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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삼조선 분립시대-조선분립 후의 ‘말朝鮮’ 

‘말朝鮮’의 천도와 마한으로의 국호 변경

 

말조선의 처음 수도가 평양이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이다. 그 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호를 말한(馬韓)으로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천도한 것이다. 그러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멸망한 것이다. 그 천도의 원인은 이전 역사서에 기록된 바가 없으나, 대개 신조선과 불조선이 흉노와 중국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 북방의 전운이 빈번하고 급박했기 때문인 것이다. 말조선왕은 이러한 전란에 염증을 느껴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칭이 외국인의 시기와 미움을 받는다고 여겨,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린 것이다. 대신 지난날 왕호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삼아 이두문으로 마한이라 쓰고, 새로운 왕호인 '신한'은 이두문으로 진왕이라 써서 '마한국진왕'이라 일컬은 것이다. 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쓴 것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 왕의 존재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은 뒤에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본래의 성씨인 기씨를 버리고 한씨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는 "준이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의 땅에서 살며 한왕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월지국에 대해 이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월지국을 전사(前史)에서는 백제의 금마군(지금의 익산)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속전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로 보고, 미륵산의 선화부인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의 유적이라 여겨서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 금마군에 도읍했다는 잘못된 설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무강왕릉의 다른 이름은 말통대왕릉인데, 말통은 백제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인 것이다. 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서동(薯童)은 그 의역이고, 《고려사》지리지의 말통(末通)은 그 음역인 것이다. 또한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의 공주로서 무왕의 왕비가 된 인물인 것이다.

백제를 마한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적들은 단지 익산이 백제의 옛 서울이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더욱이 마한 50여 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이 있었는데, 건마국이 금마군 즉 지금의 익산이었을 것이므로, 월지국, 즉 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백제 건국 13년)의 국경이 웅천(지금의 공주)이었으니, 월지국은 대체로 그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으나, 그로부터 5, 6백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왕호로 사용된 예가 있는 것이다. 신라의 눌지·자비·소지·지증 네 왕은 모두 '마립간'이라 일컬었는데, 눌지 마립간의 주석에 "마립은 말이다"라고 하였다. '궐'이란 글자의 뜻이 '말'이므로, 마립간의 '마'는 그 전성을 취하여 '마'로 읽고, '립'은 그 초성을 취하여 '립'으로 읽고, '간'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한 것이다. 따라서 마립간은 곧 '말한'이니, 이는 말한을 왕호로 썼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후,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가 일어나 그 부근 25국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룬 것이다. 전사에서 말하는 낙랑국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낙랑이 이미 분리되어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여전히 임진강 이남의 70여 국을 통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북방에서 중국과 흉노의 전란을 피해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조선과 불조선의 유민이 날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에 마한은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00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를 세우게 하고 이를 '진한부'라 한 것이다. 또한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일부 떼어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를 세우게 하고 이를 '변한부'라 일컬은 것이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함께 살았기에 변진부라고도 불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삼한인 것이다. 마한이 굳이 진한과 변한 두 한을 세운 것은 삼신에 따라 삼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대단군 왕검의 삼한에서는 중심 주권자가 있고 말한과 불한이 좌우의 보좌가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에서는 말한, 즉 마한이 가장 큰 나라인 종주국이 되고, 신한인 진한과 불한인 변한이 두 작은 나라가 된 것이다. 이는 그 이주민의 계통을 따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인 것이다.
세 한은 모두 왕을 '신한'이라 일컬었는데, 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여 신한이 셋이 된 것이다. 대개 앞의 것은 삼조선 분립 이후의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며, 진한과 변한 두 한의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직하여 이름만 있고 실제는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립 원리인 것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상 매우 논란이 많은 문제가 되었으나, 기존의 학자들은 단지 《삼국지》삼한전의 남삼한만을 근거로 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했을 뿐이다. 그들은 삼한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삼한의 예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지 못했기에, 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북방 원류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낙랑25개국과 남삼한70여국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 25개국인 것이다. 조선, 감한, 패수, 함자(탐자라고도 함), 점선, 수성, 증지, 대방, 사망, 해명, 열구, 장잠, 둔유, 소명, 누방, 제해, 혼미, 탄렬, 동이, 불이(불내라고도 함), 잠대, 화려, 야두미, 전막, 부조(옥저의 잘못인 듯) 등이 그것이다.
이들 25국은 《한서지리지》에 한낙랑군의 25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닌 것이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 할 때 그 신하와 백성들의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이 거의 다 중국의 옛 땅임을 위증하고자 전대 중국의 역사책 중에서 조선 관련 기록들을 모두 가져다가 많이 고칠 때, 조선 고대의 낙랑 25국을 낙랑군 25현으로 고쳐 《한서지리지》에 넣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4편에서 자세히 논술할 것이다.
25국 중 '조선'과 '패수'는 모두 평양에 있는 나라인데, 조선은 곧 말조선의 옛 땅이므로 조선이라 일컬어 낙랑의 종주국이 된 것이고, 패수는 '펴라'로 읽을 것이니 24개 속국의 하나인 것이다. 조선국과 패수국의 관계를 비유하면, 전자는 평양감영과 같은 것이요, 후자는 이에 딸린 각 고을과 같은 것이다.
'소명'은 지금의 춘천 소양강이요, 불이는 그 뒤에 동부여가 된 곳으로 지금의 함흥이니, 낙랑국의 전체가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함경도의 각 일부분을 차지한 것이었다.

삼한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 70여 국이니, 그 중 마한이 통솔한 54국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애양, 모수, 상외, 소석색, 대석색, 우휴모탁, 신분고(신분활이라고도 함), 백제(백제로도 씀), 속로불사, 일화, 고탄자, 고리, 노람, 월지, 치리모로(자리모로라고도 함), 소위건, 고원, 막로, 비리, 점비리, 신흔(점흔이라고도 함), 지침, 구로, 비미, 감해비리, 고포, 치리국, 염로, 아림, 사로, 내비잡(내비리라고도 함), 감해, 만로, 벽비리, 구사오단, 일리, 불미(불리라고도 함), 지반(우반이라고도 함), 구소, 첩로, 모로비리, 신소도, 고랍, 임소반, 신운신, 여래비리, 초산도비리, 일난, 구해, 불운, 불사분야, 원지, 건마, 초리 등 54국을 통솔한 것이다.
이 중 비리의 여러 나라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비리는 부여, 즉 지금의 부여이고, 감해비리는 고막부리, 즉 지금의 공주이며, 벽비리는 파부리, 즉 지금의 능주(화순)이다. 신소도는 신수두 곧 대신단이 있는 곳이니 성대호(소태라고도 함), 즉 지금의 태안이요, 지침은 지심, 즉 지금의 진천 등지이며, 건마는 금마군, 즉 백제 무왕릉이 있는 곳인 것이다. 이 밖에도 고증할 것이 많으나 아직은 두어두는 것이다.
변한은 12부로 구성되어 있으니, 미리미동, 접도, 고자미동, 고순시, 반로, 낙노, 미오야마, 감로, 구야, 주조마, 안야, 독로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인 것이다. 여기서 미동은 '믿'으로 읽으니 수만이란 뜻이고, 고자는 '구지'로 읽으니 반도란 뜻이며, 야는 '라'로 읽으니 강이란 뜻인 것이다.
이 12부의 위치를 신라 지리지와 가락국기에서 찾아보면, 고자미동은 고자군, 즉 지금의 고성만이요, 고순시는 고령가야, 즉 지금의 상주와 함창 사이의 공갈못이니, 공갈은 고령가야의 촉음인 것이다. 반로는 '벌'로 읽으니 별(星)이란 뜻으로 성산가야, 즉 지금의 성주이며, 미오야마는 미오마야로도 써서 '밈라'로 읽으니 임나, 즉 지금의 고령인 것이다. 구야는 '가라'로 읽으니 대지라는 뜻으로 지금의 김해이며, 안야는 '아라'로 읽으나 수명으로서 지금의 함안인 것이다.
이 여섯 나라는 곧 뒤에 가야 육국이 된 것이고, 그 나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그 부근일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진한의 구성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진한은 12개 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저(기저로도 씀), 불사, 근기, 염해, 군미, 여담, 호로, 주선, 마연, 사로, 우중, 난미리미동 등이 그것이다. 이 12부 중에서는 오직 사로가 신라인 것만을 확실히 알 수 있고, 그 밖의 각 부의 변천 과정은 알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는 신라 말기의 한학자들이 그 명칭들을 모두 이전의 이두자를 버리고 한자로 의역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4편 제4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변한 12부와 진한 12부의 구성이 문헌에 따라 서로 출입이 있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마한의 영역과 그 변천을 살펴보면, 본래는 거의 압록강 동쪽 전부를 차지할 만큼 광대했던 것이다. 이후 낙랑, 진한, 변한 세 나라가 생겨나면서 지금의 조령 이남과 임진강 이북을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한과 변한, 이 두 한의 특수한 위상이다. 이들은 이름은 독립된 나라였으나, 실제로는 신조선과 불조선의 유민들이 만든 자치부로서 마한에 대해 조공과 납세를 계속했다는 점에서 낙랑과 같은 적대적 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한의 구조는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정치체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정치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종주국과 부용국의 관계를 유지했던 이러한 체제는, 후대 삼국 형성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고대사에서 중앙집권적 국가 형성 과정의 중요한 한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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