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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단기강역(檀箕疆域)

순(舜)이 처음으로 12개의 주(州)를 설치하고 12개의 산을 봉하였으며, 또 12개의 목(牧)을 임명할때 유주도 그중의 하나 였다. 


《한서》 지리지에 보면, 
 “유주에는 그 산이 의무려(醫巫閭)이며 그곳에서 해산물과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하였으니, 이곳이 지금의 요양과 심양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단군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니 12개의 주를 설치할 때는 벌써 건국한 지가 백 년이 넘었다. 
그 영토의 경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자가 계속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의 후손인 조선 후의 시대에 와서 연과 힘을 겨루었는데, 연이 그 서쪽 지역을 공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정함으로 인하여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으니,
 연에서 동쪽으로는 본래 땅이 얼마없은즉 만반한은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만은 만주요 반은 심이 잘못된 것이다. 
압록강 밖에서 산해관까지의 거리가 천여 리에 불과하니 연에게 빼앗긴 지역은 요양과 심양이 아니고는 다시 그에 해당한 지역이 없다. 
 그렇다면 단군 시대에 벌써 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간 것이니, 우리나라가 미개 사회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순도 본시는 동방 민족이었으니, 저풍(諸馮)과 부하(負夏)는 모두 동방 9개 종족 중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기자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나 연과 국경이 연접되었고, 고죽(孤竹)이란 나라의 유허도 그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요순시대부터 중국 내지와 같이 다루어 왔고 단군·기자, 백이·숙제의 교화가 이루어졌으니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여기만한 곳이 없었다.
지금 압록강 이외의 지역은 지리적인 조건이나 인간관계로 보아 다시 합할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만들게 되어 영토의 일부가 완전히 없어지고, 일부 지역만을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문명의 전통인 옛 문화를 잃지 않고 있으니, 그런대로 천지간에 한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48. 수세대운(水勢大運)

황하와 양자강은 중국에서 가장 큰 물이다. 
황하는 건방에서 갑방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고 양자강은 경방에서 손방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니, 건·갑·손·경은 음양가에서 삼합(三合)이라고 하는 것이다. 
건·갑은 정과 함께 목국을 이루는데 건에서 출발해서 갑에서 왕성해지며 정에 가서는 장사를 지내며, 손과 경은 계와 함께 금국을 이루는데 손에서 출발하여 경에서 왕성하고 계에 가서는 장사를 지내니, 이것은 천하의 큰 물이 가진 운명이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하늘을 셋, 땅을 둘로 보는 것인데, 갑과 경이 앞뒤에 놓여 있는 것이 벌써 상에 나타나 있다. 
상이란 것을 방술가의 법이라 하여 무시할 수는 없다. 
 황제는 지남침을 발견하고 음악의 율려(律呂 음률과 악률)를 정하고 사제(蜡祭)를 만들었다. 
지남침으로 방위를 바로 잡아서 금이 자와 축 사이를 가리키고 있으니 이것은 땅을 둘로 보는 방법이며, 육합 이론의 근거가 된다. 
네 귀를 중심으로 하여 24개의 방위로 구분하게 되면 삼합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 법칙으로 미루어 보면 신·자·진·인·오·술(申子辰寅午戌)은 모두 양에 속하는 음정인 종에 해당되며, 사·유·축·해·묘·미(巳酉丑亥卯未)는 모두 음에 속하는 음정인 여에 해당된다. 
또 포태·생산·왕성·장사는 사제를 지내는 원리이며 삼대(三代) 시대에 모두 이 방법을 따랐으니, 그 의의는 매우 명백하다. 
 상세한 것은 《역경질서(易經疾書)》에서 설명하였다.



49. 일행양계도(一行兩界圖)

지형의 높이는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황하가 곤륜산 남쪽에 있는 성수해에서 북으로 수천 리를 흘러가는데도 경사가 더욱 심하고 모래나 진흙이 모이지 않는 것을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의 남방을 곤륜산 남쪽과 비교한다면 하늘 위와 땅 아래와 같을 것이며 성수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서, 사람으로 말하면 정수리와 같다. 
 황하의 중간 골짜기 동쪽에서는 물이 땅속으로 스며서 흐르고 그 위는 여우가 뛰어서 건널 만한 정도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물이 언덕을 뭉개면서 산마루를 타고 넘어왔을 것이니, 그렇다면 중국의 모든 산은 반드시 여기에서 뻗어 내려왔을 것이다.
 당 일행(一行 당 현종때의 고승)의 《산하양계도설》에는 이렇게 서술하였다. 
 “북쪽은 삼위산과 적석산에서 동으로 뻗어나와 태화산에 와서 황하를 넘어가고 다시 뇌수·저주·왕옥·태항의 모든 산을 거쳐서 북으로 상산 오른편에 이르며, 다시 동으로 국경선을 돌아서 예맥조선에 닿는다. 
 이것을 북기라 하는데 곧 오랑캐와의 경계선을 이룬 것이요, 남쪽은 민산 번총에서 동으로 태화산까지 가서는 상산·웅이·외방·동백과 연결되고 
 북부의 낙수에서 남으로 양자강과 한수를 넘어서 무당·형산과 제휴하며 형양에 닿는다. 
다시 오령의 경계선을 따라서 동구와 민중까지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을 남기라 하며 곧 남방 민족과의 경계선이다.”
 일행은 스님이다. 
천하를 샅샅이 돌아다녔으니 반드시 직접 목격하면서 그 상태를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땅의 결을 이룩할 때 반드시 남북으로 내려왔지 동서로 가로지른 것은 볼 수 없다. 
대체로 땅이 하늘 안에 싸여 있고 하늘은 반드시 동서로 돌아가는데 흙이 여기에서 뭉쳐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결이 모두 남북으로 난 것이다.
 지금 산마루에서 남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돌의 결이 모두 세로 나 있고 동서로 향한 것은 모두 가로 나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제 그가 말하는 남방의 경계선이니 북방의 경계선이란 하늘이 만들어 놓은 땅의 걸이 아니요 곧 산줄기가 뻗어나간 것이다.
  그 시초에는 황하만이 용문(龍門)을 넘어 온 것이 아니라 양자강과 한수도 다 산을 넘어 왔다. 
황하의 근원이 물이 고여서 호수를 이룬 이유는 무엇인가? 서역에 큰 사막이 있고 지대가 매우 높아서 그 북쪽의 모든 물이 다 땅속으로 스며든다. 
스며들었다면 반드시 솟아나오는 구멍이 있을 것이다. 
 또 혹은 땅의 두께가 3만 리라 하니 땅의 중심은 곧 하늘의 중심이며 모든 물건이 발생하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 
그 한 가운데는 반드시 텅 비어 있어 생산하고 기르는 근본체가 되어 있을 터이니 결코 꼭 막혀서 통하지 않는 흙덩이처럼 안팎이 없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방이 모두 1만 5천 리며 공기는 때에 따라 옆으로 퍼질 것이다. 
지금 사람이 정수리에 침 한 대만 찌르면 피가 솟아 나오는 것은 기운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공기가 몰린 곳에는 물이 따라서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을 것이다.



50. 재이(灾異)

정덕(正德) 무인 5월 15일 북경 성밖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 태묘의 기왓장이 날라가 떨어지고 궁궐 안에 담이 무너졌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사람의 문견록(聞見錄)에 의하면, 
 “이날 소주 상숙현에서는 흰 용 한 마리와 검은 용 두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왔는데 민가 3백 호와 배 수십 척이 날려서 공중에까지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하였다.
 이듬해에 우리나라에 기묘사화가 있었고 중국에도 명 무종의 학란이 있었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와 서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난은 소주에서 생긴 변괴의 지엽적인 영향이 바다를 건너서 천만리를 지나 나타난 데 불과하다. 
괴물이 대기를 뒤흔들면 그 영향이 대체로 이러하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신비한 물건이 화를 내서 싸울 때면 모진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쏟아져서 수천 리 밖에까지 영향이 미친다. 
그러나 용 세 마리가 한꺼번에 일어났다면 재난이 해외까지 미치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기묘년 6월에 경주 지방에 달이 환하게 밝았는데 서쪽에 약간 구름이 끼었다. 
 구름 사이로 무슨 빛이 나타나는데 번개도 같고 불빛도 같았다가, 또는 화살처럼 공중으로 솟아 올라가는가 하면 다시 별똥처럼 스치고 지나갔으며 또는 붉은 뱀이 날뛰는 듯하다가는 다시 메운 활처럼 구불구불했다. 
 또 비녀 다리(채고釵股)처럼 두 갈래로 되어 보일락말락 무궁한 변화가 벌어졌었다. 
이해 겨울 11월에 가서 사건이 크게 일어났다.
나의 생각으로는, 천둥 소리는 멀리 들리지 않지만 번개 불은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 백천 가지의 상태가 바다를 사이로 두고 바라보였던 것이 사실상 그럴듯한 것 같다. 
 경주에서의 보고가 이렇다면 충청·전라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을 터인데, 다만 보고를 올리고 올리지 않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모든 재이에 대한 보고는 언제나 이런 경우가 많다.
이때 밀양 저대리에서는 높이가 37척,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는 큰 버드나무가 풍우로 인해 넘어졌다가 3년 후인 무인년 여름에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는 바람에 다시 일어섰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도깨비들의 장난이다.
 효종 원년 경인년 봄 2월에 경상도 상주 땅에 오리떼가 하늘을 덮다시피 하더니 들에 내려와 두 패로 갈라져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전쟁하는 시늉을 하였고, 3월에는 충청도 공주땅에서 들오리가 떼를 지어 금강 웅진 모래밭에 모여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였고, 서울 호동에서 개구리 떼가 밀치락달치락거리면서 사흘 동안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승정원에서는 그 가운데서 10여 마리를 잡아갔다. 
 이때 국경 지대의 문제가 몹시 극심하게 발생하였고, 또 국내에서는 종사의 문제로 당파 간의 싸움이 한창 벌어져 관료들의 상소가 계속 쌓여, 그 싸움이 원수와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치열하였으니, 생물들이 이런 징조를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개구리가 무슨 이해관계가 있어서 상해를 입어가면서 이렇게 하겠는가?
 이것은 귀신이 옆에서 보고 생물들을 시켜서 한바탕 소란극을 꾸며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치에 통달한 사람으로서 볼 때는 그 화인이 아직도 없어지지 아니하여 감정의 불길이 산처럼 솟아오르고 객기가 수그러지지 않아서 지금에도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힘껏 쥐고 오히려 잔인한 학살이 모자란 듯이 생각하고 있으니 마침내 오리 떼나 개구리같이 되고 말려는가?



51. 배천배제(配天配帝)

《효경》에, 
“교제에 후직(后稷 중국 주나라의 시조로 여기는 전설상의 인물)에 제사를 지내어 하늘과 합사하며, 명당에서 문왕에게 제사를 지내어 하느님(옥황상제)과 합사한다.” 하였다. 
 하늘과 하느님의 구별은 끝내 알기가 어려웠는데 후직과 문왕의 예로 미루어 본다면, 그 내용이 곧 파악된다. 
《장자》 천운 편에, 
 “하늘은 움직이는가?
 땅은 가만히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은 저의 궤도에서 경쟁하는 것인가?
 누가 이것을 관장하며 누가 이들에 대한 질서를 마련하는가? 
 누가 아무 문제 없이 이렇게 밀고 나가는가? 
 구름이 비가 되는가? 
 비가 구름이 되는것인가?
 누가 높은 위치에서 이것을 실시하며 누가 아무런 문제 없이 유쾌하게 이것을 밀고 있는가?”라고 했는데, 
 주자는 이 말을 절대 옳다고 하였다. 
장자의 학설을 꼭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이미 주자의 판단이 내려진 것이니 그대로 믿을 뿐이다.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히 있다는 데 대해 그 움직이고 고요하게 하는 주인공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늘과 땅이 반드시 저절로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고요한 것은 아무 문제 없이 밀고 나가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형체가 완성된 후로 말하자면
 저 비로 인하여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 때문에 비가 내리는 것도 반드시 아무 문제 없는 방법으로 그렇게 운행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장의 윗부분은 하늘과 땅의 출발점을 설명한 것이니 그 내용이 하늘에 속하고 
 아랫부분에서는 비로소 자연 조화의 이유를 설명한 것이니 그 내용이 하느님에게 속한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하늘은 배나 수레와 같으며 하느님은 배를 저으며 수레를 끄는 주인공과 같은 존재이다. 
하늘은 자연에 속하므로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고,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이므로 사당에서 제사 지낸다. 
후직과 문왕도 그렇게 하여 서로 함께 제사 드리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늘과 땅에 대한 학설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가서는 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조화 가운데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모른다고 내버려두며 그 큰 힘의 움직임과 작용함이 반드시 주재하며 정리하는 주인공이 있는 것을 연구하지 않고 그만둘 수 있겠는가? 
 장주(莊周)가 설파한 이 구절의 문제점은 정말 크다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영원한 세대가 캄캄한 밤중에 놓이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52. 성월변(星月變)

경성(곧 항성·삼원·이십팔수·오제·헌원 및 북두등의 성좌.)과 
칠정천(해·달과 금·목·수·화·토의 오성이 다니는 하늘의 궤도)이 겹겹으로 둘러싸여서 마늘 껍질이 안팎으로 둘러싸인 것과 같다. 
 그러나 정기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유리처럼 환하게 틔어서 바라보아도 막힘이 없다. 
경성과 태양 두 갈래의 하늘 궤도는 정지함이 없이 운행되어 만고에 어긋나지 아니하므로 일 년의 사업이 이루어진다.
  그 밖에는 속도의 차이와 남북의 궤도가 각기 서로 다르다. 
달이 가는 하늘의 궤도는 북으로 치우쳐 있어서 따라서 달도 약간 북쪽으로 가까이 가서 자미에 이른다. 
 그러나 그 다니는 속도는 전과 마찬가지이므로 남쪽으로 돌아올 때는 언제나 따라오게 된다.
 그러므로 마주 바라보며 일식과 월식이 틀리지 않는다. 
형혹이 다니는 하늘의 궤도는 느린 길, 빠른 길, 거슬러 가는 길을 모두 가졌기 때문에 제자리를 지킬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다.
《강목》에, 
 “한 경제 2년 가을에 형혹이 거꾸로 가서 북신을 지키고 달이 북신 사이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마단림(馬端臨)의 《상위고》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다. 
저쪽의 기사에 잘못이 있었는지 이쪽의 기록에 빠진 것이 있는지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잘못 운행될 리는 없다. 
천문학에서는 수성을 신(辰)이라고 했으니 혹은 달과 화성과 수성이 한꺼번에 모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위고》에는, 
 “그 2년 가을에 수성과 화성이 두성에 모였다.” 했는데, 아마도 이 사실을 잘못 기록한 듯하다. 
역사의 기록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강목》에, 
 “진 혜제 영녕 원년 윤월이다. 
정월부터 이달까지 다섯 별이 서로 하늘을 가로질러 대중없이 가로세로로 다녔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위고》에는 이 사실을 더욱 상세히 기록하여 
 “이해 세성이 허와 위를 지켰고 신성이 태미에 들어가고 태백이 우액문(右掖門)을 지켰다. 
8월에 전성이 좌집법을 침범하고 또 상상(上相)을 침범하였으며, 형혹이 묘를 지키고 신성이 여귀를 지켰다.”고 하였다.
여기에 무슨 
“하늘을 가로지르며 대중없이 가로세로 다녔다.”는 내용이 있는가? 
 이런 기록들이 매우 많은데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금성과 수성의 하늘 궤도는 태양의 하늘 궤도와 붙어서 돌아간다. 
큰 둘레 안에 다시 작은 둘레가 있는 것이다.
 《강목》은 만고에 고쳐서는 안 될 책인데 어째서 간혹 이렇게 정리되지 못한 내용이 있는가?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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