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삼조선 분립시대-삼조선 총론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지금까지의 각 역사책에는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칭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잘못 해석해 왔다.
삼조선은 신(神)·불(佛)·말(末) 삼한의 분립을 의미하는 것이니, '신한'은 대왕이요, 불한과 말한 두 한은 부왕인 것이다. 삼한이 삼경에 나뉘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1편에서 설명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각각의 통치 지역을 다르게 부른 것이다. 즉,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한 것이다.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마한·변한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말·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막·번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서로 다른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用字)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중국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이 거의 다 소실되어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중국 역사서에는 종종 그 흔적이 보인다. 《사기》 조선열전에 '진번조선'이라 한 것은 신조선과 말조선 두 조선을 함께 지칭한 것이고, 주석에 "번(番)은 일찍이 막(莫)으로도 썼다"고 하였는데,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조선과 말조선 두 조선을 함께 일컫는 것이니, '진막번조선' 혹은 그대로 써서 신·말·불 삼조선을 모두 언급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생략하여 '진번조선'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생략하여 '진막조선'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중국인이 외국의 인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번 문장의 운율을 위하여 글자를 줄여 쓰는 관습 때문인 것이다.
목천자전의 한(韓)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의 '발조선'과 《대대례》의 '발식신'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 이외의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한(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거니와,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삼한의 도읍은 세 곳이다. 첫째는 제1편에서 말한 '아스라'로 지금의 합이빈이요, 둘째는 '알티'로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안시의 옛 터이며, 셋째는 '펴라'로 지금의 평양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이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한과 말한 두 한이 그 부왕이었다. 따라서 신한이 '아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한과 불한 두 한은 하나는 '펴라'에, 하나는 '알티'에 머물렀다. 신한이 '알티' 혹은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한과 말한 두 한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켰다. 그러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영역을 살펴보면, 《만주원류고》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의 고도이다"라고 하였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마한은 평양의 마읍산으로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말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신한은 비록 상고할 문헌은 없으나 '알티'와 '펴라'의 두 서울이 불한과 말한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신한이 합이빈 곧 '아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써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체로 그릴 수 있으니, 지금의 봉천성 서북과 동북(개원 이북, 흥경 이동)과 길림·흑룡 두 성, 그리고 연해주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였고, 요동반도(개원 이남, 흥경 이서)는 불조선의 소유였으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기록상 삼조선의 구별 조건
지금 역사를 읽는 이들이 생소한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이라는 용어를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前史)에 아무 구별 없이 쓴 '조선'이란 명칭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어떤 역사의 조선은 신조선이라 하고, 다른 역사의 조선은 불조선이라 하고, 또 다른 역사의 조선은 말조선이라 하면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본기에 동부여와 북부여를 구별하지 않고 단지 부여라고만 썼고,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다섯 가야를 구별하지 않고 단지 가야라고만 기록하였다. 만약 전사에 구별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대로 구별하지 않는다면, 두 부여의 역사나 다섯 가야의 역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날이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니, 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 이전의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의 동북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의 시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기존 관념에 젖은 이들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조선의 역사 자료는 《사기》, 《위략》, 《삼국지》등 중국 역사서에만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 중국 역사서의 저자들에게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유전적인 교만병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 조선 자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과 정치적으로 관계된 부분만 서술하였으며, 그마저도 종종 승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다.
둘째, 조선의 나라 이름과 지명 등을 기록할 때 조선인이 지은 본래의 명칭을 쓰지 않고 자의적으로 다른 이름을 지어, 동부여를 불내예라 하고 오열홀을 요동성이라 하는 등의 서술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셋째, 조선은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해 왔음에도, 매번 기자나 진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수많은 거짓 증거를 만들어냈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할 당시는 연나라의 멸망으로부터 오래지 않았으니 연나라와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을 상고할 만한 자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한무제가 조선의 일부분이자 삼경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 고도를 점령하였으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은 조선의 문화적·정치적 실상을 하나도 기록하지 않고, 오직 위만과 한나라 군대의 충돌만을 서술하였으니, 이는 진정한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小傳)이요,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略史)에 불과한 것이다. 《위략》, 《삼국지》등의 책은 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서적을 자료로 삼았으나, 역시 그들의 편향된 심리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거하여 그들의 기록에 나타난 여러 조선들을 구별하여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분을 내릴 수 있을까? 《사기》조선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라 일컬어 흉노전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이제 《사기》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역사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역사를 추출하고, 《위략》이나 《삼국지》동이열전의 기록을 바로잡아 이를 보충해야 한다. 말조선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일은 적으나, 마한과 백제의 선대가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를 통해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밀한 구분과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진정한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표면적인 기록을 넘어서서, 각 사료의 특성과 한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을 발굴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삼조선분립의 시작
대단군의 정치체제에서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있었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으로서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정치상의 수장이 되고, 말한과 불한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통일된 국가 체제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삼한이 분립한 후에야 삼조선이란 명칭이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그렇다면 삼한은 언제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나타난 진막번조선은 전연시, 즉 연나라의 전성 시대의 일이라고 하였다. 연의 전성시대는 중국 전국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또한 '발조선'을 기록한 《관자》는 관중이 지은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의 위서이며, '발숙신'을 기록한 《대대례》는 비록 한인대승이 저술했으나, 발식신에 관한 내용은 제나라 사람 추연이 전한 것인데, 추연 역시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말·불 삼조선이란 명칭이 이처럼 중국 전국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삼조선의 분립이 중국 전국시대, 즉 기원전 4세기경의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각 조선의 성씨를 살펴보면, 신조선은 성이 해씨(解氏)로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어졌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箕氏)로 기자의 자손이라 일컬어졌으며, 말조선은 성이 한씨(韓氏)였다. 말조선의 선대 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왕부의 《잠부론》에 "한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인데 위만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고 하였으니, 한서(韓西)는 대개 말조선에 속한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였을 것이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기자의 후손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퇴하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왕을 자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배후에서 쳐서 주나라의 권위를 높이려 했으나, 대부례가 이를 만류하여 중단하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이 《위략》의 기록은 서양의 로마제국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주장할 만큼 중국인들의 자존적 병리심리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문헌이니, 그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신한', '불한'을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것 외에도, '신한'을 의역하여 '진왕', '태왕'이라 했으니(단, 辰王의 辰은 음역), '신한'은 한자로는 조선왕이라 표기했을 것이며, '말한'과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우보라 했으니 한자로는 조선후라 표기했을 것이다. 따라서 기자가 이때 '불한'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조선후라 일컬은 것은 타당하다.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해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을 자칭하면서 삼조선 분립의 상황이 시작되었다. '불한'이 '신한'을 자칭한 것은 연나라가 왕을 자칭한 이후의 일이었는데, 《사기》주에 따르면 연나라가 왕을 자칭한 것은 신정왕 46년, 기원전 323년의 일이었다. 이는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세기경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는 것이다.
대부례는 '불한'의 유력한 모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을 자칭하게 하고, 연나라와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인물이 바로 이 대부례였다. 따라서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분립 후에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즉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이는 곧 각각이 대왕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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