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우주의 생성 기원과 상속
우주의 생성과 전개
이때 대중 속에 있던 부루나미다라니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옷을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어 합장하고 공손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덕이 뛰어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훌륭하게 설해 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저를 설법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추천하셨으나, 이제 여래의 미묘한 설법을 들으니, 마치 귀머거리가 백보 밖에서 모기 소리를 듣는 듯하여 본래 볼 수도 없는데 어찌 더욱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비록 저에게 밝게 설하시어 미혹을 없애주셨으나, 지금도 아직 이 뜻이 완연하여 의혹이 없는 자리를 자세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과 같은 부류는 비록 깨달았다고 하나, 익혀 쌓인 번뇌를 아직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이 법회 가운데 번뇌가 없는 경계에 오른 저희들도 비록 온갖 번뇌를 다 없앴다고 하나, 이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들으니, 오히려 의심과 후회만 더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상의 일체 6근(根)과 6진(塵)과 5음(蔭)과 12처(處)와 18계(界) 등이 다 여래장으로서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의 온갖 유위(有爲)상이 생겨서 차례로 옮기고 흐르며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입니까?
또 여래께서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본성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고요히 상주(常住)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흙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어떻게 물을 용납하겠으며, 또 물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불의 성질은 생기지 않을 텐데, 또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질이 허공에 함께 두루 원만하여 서로 빼앗아 쫓아내지 않는 이치를 밝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흙은 막히고 걸리는 성질이고 허공은 비어 통하는 성질인데 어떻게 두 성질이 함께 법계에 두루 가득 찰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뜻이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내리시어 저의 구름처럼 덮인 미혹을 거둬주옵소서.”
이 말을 마치자 대중과 함께 5체를 땅에 던져서 존경을 다하여 더 없는 여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부루나와 법회 대중 가운데 번뇌를 다하고 배움을 초월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가 오늘 널리 이 회상의 대중을 위하여 수승한 진리 가운데 진리의 본질을 밝혀서, 이제 너희들 모임 중에 삼매가 높은 성문승들과 이공(二空)을 얻지 못한 이들과 보살승으로 돌아선 아라한들이 모두 다 일승(一乘)의 적멸한 도량인 진실한 아란야의 바른 수행처를 얻게 하리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부루나 등은 존경을 다하여 말없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 너는 항상 이 여래로부터 '성품의 깨달음은 묘하고 밝으며, 본래의 깨달음은 밝고 묘하다'는 말을 들어오지 않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언제나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 뜻을 들어왔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깨달음이다 밝음이다라고 말한 것은 성품 자체의 밝은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깨달음이 밝지 않으니 밝혀야 할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밝지 않음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밝힐 대상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밝힐 대상이 없다면 밝힐 깨달음이 없다고 했는데, 밝힐 대상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며, 밝힐 대상이 없으면 밝음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또 깨달음의 고요하고 밝은 성품도 아니니라.
성품 자체의 깨달음은 본래 분명히 밝은 자리다. 그럼에도 너는 여기서 허망하게 밝혀야 할 깨달음을 생각한 것이다. 깨달음은 밝힐 대상이 아님에도 밝힘으로 인하여 밝힐 대상을 세우고, 밝힐 대상이 이미 허망하게 세워지니, 너의 허망한 능력이 생겨서, 같음도 다름도 없는 가운데 불길처럼 성하게 다른 것이 이뤄졌느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하여, 다른 것을 근거로 같은 것을 세워서, 같음과 다름을 환하게 밝히고, 이를 근거로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을 세웠느니라. 이와같이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서로 대립하여 수고로움이 생기고, 수고로움이 오래되어 티끌을 발하여 자체 모양이 혼탁해지니, 이로인하여 진로(塵勞) 번뇌를 이끌어 냈느니라.
일어나서는 세계가 되고, 고요해서는 허공이 되니, 허공은 같은 것이고, 세계는 다른 것이며, 저 같음과 다름이 없는 것이 실제의 인연으로 변화하는 법이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음과 허공의 캄캄한 어둠이 번갈아 바뀌며 흔들리기 때문에 풍륜 있어서 세계를 붙드느니라.
허공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생기고 밝힘을 굳혀서 막힘을 이루니, 저 금보는 밝힌 깨달음이 굳혀진 것이므로, 금륜(金輪)이 있어서 국토를 보전하느니라.
깨달음을 굳혀서 보배가 되고 밝힘이 흔들려 바람이 생기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이 있어서 변화하는 성질이 되느니라. 보배의 밝음이 물기를 내고 불빛이 위에서 쪼여 삶으니 수륜 있어서 시방 경계를 둘러싸느니라.
불의 오름과 물의 내림이 번갈아 발하여 굳히니, 젖은 편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편은 육지와 섬이 되느니라. 이치가 그러기 때문에 저 큰 바다에서는 항상 불빛이 일어나고, 저 육지와 섬에서는 항상 강이 흐르느니라.
물의 세력이 불보다 약하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산 돌을 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이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흙의 세력이 물보다 약하면 빼어나서 풀과 나무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숲이 불에 타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함이 얽히고 발생해서 서로 번갈아 종자가 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밝힘을 굳힌 허망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힘이 허물이다. 대상의 허망이 이미 세워지고 나면 진실한 밝은 이치가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작용은 소리를 떠나지 못하고 보는 작용은 물체를 벗어나지 못하여, 모양과 냄새와 촉감 등 여섯 허망한 경계를 이루느니라. 이로 인하여 보고 느끼고 맡고 아는 작용이 따로 열리어 같은 업끼리 서로 얽히기도 하고, 합하여 생기기도 하고, 떠나서 변화를 이루기도 하느니라.
보는 작용이 밝아서 색이 환하게 나타나면, 밝은 경계를 환히 보면서 생각을 형성하여, 소견이 다르면 미워하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하면서, 애정을 흘려보내 종자를 이루고 생각을 거둬들여 태에 드느니라.
이렇게 서로 어울려 생길 때에 같은 업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인연이 있어서 난자와 정자 등이 생기느니라.
태로 나고 알로 나고 습기로 나고 변화로 나는 중생은 그 적응할 곳을 따르는데, 알로 나는 중생은 오직 생각만으로 태어나고, 태로 나는 중생은 욕정으로 존재하며, 습기로 나는 중생은 합해서 감응하고, 변화로 나는 중생은 떠나서 상응하느니라.
이렇게 번갈아 서로 변하고 바뀌면서, 업으로 받은 과보를 따라 날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생각과 애정이 함께 얽혀서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면, 세상의 부모와 자손들이 서로 태어남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애정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애정을 탐내어 함께 몸을 불리면서 탐욕을 그치지 못하면, 온갖 세상의 알로 나고 변화하여, 나고 습기로 나고 태로 나는 중생들이 힘의 강하고 약함을 따라서 번갈아 서로 잡아먹게 된다. 이런 일들은 살생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니, 이렇게 온갖 중생들이 죽고 또 죽고 나고 또 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서로 잡아먹으며 나쁜 업을 짓고 함께 태어나기를 미래가 다하도록 쉬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투도(偸盜)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너는 나에게 생명의 빚을 졌고 나는 너에게 진 빚을 갚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모습을 좋아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번뇌에 얽히는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살생과 투도와 음욕의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과가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이러한 세 가지 뒤바뀐채 이어져 내려오는 상속(相續)은 다 깨달음의 밝음(本覺妙明)으로 명료하게 아는 성품(明了知性; 妄明)이 그 아는 작용으로 인하여 모양을 일으키니, 허망한 보는 작용으로 생긴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이 차례로 옮기고 흐르면서, 이 허망을 따라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이니라.”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이 묘각의 본래 묘한 깨달음의 밝음이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가운데, 까닭 없이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이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이제 묘하고 공(空)하여 밝은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산과 강과 대지와 인연변화의 익혀 쌓인 번뇌는 언제 또 생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여 어떤 미혹한 사람이 어느 한 마을에서 남쪽을 북쪽으로 헷갈렸다면, 이 헷갈림은 헷갈림 때문에 있겠느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왔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렇게 미혹한 사람은 헷갈림 때문도 아니고,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헷갈림은 본래 근본이 없는데, 어찌 헷갈림 때문에 있겠으며, 깨달음에는 헷갈림이 생기지 않는데, 어찌 깨달음에서 나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바로 헷갈려 있을 때, 문득 깨달은 사람이 가리켜줘서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비록 헷갈렸다고 하나 이 마을에서 다시 헷갈리겠느냐?”
부루나가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시방 여래도 이와 마찬가지다. 미혹은 근본이 없고 성품이 철저히 공하여 옛날부터 본래 미혹한 일이 없느니라. 잠시 본래의 깨달음을 미혹한 듯하나 미혹을 깨달아서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음에서는 미혹이 생기지 않느니라.
또 사람이 눈병에 걸렸으면 허공에서 헛꽃을 보겠으나 눈병이 나으면 꽃이 허공에서 사라진 것과 같으니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 꽃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꽃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을 생각해 보아라. 어리석겠느냐? 슬기롭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원래 꽃이 없는 허공에서 허망하게 생기고 사라짐을 보고, 꽃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고 본 자체가 이미 뒤바뀐 일인데, 여기에 다시 꽃이 나오도록 억지를 쓴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미친 짓입니다. 어찌 이런 미친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거나 슬기롭다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알고 있다면 어째서 제불여래의 묘한 깨달음이 밝고 공한 자리에서 산과 강과 대지가 언제 다시 나오느냐고 물었느냐?
또 마치 금광 안에서 돌과 섞여 있는 정밀한 금이 한 번 순금이 되고 나면 다시 돌과 섞이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나무가 타서 재가 되면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제불여래의 보리 열반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본성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가'를 물었고, '물과 불의 성질이 어째서 서로 밀어내어 없애지 않는가'를 의심하였으며, 또 '허공과 모든 대지가 함께 법계에 가득 차려면 마땅히 서로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부루나여, 비유하면 허공의 체는 여러 모양이 아니면서 저 온갖 모양의 활동을 막지 않는 것과 같다. 그 까닭을 말하리라. 저 넓은 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둡고, 바람이 흔들면 움직이고, 맑게 개면 깨끗하고, 기가 엉기면 흐리고, 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빛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다른 방면의 온갖 인연작용의 모양은 저들 자체에서 생기겠느냐? 아니면 허공 자체에 있겠느냐?
만일 저들 자체의 원인으로 생긴다면, 부루나여, 해가 비칠 때는 이미 이 해가 밝은 것이니, 시방세계가 한가지로 햇빛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허공 가운데 둥근 해를 보는 것이냐? 만일 허공 자체가 밝은 것이라면, 당연히 허공 제 스스로 비춰야 하는데, 어째서 한밤중에 구름이 끼었을 때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밝음은 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허공과 해와 다르지도 않느니라.
모양으로 관찰해도 원래 허망하여 지적해서 말할 수 없다. 마치 허공 꽃에서 허공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그 서로 밀어내 빼앗지 않는 뜻을 따지겠느냐?
성품으로 관찰해도 원래 진실하여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뿐이다.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처음부터 물도 불도 아닌데, 어찌 또 서로 용납하지 않는 뜻을 묻겠느냐? 진실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네가 공으로 밝히면 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각각 그대로 나타나며, 만일 함께 밝히면 그대로 함께 나타나느니라.
함께 나타남이란 무엇이겠느냐? 부루나여, 마치 어느 한 강물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날 경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 그림자를 보다가,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면, 강물의 해 그림자도 두 사람을 따라서 하나는 동쪽으로 가고 하나는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이 처음부터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마땅히 '이 해는 하나인데 어째서 각기 따로 가는가. 각기 따로 간 해가 이미 둘인데 어째서 하나씩 나타나는가'라고 따지지 못하리라. 완연히 허망만 더할 뿐 증명할 근거가 없느니라.
부루나여, 너는 색과 공으로 여래장에서 서로 기울기도 하고 서로 빼앗기도 하니, 여래장도 따라서 색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 가득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 바람은 흔들리고 허공은 고요하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우니, 중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깨달음을 등져서 경계와 합하기 때문에 티끌 번뇌를 일으키니, 세상의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나는 묘한 밝음의 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 법으로 여래장과 합했으니, 여래장의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으로 원만하게 법계를 비출 뿐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의 경계가 한량없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한량없는 경계가 하나의 경계가 되기도 하며, 작은 데서 큰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큰데서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 법계에 두루 원만하기도 하고, 몸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싸안기도 하며, 한 털끝에서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티끌 속에 앉아서 큰 법륜을 굴리기도 하느니라. 이렇게 티끌 번뇌를 멸하여 깨달음과 합했기 때문에, 진여의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일으키느니라.
여래장의 본래 미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고 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고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아니며, 색도 아니고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도 아니며, 눈의 인식 경계도 아니고 이와 같이 내지 뜻의 인식 경계도 아니니라.
또 밝음도 무명도 아니고 밝음과 무명이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내지 늙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니니라.
또 고성제도 아니고 집성제도 아니고 멸성제도 아니고 도성제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얻음도 아니니라.
또 보시도 아니고 지계도 아니며, 인욕도 아니고 정진도 아니며, 선정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며, 바라밀 실천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내지 여래도 아니며, 아라한과 정변지(正徧智)도 아니고, 대열반도 아니며, 상덕(常德)도 아니고 낙덕(樂德)도 아니며, 아덕(我德)도 아니고 정덕(淨德)도 아니니라.
이렇게 세간(世間)도 출세간(出世間)도 모두 아니므로, 여래장의 원래 밝고 묘한 마음은 그대로 마음이고 그대로 공(空)이며, 그대로 흙이고 그대로 물이며, 그대로 바람이고 그대로 불이며, 그대로 눈이고 그대로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며, 그대로 색(色)이고 그대로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이며, 그대로 눈의 인식 경계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뜻의 인식 경계이니라.
또 그대로 밝음과 무명이고 밝음과 무명이 다함이며,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늙음이고 그대로 죽음이며, 그대로 늙음과 죽음이 다함이니라.
또 그대로 고성제이고 그대로 집성제이며, 그대로 멸성제이고 그대로 도성제이며, 그대로 지혜이고 그대로 얻음이니라.
또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계이며, 그대로 인욕이고 그대로 정진이며, 그대로 선정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바라밀다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여래이며, 그대로 아라한과 바르고 두루한 지혜이고 그대로 대열반이며, 그대로 상덕(常德)이고 그대로 낙덕(樂德)이며, 그대로 아덕(我德)이고 그대로 정덕(淨德)이니라.
이렇게 모두 세간과 출세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묘하게 밝은 마음의 근원은, 일치함도 떠나고 일치하지 않음도 떠나서 일치하면서도 일치하지 않으니, 세간의 삼계중생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그들의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더없이 높은 보리를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智見)에 들어가겠느냐?
비유하면 거문고와 공후와 비파에 묘한 소리가 있을지라도, 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너와 중생도 마찬가지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마음은 저마다 원만하지만, 나는 잠시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실상 해인이 광명을 발하고, 너희들은 잠깐 마음을 들기만 해도 먼저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그것은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도를 열심히 구하지 않고 소승만을 좋아하여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기 때문이다.”
부루나가 말했다.
“저도 여래와 더불어 보배로운 깨달음이 뚜렷이 밝아서, 진실하고 미묘하고 청정한 마음이 둘이 없이 원만하지만, 저는 옛적부터 시작 없는 망상을 만나 오래도록 생사에서 윤회하다가, 이제 거룩한 아라한 과위를 얻었으나, 아직도 구경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온갖 망상을 다 원만하게 멸하시어, 홀로 미묘하고 영원한 진리에 드셨으니, 감히 여래께 묻겠습니다.
일체중생은 어떤 원인으로 망상이 있어서, 스스로 미묘한 밝음을 덮고 생사에 빠져 헤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의심을 없앴다고 하나 아직 남은 의혹을 다 없애지 못했으니, 나는 현재의 세상일들을 들어 네게 물으리라. 네가 어찌 듣지 못한 일이겠느냐? 사위성의 연야달다가 홀연히 어느 새벽에 거울로 얼굴을 비추고 거울 속에서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다가, 자기 머리에서 얼굴과 눈이 보이지 않자, 도깨비라고 성을 내어 꾸짖으며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한다. 너는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까닭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 사람은 그저 마음이 미쳤을 뿐, 더 이상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한 깨달음은 밝고 원만하여 본래 원만하게 밝고 미묘할 뿐인데, 여기에 이미 허망이라고 칭한들, 어찌 원인이 있겠느냐? 만일 원인 할 곳이 있다면, 어찌 허망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온갖 망상이 연달아 서로 원인을 이루고 미혹으로 미혹을 쌓으면서 티끌처럼 많은 겁을 지냈으니, 이 여래가 밝힐지라도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느니라. 이렇게 미혹의 원인은 미혹 자체의 원인으로 있을 뿐이니, 미혹에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은 의지할 데가 없을 것이며, 더욱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멸하려고 하겠느냐?
보리를 깨달은 사람은 꿈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비록 꿈속의 일이 정교하게 밝을지라도, 무슨 인연이 있기에 꿈속의 물건을 취하고자 하겠느냐? 더욱이 또 원인이 없어서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겠느냐?
저 성안의 연야달다인들 무슨 인연이 있기에 스스로 머리를 겁내어 달아났겠느냐? 홀연히 미친 증세만 쉬어버리면 머리를 밖에서 얻지 않으리라. 비록 미친 증세가 없어지지 않은들 어찌 머리를 잃어버렸겠느냐?
부루나여, 허망한 성질이 이와 같은데 무엇을 근거로 있겠느냐? 네가 단지 세간과 업과와 중생의 세 가지 상속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너의 마음속에 자리한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리라. 쉬고 나면 곧 깨달음의 훌륭하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 원만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닌데, 어찌 수고롭게 갈고 다듬고 닦아 증득하는 방법을 빌리겠느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안에 여의주가 매어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헐벗은 채 걸식하면서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비록 실제로는 가난할지라도 구슬을 잃은 적이 없으니,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구슬을 가리켜줘서 마음속의 소원을 성취하여 큰 부자가 된다면, 비로소 신비한 구슬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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