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왕사성에서의 교화
1. 왕사성 [마가다국 라자그하]
왕사성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당시의 인도 사대강국 중의 하나인 마가다국의 수도며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하고 가장 새로운 경향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구왕사성과 신왕사성의 둘로 나뉘어 있고 구도는 산성이라고 불리워지고 현재도 인도 최고의 석조건축으로서 그 자리가 남아 있는데 현장법사는 이 구도를 상모궁성 구사게라보라(矩奢揭羅補羅, 쿠사그리푸라) 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은 마하고빈다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신왕사성은 그 후 빔비사라왕 때에 평지에 세운 것이다. 주위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어 모두 부처님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알려져 그 이름이 유명하므로 그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판다바(白善山, 盤塗山)
② 깃쟈쿠타(靈鷲山, 祇離渠阿山)
③ 벱바아라(負重山, 倍阿羅山)
④ 이시기리(仙人掘山, 離師祇離山)
⑤ 베풀라(廣普山, 毗富羅山)
그 산의 주위에는 부처님 자취가 많이 남았는데, <대지도론>에는 그곳에 있던 다음과 같은 여러 정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① 죽원 또는 죽림정사
② 벱바라산의 칠엽굴
③ 인다살알라구하
④ 삽파손디카팝바라
⑤ 영축산
이와 같이 부처님이 있던 곳이 많은 까닭은 부처님이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지도론>을 지은 나가르주나는 말하기를 부처님은 그 육신이 난 곳과 그 법신(法身; 제일가는 진리의 몸)이 난 곳, 이 두 곳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고 하면서 왕사성을 법신이 난 붓다가야에 가까운 곳으로 들고, 사위성을 육신 즉 생신이 난 룸비니에 가까운 곳으로 들고 있다.
왕사성의 교외에는 장림이라는 숲이 있고 거기에 선주라는 이름의 체티야가 있었다. 부처님은 앞서 말한 세 카삽파 형제를 비롯하여 천명의 도중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머물렀다.
장림이란 현장법사가 전한 전설에 의하면 어떤 브라만 승려가 죽장을 가지고 부처님의 키를 재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장법사가 쓴 것을 보면 ‘죽림수조피산미곡’이라고 있으므로 역시 죽림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숲에는 선주란 이름의 체티야가 있었다는 것이다. 체티야란 천소, 천가 등으로 번역되며 대부분은 민간신앙에 의한 야차 등을 봉안한 곳이며, 또 훌륭한 사람의 무덤같은 모양을 한 것이었다. 과연 선주제지가 무엇이었던가는 잘 알 수가 없다. 이 장림에 들어온 다음 날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의 초청으로 그 왕궁에 가기 위해 왕사성의 길거리에 들어섰다.
그 광경을 불전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조복한 사람이 조복당한 사람들을 이끌고,
앞서 결발행자였던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사람이 해탈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벗어난 사람이 벗어난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사람이 해탈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생사의 바다를 넘어선 사람이 생사의 바다를 넘어선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사람이 해탈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십주 시방이시며 십법을 알고 십호를 갖추어
천 명의 비구에 둘러싸여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이 노래는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부처님의 행렬의 선도에 선 제석천의 노래라고 전해지는 노래다. 부처님 일행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앞서 장림으로 부처님을 방문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지금 또 왕궁으로 부처님을 모셔다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깊이 부처님께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왕은 부처님이 유할 곳을 물색하기에 바빴다. 성내에서 멀지 않고, 또 너무 가깝지도 않으며, 왕복하기 좋고 언제든지 가기 쉬우며 낮에는 사람들이 잡답하지 않고, 또 밤에는 훤조하지 한거하여 정사에 잠길 수 있는 곳, 그러한 곳을 왕은 물색하였다. 왕은 그의 소유인 교외의 칼란다카의 죽림원을 최적의 자리로 택하고 이곳을 부처님께 바쳤다. 칼란다카 죽림원이란 말은 칼란다카 즉 다람쥐가 방사되고 있는 죽림이란 말이다. 옛날에 다람쥐가 잠자고 있던 왕을 채치려는 독사를 물리친 데 대한 보은으로 이 동산에 다람쥐들을 방사하게 되었던 것이라는 전설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 동산에 세워진 정사를 죽림정사라고 하며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원이 되는 것이다. 이 죽림정사는 기원정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것으로 부처님이 가장 오래 체류한 곳이다. 지금의 왕사성에는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다른 遺蹟들과 더불어 죽림정사의 옛 자리는 아름답데 잘 보존되어 있다.
2. 사리불과 목련
그때 왕사성 부근에는 여러 가지 종교 단체가 있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산쟈야도 250명 가량의 제자를 이끌고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우파팃사와 콜리타라는 두 사람의 수제자가 있었다. 우파팃사는 왕사성의 동북쪽에 해당하는 나알라다 촌의 부잣집 아들이며 콜리타는 그 이웃마을의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친한 사이였다. 청년기에 이 두 사람은 부근의 산제에 참석하고 오는 길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 많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 아니냐 하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수도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산쟈야의 제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스승의 모든 가르침을 다 배웠고 이해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어, 다시 더 좋은 가르침을 구하기로 서로 결심하고 누구든지 먼저 더 좋은 진리를 알면 그것을 곧 친구에게 알려주기로 약속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날 아침 다섯 비구 중의 한 사람인 앗사지가 왕사성으로 탁발을 하려 들어갔을 때 같이 성안에 들어와 있던 우파팃사는 그 앗사지의 위의가 바른 데 그만 크게 충격을 받았다. “참으로 고상한 모습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확실히 좋은 가르침을 받고 있는 사람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앗사지의 탁발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문 밖에서 그에게 가까이 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모습은 참말로 고요하고 밝디 밝습니다. 어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십니까?”
“저의 스승은 샤카족에서 출가하신 큰스님이십니다.”
“그럼 당신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저는 이 교에 들어 온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간추려 말하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우파팃사는 크게 놀라고 또 기뻐하며, 이것이야 말로 참된 법이라고 믿고 급히 그 거처로 돌아갔다. 우파팃사는 이것을 그 친구 콜리타에게 말하고 또 250명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산쟈야의 제자들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겠다고 하고 그 스승인 산쟈야에게도 말하였다. 산쟈야는 만류하였으나 제자들은 모두 듣지 않고 곧 죽림원으로 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앗사지가 전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게의 형식으로 전하는데 매우 유명한 것이다. 물론 그 게의 형식이 앗사지가 말한 그대로가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중심 골자가 들어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게는 후대에 매우 중요시되어 법신게 또는 법사리라고 불려지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러 불전에는 이 게가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제 그것을 병기하면 다음과 같다.
법은 인에 의해 생한다.
여래는 그 인을 설한다.
또 인에 의해 멸한다.
대사문은 이와 같이 설한다.
<마하박가>
이 우파팃사가 후년에 불제자 중 가장 지혜가 밝다고 한 사리풋타이며, 또 콜리타가 나중에 그 신통력이 제일이라고 알려졌던 목갈라나인 것이다. 사리풋타는 여러 경전 중에서 대지, 속지, 첩지, 광지, 심지의 소유자라고 찬양받는 사람이다. 그러한 대지혜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간단한 게송을 듣고도 그 깊은 뜻을 능히 증득할 수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한다.
우파팃사와 콜리타의 두 사람이 250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죽림정사로 향해 오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저 두 사람은 내 수제자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이 두 사람을 제자들이 앉은 맨 윗자리에다 앉혔기 때문에 불평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부처님의 이대제자가 되었고, 특히 사리풋타는 ‘법의 장군’이라고까지 불려져 부처님 다음 가는 사람이라고까지 존숭받았다. 사리풋타는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중 자기를 부처님께 인도해 준 앗사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일생동안 앗사지가 있는 쪽으로는 다리를 뻗고 자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리풋타는 방위를 믿는 이교도라는 비난이 생길 정도였다는 것이다. 또 사리풋타 일가는 매우 부처님에 대힌 인연이 깊고 그 사형제, 삼자매가 모두 출가하여 불제자가 되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두 사람이 부처님께 귀의한 이래 부처님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왕사성의 명가의 자제로서 출가하는 사람의 수효가 점점 늘어갔다. 그 때문에 ‘고타마 스님은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아 가고, 아내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가고, 집안의 혈통을 끊는 자’라는 비난마저 일어났다. 그리하여 한 때 그 제자들의 탁발까지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으나 정법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의연한 태도에 그 비난의 소리도 점차 가라앉아 교세는 더욱 늘어가기만 했다.
부처님은 때로 죽림원의 정사를 나와서 왕사성의 동북에 있는 영축산에 올라가 그곳에 있는 돈굴동에 머무는 일도 있었다. 사리풋타의 숙부인 디가나카라는 분은 그 당시 이름 있는 다른 종교의 수도승이었는데 그 조카 사리풋타가 불제자가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대체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려고 부처님을 방문하였다. 그는 부처님 앞에 나타나자 먼저 “나는 일체의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하고 그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말하였더니 부처님은 “당신은 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크게 깨달아 부처님께 복종을 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주의주장에는 일체를 긍정하는 것과, 일체를 부정하는 것과, 일부를 긍정하는 것과,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있으나, 이 중 일체를 긍정하는 견해는 탐욕과 계박과 집착에 가깝고, 도 일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또 그 견해에 크게 집착하는 까닭에 적이 생기고 장애가 나타나므로 이 두 견해는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나중에 부처님이 돌아간 뒤 교단의 통솔자가 된 마하카삽파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마하카삽파도 마가다국 마하팃타촌의 부유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말재주가 있으며, 늘 출가해서 수도자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밧다카필라니라는 처녀와 결혼했던 것인데 결혼 후에도 둘이 서로 깨끗한 독신 생활을 그리워해 부처님이 성도한 바로 그 날 다 같이 출가하고 유행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한다. 어떤 날 카삽파는 나라다촌으로 가는 길가의 어떤 탑 옆에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어쩐지 마음이 끌려 그 뒤를 따라 죽림원까지 가서 거기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처도 나중에 마하카삽파를 만나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일찍이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아시타선인은 고타마의 상을 보고 그 성불을 예언한 바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 성불하는 날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을 슬퍼하여 그 조카 나라다에게 뒷일을 맡기고, 성불하는 날에는 꼭 자기를 대신해서 부처님을 찾아보고 그 가르침을 받으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다. 나라다는 이제 부처님이 성도한 것을 알고, 죽림정사로 가서 부처님을 만나도 그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나라다가 출가하게 된 동기를 불전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설명해 주고 있다. 나라다가 부처님을 찾아왔을 때 용왕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났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갠지스강의 복판에 아름답게 입은 두 딸을 서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은알을 담은 금바리와 금알을 담은 은바리를 들고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수수께끼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용왕은 선포하기를 그 노래의 뜻을 아는 자에게는 딸과 금은을 다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다는 몰래 부처님에게 그 뜻을 풀이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 의미를 알아 용왕에게 대답해주었다. 그로 인하여 용왕은 정말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나라다는 곧 출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다는 부처님이 돌아간 뒤까지 살아남아 파탈리푸트라의 문다왕이 애비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제자는 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제자들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인도의 수행자들이 옛날부터 해 내려오던 식으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도 여러 지방을 편력하면서 수행과 포교를 계속하였다. 부처님은 죽림정사를 나와 영축산에도 올라가고, 또 왕사성 남쪽의 남산에도 가는 등 여러 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아직 마가다국 밖으로는 나가지를 않고 있었다.
또 이와 같이 비구의 수가 많아지게 되면 자연히 공동 수도 생활의 통제상 여러 가지 규칙이 만들어지기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의 집단인 상가의 비구들이 지킬 계율이 제정되어 갔다. 처음에는 부처님이 가르친 생활상의 대원칙인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맑혀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로 충분하던 것이 점차 외부적인 구속적 계율로 발전해 간 것이다.
먼저 새로 들어온 비구들은 각각 일상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감독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을 정할 것이 규정되었다. 물론 최고의 스승이 부처님인 것은 사실이지만 옷 입는 법, 식사하는 법으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일상적인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같이 가르쳐 주는 스승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도 처음에는 삼보에 대한 귀의를 선언하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점차 복잡화해 갔다. 그것은 많은 귀의자들 가운데에 혹시 결심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3. 샤카족 사람들의 출가
태자가 성도하여 부처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벌써 카필라성에 다달았다. 그 아버지 숫도다나는 사신을 보내어 부처님이 귀성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사신은 부처님을 만나자 그 사명을 잃고 그냥 출가하여 그 제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부처님도 고향으로 찾아가 그가 깨달은 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숫도다나왕은 마침내 부처님의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이며 재간이 좋던 카루다이를 부처님에게 보냈다. 카루다이도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을 만나 그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귀성하여 고향의 모든 사람들을 교화해 줄 것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비구들을 이끌고 카필라성의 교외에 있는 니그로다 나무의 숲으로 들어갔다.
불전에는 이 때에 부처님이 샤카족 사람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일들을 나타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원래 샤카족 사람들이 인종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퍽 교만했던 사실을 들어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 날 비구들을 데리고 성내에 들어가 집집을 돌면서 탁발을 하였다. 사람들은 놀라서 이 사실을 궁전에 보고하였다. 왕도 크게 당황하여 몸소 달려나와 부처님 앞에 서서 “어째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고 하오. 당신의 집에서는 이만한 사람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오?”하였다. 부처님은 “나는 다만 조상의 법을 지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왕은 “무엇이라고? 당신의 조상은 마하삼마타왕 이래로 아무도 걸식을 한 사람이 없소”하였다. 부처님은 조용히 “왕이시여, 그것은 당신의 왕계입니다. 제 가계는 부처님의 가계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탁발로써 목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붓다의 법이 방일을 떠나고 악을 피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한결같이 안락한 것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길 위에서 숫도다나왕의 마음은 활짝 열렸다. 크게 기뻐하는 왕은 부처님의 바리를 들고 비구들과 더불어 부처님을 궁전으로 모셔가 그 날의 식사를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마음의 싸움의 승리자다. 그는 진리의 왕자다. 세속의 왕과 출세간의 왕과의 사이의 대화는 출세간의 승리, 진리의 승리로 나타났다. 위에 적은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한 바가 있는 것이다.
식사를 끝낸 뒤 부처님은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를 데리고 후궁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야소다라비는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부벼대며 예배를 드렸다. 불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조용히 비를 내려다보고 머지않아 그에게도 출세간의 광명이 비쳐 올 것을 믿으면서 자리에서 물러나왔다고 한다.
다음 날은 부처님의 이모제인 난다의 혼인날이었다고 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혼인날이 아니고 그때 이미 난다는 혼인을 하고 난 뒤가 아니었을까 의문을 품는 이도 있으나 그것은 지금 분명치 않다. 여하튼 난다가 어떤 미모의 여인에 마음이 끌려 있던 것은 사실인 모양 같다. 부처님이 다시 성내에 들어와서 궁전으로 가 출영 나온 난다에게 바리를 주고 그냥 궁전을 나와 성문을 거쳐 그가 거하던 숲으로 돌아갔다. 인도에서는 유행자에 대하는 태도로서 어떤 사람이 유행자의 바리를 받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난다는 할 수 없이 바리를 손에 들고 부처님 뒤를 따라 성문을 나서 부처님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니 난다에게는 출가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난다는 그가 스스로 원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우 불만스런 심경이었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환속을 할 수도 없고 그리하여 난다는 세속의 욕심을 좇아 번민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난다의 심경을 이해하고 그를 적당히 가르쳐 마침내 출가의 참된 목적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이 카필라성에 돌아온 지 칠일 째 되는 날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또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성에 들어가자 고루에서 야쇼다라비는 그때 일곱 살난 라훌라왕자를 창가로 불러 “저기 저분, 뭇 별들 가운데서 달처럼 빛나는 분, 저 분이 네 아버지다. 가서 유산의 상속을 주도록 말씀드려라.” 이렇게 말하였다. 왕자는 그 어머니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급히 계단을 내려와 거리로 나와 비구들 사이를 헤치고 부처님 앞으로 닦아서 그 소매를 붙잡고 유산을 상속시켜 달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뒤돌아 자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이 애는 아버지에게 세상의 재보를 구하고 있으나 그 재보는 정처없고, 고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오히려 내가 보리도량에서 얻은 내 무상한 보배를 주어 세속을 초월한 유산을 상속시키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제자 사리풋타를 불러 라훌라를 숲으로 따라오게 해서 출가를 시켜 사미로 만들었다. 부처님의 교단에서 나이 어려 출가한 사람 즉 사미는 라훌라 왕자가 최초다. 사미란 ‘삼마네라’라는 인도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인데 ‘삼마나’ 즉 사문이 될 사람이란 뜻으로, 출가는 했지만 아직 비구들이 받는 계 전부 즉 구족계를 받지 않아 온전히 비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슛도다나왕은 부처님이 돌아온 후 아침에는 아들 난다를 빼앗기고 저녁에는 손자 라훌라를 잃어 비통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 어린 손자를 잃은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왕은 부처님을 만나서 앞으로는 부모의 허락 없이는 자식을 출가시키지 못하도록 금해 주기를 간청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부처님의 제가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좇음에 있어서 출가란 형식이 필수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악마의 함정에서 벗어나 그 지배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출리, 이탈, 포기가 필연적인 일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가족을 버리고 세속의 모든 생활관습을 버리고 출세간의 길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은 얻기 위함이고 이탈함은 포섭을 위함이다. 머지 않아 법열이 경험되는 것이다.
“백의라 할지라도 사문의 청정한 율의를 봉지하고, 거가에 처한다 할지라도 삼계에 착하지 않고, 처자 있음을 나타내도 항상 범행을 닦으며, 권속이 있음을 나타내도 항상 원리를 좋아하며, 보식을 복한다 할지라도 상호로써 몸을 단장하고, 또 음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선열로써 맛으로 삼고, 만약 단혁희처에 이르려면 곧 사람을 제도하고 여러 가지 이도를 받지만 정신을 훼손시키지 않으며, 세속의 전적에 밝을지라도 항상 불법을 즐긴다.”
이것은 유마거사의 경지다. 그것은 세간과 출세간이 다르지 않은 생활의 경지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세간을 거역하는 비극을 희생적으로 겪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후 라훌라는 수행의 고통을 맛본다. 어떤 때에는 잘 자리가 없기때문에 부처님이 쓰는 뒷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도 있었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한 교훈의 말씀들을 보면 라룰라는 장난삼아 거짓말을 잘하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이고 이런 버릇을 없애기 위해 부처님은 망어하지 않는 것이 사문의 법임을 강조하였다고도 한다. 라훌라를 불전에서 ‘학족제일’의 제자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부에 열중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와 잠시 성 밖의 숲에 머물러 있었으나 고향사람들의 교화를 끝내고는 다시 왕사성으로 돌아가려고 말라족이 사는 아누피야라는 곳까지 갔다. 샤카족 중의 젊은 유명한 사람들이 이곳까지 쫓아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중에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마하나마와 아누룻다라는 형제가 있었다. 마하나마는 그 동생을 보고 “우리 종족에서 부처님이 나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아 출가를 하였으니 우리들도 출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아누룻다는 그 말에 느끼는 바 있어 출가할 결심을 세우고 그 뜻을 어머니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좀처럼 승낙을 하지 않고 “만약 밧디야 칼알리고다풋타가 출가를 한다면 너도 출가해도 좋다”고 대답을 회피하였다. 아누룻다는 밧디야에게로 가서 그로 하여금 출가할 마음을 먹게끔하고 더 나아가 아난다, 바구, 킴빌라, 데바닷타의 출가를 권유하고 또 이발사 우팔리를 데리고 부처님 뒤를 쫓아갔다. 국경을 넘어서자 그들은 몸에 매달았던 금환보식을 다 떼버리고 이것을 우파리에게 주어 귀국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발사 우파리는 “만약 내가 이런 금은보식을 가지고 혼자 나라에 돌아가면 나는 공자님들을 죽인 사람처럼 오해를 받아 혹은 죽음을 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공자님네들도 출가를 하신다니 저도 출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귀국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우파리는 공자들의 뒤를 따라 부처님을 만나서 그의 출가를 허용해 주기를 빌었다. 그때 공자들은 “우리 종족에는 교만이란 좋지 않은 버릇이 있으니 저희들에게 오랫동안 심부름을 해온 이 우파리를 제일 먼저 출가시켜 우리들의 교만한 마음을 부숴 주십시오”하고 부처님에게 탄원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 일곱 사람의 새 출가제자가 생긴 것이다.
밧디야는 ‘카알리고다’라는 부인의 아들인 것을 그 이름으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부처님과 어떤 관계의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전에 ‘귀성제일’이라고 한 것을 보면 샤카족의 아주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누룻다는 ‘천안제일’의 제자라고 불리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에도 머리맡에 있었던 분으로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언젠가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에 깜짝 잠이 들었다. 깊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그는 그 후 줄곧 잠을 자지 않아 안질이 생겼다. 부처님의 전교를 도운 공로가 크다. 킴빌라도 샤카족 名門의 출신인 것은 분명하나 부처님과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출가 후 특히 아누룻다와 난디야와 의좋게 지내며 수행한 분이다. 코삼비국에서 비구들 사이에 쟁론이 벌어졌을 때도 이 세 사람만은 숲속에 있어 수행에 전념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이 있다. ‘독처정좌, 전의염도’란 찬사를 받은 사람이다.
바구도 역시 샤카족 명문의 출신인 것이 분명하다. 수행 중 자기가 태만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방을 나가려고 하다가 넘어져 이를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너무나 유명한 분이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한역경전에서는 대개 데바닷타의 형제라고 하고 있다. 마음씨가 곱고, 퍽 사람들에게 친절한 위인이었다. 나중에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25년 동안 한결같이 부처님을 모셨다. 또 매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부처님 곁에서 들은 말씀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어 최초의 불전결집 때에는 경의 송출자가 되어 법의 장이라고 불리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 친절하고 착하여 남의 걱정만 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자기 자신의 증오가 늦어져 부처님이 돌아간 뒤에도 도를 이루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부처님의 유골을 받들고 울면서 사위성을 나와 왕사성으로 돌아와 아난다는 그 제자인 밧지풋타로부터 몹시 매도당한 뒤 크게 노력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 돌아간 뒤에는 마하카삽파와 더불어 교단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다. ‘다문제일’, ‘정념제일’, ‘행지제일’, ‘근시제일’이라고 부리운다.
데바닷타는 한역경전에서는 대체로 아난다의 형제라고 하고 있으나 팔리 경전에서는 야쇼다라비의 오빠라고 하고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물로서는 상당히 위대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긴요한 종교적 묘체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엄격한 계율주의로 기울어져 있었다. 부처님은 물론 일방적인 계율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점을 부처님은 안타까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명리에 눈이 어두워 부처님에게 반역을 감행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 추종자는 남아 있었던 모양 같다.
끝으로 우파리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샤카족 명문 인사들에게 봉사해 온 이발사였다. 불제자가 된 후 그는 늘 새로운 출가자들의 삭발체두에 종사했으므로 그때마다 부처님이 설하는 계율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일결집 때에는 계율의 송출자가 된 교단 유일의 법률가였던 사람이다. ‘지율제일’이라고 불려지는데, 그 뜻은 계율을 기억수지 하기가 제일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많은 제자를 고향에서 얻은 뒤 다시 왕사성으로 돌아갔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