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기지아동(箕指我東)
맹자가,
“기자·교격·미자·미중·왕자비간이다.”고 했는데,
분명히 기·미·왕은 땅 이름이고, 자는 작(爵)의 칭호요, 교격·미중·비간은 이름이다.
맹자는 또, “교격은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사람들 틈에서 등용되었다.” 했는데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함께 지적한 것을 보면 이는 해변을 가리킨 것이니, 그가 과거에 서민이었던 까닭인가 보다.
은나라의 제도는 왕의 아들일지라도 그를 먼 곳으로 보내어 민간의 고통을 체험하게 한 일이 있으니, 무정(武丁)의 사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자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을 줄 어찌 알 수 있으랴?
기(箕)라는 나라는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분야로 따진다면 우리나라가 기와 미의 지점에 해당되고 서쪽 지역이 기의 위치가 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단군 왕조의 말기에 기자가 이 기성의 지점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봉작을 받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고기 잡고 소금 굽는 바다.”라는 것이 무엇을 지적하여 말했단 말인가?
또 기가 다른 지방이라면 어째서 자기가 봉작을 받은 곳을 버리고 그 칭호를 사용했겠는가? 은의 역사에서 쓰여진 칭호는 봉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봉작을 받기도 전에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주 나라가 멸망하기 이전에 벌써 기자의 교화 은택을 받았던 것이다.
태미천시(太微天市)
하늘의 성좌에는 세 곳의 원이 있다.
자미원 이외에 또 태미와 천시가 있어 이들이 한곳에 나열되어 이를 삼원이라 한다.
어째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자미는 임금의 궁중, 태미는 행정을 담당하는 정부, 북두는 그 중간을 가로질러 명령을 출납하는 임무를 맡는데, 삼태가 이를 보좌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쓰임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용도의 빈번과 물자의 출입은 시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시장이란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다.
존귀한 천자도 부는 물자에 의존하는 것이요, 국가의 성쇠와 인간의 죽고 삶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성문(星文)이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면 사람들은 힘써 재물이 모일 것을 알게 된다.
그 동쪽과 서쪽의 원은 각기 11개의 별인데,
동원은 송·남해·연·동해·서·오·월·제·중산·구하·조·위요,
그 서원은 한·양·초·파·촉·진·주·정·진·하간·하중이다.
《주역》 서합괘(噬嗑卦)의 상에,
“천하의 사람을 모으고, 천하의 물자를 모아서 서로 교환하여 각기 자기의 생활을 누리게 한다.” 한 것이 대체로 성문에서 뜻을 생각해 낸 것이다.
도성(都城)
맹자는, “3리의 성, 7리의 곽”이라 하였다.
성을 굳게 지키려 한다면 넓은 것은 매우 곤란하다.
한퇴지(韓退之)가 말한 것처럼,
“줄을 맞잡고 잡아당기면 반드시 끊어지는 데가 있다.” 한 것은 좋은 비유다.
줄이 아무리 질기다 할지라도 십척 백척 정도로 긴 것을 가지고 잡아당긴다면 끊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서울의 성이나 고려의 개성은 전후하여 천 년 가까이 되는 동안 외부에서 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 한번도 앉아서 지켜본 적이 없었으니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송나라의 변도 같은 곳은 튼튼하고 완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까지 모두 이강(李綱)을 비난하고 충사도(种師道)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으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야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령 성이 견고하고 병졸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의 8~9할이 축적된 식량이 없고 아침에 벌어 저녁에 먹고, 오늘 마련해야 내일을 살 수 있는 사정이라면 그 많은 남녀노소를 정부가 모두 식량을 공급하여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며칠을 가지 못해서 굶주림과 아우성이 일어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성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마침내 성을 도저히 지켜내지 못하게 된 뒤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을 버릴 것을 계획한다면 임금을 적에게 그냥 내어 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종전의 예로 보면, 난리를 만나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른 때에 더러는 성문을 닫아버리어 남아 있는 백성들을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또 아무 세력도 없는 대신을 임명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이라고 해 놓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라에서 내버리는데 저 병졸도 없는 외톨박이가 무슨 재주로 허물어진 판국을 수습하겠는가?
당 명황이 피난길을 떠날 때 백성들을 모두 주작교(朱雀橋)까지 건네주었으니, 지난 일은 그만두고라도 백성을 건네주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게 된 것이다.
당이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당시의 선심을 베푼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 때 홍두적(紅頭賊)의 난에 공민왕이 복주(福州 안동의 옛 명칭)로 피난을 가면서 경성의 부녀자와 늙고 어린 사람들을 먼저 성 밖으로 내어 보냈으니, 후대에 성문을 닫고 자물통을 채운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겠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태조가 처음에 도성이 지나치게 큰 것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은 평화시에 안팎을 방호하기 위한 것이요, 비상시에까지 결사적으로 여기를 지키고 버리지 않겠다는 계책이 아니었을 것이다.”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일광도사(日光倒射)
해는 양이요, 달은 음이다.
음은 양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해가 낮에 운행하면 달이 밤에 밝게 된다.
해가 아니면 달은 밝은 빛을 낼 수 없다.
달 자체는 본시 어두운 것인데 햇빛을 빌어서 아래로 비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면, 물통이 땅바닥에 있는데도 햇빛이 물에 비치면 물 속의 광선이 집안 들보에까지 비친다.
이는 물의 광선이 아니라 곧 햇빛의 반사이다.
한 해를 두고 말한다면 겨울은 물에 속하여 음이고, 하루로 말한다면 밤이 물에 속하여 음이다.
겨울에 추위가 살을 에어 내는 듯 하지만 불이 따뜻하게 해주고, 밤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지만 불빛이 밝혀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따뜻한 방에서 등불을 밝히고 앉아서 나도 모르게 기쁨을 느낀다.
지도묘사(地圖描寫)
지도를 그리는 방법도 선비의 학문으로서 몰라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세밀하여 그리기 어려운 것이라도, 엷은 종이에 들기름칠을 하거나 또는 양초를 녹여서 바르고 투명하게 해놓고 붓을 대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원지도에다 가로와 세로 선을 그어서 간격을 그려 구역을 설정해 놓고 또 다른 종이에다 간격을 고르게 그려 놓고, 멀고 가까운 거리와 크고 작은 모양을 하나하나 원형대로 그리면 된다.
이렇게 하면 큰 것을 축소 시키기도 하며, 작은 것을 확대시킬 수도 있고 서로의 거리도 그 구역에 따라 알아내게 된다.
월리필(月麗畢)
달이 별을 따르는 것이 바람과 비와 관계가 있다.
《시경》에, “달이 필성(畢星 28수의 19번째 별자리)에 걸쳤다.”는 것이 그 예다.
내가 겨울에 시험해 보니, 달이 미처 필성에까지 가지 않았는데도 먼저 눈이 내렸다.
아마 달이 위성이나 묘성(昴星 28수의 18번째 별자리)의 자리에만 가더라도 그것이 눈이 내릴 징후라고 봐도 될 듯하다.
천문기상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참고하기를 바란다.
염지(鹽池)
《금사》 식화지(食貨志)에,
“임황 북쪽에 큰 소금 봇도랑이 있고 오고리 석루부에는 소금 못이 있는데, 모두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먹기에는 충분하다.” 하였다.
중국은 산간이나 육지에 간 곳마다 소금이 생산되는데, 우리나라만은 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고 바닷물의 맛이 짜기 때문에 그대로 구우면 소금이 된다. 짠 것은 다섯 가지 맛 중의 하나다.
천지 사이에는 본래부터 짠 것이 있게 마련이므로 바다와의 거리가 먼 곳에는 그 기운이 새어 나와서 못도 되고 우물이 솟아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는 것이 도리어 당연하다. 귀산(龜山)의 소에,
“이절 지방에는 가난한 백성이 일년내내 소금을 먹어 보지 못하여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못하면 병이 난다.” 하였으니, 이곳에 소금 못이나 소금 우물이 모두 없다는 얘기다.
이런 것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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