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神通大光明藏)의 삼매에 드니, 이 삼매는 일체여래가 빛으로 장엄하여 머무는 자리로서 모든 중생의 청정한 깨달음이었다. 신심(身心)이 적멸하고 평등한 본제(本際)로서 시방세계에 원만하고 불이(不二)에 수순하여 불이의 경계에서 모든 청정 국토를 드러내었다.
그 때 십만 명의 대보살이 함께 하였으니, 그 이름하여 문수사리 보살, 보현 보살, 보안 보살, 금강장 보살, 미륵 보살, 청정혜 보살, 위덕자재 보살, 변음 보살, 정제업장 보살, 보각 보살, 원각 보살, 현선수장 보살 등이 상수(上首) 제자가 되었다. 이 십만의 보살과 그들의 권속 모두가 함께 삼매에 들어가 여래의 평등한 법회에 같이 머물렀다.
1. 문수장 : 무명의 본질과 원각의 성품
이 때에 문수 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조아려 예배하고, 존경의 표시로서 우측으로 세 번 돌며,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으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크게 자비로우신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이 법회에 모인 대중들을 위하여, 여래의 본래 자리에서 일으킨 청정한 인지법행(因地法行)을 설해 주시고, 나아가 보살이 저 대승 가운데 청정한 마음을 발하여 모든 병통을 멀리 벗어나게 설하시어, 오는 세상의 말세중생이 대승을 구하여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이 말을 마치고서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거듭 세 번 청함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청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 문수사리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여. 너희들이 모든 보살을 위하여 여래의 인지법행(因地法行)을 물어, 말세의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대승을 구하여 바르게 그 자리에 머물러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구나. 너희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그러자 문수사리 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환희하고, 모든 대중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묵연히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선남자여, 무상법왕(無上法王)은 대다라니문(大陀羅尼門)이 있어 원각(圓覺)이라 하니, 일체의 청정한 진여와 보리와 열반 및 바라밀이 여기에서 흘러나와 보살을 가르치게 된다.
일체여래가 본래의 자리에서 인지법행(因地法行)을 일으킴은, 모두 원조(圓照)의 청정한 깨달음으로써 무명을 영원히 끊어야만 불도(佛道)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선남자여,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여러 가지 전도된 생각을 하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동서남북을 바꾸어서 생각하듯, 허망하게 사대(四大)를 자신의 몸으로 삼고 육진(六塵) 경계에 반연한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면 병난 눈으로 허공의 꽃과 환영으로 나타난 달을 보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허공에는 진실로 꽃이 없는데도 병난 눈으로 허망하게 있다고 집착하니, 이 허망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허공의 자성(自性)에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재의 꽃이 생겨나는 곳에도 미혹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윤회하는 생사가 있게 되니, 이를 무명(無明)이라 한다.
선남자여, 이 무명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마치 꿈꾸는 사람이 꿈꿀 때 꿈속의 사물이 없지는 않으나, 꿈을 깨어서는 이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허공에서 많은 꽃이 멸하나, 정녕 멸하는 곳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인가. 본디 생겨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중생도 생겨날 곳이 없는 가운데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니, 이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라고 말한다.
선남자여, 여래의 인지(因地)에서 원각을 닦는 자는 허공의 꽃인 줄 아니, 그에게는 윤회가 없고 또한 신심(身心)도 없다. 생사를 받는 일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본래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알고 깨닫는 것도 오히려 허공과 같으며, 이 허공을 아는 것도 곧 허공의 꽃 모습과 같으나, 또한 알고 깨닫는 그 성품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유무(有無)의 견해를 다 버려야만 이를 ‘청정한 깨달음에 수순(隨順)한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항상 부동(不動)하기 때문이다. 여래장(如來藏) 가운데는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없으며 지견(知見)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법계의 성품이 구경에 원만하여 시방세계에 두루한 것과 같으니, 이를 인지법행(因地法行)이라 한다. 보살은 이것으로 대승 가운데 청정한 마음을 발하고, 말세의 중생은 이를 의지해 수행하여 삿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문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시방세계 일체 모든 부처님들은
깨달음의 수행처 본 자리에서
모두 다 지혜로써 깨달음 얻어
무명의 본 모습을 알았느니라
허공의 꽃 그 실체 알게 되면
생사의 흐름에서 벗어나리니
이는 마치 꿈속에 있던 사람이
꿈을 깨면 꿈속의 일 사라지듯이
비유하면 깨달음은 허공과 같아
평등하여 움직임이 있지 않다네.
이 깨달음 시방세계 두루 하다면
그 자리서 불도를 이룰 수 있네.
허깨비들 사라져서 없는 곳에는
도 이룰 그 자체도 얻을 수 없네.
그 자리의 본래 성품 원만하므로
보살은 원만한 이 가운데서
깨달음의 마음을 낼 수 있으며
말세의 모든 중생 이를 닦으면
삿된 견해 떨어짐을 면하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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