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Ⅲ.삼조선 분립시대-삼조선분립 후의 ‘불朝鮮’

‘불朝鮮’의 서북 변경을 빼앗김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나라에게 패배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그 잃은 땅의 규모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위략》에는 "진개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유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 2천여 리로 계산하여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 했으나, 이는 큰 착오이자 억지 해석인 것이다.

《사기》나 《위략》을 살펴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는 분명히 상곡에서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요동군 현 중에 '문'과 '번한'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번한인 것이다. 문현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했으나, 번한은 지금의 개평 등지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만반한은 지금의 해성·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했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나라 때 혹은 한나라 때의 명칭을 《위략》의 저작자가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의 두 나라 국경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번한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이었기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사기》의 1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을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천여 리는 신조선과 불조선 두 나라가 잃은 땅을 함께 지적한 것이니, 상곡·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요서·우북평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인 것이다. 만반한은 사군 연혁의 문제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니, 이 부분은 독자가 특히 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불朝鮮’의 진·한과의 관계

연왕 희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옮기니, 불조선은 지난날 연나라에 대한 오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나라와 맹약을 맺고 연나라를 토벌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한 것이다. 불조선이 진나라와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에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략》에 의하면 이때 불조선왕의 이름을 '부'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문헌을 자료로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에는 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이 된 부루를 부로 와전한 것인가 하여 여기에서는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기원전 200여 년경에 기준이 불조선왕이 되었을 때는, 진나라의 진승·항적·유방 등이 모반하여 중국이 크게 혼란해져서 상곡·어양·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제·조의 중국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았던 것이다.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한 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나라와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은 것이다.

《사기》조선전에 "한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으로 연왕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고 한 것은 다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선유들이 흔히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한 것은 물론 큰 잘못이며, 근래 일본의 백조고길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한 것 또한 큰 망발인 것이다.

 

위만의 반란과 ‘불朝鮮’의 남천

기원전 194년에 한의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한 것이다. 준왕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에 임명하고 패수 서쪽 강변(옛 중립 공지)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과 연·제·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위만은 이를 기회로 군사를 양성하고 조선과 중국의 망명 죄인을 모아 결사대를 만들어 병력을 강화한 것이다. 그 힘이 강대해지자 "한나라 군사가 10도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은 후 정예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한 것이다.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을 싣고 패잔병을 이끌고 바닷길을 따라 마한의 왕도 월지국으로 들어가 이를 정복하고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 준왕을 멸망시킨 것이다.

왕검성은 대단군 제1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인 지금의 합이빈과 평양, 그리고 불한의 옛 도읍인 개평 동북쪽 이 세 곳이 모두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인 것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이 바로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이다"라고 한 것은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논술할 것이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