈무드>의 내용 공부는 선생이 하나하나 일일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대강의 줄거리만 말해 주고, 그에 따른 방향만 제시해 주는 것으로 그친다.
낮은 학년의 학생들은 빙 둘러앉아 공부하는데, 그때 선생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다. 물론 수업 준비에 대한 의문점은 선생에게 수시로 물어볼 수 있다.
<탈무드>를 배우는 반은 반드시 그리스와 라틴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인 생활에도 익숙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랍비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 독신일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다. 대개 약 100여명의 학생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는 마치 학생사회와 같은 것이 형성된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분위기는 아니다. 휴식할 수 있는 밤에는 운동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사회와 접촉이 없는 수도원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학교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은 2년 동안 학교를 위한 봉사에 임해야 하는데, 그 길은 종군 랍비나 랍비가 없는 마을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나는 종군 랍비가 되어 2년간 공군에서 봉사하였다.
일단 이 2년간의 봉사 생활이 끝나면 두 길 중 한가지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학교의 선생과 사회에서의 랍비의 일 가운데 유태 사회의 랍비로서의 일을 택하였다.
각 교구는 모두 따로따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와 같이 랍비가 교단의 지시대로 각지로 전근되어 다니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지역에서 랍비를 교육하는 학교에 보수에 맞는 랍비를 신청하면 된다. 그러면 학교의 사무국에서 신청 조건에 응해 오는 랍비를 지역에 보내 면접을 거치게 한다. 각 지역사회나 이에 봉사하는 랍비는 각각 자기에 맞는 조건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지역사회나 랍비는 많은 랍비의 후보자 중에서 고를 수 있고, 반대로 랍비도 이곳저곳을 다녀본 뒤 자기에 맞는 지역을 선택하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역사회의 예배를 주재하게 되는데, 보통 봉사 기간은 2년이 한 기간으로 되어 있다. 이때 물론 보수나 그 밖의 생활에 필요한 조건은 쌍방의 합의에 의해 맺어진다. 유태인 사회에서의 예배당과 교구는 수시로 생겨나는 것이어서, 유태인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에는 여러 곳의 예배당이 생겨난다. 반대로 예배당이 없는 곳에는 유태인이 살 수가 없다. 유태인들에게는 매일 마침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이 또한 예배당이 없으면 안된다. 이것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학교인 예배당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유태인이 20여가구만 되면 1개의 예배당을 만들어 이를 맡을 랍비를 모시게 된다. 물론 한 지역사회에 여러 명의 랍비가 있어도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지역에 얼마나 많으니 유태인이 살고 있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사회에 필요한 재원은 지역내에 거주하는 유태인 가족을 단위로 하여 각각 분담하게 되며, 여유가 있는 사람은 1년에 한번씩 기부금을 희사할 수 있다.
오늘날 랍비가 맡고 있는 역할은 유태인 학교의 선생으로서의 책임과 예배당의 관리와 설교를 맡는 것이다. 랍비는 4000년 유태의 전통을 유태인들을 대신하여 연구하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유태인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능력자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랍비를 초빙하고, 결혼하거나 죽었을 때도 랍비를 모셔다 조언을 듣게 된다. 유태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랍비는 참여하여 개입함으로써 그는 학자이며, 선생이며, 존경받는 인물인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5세기까지의 랍비는 무보수의 봉사자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랍비는 다른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부터는 지역사회가 이들의 생활을 책임지게 되었다. 1세기경부터 쓰이기 시작한 '랍비'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에서 '교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로는 '라바이'라고 말한다.
유태교에서는 특히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에 반해 어떠한 장소나 지역은 별로 중요시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볼 수 잇는 성역이란 말은 쓰이지 않지만 랍비를 '성인'이라고 존경하고 있다.
■ 유태인의 생활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면, 먼저 씻고 그리고 식사 전 30분정도를 기도로 보낸다. 이때는 팔과 머리 위에 성스러운 상자를 메어 달고 몸에는 목띠를 감는다. 집에서 기도를 해도 되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은 근처에 있는 예배당에 가서 기도한다.
이들의 기도문은 어디에서나 같다. 집에서 보다는 예배당에 가면 많이 모여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다. 게다가 집에서 혼자서 기도할 때는 대개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 쉽지만 모두 모여 함께 기도하면 이런 폐단을 막을 수도 있다.
이렇게 아침 기도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한다. 그때도 역시 손을 씻은 뒤 간단한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식사를 시작한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탈무드>에 관한 얘기를 화제로 삼는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뒤에도 간단한 기도를 하는데, 역시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한자리일 때는 함께 입을 맞추어 낮은 소리로 기도한다.
이 일이 끝난 뒤에 각자 자기의 일터로 향한다.
오후가 되면 정오에서부터 해가 지는 시간의 중간에 5분여 정도의 간략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온 뒤에는 근처의 학교에 가서 공부한다. 왜냐하면, 유태인은 하루 일과 중 어떻게 틈을 내든 반드시 <탈무드>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 유태인의 장례
유태인들은 죽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경의를 표하여야 하고, 그리고 죽은 사람은 항상 지켜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죽은 이의 몸을 깨끗이 한다. 그 일은 그 지역사회에서 가장 교양이 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사람이 맡아 한다. 이러한 일은 유태인 사회에서 매우 영예로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가능한한 빠른 시간 안에 매장하는데 화장이 아니라 매장한다. 원칙적으로는 죽은 다음날에 매장하는 게 관례이다.
죽은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장례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참석한 사람 중에서, 이를테면, 랍비가 추도사를 읽고 상주가 기도문을 읽는다. 이들은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내용의 기도를 1년동안 매일 반복한다.
일단 매장이 끝나면 가족은 집으로 돌아온 뒤 일주일간 같은 일을 반복한다. 1개의 촛불을 켜 놓고 10명의 친지가 마루에 모여 앉아 기도문을 외우는데. 이때는 집안의 있는 거울을 모두 덮어야 한다.
그리고 상주는 일주일 동안 집밖의 출입을 삼간다. 예배당에 가는 일도 이 일주일이 지나야 가기 시작한다. 상주가 집에 있는 일주일 동안에 그 가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조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일주일의 의식이 끝나면 상주 가족은 집밖에 나와 자기 집 둘레를 한 바퀴 돌게 된다. 죽은 뒤 한달 동안에는 얼굴을 씻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죽은 뒤 1년 동안에는 화려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장소에는 출입하지 않는다. 그후 해마다 죽은 사람의 기일이 되면 반드시 상복을 입어야 한다.
가족들이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달걀을 먹는다. 죽은 사람에 대한 유태인들의 사고 방식은 사람은 누구나 가족이 죽으면 슬퍼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일주일간 추모하고 집밖을 나간다는 것은 그 이상 슬픔에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다. 이것은 사람이 슬픔을 너무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불건강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집밖에 나가 집 둘레를 한바퀴 도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달걀을 먹고 집의 둘레를 한바퀴 도는 것은, 둥근 원이 끝도 시작도 없는 거와 같이 인간의 생명도 끝이 없는 원과 같이 언제이고 돌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뜻한다.
이들이 가장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은 일주일 동안이다. 그 뒤의 한달 동안은 추모 기간이 있지만, 이 기일에는 일주일이 슬픔과는 같지 않다. 뒤의 1년 동안도 역시 슬픔이 덜한 기간이다.
죽은 뒤 1년 후부터는 기일을 빼고는 상복을 입지 않는다. 1년 동안 상복을 입어 추모하는 대상은 부모의 경우일 뿐이고 다른 사람의 경우엔 1일주일과 1개월에 추모의 기간이 끝난다.
나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나는 슬픔에 싸여 식사마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걀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의무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만이 현재 살아있는 사람을 지배하고 있어서는 안되며,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는 중요성을 유태인들은 가르치고 있다 이들에 있어 자살은 큰 죄악이다.
유태인들의 장례식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구별이 없고, 학자와 무식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은 관과 옷을 입혀 행한다. 인간들의 지위나 부위 영화에 따라 장례식이 달라지는 경우는 없다. 이들은 인간 평등을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당에서 같은 모습, 같은 모자를 쓰고 함께 모여 앉아 기도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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