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백두정간(白頭正幹)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철령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은 여러 산맥이 모두 서남쪽으로 줄달음쳤다.
철령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서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본 줄기이고 그 중간에 있는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갔으니, 이것은 풍수학에서 말하는, ‘버들가지’라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오동나무 잎에는 반쪽 씨가 달리고, 버들가지 끝에는 알맹이가 맺는다.”고 하였으니,
그 알맹이의 위치는 영남 지방에 해당 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안동과 예안 사이를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태백산·소백산 이상의 산세가 이러하므로 물이 모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영남 지방만은 동래와 김해를 좌우로 싸고돌아서 문막이가 되었다.
이것은 곧 산이 끝난 곳에 물이 합류된 형국으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흔적 없이 제거된 것이다.
왼쪽으로는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산의 큰 산맥과 더불어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같이하였다.
거북과 자라, 용과 물고기들이 생산되며 모든 물자가 번식한다.
그러므로 무한한 인재가 양성되었다.
밖으로는 일본으로 돌아간 큰 산맥이 남으로 또는 서로 뻗어가면서 물의 어구[水口]를 안고 돌아 산맥이 뛰어 건너가서 작은 섬 큰 섬들이 형성되었다.
오른쪽 산맥은 지리에 이르러 끝났는데, 그 상태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온 듯이 웅장하고 기운차서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
태어난 인물로 말하면, 고려 이전까지는 문화가 미개해서 무지함을 면치 못하다가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중국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퇴계가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계통을 받은 인물들이 깊이가 있으며 빛을 발하여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학이 찬란하여 수사의 유풍을 방불케 하였고, 남명은 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후계자들은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어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위험이 닥쳐온다하여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여 독립적 지조를 가졌다.
이것은 영남 북부와 남부의 다른 점이다.
그 일직선의 큰 산맥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이 되었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에 이름을 붙인 것도 의미가 있었던 듯하며 인물이 산출된 것으로 보아도 이 지역이 인물의 창고라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에서 의존할 수 있는 힘을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위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았으므로 물고 뜯고 하는 판국에서도 나라를 유지하다가 진나라는 삼세 때에 가서야 망했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간모시(竿旄詩) 한 편이 많은 인재를 양성한 데에 기인한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 가야가 조그마한 나라였으나 고구려와 백제가 아귀다툼을 하는 틈바구니에서도 버티어 나갔고 오랜 세대를 이어 나갔으니 그 사정이 매우 비슷하다.
천만 년의 역사가 지난 뒤에 국가가 위태로운 국면을 당할 경우라도 전략자가 여기에서 나올 것이며 충절도 여기에서 나올 것이다.
이는 장담하고 기다려도 틀림없을 것이다.
35. 모두(旄頭)
김 참판의 《퇴식기문》에,
“만력 원년부터 묘성의 별 하나가 나타나지 않아 지금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만력 원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반드시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일 것이다.
묘성이란 모두라고도 하는데, 곧 오랑캐를 상징하는 별이다.
“그 별이 뛰노는 것처럼 꿈틀거리면 오랑캐가 대규모로 습격해온다.”고 하나, 변동하는 세태와 맞추어 보면 들어맞지 않는다.
《상위고》에는 또
“빛이 어두우면 형벌을 함부로 행사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들어맞는 듯도 하다.
그러나 천하가 넓은데, 중국 지역 한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만으로 천문을 맞 출 수 있으랴?
현재는 별 일곱 개가 다 잘 보이는데, 근자에 형혹(熒惑 화성을 재화나 병란의 징조로 보여주는 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 옆으로 스쳐가더니, 곧 제자리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상하다.
36. 부열(傅說)
부열은 별 하나로 되어 있는데, 미성의 뒤에 위치한다.
임금의 후궁, 무당 또는 기도드리는 축관을 상징한다.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것을 축원하는 대상의 별이다.
그러므로 왕후가 궁중에서 제사를 드려서 자손을 축원하는 일을 관장한다.
《시경》에,
“정성들여 제사를 올려 아들이 없는 것을 면케 한다.” 하였으니,
옛사람들의 행사로 되어 있다.
정협제(鄭浹漈)는 부모라는 의미의 부로 해독했는데, 후세에 이르러 그 음이 같기때문에 기미를 탄다는 얘기가 나왔다.
내 생각에는, 황제는 중앙의 신이요 헌원은 곧 황룡으로 다섯 가지 짐승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중앙의 신에게 제사드릴 때 헌원을 함께 모시고 그 별 이름을 헌원이라 한 것이니, 그것은 곡물의 신에게 제사드리면서 후·기(后棄)를 함께 모시고 사직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혼의 예절은 은 왕조에서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니,
“제을(帝乙)이 누이 시집 보낸다.”는 말이 《주역》에 나와 있으며,
“흰 말이 나르는 듯 한다.”는 말로도 증명이 된다.
은 왕조에서 혼인의 예절을 마련하고 궁중에서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의식을 대신이 주관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 부열을 혼인 중매하는 신으로 삼고 그 별에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독단적인 억측은 하기 어려우나 ‘중매하는 신’으로만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37. 석굴(石窟)
석굴로 기이하게 생긴 것은 상원의 가수굴, 울진의 성류굴, 영원의 석룡굴이 가장 저명하다.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옥천에서 사냥꾼이 이상한 짐승을 발견하고 이를 추격하는데, 짐승이 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까스로 몸을 굽히고 안으로 들어가 본즉,
아래로 내려가다가는 다시 위로 올라가고 올라가다가는 다시 내려가기를 두어 마장쯤 가서 안이 활짝 넓어졌는데, 환하게 트이어 각종 물체 모양이 없는 것이 없었으며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끝이 없었다 한다.
보성 오봉산 밑에도 굴이 있는데,
절의 승려 여덟 명이 약속하고 함께 관솔불을 켜 들고 새끼로 길을 표시하면서 들어가다가 속이 너무 깊어서 무서워 더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으나 깃발·칼·창·전투용 배 등 없는 물건이 없었다 한다.
38. 서관(西關)
서관은 3대의 조선 왕조의 터다.
산물이 풍부하고 주민이 많으며 산과 물이 서로 싸고 둘러 있고 선박이 사방에서 들어온다.
평양은 그 중심지이다.
우리나라의 서관은 중국의 연경과도 같다.
연경을 장성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잠시라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내삼관이란 거용관·자형관·도마관이다.
가까이 있기는 하나 모두 험준하여 통과하기가 어렵고 사방으로 방어하며 전쟁 또는 수비의 준비가 생활화하다시피 갖추어 있으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는 모두 그것과 반대 현상을 이루고 있어 절령을 넘어선 다음부터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중세 이후로 천하의 전쟁이 언제나 동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서북 2도는 마침내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명 태조가 철령위를 설치하려다가 우리의 사신이 말을 잘하여 중지된 일이 있는데, 이 사실이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아서 그 설치하려던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절령을 경계선으로 해서 북도(함경도)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리라.
만일 압록강 북쪽 지역이었다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끊임없이 진정했겠는가?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가 조서 안에 장정(長定)과 고화(高和)라는 구절이 있는 것만 보고 이것이 바로 철령 밑에 있는 수 개의 고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정과 고화는 지금의 영흥·안변 등 지역이니 중국 영토와는 험준하고 막혀 있는 파저강과 장령을 사이에 두고 있다.
명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천 리 길을 넘어와서 이 수 개의 고을을 관찰하려 했겠는가?
그 지역 안에 있는 70여 개소의 역은 고 황제가 직접 지정하였으며, 철령위라고 한 것은 가장 먼 곳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서에 또,
“본래 개원(開元)에 속했다.” 하였으니,
개원은 요의 땅에 있다.
저 철령이 어째서 우리 서관을 버리고 멀리 떨어진 개원에 속했는가?
요의 지역에도 철령이란 명칭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우리 함경도의 철령인 줄로 생각하고 이러한 착오가 생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차근차근하지 못한 점이 대체로 이러하다.
39. 삼원갑자(三元甲子)
삼원갑자는 예부터 오늘날까지 술가에서 기본으로 삼고 내려온 것이니 틀릴 까닭이 없다.
김 참판(金參判)은,
“태을력에 보면 ‘제원 갑자에서 천계 갑자까지가 1천 15만 5천 5백 41년이라’ 하였고, 소자의 《경세서》에서는, ‘천지가 개벽 된 갑자에서 6만 8천 6백 41년이라’ 하였고, 《태을육기》와 《자백비둔수》로는 ‘육기 하원갑자(六紀下元甲子)라’ 하였고, 《경세서》에는 ‘오회(午會) 제9세(世) 5기(紀) 중원갑자라’ 하였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책에 대하여 익숙하지 못하고 또 그 책이 현재 없기 때문에 그 옳고 그름을 고증할 수 없으나, 율력지를 가지고 참고한다면, 《춘추》 이후에서 《강목》 이전까지의 연대 수가 맞지 않는다.
혹은 중간 몇 해 동안이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산출 해 본즉, 갑자년 자월 갑자일 자시의 11월 초하루 밤중이 동지라고 가정하면 4천 5백 60년이 지나야 한바퀴 돌아오게 된다.
옛 역사에 보면, 인황씨가 4만 5천 6백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또 그 수에다 10곱절을 한 것이다.
그 이치를 알 수 있으며 또 하늘과 땅의 숫자가 12회 12만 9천 6백만 되겠는가?
술가들이 숫자적으로 들어 맞추고 연결시켜 가지고 시도한 숫자에 불가할 것이다.
12회 이외에 또 얼마나 많은 무한한 수가 있을지 모른다.
선통·구두니 뭐니 하는 등등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생각건대, 형체가 크면 수명도 오래간다.
가장 작은 벌레는 아침에 생겼다 저녁에 죽고 봄에 생겼다가 가을까지 가지 못하는 것도 있으나 사람은 백 살까지도 사는 수가 있고 나무의 크기는 사람의 수십 배에 달하는 것도 있고 수명도 수천 년까지 간다.
땅의 두께가 3만리 인즉 인간과 비교해 볼 때에 어떠한가?
태양은 땅의 몇백 배나 되며 하늘은 또 태양의 크기에 비한다면 숫자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원(元)이라는 것은 곧 하늘의 극히 짧은 시한에 불과하다.
아!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매문정(梅文鼎)의 역학의문(曆學疑問)을 보니, 그 학설이 같지 않은 곳이 있다.
다시 상세히 고찰하려 한다.
40. 태을술(太乙術)
태을 육임(六壬)의 방법은 장량(張良)의 《적정경》에서 나왔다.
괴벽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 방법을 전수하여 간혹 맞히는 수도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전한다.
나는 본시 이런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인조 갑신년(1644)에 심기원의 일당인 권두창(權斗昌)이란 사람이 특이한 재주를 지녀서 세상에서 관중과 제갈량이라고 하였다.
태을의 수로 추측해 보고
“이해에 천하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반란 사건이 비로소 평정된다.” 하였는데, 이해에 명 왕조가 망하였으나, 제가 어떻게 이것을 알아냈겠으며, 또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넓은 천하에 수억만 개가 되는 나라와 지역에서 어떻게 큰 숫자만 가지고 추측해 낼 수 있겠는가?
명 왕조가 망한 것이 우연히 이 시기에 들어맞았을 뿐이다.
남단과 북단, 극동과 극서의 운명이 반드시 다 같을 이치가 없을 것인즉, 결국은 아무 소용이 닿지 않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나의 할아버지 지평공(持平公)께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공자의 옷을 입고 공자의 말을 말하는가? 내가 보니 권두창은 눈이 단정한 듯하면서도 간사스럽고 얼굴은 근엄한 듯하면서도 애교를 부리고 말은 엄숙한 듯하면서 편협하고 모든 일에 옛날 경전을 인용하면서 성질이 못되었고 바르지 못하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 훌륭하다고 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을 듣는 사람이 공에 대하여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그가 처형을 당하게 되자 모든 사람은 비로서 탄복하였다.
41. 재상(灾祥)
혜성과 패성은 다 같은 뜻으로 쓴다.
그런데 《춘추》에 패(孛)라고 쓴 것이 세 번 있는데, 《공양전》과 《곡량전》에서는 모두 혜성이라고 풀이하였다.
후대의 역사에서는 혜라고도 쓰고 패라고도 썼는데, 패란 다만 떠돌이별의 종류다.
혜(彗)라는 이름은 본시 불길한 것을 쓸어버린다는 뜻으로 생긴 것이니, 이익은 있고 해는 없다.
이익이 있다면 상서로운 것이며, 해가 있다면 불길한 것이니, 어찌하여 불길한 별이라 할 수 있는가?
은 나라 때에 상곡(桑穀)을 상서로운 것이라 하였으니, 상곡이 난 것을 보고 상서롭다고 풀이한 것은 그것이 재난을 예고하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재난임이 아니다.
재난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상곡이 나타났으니, 그것을 상서롭게 여기는 것은 재난을 미리 발견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다행스럽다 하면 이로 인하여 재난을 퇴치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적으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사스러운 물건이 덕있는 사람을 이겨내지 못한다.” 하는 말은
곧 이로 인하여 덕을 닦아서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재난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둑이 오는 것을 보고 개가 짖을 때 그 개를 요물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난이라 하는 것은 물건을 해친다는 뜻이다.
가령 한재가 들 때 초목이 타고 천화(天火)가 성하면 물건이 탄다든가, 메뚜기·딱정벌레·물여우 같이 생물을 해치는 것들이 모두 재난에 속한다.
그렇다면 은나라 임금이 두려워하고 반성해서 나타나지 아니했을 때보다 더 조심한 것인데, 후세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르고 재난을 상서로 풀이하여 정의를 내린 것이 서로 뒤바뀌게 되었으니 우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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