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처님 지견에 들어가는 방법
바로 이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방금 세존께서 '살생과 투도(偸盜)와 음욕(淫慾) 업의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고, 쉬고 나면 곧 깨달음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인연의 이치가 명백히 밝혀졌는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인연을 가차 없이 버리시는 것입니까? 저는 인연으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이 어찌 홀로 나이 어린 저희들 유학성문들 뿐이겠습니까? 이 법회의 대목건련과 사리불과 수보리들도 산자야를 따르다가, 부처님의 인연법을 듣고 발심하여 깨달아서 번뇌가 없는 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기를 '보리는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왕사성의 막갈리 고살라 외도들이 설한 자연이 가장 뛰어난 뜻이겠습니까? 부디 대비를 내리시어 저의 답답한 심정을 시원하게 열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성안의 연야달다가 미친 증세의 인연을 없애버린다면, 미치지 않는 성품은 자연히 나올 것이며, 인연이다 자연이다라는 이치도 여기서 끝나게 되리라.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 저절로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이 저절로 아님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머리를 겁내고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자연의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째서 자연의 머리는 인연 때문에 잃지 않았느냐? 본래의 머리를 잃지 않고 미친 두려움만 허망하게 나왔다면, 잠시도 변하여 바뀐 일이 없는데, 어찌 인연을 빌리겠느냐?
미친 증세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부터 미치고 두려운 증세가 있어야 할 텐데, 미치기 전에는 미친 증세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느냐?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잘못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본래의 머리를 깨닫고 미쳐서 달아난 까닭을 안다면, 인연이나 자연이라는 주장은 다 쓸모없는 논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나는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곧 깨달음의 마음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만일 깨달음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생멸일 뿐이다.
생멸이 모두 사라져서 공덕(功德) 작용이 없는 도에 만일 자연이 있다고 하면, 이 경우에도 자연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밝히는 격이니, 이것 역시 생멸(生滅)이니라.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세상에서 온갖 모양을 뒤섞어 일체를 만들어서 화합성질이라고 이름하거나, 화합하지 않는 것을 본연의 성질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으리라.
본연(本然)이다 본연이 아니다 화합이다 화합이 아니다라고 하는 화합과 본연을 모두 떠나고, 떠났다 떠나지 않았다를 모두 벗어나야만 이 구절을 비로소 쓸모없는 논리를 떠난 법이라고 하리라.
너는 아직도 보리열반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겁을 지내 부지런히 힘써 닦은 정도로 증득할 단계가 아니다. 비록 또 시방 여래께서 다양한 형식으로 가르치신 12부경의 청정하고 미묘한 이치를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이 기억할지라도, 단지 쓸모없는 논리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을 담론할 때 명료하게 결정함으로써 사람들이 너를 들은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렇게 겁을 쌓아 듣는 지식을 많이 닦아 익히고도, 마등가의 난을 면할 능력이 없다가, 너는 어째서 나의 불정(佛頂) 다라니를 기다려 마등가의 불꽃같은 음욕을 단번에 끄고 아나함과를 성취하여, 나의 법 가운데 정진의 숲을 이루고 애욕의 강물을 말려서 너를 해탈케 한 것이냐?
그러므로 아난아, 네기 비록 겁을 지내며 여래의 묘하게 장엄한 비밀법을 기억할지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닦아서 세상의 미움과 사랑의 두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못하리라.
마등가는 지난 세상에 음녀(淫女)였으나, 신비한 주문의 힘으로 그 애욕을 소멸하여, 지금은 법회 가운데 성비구니란 이름으로, 라후라의 어머니인 야수다라와 함께 과거 세상의 원인을 깨달았느니라. 여기에 이들은 지내온 세상을 애정의 탐욕 때문에 괴롭게 살아왔음을 알고, 일념으로 번뇌 없는 선행을 닦았기 때문에, 얽힘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수기를 받기도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 경계에 멈춰 있는 것이냐?”
아난은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니, 의혹이 사라지고 마음에 실상을 깨달아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얻고 감격하여 다시 슬피 울며, 부처님의 발까지 이마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길게 꿇어앉아서 두 손 모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더없이 대비하시고 청정하신 부처님께서는 저의 마음을 잘 깨우쳐 주셨으며, 이러한 가지가지 인연과 방편으로 어둠에 잠긴 이들을 타이르고 이끄시어 고해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비록 이러한 설법을 듣고 여래장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여래의 시방 국토에 청정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품어 기르는 줄을 알았으나, 여래께서는 저에게 또 '많이 들어 안 지식은 공덕이 없으니, 실제로 닦는 것보다 못하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저는 지금 마치 집 없는 떠돌이가 홀연히 천자로부터 화려한 집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록 큰집을 얻었을지라도 들어가는 문을 몰라 찾고자 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대비를 버리지 마시고, 이 법회의 어둡고 무지한 저희들이 소승을 버리고, 여래께서 무여 열반을 향하여 본래 발심하신 길을 얻게 하시고, 또 배우는 단계의 행자들이 옛날부터 반연해 온 경계를 무엇으로 다스리고 굴복시켜야만 다라니를 얻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온 몸을 땅에 던져 법회 대중과 함께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이 법회 가운데 연각(緣覺)과 성문(聲聞)으로서 깨달음의 마음이 자재하지 못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미래에 깨달음의 마음을 낼 말법 중생들에게도 더없이 높은 법의 묘한 수행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켜서 여래의 묘한 삼매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먼저 깨달음을 일으키는 첫 마음에 두 확고한 뜻을 밝혀야 한다.
첫 마음에 두 확고한 뜻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첫째 뜻은 너희들이 만일 성문을 버리고 보살 법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수행자리에서 일으킨 마음이 결과자리의 깨달음과 같은지 다른지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니라.
아난아, 만일 수행자리(因地)에서 생멸심을 가지고 첫 수행의 원인을 정하여 생멸을 떠난 불법을 구한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뜻에서 너는 온갖 물질로 이뤄진 세상을 밝게 비춰보아라. 조작이 가능한 법은 모두 변하여 사라지느니라. 아난아, 너는 세상의 조작이 가능한 법을 보아라, 무엇인들 무너지지 않겠느냐? 그러나 끝내 허공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조작이 가능한 법이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져 없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몸 안에 굳은 형태는 흙의 요소이고 젖는 성질은 물의 요소이며, 따듯한 감촉은 불의 요소이고, 흔들리는 성질은 바람의 요소이니, 이 네 가지 요소가 얽혀 짜임에 따라, 너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나뉘어 보고 듣고 느끼고 살피는 작용으로 변한 상태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를 다섯 겹쳐 쌓임의 혼탁이라고 하느니라.
혼탁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맑은 물은 본래 청결하고, 저 먼지와 흙과 회 가루의 종류는 본질이 막히고 걸림으로, 두 체(體)는 본질 그대로 서로 따르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흙을 집어서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막히는 성질을 잃고 물은 청결을 잃어서, 모습이 어지럽게 뒤섞인 상태를 혼탁이라고 하며, 너의 혼탁의 다섯 겹쳐 쌓임도 마찬가지니라.
아난아, 너는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한 허공을 보아라. 허공과 보는 작용은 구분되지 않으리라. 허공은 있으나 실체가 없고 보는 작용은 있으나 감각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첫 번째 겹쳐 쌓임의 겁탁(劫濁)이라고 한다.
너의 몸은 현재 네 가지 요소를 뭉쳐서 형체가 되었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막아서 걸려 막히게 하며,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을 돌려서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두 번째 겹쳐 쌓임의 견탁(見濁)이라고 한다.
또 네가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식별하고 외우고 익힐 때, 성품은 알고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모양은 여섯 경계를 나타내고 있으나, 경계를 떠나면 모양이 없고, 지각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세 번째 겹쳐 쌓임의 번뇌탁(煩惱濁)이라고 한다.
또 너는 아침저녁으로 생기고 멸함이 멈추지 않아서, 알고 보는 작용은 언제나 세상에 머물고자 하고, 업은 운행하여 항상 국토를 옮기려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네 번째 겹쳐 쌓임의 중생탁(衆生濁)이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들의 보고 듣는 작용은 원래 다른 성질이 없으나, 여러 경계가 따로 떨어져 까닭 없이 다른 것이 생기니, 성품 가운데서는 서로 알고, 작용 가운데서는 서로 등져서, 같고 다름이 기준을 잃은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다섯 번째 겹쳐 쌓임의 명탁(命濁)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과 깊이 계합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먼저 생사(生死)의 근본을 가려내고, 생멸을 떠난 원만하고 고요한 성품을 의지해서 성취해야 한다. 고요한 자리로 그 허망한 생멸을 돌려서 누르고, 원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밝은 깨달음의 생멸이 없는 성품을 얻어 수행자리의 마음으로 정한 뒤에, 결과자리의 수증(修證)법을 원만하게 성취해야 하느니라. 이것은 마치 혼탁한 물을 흔들리지 않는 그릇에 담아서 깨끗이 맑히는 것과 같다.
오래도록 가만히 두어 움직이지 않고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아 맑은 물이 뚜렷이 나타난 상태를 객진번뇌를 처음 누른 경계라고 하며, 탁한 찌꺼기마저 제거하여 순수하게 맑은 물만 남은 상태를 영원히 근본무명을 끊은 경계라고 한다.
이렇게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여, 일체의 변화가 나타나서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모두 다 열반의 청정한 묘한 덕과 계합하느니라.
둘째 뜻은 너희들이 반드시 깨달음의 마음을 내어 보살법에 큰 용맹을 일으켜서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을 버리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서 '이것이 시작 없이 아득한 옛적부터 오랜 세월에 업을 일으켜서 태어남을 북돋고 있으니 무엇이 짓고 무엇이 받는가'라고 관찰하는 일이다.
아난아, 네가 깨달음을 닦으면서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다면, 허망한 감관과 경계가 어느 곳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뒤바뀐 곳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번뇌의 근본을 항복시켜서 여래의 자리를 취하겠느냐?
아난아, 너는 세상의 매듭 푸는 사람을 살펴보아라. 맺힌 곳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푸는 방법을 알겠느냐? 허공이 너에게 무너뜨림을 당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맺히거나 푸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네 앞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의 여섯이 도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자기 집안의 보배를 겁탈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하여 시작 없는 겁 동안 중생세계에 얽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니라.
아난아, 어째서 중생세계라고 하겠느냐? 세(世)는 옮겨 흐른다는 뜻이며, 계(界)는 방위라는 말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동쪽과 서쪽과 남쪽과 북쪽과 동남쪽과 서남쪽과 동북쪽과 서북쪽과 위아래는 계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세이다.
방위는 열이고 흐름은 셋이니, 일체중생이 허망을 짜서 서로 이뤄내고 몸 안에서 바뀌고 옮기면서 세와 계를 서로 밟는 것이니라.
이 계의 성질이 비록 열 곳이라 하나, 일정한 방위가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는 단지 동서남북만 지목할 뿐이다. 위와 아래는 자리가 없고, 사이는 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의 수는 분명하여 세와 서로 밟아서, 세 때가 사방으로 사방이 세 때로 완연히 구르니 열 둘이니라. 이렇게 흘러 변함을 세 차례 포개면, 하나가 열이 되고 백이 천으로 불어난다. 처음과 끝을 다 포함하면 여섯 감관 안에는 각각 공덕이 천 이백이 있느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가운데 자세히 헤아려 공덕이 많고 적음을 정해 보아라.
눈이 보는 것은 뒤가 어둡고 앞이 밝은데, 앞쪽은 전체가 밝으나 뒤편은 전체가 어둡다. 왼쪽과 오른쪽의 옆으로 보는 것이 세 몫 중에 두 몫이다. 다 합해서 논한다면 짓는 공덕이 완전하지 못하여, 세 몫의 공덕에서 한 몫의 공덕이 없으니, 마땅히 눈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귀는 두루 다 들어서 시방 어디에나 빠짐이 없다. 소리가 움직일 때는 멀고 가까움이 있는 듯하나, 조용할 때는 한계가 없으니, 마땅히 귀의 감관은 천 이백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통해서 작용하는데, 내쉬고 들이쉬는 작용만 있고, 중간의 어울림은 빠져 공덕이 없느니라. 코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코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혀로는 모든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를 다 설하여 밝힐 수 있음으로, 말은 한계가 있을지라도, 끝없는 이치를 다해내니, 마땅히 혀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몸은 닿음을 느껴서 거슬리거나 따르는 경계를 아는데, 합할 때는 느낄 수 있으나 떼었을 때는 알지 못하니, 떼었을 때는 하나이고 합했을 때는 한 쌍이다. 몸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몸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는 묵묵히 시방 삼세의 일체세간과 출세간 법을 받아들여서, 성인과 범부를 다 포용하여 끝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땅히 뜻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네가 지금 나고 죽는 애욕(愛慾)의 흐름을 거슬러 흐르는 근원을 끝까지 다 돌이켜서, 생멸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여섯 가지로 수용하는 감관에서, 어느 감관과 합해야 하는지 어느 감관을 떠나야 하는지, 어느 감관이 깊은지 어는 감관이 얕은지, 어느 감관이 원통한지, 어느 감관이 원통하지 않은지를 체험해야 한다. 만일 여기에서 원통한 감관을 깨닫고 저 시작 없는 옛날부터 망상으로 짜인 업의 흐름을 거슬러서, 원통한 감관을 따를 수 있다면, 원통하지 못한 감관으로 닦은 날과 겁보다 그 공덕이 배가되리라.
내가 지금 여섯 감관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밝은 본래공덕의 수량을 이와 같이 자세히 밝혔으니, 너는 잘 생각하여 들어가기에 알맞은 감관을 가려보아라. 나는 마땅히 밝혀서 너를 더욱 잘 닦아 나갈 수 있게 하리라.
시방 여래께서는 열여덟의 경계를 낱낱이 수행하여 다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원만하게 성취하셨는데, 그 중간에 전혀 우열이 없었느니라. 단지 너는 근기가 낮아서 그 가운데 자재한 지혜가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선양하여 너에게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니, 한 문으로 들어가서 헛되지 않으면, 저 여섯 감각기관은 일시에 청정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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