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자유연상기법으로 꿈을 분석해 히스테리의 원인을 밝혔다.
자기 삶의 주인이고자 안락사 선택
1939년 가을, 런던의 한 병원에 암으로 입원한 노인의 팔뚝으로 치사량의 모르핀 주사가 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의 딸과 의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튿날 새벽 노인은 세상을 하직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종교가 주는 유혹을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안락사를 선택한 노인.
그의 이름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세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여덟 아이 중 장남이었다.
포목상이었던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860년 가족을 데리고 빈으로 이주했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빈에 대해 프로이트는 애증을 품었지만 잠깐의 해외 방문 기간을 빼고는 80평생을 거의 이 도시에서 살았다.
프로이트는 원래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우연히 자연에 대한 강연을 듣고 진로를 바꿨다.
1873년 빈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에른스트 브뤼케의 생리학 수업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평생에 걸친 반형이상학적, 반종교적, 반관념적 태도는 이때 체험한 엄밀한 자연과학적-유물론적 교육에서 기초가 다져졌다.
프로이트는 신경생리학자로서 전문 연구자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반유대주의가 강한 빈에서는 숱한 난관이 있을 거라는 판단 아래 임상의가 되기로 결심하고 종합병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당시 유명한 뇌 전문의였던 테오도어 마이너트의 지도를 받는다.
프로이트는 뇌의 기능 이상과 국부적 손상을 진단하는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의 저명한 신경생리학자 장 샤르코가 연구하는 파리로 떠난다.
로이트가 도착했을 때 샤르코는 히스테리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히스테리 증상은 국부 뇌 손상의 효과와 비슷하지만 신체적 원인을 찾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히스테리를 꾀병으로 일축하고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샤르코는 진정한 원인이 있다고 믿고 최면요법으로 히스테리 환자에게 접근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프로이트는 여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유연상 기법으로 되살아난 카타르시스 요법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다시 신경생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환자 수가 적었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해 히스테리 환자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목욕요법이나 가벼운 전기요법을 시도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증세가 사라질 것이라고 직접 암시를 주는 방법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이트는 파리로 떠나기 전 절친한 동료 브로이어가 들려줬던 베르타 파펜하임이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치유 사례를 떠올렸다.
의사는 최면 상태의 환자에게 히스테리 증세와 관련된, 그동안 잊었지만 감정이 강하게 담긴 경험들을 회상하라고 요구했다.
환자가 그 사건들을 떠올리고 억눌렸던 감정을 폭발시키자 히스테리 증세가 사라졌다.
하지만 치료 막판에 환자가 의사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는 데 질려버린 브로이어는 두번 다시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망각되었던 카타르시스 요법을 부활시킨 사람이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연구』를 펴냈다.
이 무렵 프로이트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그것은 최면이 안 걸리는 히스테리 환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다.
프로이트는 ‘자유연상’ 기법을 창안해 이 난관을 돌파했다.
‘자유연상’은 환자가 최면 상태가 아닌 각성 상태에서도 자신의 증세와 관련돼 떠오르는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환자의 자기 검열과 차단, 짜깁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석가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낳는 생각은 환자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고 대신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환자의 무의식으로 어떻게 뚫고 들어갈 것인가? 무의식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데 꿈처럼 좋은 재료는 없었다. 프로이트는 꿈의 내용을 자유연상한 뒤 분석해 봤다.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 꿈
꿈에 나타난 내용을 히스테리 증세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유연상시켰더니 무의식에 숨어 있던 내용이 나타났다.
꿈의 숨은 내용과 드러난 내용의 관계는 많은 점에서 히스테리의 발병 원인과 증세의 관계와 비슷했다.
두 경우에서 모두 의식에 떠오른 결과는 자유연상을 통해 캐내야 하는 원래의 무의식적 사고보다 안전하다.
즉 불안을 덜 일으킨다.
그 불안의 뿌리를 프로이트는 유년기에서 찾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이 받았던 충격을 깊이 분석해 그 바탕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던 경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해부해냈다.
이른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였다. 이런 자기인식은 히스테리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부터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의 자유연상이 자꾸만 어린 시절의 성과 관련된 기억과 결부되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아버지나 어머니에 의한 성적 희롱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어린이에게는 이것이 성적으로 인식되지 않았겠지만 사춘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이 경험은 의식의 억압을 받고 무의식으로 잠복한다.
이 무의식을 분석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꿈이었다.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였다.
1900년에 발표한『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겉보기에는 무의미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해석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만년에도 자신의 대표작을 『꿈의 해석』으로 꼽을 만큼 이 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발간 후 10년 동안 겨우 361권이 팔릴 만큼 처음에는 무시당했다.
이듬해 간행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는 실언 같은 사소한 행위의 배후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석했다.
1905년에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잇따른 저서의 발간으로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알프레드 아들러, 칼 구스타프 융, 카를 아브라함, 산도르 페렌치 등이었다.
1902년부터 프로이트의 집에서 매주 열린 '수요 심리학 모임'은 1908년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전했다.
이듬해 프로이트는 융, 아들러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정신분석학을 신대륙에 전파했다. 정신분석학은 세력을 넓혔고 1910년 '국제 정신분석학협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까운 두 제자 융, 아들러와 모두 결별한다.
두 사람은 스승의 이론이 지나치게 성 일변도라고 여기고 인류의 시원적 심성인 집단무의식을 상정하는 분석심리학(융)과 사회 현실이 개인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는 개인심리학(아들러)으로 갈라져나갔다.
혁명적 학문 정신분석의 창시자
1차대전은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아들 셋이 전선에 나가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프로이트는 인간이 가진 공격성의 심리적 원인을 끈질기게 성찰했다.
그 전까지는 성욕(쾌락욕)과 식욕(자기보존욕)을 인간의 근원적인 두 가지 충동으로 봤지만 1920년에 쓴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에로스 즉 삶을 지향하는 충동과 타나토스, 즉 죽음을 지향하는 충동이라는 새로운 대립항을 내놓았다.
아무런 자극이 없고 아무런 긴장이 없는 태초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본능을 프로이트는 타나토스라고 불렀다.
아들의 죽음과 구강암의 발병이라는 개인적 고통을 겪으면서 프로이트의 생각은 점점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환상의 미래』(1927), 『문명 속의 불만』(1930) 같은 후기작에서 프로이트는 의학과 심리학을 거쳐 철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의 영역으로 사색을 발전시킨다. 인간은 쾌락을 지향한다. 프로이트는 자극이 유발시킨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곧 쾌락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쾌락의 무분별한 표출은 개인간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이것을 방지하는 장치로 사람들은 '문명'을 만들었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모순적이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려고 한다.
사회와 개인의 조화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이성의 의도와 노력을 회의적으로 거의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디까지나 계몽적 인간이었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프로이트를 이렇게 평가했다.
“프로이트가 연구자로서 감정에 대해 갖는 흥미는 이성의 영역을 희생시키면서 감정을 찬미하는 방향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의 반합리주의는 정신에 비해 본능이 현실적으로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는 점을 통찰할 뿐이다.
프로이트는 본능의 우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정신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다.”
1933년 독일의 국가종교로 부상한 국가사회주의라는 비합리주의 이념은 프로이트의 저작을 모두 불살랐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프로이트 일가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는 망명한 지 1년 만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합리성의 심층 세계를 규명한 그의 연구는 히틀러가 주도한 2차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견뎌냈다.
적잖은 반론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프로이트가 세운 무의식의 과학은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가진 지식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대시킨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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