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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수두시대 -수두의 홍포와 문화의 발달

 

부루의 서행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夏禹)를 도산에서 만났다"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당요 때에 9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형산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다.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의 창수사자라 일컫고, 우에게 말하기를 구산 동남쪽의 도산에 신서가 있으니, 석 달 동안 재계하고 그것을 꺼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따라 금간옥첩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을 제정하고, 율도량형의 제도를 세웠다"고 하였다.

현이(玄夷)는 당시 조선의 동·남·서·북·중 오부를 남·적·백·현(玄:黑)·황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이니 중국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라고 한 것이요, 창수는 곧 창수(倉守)이고, 주신(朱神)·숙신(肅愼)·직신(稷神) 혹은 식신(息愼)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의 창수사자인 것이다. 이때 중국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삼선오제교의 일부분인 오행설을 전하고 치수의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우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중국에 전파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도 또한 중국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고 하였는가? 이는 신성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한 것이니,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인 것이다.

기자의 동래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夏)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내어 도산에서 받은 신서를 홍범구주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다. 하나라가 수백 년 만에 망하고 상(商)나라가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 만에 망하고 주(周)나라가 일어났는데, 주무왕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殷)의 왕족 기자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였으니, 지금 상서(尙書)의 홍범이 곧 그것인 것이다.

홍범편 가운데, "초일은 오행이요, 차이는 경용오사요, 차삼은 농용팔정이요, 차사는 협용오기요, 차오는 건용황극이요, 차육은 예용삼덕이요, 차칠은 명용계의요, 차팔은 염용서정이요, 차구는 향용오복·위용육극이다. 첫째 오행은 일은 수, 이는 화, 삼은 목, 사는 금, 오는 토요, 둘째 오사는 일은 모, 이는 언, 삼은 시, 사는 청, 오는 사요, 셋째 팔정은 일은 식, 이는 화, 삼은 사, 사는 사공, 오는 사도, 육은 사구, 칠은 빈, 팔은 사요, 넷째 오기는 일은 세, 이는 월, 삼은 일, 사는 성진, 오는 역수요, 다섯째 황극은 황건기유극, 여섯째 삼덕은 일은 정직, 이는 강극, 삼은 유극이요, 일곱째 계의는 택건립복서인이요, 여덟째 서징은 우·양·오·한·풍이요, 아홉째 오복은 일은 수, 이는 부, 삼은 강녕, 사는 유호덕, 오는 고종명이요, 육극은 일은 흉단절, 이는 질, 삼은 우, 사는 빈, 오는 악, 육은 약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문구는 곧 도산·신서의 본문이고, 그 나머지는 기자가 연술한 것이다. '천내석우(天乃錫禹) 홍범구주'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이라 하고 단군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수두'의 교의에서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나라가 주나라에 망하는 동시에 상나라의 국교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서에서는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에서 나왔으므로 우가 홍범을 연술하였다고 했지만, 역경의 계사에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씨가 나와,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라 하여 분명히 하도낙서가 다 역괘를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다.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겠는가(위 일절은 청나라 학자 모기령의 설을 채택함).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는 것이 옳고, 또 초사에 의거하여 동황태일 곧 단군 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절강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제사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게서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흉노의 휴도 

'수두교'가 중국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사기 흉노전에 의거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제를 형상한 동인(銅人)을 '휴도'라 불렀으니, 이는 곧 '수두'의 번역인 것이다. 휴도의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이라 하여 이 또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을 모시니, 용은 또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를 수입하였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고대에는 종교와 정치의 구별이 없어 종교상의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였으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의 속지였으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중국·흉노 등의 각 민족에 널리 퍼졌음으로 말미암아 정치상 강역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자의 수입과 이두문의 창작

조선 상고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땅이 중국과 이어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을 것이니,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에게 금간옥첩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글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 '향서' 혹은 '가명'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는 것이다.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설총 이전의 옛 비석(진흥왕 순수비 따위)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가 있으니, 설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임금을 왕검(王儉)이라 번역하여 왕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낙랑이라 번역하여 낙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펴'로 읽고, 랑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인 것이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 년 전인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이 진보하여 글자가 되고 형자가 진보하여 음자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듦은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을 따라서 알파벳을 만듦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사상의 한 진보라 할 것이다. 후세의 거란문·여진문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러운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음과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자음 'ㄱ'과 모음 'ㅏ'의 음절이요, '라'는 자음 'ㄹ'과 모음 'ㅏ'의 음절인데,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절이 한 글자가 되어 '가'를 '加' 혹은 '家'로 쓰고, '라'는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이다.

둘째, 음표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 자 한 자를 '백활'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위백제'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며, '이' 자 한 자를 '의신'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교의'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칙이 없는 것이다.

셋째, 상음 하몽의 이치를 획정하지 않음이니, 예컨대 '달이'를 '월이'라 쓰지 않고 '윌리'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를 '풍이'라 쓰지 않고 '풍미'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언어의 근간과 지엽이 서로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고, 다른 시대, 다른 지방 사람은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문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이 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달해주기 때문인데,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 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 을 시대, 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 지 1천여 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의 글을 적국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다. 삼조선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 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조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두문이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으로 된 것은 학문적 재주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지의 역사

전사에는 단군 때에 신지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사실 신지는 '신치'의 번역이요, '신치'는 '신크 치'의 약자이며,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 대신인 것이다. '신치' 즉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에서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용사들의 행적, 예언, 유의점,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본보기가 되었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들을 모아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인 '신치'로 책 이름을 삼은 것이니, 이른바 신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재했을 것이다.

고려사 김위제전에는 신지비사의 "여칭추극기·칭간부소량·추자오덕지·극기백아강·조항칠십국·뇌덕호선정·수미균평위·흥방정태평·약폐삼유지·왕업유쇠경"이라는 10구를 싣고, 부소량은 지금의 송도, 오덕지는 지금의 한양, 백아강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도·한양·평양은 고려의 삼경이고, 단군의 삼경은 그와 다른 것이었다. 하나는 지금의 합이빈이니 고사에 부소갑·비서갑 혹은 아사달로 기록한 것이고, 하나는 지금의 해성·개평 등지이니 고사에 오덕지·오비지·안지홀 혹은 안시성으로 기록한 것이며, 또 하나는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낙랑·평원 혹은 평양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두문의 읽는 법에 따르면 부소·비서·아사는 '아스'로 읽고, 오덕·오비·안지·안시는 '아리'로 읽으며, 백아강·낙랑·평원·평양은 '펴라'로 읽는 것이니, 위의 비사 10구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전에 이두문으로 기록된 시와 글을 한시와 한문으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니, 신지의 한시 번역도 그 한 예인 것이다. 어찌하여 비사라 일컬었는가? 고대의 역사 종류를 성서라 하여 대궐 안에 비장해두어 민간에 유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지와 신지비사 같은 것들이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는가?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 왕궁의 비장이 불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조선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에 두었었는데, 역시 조선 임진왜란의 불에 타버린 것이다.

 

조선의 전성시대

'대단군조선의 전성시대'를 현대어로 윤문하겠습니다.

기원전 10세기경으로부터 그 뒤 약 5, 6백 년 동안은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였다. 수문비고에는 고죽국이 조선의 후예라고 하였는데, 백이·숙제 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중국의 섬서성을 유랑하다가 주무왕에게 격렬히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였다. 고대 중국의 강회(江淮) 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옮겨가 살면서 수많은 소왕국을 건설하였는데, 그중 서어왕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인의(仁義)를 행하여 중국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이주민 중의 한두 호걸의 행동이었거니와, 기원전 5, 6세기경에 불리지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하북성 직예(直隸)·산서(山西)·산동(山東)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 부근에 한 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아 불리지국이라 하였다. 주서의 '불령지'와 사기의 '이지'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 불리지는 또한 그가 정복한 지방을 그의 성씨 '불'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으니, 요서의 '비여'나 산동의 '부역'이나, 산서의 '비이'(관자라는 책에 보임)가 '불'의 번역인 것이다.

상고에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모두 땅이 연이어져 있었고,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발해의 '발'도 음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가 지은 이름이다.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검은 원숭이·담비·여우·삵 등의 털가죽 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하여 상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조선의 쇠약

기원전 7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을 근거지로 하여 불리지국과 연합해서 연(燕)나라와 진(晉)나라를 공격하니, 연과 진은 제(齊)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제나라의 환공(桓公)은 어진 재상 관중(管仲)과 이름난 장수 성부(成父)를 얻어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조(曹)·위(衛)·허(許)·노(魯) 등 10여 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나라를 구원하고자 태행산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나라를 지나 고죽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으므로, 공자는 관중의 공을 칭찬하며 "관중이 피발좌임을 징계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양식을 가리킨 것이고,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자(管子)》에는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에는 두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로 중국의 문자 기록에는 부화하고 과장된 내용이 많으며, 특히 이러한 대외 전쟁을 서술할 때 더욱 심하다는 점이다. 둘째로 《관자》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목격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적인 내용만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 연대의 고증

'단군기원에 대한 고찰' 부분을 현대어로 윤문하겠습니다.

전사(前史)에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기자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서야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弗朝鮮)의 왕이 되었다. 이는 제2편 제2장에서 기술하겠거니와, 이제 사실에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하는 것이다. 또한 전사에서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였으나, 이 또한 근거 없는 망령된 말이다.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사에 초록한 위서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라는 구절로 인한 것이다. 아사(阿斯)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弓忽)이요, 궁홀은 이두문으로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이다. 이는 마치 개홀(皆忽: 개골로 읽음)에 있는 산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 달 산으로 억지로 해석하여 아사달산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사달은 이두문에서 '아스대'로 읽는데, 옛 말에 소나무를 '아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의 합이빈의 완달산이 곧 아사달산인 것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이요,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안시의 고허인 '아리티'가 중경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수도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는 것이 어디에 근거한 말인가?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무진을 당요(堯) 25년이라 하였으나, 중국도 주소공화(共和: 기원전 841년)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년임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않는다. 고기(古記)에 단군의 나이가 1,048세 혹은 1,908세라는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眞檀)으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고쳐서 불전(佛典)의 말로 조선 고사를 왜곡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만 년, 3천 년, 5백 년 등 장수했다는 부처의 기록을 본떠서 만든 말이라,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조선 초에 권근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여 천 년이 지났네"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의 시말을 모르는 말이다.

옛날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을 가져 그 처음에서 끝까지 2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천 년만으로 헤아리겠는가.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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