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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수행하는 점차에 따른 12류 중생


아난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이 우둔해서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좋아하여 온갖 번뇌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들어 바르게 닦는 길을 알게 되니, 몸과 마음이 시원하게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부처님의 삼매를 닦고 증득하여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그 사이 어떤 것을 이름하여 간혜지(乾慧地)와 44심(心)이라고 하며, 어느 정도 차례로 닦아야만 수행자란 명목을 얻겠습니까? 또 어느 곳까지 나아가야 지(地) 가운데 들어갔다고 하며, 어떤 경지를 등각 보살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온몸을 땅에 엎드려 대중과 함께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한 말씀을 기다리면서 눈을 바로 뜨고 집중하여 부처님을 우러러 보았다.
이때 세존께서 아난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다. 너희들은 널리 지금의 대중과 말세에 삼매를 닦아 대승을 구할 일체중생을 위하여, 범부에서 대열반에 이를 때까지 미리 더 없는 바른 수행의 길을 보여 달라고 하니, 너희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아난과 대중은 마음을 비우고 합장하여 묵묵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묘한 성품은 원만하게 밝아서 온갖 이름과 모양을 떠났음으로 본래 세계와 중생이 없으나, 허망으로 인하여 생겨남이 있고 생겨남으로 인하여 사라짐이 있으니, 생겨남과 사라짐을 허망이라 하며, 허망이 사라진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이를 여래의 무상보리와 대열반의 두가지에 의지하여 전도된 법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진실한 삼매를 닦아서 바로 여래의 대열반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마땅히 이 중생과 세계의 두 가지 뒤바뀐 원인을 알아야 한다. 뒤바뀜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의 진실한 삼매니라.
아난아, 중생의 뒤바뀜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성품이 밝은 마음은 성품의 밝음이 원만하기 때문에 밝음으로 인해서 성품이 일어나고 성품에서 허망한 보는 작용이 생기니, 끝까지 없는데서 끝까지 존재하는 것이 이뤄졌느니라. 이 존재 자체(能有)와 존재의 대상(所有; 業)은 원인(業)도 원인의 대상(煩惱)도 아니며, 머무는 자체(住)와 머무는 대상(所住)의 모양도 전혀 근본이 없는데, 이 머묾이 없는 모양을 바탕으로 세계와 온갖 중생이 세워졌느니라.
본래의 원만한 밝음을 미혹하여 허망이 생겼으니, 허망한 성질은 자체가 없으며 의지할 대상이 있지 않느니라. 오히려 진실을 회복하고자 하여 진실 하려고 해도, 이미 진실한 진여의 성품이 아닌데, 진실이 아닌 것으로 회복하기를 구하면 완전히 잘못된 모양을 이루느니라. 잘못된 생겨남과 잘못된 머무름과 잘못된 마음과 잘못된 법이 연달아 발생하고, 생기는 힘이 환하게 열려서 훈습하여 업을 이루어 같은 업을 서로 받고, 받는 업이 있음에 따라 서로 멸하고 서로 나니, 이로 인해서 중생의 뒤바뀜이 있느니라.
아난아, 세계의 뒤바뀜이란 무엇이겠느냐? 이 존재 자체와 존재의 대상으로 분단되는 생사가 허망하게 생기니, 이로 인하여 계(界)가 세워졌느니라. 원인 자체도 원인의 대상도 아니고, 머무는 자체도 머무는 대상도 없어서, 옮기고 흘러 머물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세(世)가 세워졌느니라. 이렇게 삼세(三世)와 사방(四方)이 화합하고 서로 밟아서, 변화하는 중생이 열두 종류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세계는 움직임으로 인하여 소리가 있고 소리를 따라 물질이 있으며, 물질을 따라 냄새가 있고 냄새를 따라 감촉이 있으며, 감촉을 따라 맛이 있고 맛을 따라 법을 알면서 여섯 가지 어지러운 망상이 업의 성질을 이루기 때문에 열두 종류로 나눠지니, 이로 인하여 굴러다니느니라. 그래서 세간의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 등이 열둘의 변화를 다하면서 한바탕 휘도느니라.
이 윤회하는 뒤바뀐 모양을 타서 굴러가기 때문에, 세계에는 알로 나는 중생과 태로 나는 중생과 습한데서 나는 중생과 변화하여 나는 중생과 색이 있는 중생과 색이 없는 중생과 생각이 있는 중생과 생각이 없는 중생과 색이 있지도 않는 중생과 색이 없지도 않는 중생과 생각이 있지도 않는 중생과 생각이 없지도 않는 중생이 있느니라.

아난아, 세계에서 허망한 생각을 따라 윤회하는 흔들림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기와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날아다니거나 잠기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알의 갈라람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고기와 새와 거북과 뱀의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잡된 오염을 따라 윤회하는 애욕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불려 기르는 양분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기거나 서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태의 알포담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사람과 축생과 용과 신선의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집착을 따라 윤회하는 향하여 나감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따뜻함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뒤집히고 엎어지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축축한 모양의 폐시가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우물거리고 쭈물거리고 꿈틀거리고 움직거리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변하여 바뀜을 따라 윤회하는 거짓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촉감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묵은 것을 새것으로 바꾸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변화하는 모양의 갈남(태내에 생긴 한달 이하의 생명)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허물을 벗고 날아다니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막힘과 걸림을 따라 윤회하는 장애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밝음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정밀하게 비추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색이 있는 모양의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길한 별과 흉한 별과 정기가 밝은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스러져 흩어짐을 따라 윤회하는 미혹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어둠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어둠 속에 숨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색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허공에 흩어지고 스러져 잠기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형체 없는 그림자를 따라 윤회하는 그림자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기억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속으로 몰래 맺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이 있는 모양의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신(神)과 귀(鬼)와 정령의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우둔함을 따라 윤회하는 어리석음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완고함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바싹 마르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정신이 화하여 흙과 나무와 쇠와 돌이 되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서로 기댐을 따라 윤회하는 허위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오염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서로 기대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색의 모양이 있지 않으면서 색을 이룬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온갖 해파리 등이 새우의 눈을 빌리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서로 이끌어 들임을 따라 윤회하는 성질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주술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불러들이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색상이 없지 않으면서 색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저주와 독으로 남을 해치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거짓과 어울림을 따라 윤회하는 속임수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성질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돌려 짜 맞추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생각의 모양이 있지 않으면서 생각을 이룬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저 나나니벌처럼 다른 성질을 서로 이루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원한의 해침을 따라 윤회하는 죽임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괴이한 성질과 화합을 이룬 팔만사천의 무리가 부모를 잡아먹는 것으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의 모양이 없지 않으면서 생각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흙덩이를 품고 자식을 만드는 새와 독 나무의 열매를 품고 자식을 만드는 파경조처럼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잡아먹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이것을 12류 중생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중생은 낱낱 종류 가운데 각각 열두 가지 뒤바뀜을 갖췄으니, 마치 눈을 눌렀을 때 어지러운 꽃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미묘하고 원만하고 진실하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뒤바뀌어 이와 같이 허망한 어지러운 생각을 갖춘 것이니라.

네가 이제 부처님의 삼매를 닦아서 증득하려면, 이 근본 원인이 되는 원래의 어지러운 생각에, 세 가지 차례로 닦는 방편을 세워야만 비로소 없앨 수 있느니라.
그릇 속에서 독한 꿀을 제거하려면 끓는 물과 재 섞인 향료로 그릇을 씻어내야만 감로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점차란 무엇이겠느냐? 
첫째는 수습으로서 그 돕는 원인을 제거하는 행이고, 둘째는 진실한 수행으로서 근본 성품을 뽑아내는 행이며, 셋째는 증진하는 법으로서 현재의 업을 어기는 행이니라.

무엇을 돕는 원인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이러한 세계의 12류 중생은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네 가지 음식으로 살아간다. 이른 바 단식과 촉식과 사식과 식식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설하시기를 '일체중생은 다 음식을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하셨다.
아난아, 일체중생은 맛난 음식을 먹으면 살고, 독을 먹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중생이 삼매를 닦으려면 마땅히 세간의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끊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서 먹으면 음욕을 일으키고 생으로 먹으면 노여움을 돋우느니라. 이렇게 매운 채소를 먹는 세상 사람이 비록 12부경을 잘 설할지라도, 하늘과 신선은 그 더러운 냄새를 싫어하여 다 버리고 멀리 떠나느니라. 또 매운 채소를 먹을 때는 굶주린 귀신들이 그 입술을 핥음으로, 항상 귀신들과 더불어 사는 격이니, 복덕이 날로 소멸하여 영원히 이익이 없느니라.
또 이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이 삼매를 닦을지라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과 시방의 좋은 신들은 와서 수호하지 않으니, 힘센 마왕이 그 방편을 얻고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면서 금계를 비방하여 헐고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찬양하느니라. 이러한 사람은 죽은 뒤에 스스로 마왕의 귄속이 되었다가, 마구니의 복을 다 받고 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아난아, 깨달음을 닦는 사람은 영원히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끊어야 한다. 이것이 첫째 증진수행의 차례이니라.

무엇을 근본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중생이 삼매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먼저 청정한 계율을 엄하게 지키면서, 영원히 음욕심을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며, 음식을 불로 잘 익혀 조리해서 먹어야 하고, 날것으로 먹지 않아야 한다.
아난아, 수행자가 음욕과 살생을 끊지 않고 삼계를 뛰어넘으려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니, 마땅히 음욕을 잘 살펴서 독사처럼 여기고 원수처럼 보아야 한다. 먼저 성문의 4기와 8기를 잘 지켜서, 몸을 단속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고, 뒤에 보살의 청정한 율의를 행하여 마음을 단속해서 일어나지 않게 하여라. 금계를 성취하면, 세상에 서로 태어나고 서로 죽이는 업이 영원히 없어지며, 도둑질과 겁탈을 행하지 않으면, 서로 허물을 짊어질 일이 없고, 세간에서 묵은 빚을 갚을 일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청정한 사람이 삼매를 닦으면, 부모에게 받은 육신으로 천안통을 구하지 않고도, 자연히 시방세계를 관찰하게 되며,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게 되며, 친히 거룩한 뜻을 받들어 큰 신통을 얻고, 시방세계를 마음대로 유행하며 지난 세상의 일이 청정하니, 어려운 일이 없느니라. 이를 둘째 증진수행의 차례라고 하느니라.

무엇을 현재의 업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이렇게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마음에 음욕을 탐내지 않으니, 바깥 여섯 경계에 그다지 방탕하게 흐르지 않으며, 방탕하게 흐르지 않기 때문에 근원을 돌이켜 스스로 돌아가느니라. 경계를 이미 인연하지 않고 감관이 짝할 상대가 없으며, 흐름을 돌이켜 유일한 진실이 완전하여 여섯 작용이 행하지 않으므로, 시방국토가 밝고 맑아서, 유리 안에 밝은 달이 달린 것과 같으리라. 그러면 몸과 마음이 시원하고 미묘하고 원만하고 평등하여 매우 안온한 경지에 들어서, 일체여래의 원만하고 청정하고 미묘하고 비밀한 도리가 다 그 속에 나타나니, 이 사람은 곧 무생법인을 얻게 되며, 이로부터 차례로 닦는 가운데 곳에 따라 수행을 일으켜서 안전하게 성인의 자리에 들게 되느니라. 이를 셋째 증진수행의 차례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애욕이 말라서 감관과 경계가 짝을 맺지 않음으로 현재의 몸을 다하고 나서 더 이상 계속 태어나는 일이 없으며, 집착한 마음이 비고 밝아서 지혜가 순수하고, 지혜의 성품이 밝고 뚜렷하여 시방세계를 비추는 가운데, 애욕의 습기가 말라서 생긴 지혜를 간혜지(乾慧地)라고 한다. 이 지혜는 애욕의 습기가 처음 말랐을 뿐, 아직은 여래의 법이 흐르는 물과 닿지 않았느니라.
곧 이 마음으로 가운데에서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면, 원만하고 미묘한 경지가 환하게 열려서, 진실하고 미묘하고 원만한 경계로부터 더욱 진실하고 미묘한 경계가 발생하여 미묘한 믿음이 영원히 머물러서, 일체의 망상이 남김없이 멸하여 다한 가운데, 중도가 순수하고 진실한 자리를 신심주(信心住)라고 한다.
진실한 믿음이 환하게 밝아서 일체를 원만하게 통달하여, 5음과 12처와 18계의 장애를 받지 않으며, 이와 같이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한량없는 겁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은 일체 습기가 다 앞에 나타나서, 이 선남자가 다 잘 기억하여 잃거나 잊지 않는 자리를 염심주(念心住)라고 한다.
미묘하고 원만한 경계가 순수하고 진실하여 진실한 정기가 변화를 일으켜, 시작 없는 겁의 습기가 하나로 통하여 정교하게 밝아서, 오직 정교한 밝음이 진실한 청정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자리를 정진심(精進心)이라고 한다.
마음의 정진이 앞에 나타나서 순전히 지혜만 작용하는 자리를 혜심주(慧心住)라고 하며, 지혜의 밝음을 그대로 유지해서 두루 고요하고 맑은 가운데 고요하고 미묘함이 항상 엉기는 자리를 정심주(定心住)라고 하며, 선정의 빛이 밝음을 일으키고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가서 오직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않는 자리를 불퇴심이라고 한다.
마음의 정진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여 잃지 않고 시방 여래의 기분과 어울려 닿는 자리를 호법심(護法心)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밝음을 보호하여 유지하고 묘한 힘으로 부처님의 자비한 빛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향하여 편안히 머무는 능력이, 마치 두 거울의 광명이 마주하여 그 가운데 묘한 그림자가 겹겹이 서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자리를 회향심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의 빛을 은밀히 회향하여 부처님의 변함없이 엉긴 더없이 묘한 맑음을 얻고 무위의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 잃지 않는 자리를 계심주(戒心住)라고 한다.
계에 자재하게 머물러 시방을 유행하면서 소원 따라 가는 자리를 원심주(願心住)라고 한다.
아난아, 이 선남자가 진실한 방편으로 이 열 가지 믿는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의 정기가 빛을 발하여 열 가지 작용을 밟아 들어가서 원만하게 한 마음이 된 자리를 발심주(發心住)라고 한다.
마음 가운데서 밝음을 일으킴이 마치 깨끗한 유리 안에 정교한 황금이 나타나듯, 앞의 묘한 마음으로 밟아서 경지를 다져 성취한 자리를 치지주(治地住)라고 한다.
마음과 경지가 서로 통하여 알고 함께 명료해져서 시방을 자유롭게 다녀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는 자리를 수행주라고 한다.
수행이 부처님과 동일하여 부처님의 기분(氣分)을 받음이 마치 중음신(中陰身)이 스스로 부모를 찾을 때처럼, 은밀한 신호가 가만히 통하여 여래의 종성에 들어가는 자리를 생귀주(生貴住)라고 한다.
이미 도의 태에 노닐며 직접 깨달음의 후사를 받듦이, 마치 태를 이미 이루고 사람의 모양을 모자람 없이 갖춘 것과 같은 자리를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고 하며, 용모도 부처님 같고 마음상태도 부처님과 동일한 자리를 정심주(正心住)라고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성취하여 날마다 더욱 자라나는 자리를 불퇴주(不退住)라고 하며, 열 가지 몸의 영묘한 모양을 일시에 다 갖춘 자리를 동진주(童眞住)라고 한다.
형상을 이루고 태에서 나와 친히 불자가 된 자리를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며, 성인을 표함이 마치 대왕이 나라의 일들을 태자에게 나눠 맡기려고 장성한 찰리왕세자를 위하여 관정식(灌頂式)을 행함과 같은 자리를 관정주(灌頂住)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불자가 되고 나서 한량없는 여래의 묘한 덕을 원만하게 갖추고, 시방에 알맞게 순응하는 행을 환희행이라 하며, 능숙하게 일체중생의 이익을 잘 처리하는 행을 요익행이라 하며,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우치면서 어기거나 거절함이 없는 행을 무진한행이라고 한다.
종류마다 불법에 출생케 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삼세(三世)와 평등하고 시방을 통달한 행을 무진행이라 하며, 일체와 합동하여 가지가지 법문이 어긋나거나 잘못이 없는 행을 이치란행이라 하며, 같은 가운데 여러 다른 모양을 나타내고, 낱낱 다른 모양에서 각각 같은 모양을 보이는 행을 선현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시방허공에 이르기까지 미진을 충분히 갖추고, 낱낱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고 세계를 나타내어도, 서로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 행을 무착행이라 하며, 가지가지 앞에 나타나는 것마다 다 제일바라밀다가 되는 행을 존중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원만하고 융통하여 시방 모든 부처님의 법칙을 잘 성취하는 행을 선법행이라 하며, 낱낱이 다 청정하여 샘의 번뇌가 없고, 한결같이 진실 무위하여 본래 그대로 작용하는 행을 진실행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신통을 원만하게 갖추고 불사를 성취하고 나서 순수하고 깨끗하고 정교하고 진실하여, 온갖 장애의 시름을 멀리 벗어나게 되어 당연히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제도하는 모양이 사라져 없는 가운데, 무위의 마음을 돌려서 열반의 길로 향하는 자리를 일체중생을 구호하는 이중생상회향(離衆生相迴向)이라고 하며, 무너뜨릴 것을 무너뜨리고 온갖 벗어나야 할 것을 멀리 벗어난 자리를 불괴회향(不壞迴向)이라고 한다.
본래의 깨달음이 고요하여 깨달음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지런한 자리를 등일체불회향이라고 하며, 정밀한 진실이 밝음을 일으켜서 지위가 부처님과 같은 자리를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이라 한다.
세계와 여래를 통하여 들어가서 걸림이 없는 자리를 무진공덕장 회향이라고 하며, 부처님과 동등한 지위에 들어 지위 가운데 각각 청정한 수행원인을 내고 그 원인을 의지해서 빛을 발하여 열반의 길을 취하는 자리를 수순평등선근 회향이라고 하며, 진실한 선근을 이미 성취하고 나서 시방중생이 다 나의 본성임을 증득하고, 중생의 성품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중생을 잃지 않는 자리를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迴向)이라고 한다.
일체 법과 일치한 가운데 일체 모양을 벗어나서 일치함과 벗어남에도 집착이 없는 자리를 진여상회향이라고 하며, 진실이 본래 여여한 경지에 들어 시방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무박해탈회향이라 하고, 성품의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법계의 한량이 사라진 자리를 법계무량회향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청정한 41심을 다하고 나면, 그 다음에 네 가지 미묘하고 원만한 가행(加行)을 성취하느니라.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았으나, 그 깨달음의 경지가 나올 듯하면서도 아직 나오지 않음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울 때 그 나무에 불이 붙으려는 상태를 난지(暖地)라고 한다.
또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이 밟은 경지를 성취하였으나, 의지한 듯하면서도 의지하지 못함이,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몸은 허공에 들었지만, 아래는 미약한 걸림이 있는 상태를 정지(頂地)라고 한다.
마음과 부처가 둘이 동등하여 중도에 잘 들었으나, 마치 일을 참는 사람이 품은 것도 아니고 벗어난 것도 아닌 상태를 인지(忍地)라고 한다.
수와 양이 소멸하여 미혹과 깨달음이 중도인지 중도가 아닌지 둘 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를 세제일지(世第一地)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대보리를 잘 통달하여 깨달음이 여래와 통해서 부처님의 경계를 다한 경지를 환희지라고 하며, 다른 성품이 같은 성품에 들어가서 같은 성품도 멸한 경지를 이구지라 하며, 맑음이 끝까지 다하여 광명이 발생하는 경지를 발광지라고 한다.
밝음이 끝까지 다하여 깨달음이 원만한 경지를 염혜지라고 하며, 일체 같고 다름이 이를 수 없는 경지를 난승지라고 하며, 무위진여의 성품이 맑고 밝게 드러난 경지를 현전지라고 한다.
진여의 경계를 끝까지 다한 경지를 원행지라고 하며, 한결같은 진여의 마음을 부동지라 하며, 진여의 작용이 일어나는 경지를 선혜지라고 한다.
아난아, 이 보살들이 여기서부터 이후는 닦는 공덕을 마치고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므로, 이 지(地)를 수습위라고 한다.
자비의 그늘과 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고 있는 경지를 법운지라고 하느니라.
여래는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왔고, 이러한 보살은 열반의 흐름을 따라 행하여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 어울리는 경지를 등각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렇게 마른 지혜의 마음으로부터 등각에 이르면, 이 깨달음은 비로소 금강처럼 견고한 마음의 첫 번째 건혜지를 얻느니라.
이와 같이 겹겹이 단(單)으로 다시 열 두 자리를 닦아야만, 비로소 묘한 깨달음을 다하여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느니라.
이 가지가지의 지위마다 다 금강의 마음으로 환술과 같은 열 가지 깊은 비유를 관찰하고, 사마타 가운데서 모든 여래의 관찰 법으로 청정하게 닦고 증득하여 점차 깊이 들어가야 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다 세 가지 증진수행 법을 쓰기 때문에 훌륭하게 55위의 진실한 깨달음의 길을 잘 성취할 수 있느니라.
이러한 관찰이 바른 관찰이요, 이와 다른 관찰은 삿된 관찰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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