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필자의 서
《성호사설》은 성호옹(星湖翁)의 희필(戱筆 자기의 글씨나 그림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늙은이가 이 글을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였을까?
별다른 뜻은 없다. 뜻이 없었다면 왜 이것이 생겼을까? 옹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독서의 여가를 틈타 전기·자집·시가·회해나 혹은 웃고 즐길 만하여 두고 열람할 수 있는 것을 붓 가는 대로 적었더니, 많이 쌓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기록한 글을 잊지 않기 위해서 권 책에 기록하게 되었는데, 뒤에 제목별 그대로 배열하고 보니, 또한 두루 열람할 수 없어 다시 문별로 분류하여 드디어 책의 권질(卷帙)을 만들었다. 이에 그 이름을 「사설」이라 붙인 것인데, 이는 마지 못해서이지 여기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옹은 20년 동안 경서를 연구하면서 성현들의 남긴 뜻을 보고 이해한 대로 거기에 대해 각각 설을 만들었고, 또 저술을 즐겨 때에 따라 읊고 묻고 대답한 것, 그리고 서·기·논·설을 별도로 채집하였으되, 사설 따위는 차마 이 몇 가지 조항에 실리지 못할 것인즉,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속담에
“내가 먹기는 싫어도 버리기는 아깝다.”는 그 말이 이 「사설」이 생긴 이유이다.
무릇 삼대가 그 숭상함을 달리하여 문(文)에 이르러 그쳤는데, 문의 말세란 소인의 시시하고 자잘한 것들이다. 주 나라 이후로 그 문이 순수한 데로 되돌아가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평민의 덕이란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지게 마련이라, 우리 같은 소인배가 세속과 함께 흘러 움쩍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천한 분양초개(糞壤草芥)라도, 분양은 밭에 거름하면 아름다운 곡식을 기를 수 있고, 초개는 아궁이에 때면 아름다운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이 글을 잘 보고 채택한다면 어찌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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