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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삼조선 분립시대-삼조선분립 후의 ‘신조선’ 

 

신朝鮮의 서침과 연· 조· 진의 장성 

삼조선이 분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조선왕 모갑이 영특하고 용감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말조선과 불조선 두 나라를 다시 연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지금의 동몽고 지역을 공격하여 선비족을 정복하고, 나아가 연나라를 쳐서 우북평(지금의 영평부), 어양(지금의 북경 부근), 상곡(지금의 산서성 대동부) 등지를 모두 차지하여 불리지의 옛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연나라 왕은 이에 크게 두려워하여 신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며, 태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갑이 죽고 모을이 왕위를 계승한 후, 연나라의 태자는 귀국하여 왕이 되었고, 이후 장군 진개를 왕자라고 속여 볼모로 보냈습니다. 모을은 이 속임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운 면모를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습니다.

진개는 신조선의 모든 기밀을 탐지한 후 도주하여 돌아갔고, 이후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신조선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그는 신·말·불 세 나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서북 변경, 즉 이전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했던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탈환했습니다. 더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공격하여 요서(지금의 노룡현)와 요동(지금의 요양 부근)을 함락시켰습니다. 연나라는 이 지역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5군을 설치하고, 2천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아 조선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흉노열전에는 "연의 어진 장수 진개가 호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에서부터 양평에까지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은 것은 연나라만이 아니었습니다. 조나라의 무령왕이 쌓은 장성(지금의 산서성 북쪽)도 조선과 그 속민인 담림·누번 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나라 소왕의 장성은 표면적으로는 의거를 토벌하고 흉노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이었지만, 사실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서 지금의 감숙성으로 이주하여 성과 궁궐을 건설하고 농업 문화를 발전시켜 상당한 문명을 이룩했던 세력이었습니다.

의거는 군사력이 강성하여 진나라를 압박했는데, 진나라의 선태후(진시황의 고조모)는 절세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의거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우려하여 의거왕을 유혹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한 뒤, 의거왕을 불러들여 살해하고 두 아들마저 죽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창해역사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먼저 창해역사의 철퇴와 진시황의 장성 건설 시기를 살펴보면, 신조선이 연나라와 조나라를 상대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진나라가 급격히 강성해져 한·위·조·연·제·초 등 중국의 여러 나라를 모두 정복했습니다. 이때 한나라의 장량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으로 들어와 구원을 청했고, 왕 모병이 장사 여씨를 소개해주어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120근의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저격하려 했으나, 잘못하여 부거만 부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기》에는 장량이 창해군을 만나 장사를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창해를 강릉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이라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신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창해는 동부여의 다른 이름이며, 동부여는 북갈사(지금의 훈춘)와 남갈사(지금의 함흥) 두 곳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시황은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경계하여, 기존의 연·조·진의 장성들을 연결하는 대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전 중국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으로 하여금 30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하게 하여, 동양 역사상 유명한 만리장성을 완성했습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고 이세가 즉위하자, 이듬해에 진승·항적·유방 등 혁명 세력이 봉기하여 진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두산은 이를 논하며 "진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유례없이 팽창하여 만백성이 시황을 천신처럼 우러러보고 있을 때, 뜻밖의 철퇴 저격 사건이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 유민의 적개심을 자극했다. 그 결과 시황의 시신이 땅에 묻히기도 전에 진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서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흉노 모돈의 동침과 신조선의 위축

진나라의 내전이 8년간 계속되는 동안 신조선왕 모정은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어양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족의 항복을 받아 국위를 다시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 대에 이르러 흉노 모돈의 침략을 받아 국세가 다시 쇠약해지고 말았습니다.

흉노는 제1편에서 설명했듯이 조선과 어계가 같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었으나,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 목축과 사냥에 종사했습니다. 그들은 천성이 침략적이어서 자주 중국 북부를 침략했고, 신조선에 대해서도 배반과 귀부를 반복했습니다.

기원전 200년경 두만이 흉노선우(흉노 대추장의 호칭)가 되었는데, 맏아들 모돈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살해당했고, 모돈이 그 자리를 계승했습니다. 신조선왕은 모돈의 사납고 음험한 성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주 물건을 요구했습니다. 모돈은 일부러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자신이 아끼는 말을 주고, 미인을 구하면 자신의 후궁을 주었습니다. 이에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신뢰하여 사신을 보내 두 나라 사이의 천여 리에 달하는 구탈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요구했습니다.

구탈은 당시 중립지대로 남아있던 빈 땅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모돈은 이 요구를 받고 크게 분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 하느냐"며 사신을 처형하고, 전 흉노의 기병을 동원하여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지역을 습격했습니다. 주민들을 유린하고 선비족을 대량 학살했으며, 신조선은 어쩔 수 없이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포기하고 후퇴했습니다. 선비족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지금의 내외 흥안령 부근)으로 도주했고, 이로부터 신조선은 극도로 쇠약해져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룰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청말의 학자 엄복은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라 하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했겠는가? 이는 사마천의 과장된 서술에 불과하다"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사기》, 《한서》등을 살펴보면, 흉노는 음산의 험한 목을 빼앗겼을 때 그곳을 지나는 자마다 통곡했다고 하며, 연지가 생산되는 언지산을 빼앗겼을 때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흉노의 토지에 대한 인식이 비록 문화적 민족들과 같지는 않았더라도, 토지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었다고 보는 것은 편향된 판단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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